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의 피터팬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 6
이시다 이라 지음, 김미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 통칭 I.W.G.P. 총 6권을 모두 읽다.
드라마로부터 시작된 여정이 이제 마무리된 셈이다. 다소 길었지만 매우 흥미진진한 여행이었다.


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코드는 '2급수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순결한 자만이 정의를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한다.
맞다. 그것은 분명히 착각이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명분, 권력, 전략 등의 3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한다.
명분을 획득하지 못한 권력은 폭력에 불과하며,  
권력을 동반하지 못하는 명분은 허울에 불과하다.
또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전략이 필요하며,
전략이 부재한 권력은 비효율적이 된다.

하지만 순결한 자는 단지 명분 만을 충족시킬 수 있을 뿐이다. 


권력은, 더구나 전략을 가진 권력은 순결하기만 해서는 절대로 얻어낼 수 없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피어나는 꽃인 것처럼,
권력 역시 진흙탕에 손을 적시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여, '순결한 정의'란 그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정의는 순결하지 않은, 하지만 순결을 지향하는 자만이 지킬 수 있다.
이것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모순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법칙에 가깝다.

처녀는 순결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새 생명을 잉태할 수 없다.
순결이 깨지고, 처녀라는 이름을 잃어버릴 때, 여자는 비로소 생명을 만들 자격을 획득한다.
그 자역의 이름은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순결하지 않다. 하지만 생명을 잉태하고, 탄생시키고, 양육한다. 그럼으로써 위대해진다.
처녀는 순결하다. 하지만 생명을 잉태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지만 위대할 수는 없다.

정의는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위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2급수적인 인물로 하여금 정의를 지키게 한다는 것, 즉 나쁜 놈이 더 나쁜 놈을 징벌한다는 설정이야말로 작가의 세계 인식이 성숙하다는 증거이다.


사실, 이러한 설정이 이시다 이라만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유행했던 하드보일드 추리물의 핵심코드 역시 '2급수 정의'이다. 이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타락한 경관이나 탐정이다. 그럼에도 독자들은 그들을 경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적은 그들보다 훨씬 나쁜 놈들이거나, 보다 타락한 사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유형의 작품이 대부분 도회적이고, 냉정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가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순결한 자의 싸움은 스스로의 우월함에 대한 확인일 뿐이지만, 타락한 자들은 싸움을 통해서 자신의 상처와 타락과 비열함을 다시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엔 스스로를 회의하게 되기 때문이다.
 


I.W.G.P가 독창적이 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주인공 마코토는 분명 순결한 인물은 아니다. 건전한 인물도 아니다. 그는 하드보일드 류의 주인공과 비슷하지만, 보다 경쾌하다. 회의하지도 않는다.

이유는?
그는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리지 않지만, 세상물정을 다 맛본 기성세대도 아니고,
마마보이 찌질이는 아니지만, 독립하여 가정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의리에 목숨 걸만큼 어설프지는 않지만, 이해 관계가 아닌 유대를 나누는 친구들과 관계를 유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언제나 돌아갈 곳, 즉 가족과 동류(同類)들이 있다.
이것이 그가 하드보일드 주인공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그가 보다 타락한 자들과 싸울 수 있는 이유도, 그 싸움의 끝이 피로하긴 하지만 회의로 빠지지 않는 이유도, 그럼으로써 끝내 정의로울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를 '소통하고 연대하는 2급수 정의'라고 부르고자 한다.

또한
그가 지역문화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고자 한다.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이케부쿠로'는 도쿄의 부도심 지역이다.
도심이 되지 못하는 부도심, 소비+향락+문화가 버무려진 지역, 오다이바 같은 신시가지처럼 세련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고색창연하지도 않다.

※ 이케부쿠로의 분위기를 알기 위해서는 아래의 링크들을 참고
-
http://100.naver.com/100.nhn?docid=883883
-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443075

이 지역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상징이 바로 마코토라는 인물이고, 그가 지키는 정의이다.

 

이제 다시 고민해야 한다.

