그다지 선호하는 시인들은 아니나, 마리몬드 카버판으로 보면 다를까 싶어 주문넣었는데, 음 한권은 도대체 뭐지?

 기왕 한권 잘못 넣을꺼면 박준 시집을 원본으로 넣지...

 박준 시는 마리몬드 커버랑 안 어울림 


 연락하기 귀찮으니 그냥 두고 보면 될 일이지만,


 생각해보니 예전엔 나쓰메 소세키 사케잔 이벤트 때는 이벤트 보고 주문할라고 했더니, 이벤트가 안 보이더니 주문하고 며칠 후 들어가보니 사케잔 이벤트  

 소세키가 나만 주지 말라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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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7-09-22 1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리몬드 커버판....저도 선호하는 시인은 아니지만 살짝 땡깁니다^^

雨香 2017-09-22 11:19   좋아요 0 | URL
소장용으로는 좋은데, 좋아하는 시인의 작품이었으면 더 좋았을거라는 생각입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빅뱅 우주론 강의>를 읽으면서, 저자의 다른 책 <초신성의 후예, 나는 천문학자입니다>를 읽었다. <초신성의 후예, 나는 천문학자입니다>와 두 책의 내용이 일부 겹치기 때문에 읽는 데 조금 수월하기도 한데, <초신성의 ~>는 천문학과 관련된 내용에서 자신과 사회를 돌아본다. 


<초신성의 후예~ >에서는 이 분이 천문학에 굉장한 애착이 있다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동시에 이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같이 보인다. 


우주를 차지하고 있는 암흑물질을 설명하면서, 과학고나 외국어고를 떠올린다. 

나는 1980년대 초반에 고등학교를 다녔으니 특목고가 탄생하기 이전 세대이다. 처음엔 좋은 일이지 싶었다. 과학서적을 탐독하고 라디오를 만든다고 납땜질을 하는 어린이들에게 온갖 실험을 맘껏 할 수 있는 학교가 생긴다니, 외국어 교육이 부실한 우리나라에서도 훌륭한 외교관과 언어를 필요로 하는 분야의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해 외국어 교육에 중점을 둔 학교가 생긴다니 반가운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런 교육의 기회는 결국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기득권을 가진 계층에겐 활짝 열려 있지만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가정에겐 그림의 떡이 되고 있다. 더 많은 기회를 이미 가진 사람들에게 더 좋은 기회를 새롭게 제공하는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대학 입시 서류 심사를 하다 보면 특목고 출신들은 화려한 경력의 훈장을 셀 수 없이 많이 달고 있다. 그들에 비해 지방 멀리 있는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들의 서류는 수수하기 그지없다. 훈장의 숫자로서열을 매기는 현재의 시스템 상에서 부와 기회의 대물림에 거스를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훌륭하신 분들이 어련히 많은 고민을 하시고 계시겠지만 내 짧은 생각으론 특목고는 이미 다양한 공,사교육의 기회를 가진 대도시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기보다 그런 기회가 적은 지방의 학생들과 사교육이 어려운 저소득층 학생들을 대상으로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실시되면 좋겠다. 일생을 바쳐 과학을 하고 싶어 안달이난, 그러나 기회가 적은 그런 학생들을 육성하고, 외국어를 진지하게 배우고 싶어 하는 인문 사회학도를 찾아 가르치는 그런 교육 정책 말이다. (145-146)


요즘 젊은 이들에게 뭐라 말하는 꼰대와 달리, 저자는 스승의 날에 어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 선배들 부모들 그리고 이 땅의 선생들 우리는 후대에게 끝없이 더 잘되라고 교육을 하지만 정작 우리가 처한 위치에서 올바로 서기 위해서 들이는 노력은 별로 없다. 내 나이 오십에 무슨 공부를 더하겠냐 하겠지만 삶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은 공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책을 읽지 않으며 어떻게 후대에게 책을 강요하며, 내가 내 가정의 복지를 위해 술담배를 줄이고 운동을 할 노력을 기울이지 못하면서 어떻게 후대에게 자신을 다스리라고 호소력 있게 말할 수 있겠나. 


