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 돌베개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는 한국전쟁 50주년을 기념해 출간되었다가 개정된 책이다. 김동춘의 전쟁과사회는 그 동안의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연구되어온 한국전쟁을 사회학적 차원에서 연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연대기적 구성보다는 피난, 점령, 학살이라는 주제로 권력을 가졌던 세력과 일반 대중들과의 입장을 보여준다. 그런면에서 일반 대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저자는 한국전쟁을 국가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사회구성원의 차별, 고통과 희생의 차원에서 접근하려고 하고 있다. 현대의 고전이나 명저 등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보면 전쟁과사회가 기존 연구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에서 전투과정외의 것을 따져본다면 피난이 먼저 떠오른다. 북한의 압제를 피해 피난을 떠나야 했던 무리들, 그 과정에서 수 많이 이산가족들이 발생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기존의 피난이 1.4후퇴때의 피난에만 초점이 맞춰졌었는데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의 서울 점령과정에서의 피난이 있었다. 이를 1차 피난, 1.4후퇴때의 피난을 2차 피난이라 할 수 있다. 1차 피난 때는 정부의 거짓말(서울을 떠나지 말라는)도 있었지만 일반 대중들은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이미 지식인들은 이승만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1950년 총선에서 이승만세력의 참패는 일반 대중 마저도 이승만정권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해준다. 일반 대중에게 북한이나 남한이나 별 차이를 못 느꼈던 것이다.그래서 1차 피난은 국가공직자, 친일파, 월남한 이북출신, 미군가족이 주류였다. 불과 며칠사이에 일어난.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도 1차 피난을 떠나는 이들이 많지 않았는데 농번기라는 특성에 농민들이 쉽사리 땅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2차 피난의 경우는 전반적으로 일어난 피난이었다. 그러나 주된 이유는 미국의 공습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미군의 공습이 군대 이외 마을지역에도 무차별적인 공습을 감행했기 때문에 대중들은 그 공습을 피해 피난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부의 말을 믿고 1차 피난을 가지 않았던 이들에 대한 남한과 보수우익(친일파로 이루어진)에 의해 잠재적인 부역자 혹은 북한친양적으로 찍히는 상황은 피난을 갈 수 밖에 없는 배경을 만들어냈다. 저자는 1차 피난을 정치피난, 2차 피난을 생존피난이라고 규정짓는다.

 

한국전쟁에서 남,북한 서로 상대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한다. 먼저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했던 북한은 대중참여 인민주의를 펼치지만 형식만 있었을 뿐 실질적인 영향력은 없었다. 점령지에서 인민위원들을 선출하는 등 나름 대중이 참여하지만 일본제국주의, 미국제국주의, 자본가 등에 대한 재판은 증오와 매국노 처벌이라는 도덕주의와 결합해 반대편에 대한 숙청으로 나타난다. 이로 인해 전쟁초기 북한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던 자영농, 소규모 자본가들이 등을 돌리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다시 남한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면서 상황은 반대가 된다. 먼저 피난하지 않은 이들에 대한 분류작업이 시작된다. 일단 부역자로 몰리게 되면 총살에서 부터 구타 등 인간 이하의 처우를 감내해야만 했다. 이는 일반 대중뿐 아니라 피난하지 않은 국회의원들까지 해당된다. 1950년 5월 선거에서 참패했던 이승만 정권은 피난하지 않은 국회의원들의 제거와 부산 국회파동 등으로 정적들을 일거에 제거할 기회를 갖게 된다. 게다가 부역자 처단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우익청년들의 행동은 남한 정부의 눈가림속에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된다. 그리고 친일파들은 이를 계기로 자신의 친일 행적을 알고 있는 이들을 부역자로 몰아 처단하며 권력을 되찾는다. 이 역시 이를 방조한 정부의 역할도 한 몫 했다.