우리의 이야기 속에 올바른 '정의'를 다룬 것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충실히 반영하는 캐릭터는 있는가?

있다면 발전시켜야 하고, 없다면 만들어야 할 것이다.

찾자.
'정의의 사도'야말로 모든 스토리텔러들의 로망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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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 기획법 - 한수 위의 기획
김재호 지음 / 이코북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기획은 돌파(突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 기획은 당신 앞에 놓인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고 목표를 달성하게 해준다. 기획은 당신이 이전에 이루었던 성과나 목표, 결과의 수준을 뛰어넘게 해준다. 기획은 상황을 반전시켜 경쟁자를 압도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 p. 13.  
   



이 책의 강점은 바로 이것이다. ‘기획’의 개념을 보다 분명하고 실용적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  
실증은 미뤄두고 관념적인 이론만 늘어놓거나, 개념 정립은 도외시한 채 사례 나열에 급급한 책이 범람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이러한 설정의 의미는 보다 선명해진다.

내용 중에도 언급되지만, 기획이란 문제를 인식하고 그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활동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좋은 기획이 되기 위해서는 분석력아이디어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분석력은 이론에 해당하고, 아이디어는 실증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기획법에 대한 좋은 책이 되기 위해서는 이론과 실증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그러한 조화의 실천적 형태가 바로 위의 인용에 제시된 ‘돌파’라는 표현이 될 것이다.

(※ 물론 ‘돌파’가 저자의 독창적인 표현은 아니다. 히비노 쇼조의 <돌파의 사고력>에서 영향을 받은 듯 하다. 하지만, 뭐 저자는 스스로 인용이야말로 ‘창의적 기획’의 한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물론 이 책 역시 완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기존에 출간된 기획/마케팅/광고/경영 서적들보다는 균형이 잡힌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요컨대 ‘돌파’와 같은 다소 전략적인 카피라이팅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책에는 기존의 논의들도 잘 정리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래와 같다.  

* 성공하는 기획의 3가지 특징 (pp. 27-28.)
   - 성공하는 기획은 창의적이어야 한다.
   - 성공하는 기획은 문제 해결 지향적이어야 한다.
    - 기획이 성공하려면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이 내용은 수많은 관련 자료에서 반복되었던, 지극히 타당하지만, 일반적이기 짝이 없는 정보이다. 물론 이런 정보라고 해서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보편적 가치의 증거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심심할 뿐. 모범생에 매력을 느끼기 어려운 것처럼, 보편타당한 진리야말로 맨송맨송하기 짝이 없다. 지극히도. 

저자도 이런 사실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으리라. 아래의 내용을 구태여 설명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세상에 100% 새로운 것은 없다. 우리가 말하는 ‘새로운 것’이란 알고 보면 ‘이 세상에 없던 100% 새로운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들과 다른 새로운 것’이다. (p. 116.)  
   


맞다. 인용처럼, 세상에 완전하게 새로운 것이란 없다. 다른 것이 있을 뿐. 바로 그런 ‘다름’이 보편타당한 진리에 맛을 더하는 조미료가 된다. 즉, 얼마나 동시대적이면서도 타당한 예시를 제공하느냐가 기획법 관련 책에 독창성을 부여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도 이 책의 강점은 빛난다. 저자의 풍부한 현장경험과 현실감각은 매우 적절한 예시를 제공했는데 ‘웅진코웨이’, ‘One Shot 018’, ‘삼양라면’ 등이 특히 주목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곧 독소로 작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반복되는 예시
: 좋은 이야기도 한두 번, 반복할수록 예시의 독창성을 떨어진다.

2) 부적합한 예시
: ‘두바이’와 ‘타이거 우즈’와 관련된 내용이 여기 해당한다. 물론 원고를 쓸 때야, 이들은 매우 적절하고 매력적인 예시였을 것이다. 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이 책이 인쇄된 것은 2009년 11월 5일, 발행은 11월 10일. 그런데 11월 26일에 두바이 모라토리엄 쇼크가 발생했고, 11월 28일에는 타이거 우즈의 교통사고 소식이 전해졌고 연이어 스캔들이 터졌다. 모델로서의 가치가 사라진 것이다. 어쩜 이렇게 운이 나쁠 수 있을까? 