우리 학생들은 연구가 잘 안 풀리면 다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며 주눅이 든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지금까지 예일 대학교,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칼텍), 옥스퍼드 대학교, 연세대학교에서 십수 년 교육에 종사한 경험상 교수가 친절히 잘 지도했을 때,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일은 별로 없었다. 학생이 얼마나 좋은 연구를 하는가에 멘토의 역할이 절대적이라는 말이다. 거꾸로 말하면, 학생이 힘들어 한다면 책임의 큰 부분이 교수에게 있다는 것이다. 어떤 논리도 일반화하긴 힘들지만 내 학생 대부분이 뭔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먼저 나의 역할을 의심해 볼 일이다. 


나는 지금까지 다섯 명의 박사를 배출했다. 영국에 있던 시절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세 명, 귀국한 후 연세대학교에서 두 명이다. 모두 다 프로 천문학자로 일하고 있고 나의 큰 자랑거리이다. 그중 바티칸에서 교황을 보필하는 과학자도 있고, 세계 적인 명문 대학교의 교수가 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지금도 내가 그들을 보면 부족한 것이 보인다 1、2년에 한 번씩 나를 찾아와 함께 공동 연구를 할 때엔, 나는 어김없이 옛날 의 나로 돌아가 꾸짖고 책망하길 반복한다. 마치 나는 늘 옳고 그들은 늘 부족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실상을 말하자면, 나는 그들과 같은 나 이에 훨씬 능력이 부족했고, 그들이 내 나이가 되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역사가 흐르는 방식이다. 


나는 요즘 내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내 학생들이 내게서 박사 학위 를 받은 후 세계로 뻗어 나가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를 하는 것을 보고 싶지만 내겐 그들의 뜀판이 되기엔 충분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내게 지도를 받는 학생들의 학문 세계는 지도 교수인 나의 학문 세계의 크기를 크게 벗어나기 힘들다. 결국 내 학생들의 수준은 곧 나의 수준의 반영인 것이다. 조금이라도 내 한계를 더 많이 뛰어넘기만을 바랄 뿐이다. 각고의 노력 끝에 좋은 연구 결과를 내더라도, 그들의 학문적인 아버지인 내가 국제적인 인지도가 낮아서 그들의 진출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땐, 더욱 기분이 쳐진다. (36-38)


저자는 유학시절, 돈이 없어 곤궁했던 시절 남의 차 후미등 하나를 깨뜨렸으나 도망친 일을 원죄로 생각한다. 사정이 급박한 사람들에게는 그럴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를 먼저 생각한다. 

복된 삶을 누라는 사람이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은 쉽다. 우리는 깨끗 차를 몰고다니면서, 하루종일 길을 걸으며 힘든 숨을 가래침으로 길에 뱉는 휴지 줍는 할아버지를 나무란다. 한 번도 배를곯아 본 적 없으면서, 사흘을 굶다가 시장에서 빵을 훔치다가 잡힌 우리 시대의 장발장을보며 혀를 찬다. 자기가 소유한 다섯 채의집중딴하나도 자기 힘으로 사야 할 필요가 없었으면서, 생애 처음 집 하나 장만하는 젊은 부부가 집값을 깎아 달라고 비굴한 미소를 지으면 경멸의 눈초리를 보낸다. 우리 아파트 단지에 살지 않으면서 저녁이 되면 산책을 오는 나보다 못사는 사람들이 싫다. 우리 아름다운 교정에 음식을 배달하러 들어오는 오토바이가 눈에 거슬린다. 나의 깨끗한 집을 다른 사람들이 어지를지 모르기 때문에 담을 높이 쌓는다. 복된 삶을 사는 내 자녀가 그렇지 않은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싫어서 특수학교를 보낸다. 사회에 범죄를 짓고 이미 죗값을 치른사람들을 우리로부터 영원히 격리하고 싶다. 나는 마치 어떤 종류의 불행에도 면역을 가진 것처럼. 하지만 무슨 말이 내 입에서 나오기 전에 나는 내 원죄를 기억한다. (215-216)


우주과학이 어려워 함께 읽어본 책인데, 우주과학 못지 않게 한 어른께 조언 아닌 조언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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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용 1심 선고를 보면서, 회사에서 사람들끼리 이런 이야기를 했다. 

