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멋진 신세계 - 새로운 세기의 풍경들
김병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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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요즘같은 '新토목시대'에는 그 주기가 더 빨라지고 있지만,   그 세월이 주는 무게감이야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이 발표된 것은 1999년,  돌이켜보면 참으로 허망한 엄살과 허풍에 불과했지만,  '세기말'의 풍조가 거리를 어슬렁거리던 시절이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경이와 공포,  사라져 가는 낡은 것에 대한 연민과 구차함,  

사실은 샴쌍둥이처럼 등이 맞붙어 있는 이 감정들이 당시를 대표할 수 있는 정서였다.  

 

이 책에도 그러한 정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 책의 핵심이자, 구성원리가 되는 문장이라 할 수 있는 다음의 문단이 그를 증명한다.

 

   
  문자에서 영상으로,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 실물에서 사이버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며 인쇄 문화에서 컴퓨터 문화로, 도서 문화에서 인터넷으로, 독자에서 네티즌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고, 나아가, 글자에서 비트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인문주의에서 기능주의로, 사유에서 정보로, 지식에서 뉴스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끔찍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문명의 추세이며 안타깝지만 투항하지 않을 수 없는 새로운 역사가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거대한 전환.변혁.이월의 가장 현저한 희생의 예를 출판 문화가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 51쪽  
   

 

이러한 인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새로운 세기를 "끔찍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문명의 추세이며 안타깝지만 투항하지 않을 수 없는 새로운 역사"로 인식하는 태도이다. 지식인다운 겸손이라고 볼 수도 있고,  행동이 결여된 수동성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문제는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저자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진술 속에는 독특한 방어전략이 숨어있다.  

세대론으로 이어지는 구분주의적 태도이다. 저자는 '세기말'의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면서, 본인을 앞선 세대의 인물로 편입시킨다.  

이러한 입장표명은 매우 교묘하다. 저자는 비판의식도 없이 시대 변화에 편승하는 철없는 어린아이와, 고리타분한 노인네의 사이에 위치한다. 이 위치를 통해 그는 양쪽 모두를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는 고지를 점령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그 어느 쪽에서도 공격받지 않을, 아니 나아가 동정까지 받을 수 있는 입장이 된다. 나이는 먹었지만 그래도 변화를 수용할 줄 아는 분이거나, 젊은이들에게 시선을 맞추면서도 연장자로서의 권위를 잃지 않는 이 등등의 진술은 그가 점유한 위치의 논쟁적 우월성을 증명한다.   

 

하지만, 자칫 이런 식의 수동성은, 책임회피로 이어지기 쉽다.  

중간지대에 서 있는 자, 회색인들의 공통된 약점이자 위험요소라고 할 것이다.  

시대의 변화를 어찌할 수 없는 흐름으로 파악했을 때, 정작  그 변화는 몇몇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사용자들 모두가 관여된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엘리트주의로 함몰되기 쉬운 것이고, 나아가 비판은 했으나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의 지적은, 강산이 한 번 바뀐 2009년 현재에 적용해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유용하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지나치게 신중한 논의이고, 보편타당하기만 한 내용만을 주장했기 때문인 것은 아닐지?   

 

 

후반부, 특히 2장 "자본-과학 복합체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빈번하게 노출되는 반복적인 지식은, 이 책의 권위와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특히 리브킨의 <노동의 종말>에서 인용된 미국 흑인들이 슬럼화되었던 사례는 몇 차례 반복되어 참신함이 사라져 버린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반복되면 잔소리가 된다. 말 뿐만 아니라, 글도 역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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