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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박완서 지음 / 창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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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색창연함이 주는 아름다움을 모른다. 아니 모르도록 강요받았다. 새로운 것이 주는 막강한 힘, 그 현란함과 속도감은 우리에게서 옛날 사람, 낡은 물건의 아름다움을 빼앗아갔다. 새로운 것은 곧 권력이고 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화재를 보호하기 보다는 새로운 빌딩을 올리는 일에 열광하고, 전통적인 것을 되살리기 보다는 새로운 유행을 받아들이는 일이 급급하다. 그러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것들도 결국에는 옛것이 되고 만다는 진리를.

이런 사조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우리 문학에서 작가는 단명을 하고 만다. 새로운 것을 들고 나오는 젊은 작가들에게만 집중할 뿐, 묵묵히 옛것을 반추하는 늙은 작가들에게는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없었다면 어찌 새로움이 있을 수 있었을까?

박완서는 분명히 낡은 작가이다. 생명적인 나이를 보든지,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를 보던지, 그 소재를 다루는 방식을 보던지 어떤 부분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이 작가 박완서를 돋보이게 만든다.

맞다. 나이를 건너 뛰어, 시대를 건너 뛰어 소통을 할 수 잇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완서는 그런 작업을 그치지 않고 있다. 그것도 요즘의 세태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지키면서. 결코 그게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낮고 분명한 목소리로. 바로 이것이 그에게 붙은 '작가'라는 타이틀을 부끄럽지 않게 많드는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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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나날 문학과지성 시인선 211
이기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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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죽만 건드리는 것은 싫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그의 시는 선언적이다. 詩가 선언적이라는 것은 나쁜가? 아니다. 나쁘지 않다. 그것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시인의 개성에 속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가? 문제가 될 것 역시 없다. 적어도 시의 구성논리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그렇다. 시의 고전적인 목적이 '감동의 전달'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더욱 그렇다. 선언적인 문장도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다.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지극히 단정적 표현으로 일관되고 있다. 그 내면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과 타인의 삶에 대한 관찰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러한 것들은 진술의 전면으로 나타나지 못한다. 그만큼 선언적인 목소리가 강하기 때문이다. 선언적인 목소리가 지배하는 진술에서는, 타인의 견해는 끼어들 틈이 없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모든 문장은 독자와 작가 사이의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하는데, 이런 식의 작품에서는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고, 독자는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는 작품의 내부에 국한되는 설명이다. 작품의 외부, 즉 작품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시점에서부터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이런 작품에 내릴 수 있는 평가는 두 가지 뿐이다. 작가의 선언에 동감하거나, 반대하거나. 이것은 강요된 선택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작품들은 작가의 위치를 지나치게 우월하게 만든다. 마치,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군주처럼, 작가는 독자에게 명령한다. 내 말에 동조하라, 동조하지 못하겠거든 포기하라.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자만이다. 불안한 권력이다. 불손한 자신감이다. 과연 누가, 어떤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선택을 강요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선언적인 시는 위험하다. 나쁘지는 않지만, 위험하다. 권력의 핵이 작가에게 집중되기 때문이다. 작가의 삶이 그대로 이해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균형감각을 갖춘 군주라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만, 그렇지 못한 작가에게 이런 종류의 시는 너무나 위험한 무기가 된다.

또 다른 측면을 생각해볼 수 있다. 시집에서 선언하는 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목소리를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단단하게 응집될 뿐이다. 그는 반성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꽃, 먼지, 별빛, 뻘물보다 못한 존재라고 설명한다. '~보다'라는 표현의 이중성에 주목하자. 이런 것들에 자신을 비유한다는 것 자체가 강한 자신감이다. 스스로 못하다고 하면서도, 결국 이것들에도 미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우월하다는 의식이다.

이러한 우월성이 없다면,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의 긴장감은 유지되지 못한다. 작가가 내비치는 우월성은 권세나 자본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한 단련을 통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흔들릴 때는 어떻게 되는가? 말 그대로 '유리'처럼 맑은 상태에서만 작품의 건강성이 확보될 수 없다. 조금이라도 더러워지면 이 시집의 선언은 허망한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거칠게 말하자면, 이 시집은 동어반복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시들이 필요할 것인가? 이 시집은 결국 단 하나의 시로도 묶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작가는 무엇 때문에 이리도 많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며, 독자는 무엇 때문에 같은 내용의 성명을 거듭해서 들어야 하는가?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이런 형식의 시는 지루하다. 나쁘지는 않지만 지루해지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견딜만 하다. 아직까지는 많이 위험하지 않고, 많이 지루하지도 않다. 다만 위태로울 뿐이다. 높이 매달린 끈을 걸어가는 곡예사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단 한 발자국만 잘못 내딛어도 그는 추락하고 만다. 스스로 묶어놓은 끈이 너무 높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추락이 치명상이 될 것이다. 위험하다. 불안하다. 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나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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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데이
이병천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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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렴, 맞다. 큰 기대는 큰 실망만을 남긴다. 실망하지 않으려면 기대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이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독자와 작가, 독자와 작품 사이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작년 이맘 때, 이병천이란 작가를 만났다. 여러 출판사에서 경쟁하듯이 내놓는 '올해의 좋은 소설'이었나, 아니면 그 숱한 문학상 중의 하나였나, 하여튼 소설종합선물세트에 포함된 것 중 하나였다. 그 선물세트 중에서 그의 작품「검은 달 흰 구름」은 단연 탁월했다.