 '5년을 때렸으니, 항소 할 거고, 항소하면 2년이나 3년, 그리고 대법원 가면 2년에 집행유예 2년 되고 풀려나겠죠'

 

 주진형은 <경제, 알아야 바꾼다>에서 재벌에 대한 판결을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재벌 총수가 횡령이나 배임으로 기소되면 1심에서 5년을 선고합니다. 그러면 2심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서 3년으로 줄여줘요. 정상 참작으로 형을 줄일 수 있는 한도는 50%거든요. 그다음에는 그동안의 경제발전에 공헌 운운하면서 집행유예를 선고합니다. 우리 형법에는 3년 이하의 형을 받으면 집행유예가 가능하도록 되어 있거든요.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이게 말하자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죠.


 처음에는 5년을 때려서 국민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고 2심에서는 집행유예, 대법원에서는 집행유예 확정

(51쪽)


어찌되었건 담당판사는 넥슨 사건도 그렇고, 정황상 여러 의심을 갖게 한다. 정유라가 법정에 깜짝 등장하지 않았으면 무죄를 때리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휴가를 포함해서 잠시 여기저기 다닐 일이 많아지면서, 갑자기 독서주제가 많아졌다. '적폐'가 하나의 주제이고, '우주과학'이 또 있다. 여기에 몇 개의 책을 더 읽으면서 후기를 적어야 할 책들이 계속 줄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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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론에 관한 책을 읽다가 기초가 될만한 책을 찾아 읽고 있다. (적폐 주제로 <삼성독재> <권력과 검찰> <권력과 언론>도 같이 읽는 중이고, 제주관련 책들은 간단히 평을 남길까 고민중이다.)


    




문과출신이지만, 과학책을 좀 읽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우주론은 생각보다 어려운 개념이 많다. 우주팽창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도플러효과를 이야기 하길래 도플러 효과에 대해 찾아봤다. 자동차소리가 다가오면 커지다가 지나가면 갑자기 소리가 줄어든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우주팽창하고 무슨 관계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래 동영상 1분 35초 정도에 보이는 장면과 같이 별이 지구에 가까워지면 파장이 짧아지기 때문에 파랑색 빛을 내고, 멀어지면 빨간색을 낸다. 


허블은 매일매일 안드로메다은하를 관찰했습니다. 그런데 안드로메다에서 오는 별빛이 점점 빨간빛에 가까워지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허블은 안드로메다은하가 우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별빛이 빨간빛에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별들이 우리로부터 멀어진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아낸 걸까요? 그것은 바로 도플러 효과 때문입니다. 모든 파동은 관측자로부터 멀어지면 파장이 길어지고, 관측자에게 가까워지면 파장이 짧아집니다. 


음파(소리)를 생각해 봅시다.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나오는 노래는 오토바이가 멀어지면 음이 낮게 들리고, 가까이 다가 오면 높은음으로 들립니다. 그 이유는 멀어졌을 때 파장이 길어지고 가까워지면서 파장이 짧아지기 때문이지요. 빛도 파동이므로 도플러 효과가 성립합니다. 그러니까 광원이 관측자로부터 멀어지면 파장이 긴 빨간빛이 되고, 관측자로부터 가까워지면 파장이 짧은 파란빛이 관측되는 것이 지요. 안드로메다의 별빛이 점점 빨간빛으로 관측되는 것으로 보아 안드로메다 은하가 우리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6쪽, 호킹이 들려주는 빅뱅우주 이야기>




오스트리아의 과학자 도플러는 항성의 색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도플러 효과를 발견했지만, 이 후 도플러효과는 음파, 마이크로파가 발전했다. 파동의 원리인데, 잘은 모르겠지만(뉴턴하이라이트 파동 편을 사야 하나?)