군 점령지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작업은 바로 징집이다. 젊은이들은 북이건 남이건 징집을 당하지 않기 위해 숨거나 산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래서 전쟁초기 징집이 되는 운이 나쁜 경우에 해당했다. 북한 점령시 초기에는 의용군 징집이 자발적 의사에 의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CIA의정보에서는 서울 학생의 절반이 의용군에 가담했다고 하는데 이는 1950년대 이승만에 대한 국민의 감정이 어땠는지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북한은 점령지에서 강제징집 및 물자 동원정책을 실시하는데 이는 북한이 애초에 의도했던 토지개혁을 통한 민중해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는 결국 지지층이 되어야 할 노동자, 농민들마저 등을 돌리게 한다. 남한 역시 방위군이라는 이름으로 징집을 하는데 자위대라는 이름의 우익청년들은 지역내에서 부역자 처단 등의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이 때 부터도 남한 군대내 부정부패가 심각했는데 방위군에 대한 보급품을 착복하여 수많은 방위군이 부상과 아사로 사망하였다. 이런 징집은 우리가 근래 상영되는 영화 혹은 드라마와는 상충되는 것이다. 국가를 위해 참전을 하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참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학살이다.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낯설다.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 부터 최근의 동티모르학살까지 학살은 외국에서나 일어난 일일 뿐이다. 그러나 노근리 사건에서 밝혀진바와 같이 한국전쟁당시 남한과 북한에서 이루어진 학살이 많았다. 저자는 학살을 3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첫째는 작전으로서의 학살이다. 제주 4.3사건, 거창양민학살 사건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국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학살을 말한다. 여기에 명령을 받지는 않았지만 수뇌부의 묵인하에 이루어지는 학살 또한 작전으로서의 학살에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 북한을 도왔다고 의심되는 지역을 학살하는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특히 미공군에 의한 전북 익산 및 경남 창녕 등에 대한 폭격은 인민군이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인 마을에 폭격을 가한 경우다. 둘째는 처형으로서의 학살이다. 인민군이 점령했던 지역에서 인민군에 동조했던 이들에 대한 처형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이는 전쟁초기부터 발생했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마자 각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좌익 인사들에 대한 처형을 단행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민군도 후퇴하는 과정에서 많은 우익 포로들을 처형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 우익청년들에 의한 자의적인 처형이 많았다. 무심결에 동무라고 말했다가는 처형되었던 시절이었는데 국가권력이 생명의 위기에 빠진 민중을 노리갯감으로 여겨 보복한 반윤리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셋째는 사적인 보복으로서의 학살이다. 국가의 명령이나 국가로부터 받은 권리를 바탕이 아닌 개인, 가족간의 원한관계에 의한 학살이다. 이는 한국전쟁이 서로의 영토를 거의 점령한 특이한 경우이다 보니 한 마을에서 어떤 가족은 북에 어떤 가족은 남에 협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로를 처단하는 일이 많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런 학살은 전쟁이 지난 50년 동안 묻혀졌었다. 특히 전쟁 당사자인 국내에서는 이런 학살에 대해 공식 언급은 불가능하였다. 그나마 AP 통신을 통해 노근리사건이 밝혀지면서 잊혀졌던 학살들이 하나 둘 거론되고 있지만 정부의 의지가 없는 한 제대로 된 조사와 그로 인한 역사적 화해는 멀어 보인다. 재미있는 사실 중에 하나는 인민군에 의한 학살도 상당히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간 인민군의 학살에 대한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자는 인민군의 학살을 조사하다가 국군, 미군 및 우익에 의한 학살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추정하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 되었지만 한국전쟁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가 국내에서 나온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는 전쟁의 발발에 초점을 맞췄던 기존의 연구에서 벗어난 점 그리고 사회적으로 접근한 점에서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한국전쟁을 통해 발생한 국가억압체제가 오늘날의 한국사회 가정, 학교, 사회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억압으로 폭력이 구조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는 인민군 편, 국군이 올라왔을 때는 국군 편을 들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 구조가 자유당 시절엔 자유당을 민정당 시절엔 민정당을 찍는 순응주의적 태도로 나타났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있다. 학살의 경우도 현재화되고 있는데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일어난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한국전쟁이 현재까지 미치는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노무현 전대통령 분향소를 폭력적으로 철거했던 서정갑 등 보수주의자들의 행태는 점령 당시 남한에서 있었던 모습과 유사해보이고 북한에 대한 압력을 위해 집회를 하는 그들의 뒤에 일본 극우파 인사와 자본이 참여했다는 사실은 한국전쟁의 왜곡된 사회구조가 지금까지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은 단순히 남과 북의 전쟁이 아니었다. 한반도로만 국한되어 보더라도 남과 북 그리고 남한,북한내에서의 좌익과 우익의 전쟁이었고 한 마을에서 가족과 가족의 전쟁이었다. 그만큼 복잡했는데 이는 결국 남과 북 서로의 국가주의라는 틀안에서 소중한 목숨이 하찮게 여겨졌다. 이런 국가주의를 넘어서야 제대로 한국전쟁을 바라볼 수 있고 되짚어 볼 수 있고 나아가 국가주의가 갖는 폐단을 공감해 현재와 같이 준전시상태가 지속되는 소모적 환경을 극복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왜곡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보다 다양하고 심도있는 한국전쟁 연구와 한국전쟁을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절실해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