2)는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없지 않지만, 저자의 분석이 정확하지 않다는 뜻도 된다.

더구나 1)은 보다 복잡한 의미를 가지는데, 예시의 반복은 저자의 글쓰기 방식이 가진 문제, 나아가 책의 체계에 대한 의심으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시의 반복 사용은 짧은 글들을 묶어 책으로 묶어낼 때 주로 일어난다. 두서없이 중구난방으로 발표된 글이라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이처럼 한 챕터의 분량이 짧다면 그런 의심은 더 커진다. 물론 이 책의 경우는 그런 글쓰기 방식은 아닐 것이다. 각 챕터의 내용이 서로 긴밀하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글쓰기 방식을 구태여 선택할 필요가 있었을까?  

내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더구나 현재의 구성은 지나치게 세분화되어 있어, 각 내용의 집중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이처럼 잘게 쪼개진 챕터들을 묶어 몇 가지 주제를 만들고, 각 주제들을 하나의 챕터로 만들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훨씬 체계적으로 될 수 있었을 것을. 아쉽다.


평가하자면, 이 책은 단점보다 장점이 많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약점이 자꾸 거슬린다. 가능성이 있음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을 바라봐야 하는 안타까움. 그 감정이 남아 뒷맛이 쓰다. 보다 엄정하게 수정되고 보완된 개정판이 만들어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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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멋진 신세계 - 새로운 세기의 풍경들
김병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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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요즘같은 '新토목시대'에는 그 주기가 더 빨라지고 있지만,   그 세월이 주는 무게감이야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이 발표된 것은 1999년,  돌이켜보면 참으로 허망한 엄살과 허풍에 불과했지만,  '세기말'의 풍조가 거리를 어슬렁거리던 시절이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경이와 공포,  사라져 가는 낡은 것에 대한 연민과 구차함,  

사실은 샴쌍둥이처럼 등이 맞붙어 있는 이 감정들이 당시를 대표할 수 있는 정서였다.  

 

이 책에도 그러한 정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 책의 핵심이자, 구성원리가 되는 문장이라 할 수 있는 다음의 문단이 그를 증명한다.

 

   
  문자에서 영상으로,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 실물에서 사이버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며 인쇄 문화에서 컴퓨터 문화로, 도서 문화에서 인터넷으로, 독자에서 네티즌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고, 나아가, 글자에서 비트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인문주의에서 기능주의로, 사유에서 정보로, 지식에서 뉴스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끔찍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문명의 추세이며 안타깝지만 투항하지 않을 수 없는 새로운 역사가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거대한 전환.변혁.이월의 가장 현저한 희생의 예를 출판 문화가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 51쪽  
   

 

이러한 인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새로운 세기를 "끔찍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문명의 추세이며 안타깝지만 투항하지 않을 수 없는 새로운 역사"로 인식하는 태도이다. 지식인다운 겸손이라고 볼 수도 있고,  행동이 결여된 수동성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문제는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저자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진술 속에는 독특한 방어전략이 숨어있다.  

세대론으로 이어지는 구분주의적 태도이다. 저자는 '세기말'의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면서, 본인을 앞선 세대의 인물로 편입시킨다.  

이러한 입장표명은 매우 교묘하다. 저자는 비판의식도 없이 시대 변화에 편승하는 철없는 어린아이와, 고리타분한 노인네의 사이에 위치한다. 이 위치를 통해 그는 양쪽 모두를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는 고지를 점령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그 어느 쪽에서도 공격받지 않을, 아니 나아가 동정까지 받을 수 있는 입장이 된다. 나이는 먹었지만 그래도 변화를 수용할 줄 아는 분이거나, 젊은이들에게 시선을 맞추면서도 연장자로서의 권위를 잃지 않는 이 등등의 진술은 그가 점유한 위치의 논쟁적 우월성을 증명한다.   