도플러 효과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현상이다.다만 눈 대신 주로 귀로접한다. 보도에 서 있을 때 소방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온다. 그런데 소방차가 우리 옆을 쌩하니 지나가는 순간 귀청을 찢던 사이렌 소리의 음높이가 갑자기 팍 떨어진다. 다가올 때의 사이렌 소리와 멀어질 때의 사이렌 소리는 확연히 다르다. 이것이 도플러 효과다. 혹시 이때 소방차의 색이 변하는 것을 눈치챈 사람도 있을까? 있다면 초능력자다. 소방차는 달려왔다 달려가면서 소리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색깔도 변한다. 두 가지 경우 모두 도플러 효과다. 소리의 변화는 누구나 느낀다.  하지만 소방차의 지극히 미세한 색깔 변화를 잡아낼 만큼 예리한눈을 가진 사람은 없다. 

도플러 효과의 핵심에는 진동수와 파장이 있다. 음원이나 광원이 관측자에게 접근하거나 멀어지면, 또는 관측자가 음원이나 광원에 접근 하거나 멀어지면, 진동수와 파장이 변한다. 1842년에 이 개념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설명한 사람이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요한 도플러Christian Johann Doppler, 1803-1853다. 도플러 효과가 애초부터 소리의 변화를 설명하려는 용도는 아니었다. 원래는 지구에서 관측되는 항성의 상대운동 속도에 따라 항성의 색이 변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음파는 음원과 관측자 간의 상대속도에 따라 음높이가 달라지고, 광파는 광원과 관측자 간의 상대속도에 따라 빛깔이 달라진다. (39-40)


도플러 효과를 응용한 기구는 많지만,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경찰관이 속도위반 단속 때 쓰는 레이더 건이다. 레이더 건은 들리는 소리나 보이는 빛의 도플러 효과가 아니라, 마이크로파(극초단파)의 도플러 효과를 활용한다. 마이크로파의 진동수와 속도는 음파보다 훨씬 높다. 진동수가 10GHz, 달리 말해 초당 100억 개나 된다. 레이더 건의 작동 원리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말 그대로 총처럼 손에 들고 목표물을 향 해 마이크로파를 쏘면 된다. 마이크로파는 초속 3억m의 광속으로 날아간다. 단속대상인 자동차의 속도는 이에 비하면 느리기 짝이 없다. 기껏해야 시속 70마일 정도다. 굳이 비교하자면 마이크로파는 자동차 보다 거의 천만 배는 빠르다. 레이더 건에서 발사된 마이크로파는 과속차량에 맞고 반사돼 순식간에 레이더 건으로 돌아온다. 레이더 건은 도플러 효과를 응용한 기구는 많지만,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경찰 관이 속도위반 단속 때 쓰는 레이더 건이다. 레이더 건은 이 반사파를 잡아서 진동수를 측정한다. 도플러 효과에 따라 발사파와 반사파 사이에는 진동수 변화가 발생하고, 이 진동수 변화로 목표차량의 속도를 계산한다. 자동차 속도는 광속에 비해 지극히 미미하므로 진동수 변화도 미미하기 짝이 없다. 그렇더라도 진동수 변화를 포착해서 정밀하게 측정하는 것쯤 현대기술로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국 경찰이 과속차량 적발에 이 기술을 처음 도입한 것이 1954년이다. 