다소 고색창연한 문체, 바둑이라는 범상치 않은 소재, 구성과 갈등 형성에 이르기까지. 탁월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빼어난 작품인 것은 분명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났던 밀도 높은 작품이었고, 정석적인 작품이었다.

이런 작가가 숨어있었다니, 작가의 약력을 살펴보니 「모래내 모래톱」,『마지막 조선검 은명기』등이 낯익었지만, 크게 관심을 끌만한 작품들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재야에 숨어있던 검술의 고수가 홀연히 강호에 등장한 것이었다.

나는 타고난 구경꾼 기질, 그 경망스러운 기질을 감추지 못하고, 그의 작품을 칭찬하기 시작했고, 그의 작품집을 구해다녔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그의 작품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묘한 일이었다. 이만한 고수가 주목을 받지 못하다니.

호들갑스럽기 짝이 없는 나의 구경꾼 기질은, 이번에는 비평계의 게으름과 패거리 주의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제야 사과하건데, 내 설익은 세 치 혀에 상처받은, 혹은 상처받은 척 했던 비평가 지망생들이여, 나를 용서하시라. 아니면 내 안에서 음흉한 눈을 번뜩이고 있는 구경꾼을 증오하시라.

그의 작품집을 통독하고 나서 나는 당신들에게 고개 숙인다. 인정한다. 비평이라는 것이 단 하나의 작품만을 가지고 할 수는 없다는 당신들의 주장에 동감한다. 잠시동안, 텍스트에 대한 정독 운운하며, 작품의 개별성을 훼손하는 통시적 시각의 폭력 운운하며,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려는 비겁한 수사 운운하며, 당신들의 심기를 괴롭혔던 것에 용서를 빈다. 때로는 술에 취한 혀가 말짱한 정신을 괴롭힐 수도 있는 것이니, 용서하시라.

당신들이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작가에 대한 평가는 개별 작품과 함께 작품세계 전반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 하나 하나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방법만으로 고찰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래 있다. 분명히 있다. 이번 독서에서 그것을 여실히 느꼈다. 내가 이 작가를 변호했던 단 하나의 이유 - '이만한 작품을 쓴 작가가…'라는 것은 근거 없는 믿음이었다.

작품 하나가 좋다고 해서, 다른 작품들까지 좋은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건 우리 출판-문학계의 못된 관행이기도 한데, 대부분의 작품집은 끝부분에 수록된 작품일수록 여지없이 느슨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작품집은 그 정도가 심했다.

총 11작품이 수록된 이 작품집에서 주목되었던 작품은「홀리데이」,「검은 달 흰 구름」,「백조들 노래하며 죽다」, 이렇게 3작품 뿐이었다. 그것도 1988년 탈옥수 지강헌 사건을 다룬 「홀리데이」와 백지영 비디오 사건을 다룬「백조들 노래하며 죽다」는 소재의 매력을 빼고나면 미진한 구석이 많으니 말이다. 남은 것은 처음에 주목했던「검은 달 흰 구름」밖에 없다. 11작품 중에서 단 한 작품이라. 어찌해야 할런지, 그저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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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1
가오싱젠 지음, 오수경 옮김 / 민음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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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정신을 서양의 몸체에 담아라, 혹은 서양의 정신을 동양적 미학으로 표현하라.
이 명제는 동양의 문화적 전통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의 오랜 숙원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동양문화의 가치 회복, 결코 쉽사리 해결되지 않을 바로 그 문제를 고민하도록 요구한다. 거부할 수 없다.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부터 들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해갈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가 왜 쉽지 않은가? 그것은 이미 정치구조, 경제구조, 나아가 생활구조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영향력이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 영향력은 너무나 크고 광범위하여,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거의 영광이 아무리 찬란하더라도 시간을 거슬러 오를 수는 없는 법이니까. 맞다.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방향 설정이 중요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또한 할 수 있는 일은, 동양의 영광에 대한 복원이 아니라, 동양과 서양사이의 의사소통이다.