 

하지만, 자칫 이런 식의 수동성은, 책임회피로 이어지기 쉽다.  

중간지대에 서 있는 자, 회색인들의 공통된 약점이자 위험요소라고 할 것이다.  

시대의 변화를 어찌할 수 없는 흐름으로 파악했을 때, 정작  그 변화는 몇몇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사용자들 모두가 관여된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엘리트주의로 함몰되기 쉬운 것이고, 나아가 비판은 했으나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의 지적은, 강산이 한 번 바뀐 2009년 현재에 적용해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유용하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지나치게 신중한 논의이고, 보편타당하기만 한 내용만을 주장했기 때문인 것은 아닐지?   

 

 

후반부, 특히 2장 "자본-과학 복합체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빈번하게 노출되는 반복적인 지식은, 이 책의 권위와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특히 리브킨의 <노동의 종말>에서 인용된 미국 흑인들이 슬럼화되었던 사례는 몇 차례 반복되어 참신함이 사라져 버린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반복되면 잔소리가 된다. 말 뿐만 아니라, 글도 역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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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4 - 몽골 중국 티베트
한비야 지음 / 금토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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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읽었다. 다행이다.  

만일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무렵에 읽었다면, 그 느낌은 사뭇 달랐을 것이다.  

 

당시에는 아직 해외여행의 경험이 많지 않았고, 외국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며,
그러했기 때문에 낯선 곳에 열망이 가득했으니 

이 책의 내용을 열광적으로 찬양하거나, 욕을 하거나
두 가지 중에서 어떤 행동이라도 극단적이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한비야라는 여행가(적어도 이 책을 썼을 때에는 여행가였던)에 대한 평가도 그래서 극단적이다.

보편적 가치를 벗어던지고 낯선 (1998년 당시로서는 더더욱 낯설었을) 땅으로 찾아들어가는
그 삶의 방식에 동경과 찬사를 보내는 부류와  

여행을 미화했거나 신변잡기식 자기자랑이 많고,  
해당 지역의 상황을 편협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부류, 

이들은 서로 완전히 다르게 보이지만,
둘 다 한비야라는 여행가를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맞다. 적어도 이 책을 둘러싼 논쟁에서 한비야는 과대평가되어 있다.

그녀는 여행가이다. 적어도 이 책을 쓸 당시에는 아직 그러했다.  
냉철한 이론가도 아니고, 전략을 구사하는 사회활동가도 아니다. 
 

그저 여행가일 뿐이고, 낯선 땅을 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했을 뿐이다. 
 

그러니 다소 과장되어 있고 호들갑을 떠는 듯한 문체나, 
중간중간 느껴지는 자기과시,
탈식민주의적 태도를 취하면서도 끝내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각 등등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보다 아량을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모두 그러하듯,
저자 역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제 막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고,  
그에 대한 순결한 열망 
-- 그렇기 때문에 다소 무모할 수도 있지만, 매우 강력한 그 열망, 을 품고 있는 이에게
너무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부당하다.

 

오히려 그녀가 이 여행을 통해 얻었던 아이디어들,
삶의 방향을 제시해준 번뜩이는 사유들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이후 저자의 행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열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바로 그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재미있다.  

 

p.s. 그와 관련된 부분을 하나 인용하고자 한다. 한비야 씨가 꾸준하게 제시하고 있는 '공동체로의 지구'의 개념이 이 책에 등장한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이제 너무나 좁아져서 한쪽에서 그릇된 일을 하면 단박에 다른 쪽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중국 양쯔강이 범람한 원인과 결과가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수억의 이재민을 낸 홍수의 원인은 다름아닌 일본으로 수출한 나무젓가락이었다. 그것을 만드느라 무리하게 나무를 배어낸 것이 홍수의 큰 원인이 된 것이다.
  그 홍수는 또한 한국의 밥상에 올라오는 생선값을 뛰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범람한 물이 한꺼번에 황해로 몰리는 바람에 바닷물의 염도가 낮아져 고기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일본의 나무젓가락과 양쯔강의 홍수와 한국 밥상의 생선값. 이제 전세계는 이와 같이 환경적으로 하나로 얽혀 있는 것이다. - pp.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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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
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 문학동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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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러웠다. 진정으로.   

