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만 하더라도 삼성에 비판적인 학자, 언론이 많았다. 오히려 보수경제학자들이 삼성을 많이 비판했다. 중공업 등 한국산업에서의 최초라는 문을 게속 열어간 현대, 한국이라는 나라를 모르는 동유럽, 남미, 아프리카 시장을 뚫어낸 대우와 달리 삼성은 쉽게 돈 벌 수 있는 산업만 한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삼성의 규모에 비해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는 것이다.이 지적은 90년대나 2010년대나 변한 것이 없는데, 이제는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 삼성이 대한민국 수출의 몇 %를 차지하고, 세금의 얼마를 담당하는지만 이야기한다. 그러나 삼성 산업의 특성상 국내산업 영향이이 적다. 한예를 들어보자면 삼성이 만드는 스마트폰의 국산화율은 30%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핵심기술, 부품은 전부 수입한다. 산업유발효과가 현기차 등에 비해 턱없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아무도 삼성을 비판하지 않는다.  


삼성만을 줄기차게 파온 저자는 삼성의 성장과정을 한 권의 책에 담아냈다.책에 따르면 삼성의 시작은 미약했다. 일제시대 허가받은 이만 할 수 있었던 양조업으로 돈을 벌었고, 일제 착취의 수단이었던 조선척식은행과의 친분으로 조선척식은행을 사금고처럼 사용하며 땅장사로 돈을 벌었다. 


삼성상회의 자본금은 3만원이었다. .... 결코 적은금액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동안 가장 성공을 거둔 금융자본가 민규식, 경성방직의 김연수, 화신백화점의 박흥식과 비교하면 이병철의 삼성상회는 자본금 규모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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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은 삼성상회가 있는 대구를 기반으로 권력을 확보해나갔다. 해방 직후부터 을유회라는 사업가 조직을 결성해 이익을 도모했다. 그리고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구 지방지 〈조선민보>를 인수해 <대구민보>로 개칭하고 언론 사업을 벌였다. 기업가의 조직화와 언론을 통한 여론 형성은 정치적 힘을 행사하고 정치적 커넥션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요소임을 이병철은 이때 이미 간파 했던 것이다. 삼성은 기업가조직과 자신이 운영하는 언론의 영향력을 앞세워 정치세력과 어렵지 않게 연계할수 있었다. ... 

한편 식량난으로 촉발된 대구의 10월 인민항쟁이 진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만이 대구를 방문했다. 이병철을 포함해 30명의 대구 기업가들은 왜관까지 나가 이승만을 환영했다. 이병철은 자신의 아버지와 이승만과의 인연을 내세워 이승만에게 접근했다. 이병철의 아버지와 이승만은 한때 기독교 청년 활동을 함께한 동갑내기였다. 이병철과 이승만의 정치적 연결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승만의 대구 방문을 계기로 이병철은 서울에서 이승만을 다시 만나면서 정치적 연줄을 단단하게 만들어갔다. 급기야 이병철은 이승만의 권유로 삼성물산공사를 서울에 세우게 된다. 이는 지방 기업에 불과했던 삼성이 중앙 무대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본격적으로 중앙 정치세력과 커넥션을 형성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30-34쪽)


이병철은 이승만과의 관계를 통해 지금처럼 영향력 있는 대기업을 만들어냈다. 특별한 기술이나 경쟁없이 원조물자 수입, 판매를 독접하면서.  