나는 작가 가오싱젠의 가치를 여기에서 찾고자 한다. 이번 독서에서 발견한 그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다. 1)중국 연극이 전통적인 경극과 사회주의 선동극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나의 무지를 깨뜨려 주었다는 점, 2)그의 작품은 명징한 주제와 신선한 기법이 동시에 살아나고 있다는 점, 3)그가 자기 연극의 이론적 토대를 동양의 문화전통에서 찾고 있다는 점.

1) 중국에는 다양한 형태의 전통극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경극'이 가장 알졌다. 특히 서구인들에게 경극은 그리 낯선 문화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경극의 세계에 공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서구인들에게 경극은 연극이라기보다는, 서커스에 가까운 재주라는 인식이 강한다고 한다. 가오싱젠의 연극은 경극과는 다르다. 그는 서양의 연극전통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가 활용하는 이미지와 상징 등은 중국적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문화적 전통을 '연극'으로 보이게 만든 것이다.

2) 그가 다루는 주제는 보편적이다. 관료집단의 횡포와 그에 대응하는 민중의 반응을 보여준 「버스 정류장」, '연극에 대한 연극'이라고 할 수 있는 「독백」, 환경보호와 자연과의 교감을 주창하는 「야인」, 이들의 주제는 새로울 것이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동양과 서양의 관객 모두가 공감할 수 있다. 그의 독창성이 발휘되는 것은 기법적인 측면이다. 그는 '공연을 위한 제안'을 통해서 배우들이 사실적인 연기를 하기보다는, 중국의 연기기법인 '신사(神似)'에 따르라고 주문한다.

보다 직접적인 기법은 그가 '다성부(多聲部)'라고 표현한 것이다. 기존의 연극이 등장인물들 간의 주고받는 대화와 여러 명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코러스로 이루어진데 비해서, 이 기법은 여러 명이 서로 목소리 - 하지만 내적인 연관성을 가지는 목소리를 동시에 내는 것이다. 이는 극 중의 혼돈을 나타내는데 유효하며, 아울러 동참하지 않는 인물을 통해서 현대인의 소외를 그리는데 탁월하게 작용한다.

3) 그는 극작 활동과 함께 연극의 이론과 평론을 병행하는데, 이를 통해 그의 연극이 동양적 전통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인식의 토대에서 만들어진 연극이기에,「야인」에 삽입된 중국설화와 민요, 그리고 '우임금의 걸음걸이[禹步]'와 같은 장치들이 의미를 가지며, 이를 통해 구현되는 자연과의 화해라는 주제가 보다 효과적으로 구현된다.

이처럼 가오싱젠은 자신의 문화적 전통과 서구의 현대문명 사이의 소통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현실문제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그는 천안문사태에 반발하여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이로 인해 정작 중국에서 그의 작품은 금서로 묶여있다. 또한 그는 중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이론적-작품적 현실과 정치적-사회적 현실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것이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소통을 꿈꾸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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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폴 오스터 지음, 김경식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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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특별한 경험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의 태생이 원초적 체험을 만들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그가 창조한 인물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자연에서 자란 작가가 만든 인물과 도시에서 자란 작가가 만든 인물은 다르다. 자연을 원초 체험으로 삼는 작가의 인물이 고향을 이상향으로 품고 있는 반면, 도시를 원초 체험으로 삼는 작가의 인물은 이상향을 가지지 못한다.

이상향을 품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일상에서야 다른 점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자세에서 차이가 난다. 이상향을 품은 사람들은 마을공동체적 관계를 기본으로 하지만, 이상향이 없는 사람들은 개인적 관계를 기본으로 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둘의 차이가 극명해지는 것은, 절망의 순간에서이다.

이상향을 품은 사람들은 절망에서도 돌아갈 곳이 있다. 고향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는 진정으로 절망하지 않는다. 아니, 고향이 사라졌더라도 절망하지 않는다. 현실의 고향은 사라졌더라도, 그의 기억 속에 고향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쉽게 절망한다.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기에 그는 절망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애초부터 잃을 것이 없었으니까.

시대가 변했다. 작가들도 대부분 도시 태생이다. 이제 진정한 의미의 시골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체는 붕괴되었고, 산업화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모든 곳이 도시가 되어버린 마당에, 그런 이분법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고 오롯이 혼자다. 폴 오스터는 그런 사람들의 특징을 잘 표현한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은 혼자 살고 혼자 절망하고 혼자 절망을 이겨낸다. 이상향을 품은 사람이 절망 앞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다면,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도망치지 않는다. 그는 절망 속으로 추락하고 추락하고 또 추락해서 바닥까지 떨어진다. 이것이 그의 인물들이 가진 특징이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찾아왔다 쉽게 떠나가는 거리, 그 거리의 모퉁이에서 그들은 버티고 있다.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디기 위해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기 위해서. 오기 렌이 담배가게 앞에서 사진을 찍어, 스쳐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기억 속에 담아두는 것처럼. 이것이 바로 도시를 살아가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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