(43-44, 세상의모든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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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만 하더라도 삼성에 비판적인 학자, 언론이 많았다. 오히려 보수경제학자들이 삼성을 많이 비판했다. 중공업 등 한국산업에서의 최초라는 문을 게속 열어간 현대, 한국이라는 나라를 모르는 동유럽, 남미, 아프리카 시장을 뚫어낸 대우와 달리 삼성은 쉽게 돈 벌 수 있는 산업만 한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삼성의 규모에 비해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는 것이다.이 지적은 90년대나 2010년대나 변한 것이 없는데, 이제는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 삼성이 대한민국 수출의 몇 %를 차지하고, 세금의 얼마를 담당하는지만 이야기한다. 그러나 삼성 산업의 특성상 국내산업 영향이이 적다. 한예를 들어보자면 삼성이 만드는 스마트폰의 국산화율은 30%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핵심기술, 부품은 전부 수입한다. 산업유발효과가 현기차 등에 비해 턱없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아무도 삼성을 비판하지 않는다.  


삼성만을 줄기차게 파온 저자는 삼성의 성장과정을 한 권의 책에 담아냈다.책에 따르면 삼성의 시작은 미약했다. 일제시대 허가받은 이만 할 수 있었던 양조업으로 돈을 벌었고, 일제 착취의 수단이었던 조선척식은행과의 친분으로 조선척식은행을 사금고처럼 사용하며 땅장사로 돈을 벌었다. 


삼성상회의 자본금은 3만원이었다. .... 결코 적은금액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동안 가장 성공을 거둔 금융자본가 민규식, 경성방직의 김연수, 화신백화점의 박흥식과 비교하면 이병철의 삼성상회는 자본금 규모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

이병철은 삼성상회가 있는 대구를 기반으로 권력을 확보해나갔다. 해방 직후부터 을유회라는 사업가 조직을 결성해 이익을 도모했다. 그리고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구 지방지 〈조선민보>를 인수해 <대구민보>로 개칭하고 언론 사업을 벌였다. 기업가의 조직화와 언론을 통한 여론 형성은 정치적 힘을 행사하고 정치적 커넥션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요소임을 이병철은 이때 이미 간파 했던 것이다. 삼성은 기업가조직과 자신이 운영하는 언론의 영향력을 앞세워 정치세력과 어렵지 않게 연계할수 있었다. ... 

한편 식량난으로 촉발된 대구의 10월 인민항쟁이 진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만이 대구를 방문했다. 이병철을 포함해 30명의 대구 기업가들은 왜관까지 나가 이승만을 환영했다. 이병철은 자신의 아버지와 이승만과의 인연을 내세워 이승만에게 접근했다. 이병철의 아버지와 이승만은 한때 기독교 청년 활동을 함께한 동갑내기였다. 이병철과 이승만의 정치적 연결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승만의 대구 방문을 계기로 이병철은 서울에서 이승만을 다시 만나면서 정치적 연줄을 단단하게 만들어갔다. 급기야 이병철은 이승만의 권유로 삼성물산공사를 서울에 세우게 된다. 이는 지방 기업에 불과했던 삼성이 중앙 무대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본격적으로 중앙 정치세력과 커넥션을 형성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30-34쪽)


이병철은 이승만과의 관계를 통해 지금처럼 영향력 있는 대기업을 만들어냈다. 특별한 기술이나 경쟁없이 원조물자 수입, 판매를 독접하면서.  