원조물자를 효과적으로 얻기 위해서 무역 회사가 필요했다. 한국 시장경제의 출발점인 무역 회사는 성격상 상업자본이었고, 원조 물자가 상업자본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삼성물산공사도 원조 물자를 매매하는 무역 회사였다. 1948년 서울에 세워진 삼성물산공사는 1년 반만에 당대 최고의 무역 회사가 되었다. 전쟁으로 산업 시설이 파괴돼 타격을 입기도 했으나 양조업의 이윤보전에 힘입어 1951년 삼성물산주식회사로 재건되었다. 전시에는 고철을 일본에 수출하고 비료와 설탕을 수입해 부 를 축적했다. 또한 회사 안에 제당사무소를 설치했는데, 이것이 훗 날 제일제당이 되었다. 삼성은 삼성물산을 발판 삼아제일제당, 제일제분, 제일모직 등 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이들 삼성의 주력 산업은 수입 대체 산업으로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시장을 독점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사업이 아니었다. 원조 물자를 수입해 간단히 가공한 뒤 판매하면 그만이었다. 기술보다는 원조 물자 배분 권한이 있는 정치권력과 의 커넥션이 필요했다. 이병철은 일찍이 그 방면의 선두주자였다 제일모직은 모방직산업의 시설과 시장 규모의 60%를 지배했고 제일제분을 포함한 3대 재벌은 제분업 시설 용량의 약 절반을 차 했다. 제당업은 삼성의 제일제당을 포함한 4대 재벌이 독점했다. 제일제당은 그중 2/3 이상의 원당을 처리했다. 제일이라는 기업 명칭처럼 삼성은 최고의 지배적 위치를 차지했다. 이 모든 것이 미국으로부터 쉽게 원조 물자를 제공받은 덕분이었고 원조 물자의 배분권을 소유한 정치권력과의 커넥션 덕분이었다. (39쪽)


삼성은 자금확보에도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되는데, 일제시대에는 조선척식은행과의 관계로 해방후에는 정부지원하에 원조자금으로, 결국에는 금융업까지 손에 넣게 된다. 


기업의 물적 토대를 단단하게 해준 또 다른 요소는 특혜융자였다. 해방 뒤의 악성 인플레이션 아래서 특혜융자는 융자라기보다 무더기 돈을 공짜로 안겨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혜융자로 돈을 불리는 일은 아주 쉬었다. 이를테면 특혜융자를 받은 기업은 융자받은 돈으로 시설투자를 하기보다 원조 물자나 원자재를 사는 일에 몰두했다. 3년의 상환 기간이 지나고 나면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올랐고 덕분에 사재기해둔 원조 물자나 원자재 일부만 처분 해도 충분히 융자금을 갚을 수 있었다. 그 나머지는 고스란히 수익으로 남았다. 삼성도 특혜융자를 받는 데 예외는 아니었다. 


또한 삼성은 이승만 정권의 도움으로 일찍이 금융업에도 진출했다. 이승만 정권은 일본인 소유에서 정부로 귀속된 은행 주식을 공매했다. 은행 주식 불하에서 이병철과 이승만의 개인적 관계가 크게 작용했다. 최초 적산 기업 불하에서 큰 재미를 못 보았던 삼성은 은행 부문에서는 남달랐다.1954년부터 1956년까지 진행한 은 행 민영화 결과 한일은행, 조흥은행, 상업은행 등이 이병철에게 넘어갔고 삼성은 금융 자원을 확보하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이병철은 은행에 대한 정부귀속주식 공매에 응찰해 한일은행으로 바뀐 흥업은행주의 83%를 가진 대주주가 되었다. 또한 홍업은행이 상업은행주를 33% 가량 갖고 있었으므로 상업은행의 실제 최대 주주였다. 곧이어 그는 조흥은행주의 55%를 매입했다. 결국 주요 시중 은행 주식의 거의 절반이 이병철 소유가 되었다. 


이어 이병철은 한국화재보험을 인수했고 나아가 대주주가 된 은행이 관리하던 기업들을 인수했다. 호남비료의 45%, 한국타이어의 50%, 삼척시멘트의 70%에 해당하는 주식이 이병철에게 넘어 갔다. 금융 기관을 장악한 삼성은 거칠 것이 없었다.(44쪽)


최근 삼성의 행보를 보면서 해방후 삼성과 지금의 삼성이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이병철은 누구보다 뛰어난 정치적 자본가였다. 원조 물자와 원조 자금에 의존해서 성장한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상 기업가 정신 보다 정치권력과의 유착이 기업 간 경쟁에서 승리를 보장하는 열쇠가 되었다. 원조 물자와 원조 자금을 배분하는 권한은 정치권력에게 있었고 정경유착은 필연이었다. 굳이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러한 구조를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은 인물이 바로 이병철이었다.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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