  1.

  서브컬쳐의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아니, 그런 저술활동을 용납하는 풍토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

  이에 비하면,  우리의 저술집단(중에서도 학술집단)은 지나치게 분열되어 있고, 폐쇄적이다.  

  분열되어 있다는 것은, 저술자들이 자기 전공 분야에 대한 글쓰기에만 골몰하고 있고,
  또 그런 식의 글쓰기를(혹은 글쓰기) 권장하는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전문적인 글쓰기의 필요성이야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벌리는 짓거리의 치졸함이야 두 번 말하면 입만 아프다.   


 문제는 전문과 폐쇄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전문은 한 우물을 깊이 판다는 것이다. 깊이 깊이 파내려 가다 지하수를 만나는 것이다.
  표면에서야 알아 볼 수 없지만, 저 깊은 곳에서는 서로 통한다.
 
  그래서 진정한 고수들끼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분야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경지에 오른 종교인들을 보라. 그들은 종파를 초월하여 세상을 바라본다.
  경지에 오른 과학자와 예술가는 서로 말이 통한다.  

  그에 비해서 폐쇄는 벽을 높이 쌓아서 스스로를 다른 세계와 차단하는 것이다.  
  아무리 높이 벽을 쌓는다고 한들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지 않는다.   

  이런 이들이 쌓아올리는 벽의 재료는 지식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것만으로 공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아집편견이라는 결합제가 추가된다.  

  텍스트를 사전적 지식으로만 읽는 이들을 경계하라.
  그들은 법칙과 규칙을 발견할 수 있지만 사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고향이 아니라도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전문을 지향하는 이들은 소통하고, 폐쇄를 지향하는 이들은 단절된다.
  간단명료한 진리이다.  

  2. 

  그런데 우리의 시스템은 (혹은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전문을 표방하면서도 폐쇄를 지향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시스템(혹은 사람)의 문제는 자명하다. 소통을 하지 못한다. 
  텍스트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니, 전공과 소통하지 못하고.
  지식을 습득하지만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지 못하니,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며, 
  소통을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 위험을 알아차려 개선하지 못하니, 자신과 소통하지 못한다.  

  3.

  그러니 생각하건데, 전공은 "잣대 만들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일을 파악하고, 판단하고, 적용할 수 있는 일종의 기준점을 형성하는 것,
  그것이 전공에 대한 공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 뒤에는? 만들어진 잣대를 활용하여 세상을 살아나가야 한다. 
  그것이 공부의 목적 이다.  
  세상에 나가고자 하지 않는 공부는 도락에 불과하다.   

  세상 모든 것이 공부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바로 이 책이 그러한 것처럼.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는 듯,
  이 책의 내용 역시 애니메이션, 게임, 캐릭터, 인터넷콘텐츠 등등을 종횡무진 섭렵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종합하여 포스트모던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포스토모던적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데이터베이스형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4. 

  얼핏,
  사회학 서적으로도, 오타쿠에 대한 문화비평서로도, 포스트모더니즘 입문서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다.

  그 중간 영역에 위치해 있다.
  새로운 영역의 개척, 그 역시 전문을 지향하는 자의 목표중 하나이다. 

 
  자, 이제 다시 한번 다짐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하는가? 전문을 지향하는가, 폐쇄를 지향하는가?
  목표는 분명하다.

  그렇다면 세상으로 나가자.
  전공에 얽매일 필요도, 세평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 오직 목적과 목표가 있을 뿐이다.  

  p.s.

  안타깝게도 내가 이 책의 범위를 모두 따라갈 수 없었다. 이것이 별이 하나 빠진 이유이다. 
  그러니, 이제 다시 공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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