원조물자를 효과적으로 얻기 위해서 무역 회사가 필요했다. 한국 시장경제의 출발점인 무역 회사는 성격상 상업자본이었고, 원조 물자가 상업자본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삼성물산공사도 원조 물자를 매매하는 무역 회사였다. 1948년 서울에 세워진 삼성물산공사는 1년 반만에 당대 최고의 무역 회사가 되었다. 전쟁으로 산업 시설이 파괴돼 타격을 입기도 했으나 양조업의 이윤보전에 힘입어 1951년 삼성물산주식회사로 재건되었다. 전시에는 고철을 일본에 수출하고 비료와 설탕을 수입해 부 를 축적했다. 또한 회사 안에 제당사무소를 설치했는데, 이것이 훗 날 제일제당이 되었다. 삼성은 삼성물산을 발판 삼아제일제당, 제일제분, 제일모직 등 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이들 삼성의 주력 산업은 수입 대체 산업으로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시장을 독점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사업이 아니었다. 원조 물자를 수입해 간단히 가공한 뒤 판매하면 그만이었다. 기술보다는 원조 물자 배분 권한이 있는 정치권력과 의 커넥션이 필요했다. 이병철은 일찍이 그 방면의 선두주자였다 제일모직은 모방직산업의 시설과 시장 규모의 60%를 지배했고 제일제분을 포함한 3대 재벌은 제분업 시설 용량의 약 절반을 차 했다. 제당업은 삼성의 제일제당을 포함한 4대 재벌이 독점했다. 제일제당은 그중 2/3 이상의 원당을 처리했다. 제일이라는 기업 명칭처럼 삼성은 최고의 지배적 위치를 차지했다. 이 모든 것이 미국으로부터 쉽게 원조 물자를 제공받은 덕분이었고 원조 물자의 배분권을 소유한 정치권력과의 커넥션 덕분이었다. (39쪽)


삼성은 자금확보에도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되는데, 일제시대에는 조선척식은행과의 관계로 해방후에는 정부지원하에 원조자금으로, 결국에는 금융업까지 손에 넣게 된다. 


기업의 물적 토대를 단단하게 해준 또 다른 요소는 특혜융자였다. 해방 뒤의 악성 인플레이션 아래서 특혜융자는 융자라기보다 무더기 돈을 공짜로 안겨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혜융자로 돈을 불리는 일은 아주 쉬었다. 이를테면 특혜융자를 받은 기업은 융자받은 돈으로 시설투자를 하기보다 원조 물자나 원자재를 사는 일에 몰두했다. 3년의 상환 기간이 지나고 나면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올랐고 덕분에 사재기해둔 원조 물자나 원자재 일부만 처분 해도 충분히 융자금을 갚을 수 있었다. 그 나머지는 고스란히 수익으로 남았다. 삼성도 특혜융자를 받는 데 예외는 아니었다. 


또한 삼성은 이승만 정권의 도움으로 일찍이 금융업에도 진출했다. 이승만 정권은 일본인 소유에서 정부로 귀속된 은행 주식을 공매했다. 은행 주식 불하에서 이병철과 이승만의 개인적 관계가 크게 작용했다. 최초 적산 기업 불하에서 큰 재미를 못 보았던 삼성은 은행 부문에서는 남달랐다.1954년부터 1956년까지 진행한 은 행 민영화 결과 한일은행, 조흥은행, 상업은행 등이 이병철에게 넘어갔고 삼성은 금융 자원을 확보하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이병철은 은행에 대한 정부귀속주식 공매에 응찰해 한일은행으로 바뀐 흥업은행주의 83%를 가진 대주주가 되었다. 또한 홍업은행이 상업은행주를 33% 가량 갖고 있었으므로 상업은행의 실제 최대 주주였다. 곧이어 그는 조흥은행주의 55%를 매입했다. 결국 주요 시중 은행 주식의 거의 절반이 이병철 소유가 되었다. 


이어 이병철은 한국화재보험을 인수했고 나아가 대주주가 된 은행이 관리하던 기업들을 인수했다. 호남비료의 45%, 한국타이어의 50%, 삼척시멘트의 70%에 해당하는 주식이 이병철에게 넘어 갔다. 금융 기관을 장악한 삼성은 거칠 것이 없었다.(44쪽)


최근 삼성의 행보를 보면서 해방후 삼성과 지금의 삼성이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이병철은 누구보다 뛰어난 정치적 자본가였다. 원조 물자와 원조 자금에 의존해서 성장한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상 기업가 정신 보다 정치권력과의 유착이 기업 간 경쟁에서 승리를 보장하는 열쇠가 되었다. 원조 물자와 원조 자금을 배분하는 권한은 정치권력에게 있었고 정경유착은 필연이었다. 굳이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러한 구조를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은 인물이 바로 이병철이었다.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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