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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데이
이병천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10월
평점 :
아무렴, 맞다. 큰 기대는 큰 실망만을 남긴다. 실망하지 않으려면 기대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이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독자와 작가, 독자와 작품 사이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작년 이맘 때, 이병천이란 작가를 만났다. 여러 출판사에서 경쟁하듯이 내놓는 '올해의 좋은 소설'이었나, 아니면 그 숱한 문학상 중의 하나였나, 하여튼 소설종합선물세트에 포함된 것 중 하나였다. 그 선물세트 중에서 그의 작품「검은 달 흰 구름」은 단연 탁월했다.
다소 고색창연한 문체, 바둑이라는 범상치 않은 소재, 구성과 갈등 형성에 이르기까지. 탁월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빼어난 작품인 것은 분명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났던 밀도 높은 작품이었고, 정석적인 작품이었다.
이런 작가가 숨어있었다니, 작가의 약력을 살펴보니 「모래내 모래톱」,『마지막 조선검 은명기』등이 낯익었지만, 크게 관심을 끌만한 작품들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재야에 숨어있던 검술의 고수가 홀연히 강호에 등장한 것이었다.
나는 타고난 구경꾼 기질, 그 경망스러운 기질을 감추지 못하고, 그의 작품을 칭찬하기 시작했고, 그의 작품집을 구해다녔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그의 작품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묘한 일이었다. 이만한 고수가 주목을 받지 못하다니.
호들갑스럽기 짝이 없는 나의 구경꾼 기질은, 이번에는 비평계의 게으름과 패거리 주의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제야 사과하건데, 내 설익은 세 치 혀에 상처받은, 혹은 상처받은 척 했던 비평가 지망생들이여, 나를 용서하시라. 아니면 내 안에서 음흉한 눈을 번뜩이고 있는 구경꾼을 증오하시라.
그의 작품집을 통독하고 나서 나는 당신들에게 고개 숙인다. 인정한다. 비평이라는 것이 단 하나의 작품만을 가지고 할 수는 없다는 당신들의 주장에 동감한다. 잠시동안, 텍스트에 대한 정독 운운하며, 작품의 개별성을 훼손하는 통시적 시각의 폭력 운운하며,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려는 비겁한 수사 운운하며, 당신들의 심기를 괴롭혔던 것에 용서를 빈다. 때로는 술에 취한 혀가 말짱한 정신을 괴롭힐 수도 있는 것이니, 용서하시라.
당신들이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작가에 대한 평가는 개별 작품과 함께 작품세계 전반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 하나 하나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방법만으로 고찰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래 있다. 분명히 있다. 이번 독서에서 그것을 여실히 느꼈다. 내가 이 작가를 변호했던 단 하나의 이유 - '이만한 작품을 쓴 작가가…'라는 것은 근거 없는 믿음이었다.
작품 하나가 좋다고 해서, 다른 작품들까지 좋은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건 우리 출판-문학계의 못된 관행이기도 한데, 대부분의 작품집은 끝부분에 수록된 작품일수록 여지없이 느슨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작품집은 그 정도가 심했다.
총 11작품이 수록된 이 작품집에서 주목되었던 작품은「홀리데이」,「검은 달 흰 구름」,「백조들 노래하며 죽다」, 이렇게 3작품 뿐이었다. 그것도 1988년 탈옥수 지강헌 사건을 다룬 「홀리데이」와 백지영 비디오 사건을 다룬「백조들 노래하며 죽다」는 소재의 매력을 빼고나면 미진한 구석이 많으니 말이다. 남은 것은 처음에 주목했던「검은 달 흰 구름」밖에 없다. 11작품 중에서 단 한 작품이라. 어찌해야 할런지, 그저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