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6.25) 기념일만 되면 북침이냐 남침이냐를 두고 말들이 많다. 청소년들의 역사인식에 문제가 많다는 등. 그런데 알고 보면 남침, 북침의 정의를 두고도 말이 많다.
남침이다의 의미는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다로 쓰이지만, 읽기에 따라서는 남한이 북한을 침략했다로 읽힐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게 그리 중요한가?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왜냐면 한국전쟁은 평화롭게 살고 있던 어떤 날 느닷없이 북한이 평화를 깨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맞나? 사실 북침이냐, 남침이야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미 한국전쟁이전에 남북사이에는 쉴새없이 전투가 벌어졌고, 미국은 이승만이 북한을 침략할 것을 염려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전쟁발발의 책임이 있는냐가 아니라 왜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의 결과 한번도 평화와 국민들의 삶은 어떻게 되었느냐가 아닌가?
남한이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기 위해 7월에 먼저 공격을 개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1949년 9월 2일, 스티코프는 이승만이 올리버에게 보내는 편지(자료 17)를 스탈린에게 보고한다. 이 편지를 어떻게 입수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것은 이승만의 북침 계획이 분명하다는 명백한 증거로 이용된다.
남쪽의 선제공격이 있을 거라는 북한 지도부의 생각이 남침을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어쩌면 당시의 남북한 관계는지금 북한과 미국사이에서 벌어 지고 있는 안보 딜레마security dilemma), 의 모습 그대로인지 모른다. 어느 한쪽이 먼저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양쪽 모두 방어를 잘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최선의 방어를 위해서는 공격이 더 좋을거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자료만으로 볼때는 당시 미국 만이 유일하게 공격이 최선의 방어 가아니라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178쪽)
2010년 한국전쟁 발발 60년이 되었을 때 몇권의 책을 읽었다. 그 중에 박태균의 <한국전쟁>은 한국전쟁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단 한권만 읽는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한국전쟁과 관련한 여러 문제들, 남침유도설, 북침설 등에 대한 근거와 왜 6월에 일어났는지, 침공초기의 왜 북한이 서울에서 몇일을 머물렀는지, 그리고 정전협정에는 왜 2년이나 걸렸는지 등 한국전쟁에 대해 크게 볼 수 있는 책이다.
2010년 박태균의 <한국전쟁>과 함께 총 4권의 책을 읽었다.
<전쟁과사회> http://blog.aladin.co.kr/rainaroma/4595065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 되었지만 한국전쟁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가 국내에서 나온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는 전쟁의
발발에 초점을 맞췄던 기존의 연구에서 벗어난 점 그리고 사회적으로 접근한 점에서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한국전쟁을 통해 발생한 국가억압체제가
오늘날의 한국사회 가정, 학교, 사회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억압으로 폭력이 구조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는 인민군 편, 국군이
올라왔을 때는 국군 편을 들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 구조가 자유당 시절엔 자유당을 민정당 시절엔 민정당을 찍는 순응주의적 태도로 나타났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있다. 학살의 경우도 현재화되고 있는데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일어난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한국전쟁이 현재까지 미치는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노무현 전대통령 분향소를 폭력적으로 철거했던 서정갑 등 보수주의자들의 행태는 점령 당시 남한에서 있었던 모습과
유사해보이고 북한에 대한 압력을 위해 집회를 하는 그들의 뒤에 일본 극우파 인사와 자본이 참여했다는 사실은 한국전쟁의 왜곡된 사회구조가 지금까지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11가지 시선>http://blog.aladin.co.kr/rainaroma/4595062
남북한 내부적으로도 한국전쟁은 체제안정화(?)에 큰 역할을 한다. 남한이나 북한모두 불안정하게 정권을 잡았던 이승만, 김일성에게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반공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지게 되었고 김일성 역시 당내 일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한국전쟁은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 체제 안정화에도 큰 기여를 한다. 서로 상대방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산업기반을 모두 파괴해버렸기 때문에
남북한 모두 새로운 경제체제를 도입할 수 있게 된다. 더군다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시범적 대립장소가 되면서 남북한 모두 상당한 경제원조를 받게
된다. 국가재정(수입)이 남한의 경우 1959년 52%, 북한의 경우 1955년 28%가 해외 원조가 차지하게 되었다. 농업중심의 남한의 경우
전근대적 유산을 청산하고 자본주의체제를 급속하게 발전시킬 토대를 형성했고, 상업자본이 발달했던 북한은 한국전쟁을 통해 체제의 반대하는
자본세력들이 제거되었기에 사회주의 건설을 촉진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http://blog.aladin.co.kr/rainaroma/4595070
5장 두 명문 양반가의 충돌, 금산군 부리면의 비극
금산군 부리면은 해평 길씨와 남원 양씨 두 양반 가문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1931년 부터 1960년까지 단 한명을 제외하고 모두 길씨와 양씨 중에서 면장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두 성씨는 혼인으로 돈독한 관계를
이루어왔다. 일제시대 길씨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많이 나왔는데 반면 양씨는 대체로 우익편에 있었다. 특히 길씨 중에서 주류는 우익에 길씨 비주류와
양씨는 우익에 대체로 섰었다. 보도연맹과 인민군 점령시 길씨, 양씨 일가 중에서 처형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다른 마을에 비하면 그리 큰 사건은
아니었고, 대규모 학살도 없었다. 이는 두 가문이 사돈으로 돈독하게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에 금이 간 사건이 발생한다. 길씨를
중심으로 한 좌익들은 인민군 후퇴 후 근처에서 빨치산이 되는데 1950년 11월 2일 우익을 중심으로 한 결의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빨치산이
결의대회장을 습격해 78명을 학살하는 일이 발생한다. 우익을 대변했던 양씨집안과 비주류 길씨 집안의 많은 이들이 학살 대상이 되었다. 이로 인해
길씨와 양씨간의 관계는 깨어졌고, 이후 길씨는 마을에서 세력이 급격히 축소된다.
이런 마을내부에서의 전쟁에서
나오는 질문은 바로 '국가는 무엇했냐'이다. 실제 해방이후 신탁통치를 거치면서 형식적으로 남과북 각각에서 각 세력(이승만과 김일성)이 장악했지만
실제 마을 공동체까지 장악했느냐에 이르러서는 의문이 따른다. 마을에서는 아직까지 마을 내부의 권력구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을 치루면서
국가는 마을내부의 갈등을 이용 혹은 방치하여 마을 내부까지 정치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된다. 남과 북 각각 인민위원회와 우익청년단을 이용해
마을을 단속하고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마을의 문제 역시 제대로 된 국가의 부재에 의해 나타난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조차 용납되기 힘들다. '평온하던 남한에 적화야욕의 북괴가 침략했다'라는 한국전쟁의 패러다임 속에서 이런 마을내부에서의 전쟁은
논의의 토대를 갖기가 힘들다.
<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 http://blog.aladin.co.kr/rainaroma/4595066
미망인들의 삶은 전후사회의 변화를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 대부분이 스스로 생계를 이어나가야 하는데 이는 한국의 전통적 가부장사회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생계를 위한 억척스러움이 지금이 한국의 아줌마를 형성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미망인들은 대체로 농사, 바느질,
행상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는데 최소한의 자본으로 가능했던 행상이 이 때 급격히 증가했다고 한다. 사실 여성이 시장에 가는 행위자체가 흔하지 않던
시절 이들의 등장은 사회적으로 적잖은 충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