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애플 스토리
IBLP 지음, 김두화 옮김 / 나침반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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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이 책에 포함되어 있는 기독교 논리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속에 담겨있는 백인 중심주의적인 시각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책 속의 선교사 역시 고집불통이다. 그는  원주민들의 세계관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원주민들에게는 백인 중심의 기독교적 가치관을 강요한다. 그가 제법 오랜 기간동안 뉴 기니아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면서도, 원주민들의 말을 익히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상점 문을 닫았을 때와 똑같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얘기를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그들의 언어를 가르쳐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위의 인용에 나타난 것처럼, 그는 스스로 원주민들을 몰아내고서는, 아무도 자신에게 말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고 있다. 원주민들이 찾아오지 않는 것은 자신이 문을 닫아걸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서, 투덜거린다.  다만 투덜거릴 뿐, 정작 원주민들이 되돌아 간 정글 속으로 찾아 들어가서 말을 알려달라고 간청하지는 않는다.

 

  그럴 수밖에, 애초부터 그가 원했던 것은 백인들의 말로 된‘말씀의 종교’인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지, 원주민들의 말 따위를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원주민 말을 배우는 것은 유용하긴 하겠지만, 구태여 애를 쓸 필요까지는 없고, 쓰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물론 스스로야 노력했다고 하겠지만,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데 그것을 어찌 진심어린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스스로 원주민을 몰아냈다. 그가 먼저 상점 문을 닫았고, 그보다 앞서서 세퍼트를 들여왔다. 그리고 그는 개에게 사람보다 더 좋은 음식을 제공했다. 짐승이 사람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다니, 자연 상태에서야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하여 그는 원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문제는 이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원주민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고 있다. 그는 원주민들에게 징벌을 내리면서 복종을 강요할 수 있는 자이고,  허락도 받지 않고서 원주민들의 땅에 낯선 짐승을 끌어들일 수 있는 자이며, 가축에게 인간보다 좋은 음식을 먹일 수 있는 자이다.

 

  누가 그에게 이런 권리와 오만함을 선물했는가? 없다. 아무도 없다. 그는 스스로에게 권리를 부여했고, 그로 인해 오만해졌다. 그가 스스로에게 권리를 부여했던 근거는 오직 하나, 원주민들이 믿지 않는 신(神)을 자신은 믿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애초부터 그에게는 원주민들의 생활방식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는 정글에서 살던 사람들을 초원으로 끌어냈으며, 경작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경작을 요구했고, 소유와 분배의 개념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해를 강요했다.

 

  결국 이 책의 주된 갈등요인인 파인애플의 소유권 문제야 말로, 백인 선교사의 가치와 원주민들의 가치가 충돌하는 부분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소유를 주장하는 백인적 가치관과 땅의 소유를 주장하는 원주민적 가치관. 선교사는 이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서, 자신의 가치관만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서 원주민들은 선교사의 가치관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저 파인애플이 왜 당신의 것인가요? 당신은 저것을 심지도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선교사가 찾아낸 방법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 즉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소유로 명의이전 하는 것이다. 그는 이 깨달음이 대단한 것처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애초부터 원주민들이 내세웠던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그의 논리 중에서 <神>이라는 글자를 <자연>으로 바꾸기만 하면, 원주민들이 반복했던 말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것은 결국 사람의 권리가 아니라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자연에서 자라난 것을 자연의 것으로 인정하는 태도, 그것이 바로 원주민들의 논리가 아니면 무엇인가? 선교사는 종국에는 자신의 논리를 포기하고 원주민들의 논리를 받아들인 것이다.

 

  기독교는 많은 것을 몰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선교사들이 있었다. 전쟁과도 같았던 선교의 시기가 지나가고, 선교사들은 헌신적인 노력으로, 자유와 평등, 문명과 교육을 전파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뿐인가? 누가 평가를 내렸는가? 그것은 그런 수해를 받은, 이른바 ‘원주민’들의 평가가 아니다. 선교사들이 스스로 내린 평가일 뿐이다. 이제 그들 자신의 평가를 좀더 냉정한 시각을 판단해야할 때가 되었다. ‘이방인’ 혹은 ‘원주민’이라는 말은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말이다. 이제 뒤바뀐 주종관계를 복원해야할 때가 되었다. 신세계의 정당한 주인은 그곳으로 찾아온 이들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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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7-04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훌라님, 오랜만에 리뷰를 올리셨네요. 명예의 전당에서 님을 뵜구, 즐겨찾기 서재에 등록을 했었지요. 명예의 전당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좋은 리뷰네요.
 
삼오식당
이명랑 지음 / 시공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 1 ]


  최근에는 주로 비판과 반성의 대상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우리 소설사(小說史)에 있어서 리얼리즘적인 전통은 적지 않은 성과가 누적되어 있는 분야이다. 그중에서도 소시민적 일상을 리얼리즘적인 시각에서 다룬 작품은 특히 주목되어왔다. 박완서의 일련의 작품들을 비롯하여, 양귀자의『원미동 사람들』연작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 작품『삼오식당』도 그러한 전통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는 작품이다. 영등포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지극히 서민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인물들의 이야기, 그리고 질펀하게 구사되는 서민언어(작품집 말미에 달려 있는 강상희의 해설에서는 특히 언어적 측면에 주목하여 ‘시장 언어의 유쾌한 카니발’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등은 모두 전통적 기반을 표현하는 예이다.

  특히 하나의 생활공간을 상정하고,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연작형식으로 다루어내는 기법은, 박태원의『천변 풍경』과 양귀자의『원미동 사람들』(특히 그 중에서도 양귀자의 작품)에서 익히 시도되었던 방법이다.


  그만큼 이 작품의 출신성분과 작가의 의식지향은 분명한 것이다. 이런 것들이 분명하다는 것이 그대로 좋은 작품으로 이어진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나, 우선 독자와 평론가들에게 익숙하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 2 ]


  뭐니 뭐니 해도,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장점은 언어의 힘이다. 영등포 시장 바닥의 생생한 민중언어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 그것이 이 작품의 재미를 만든다. 이것은 분명히 장점이다. 특히나 리얼리즘적인 전통이 급격히 사라지면서, 민중들의 언어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 줄어들고 있는 최근의 경향에서 이 소설이 가지는 가치는 더욱 부각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장점뿐만이 아니라, 분명한 한계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 연작소설들을 이끌고 있는 서술자의 시각이 문제가 된다. 민중언어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으면서도, 작품의 서술자는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물론 서술자가 지식인으로 설정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뭇 철저하게 고수되고 있는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작품 전반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버린다. 즉, 영등포 시장에서 살아가는 억척스럽고 다소 무지하면서도 천박한 민중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바라보기만 하는 지식인의 구조인 것이다.

  서술자는 수시로 자신이 명문 여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 소설가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서술자의 주변 인물들도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서술자를 대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간혹 존경의 의미로, 더 많은 경우에는 자존심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그리고 더욱 많은 경우에는 비하(卑下)와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라고 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서술자와 그의 주변 인물들 사이에는 결코 좁혀질 수 없는 거리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서술자는 지식인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허리를 곧추 세우고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입으로는 민중을 외치면서, 글로는 민중언어를 기록하면서, 눈을 낮추지는 않는다. 민중의 눈높이에 맞춰 엎드리지 않고서, 끝까지 일어선 자세를 유지한다.

  서술자가 별다른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설정이 그와 같은 자세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삼오식당에서 나오는 돈으로 대학을 다녔고, 천박하긴 하지만 제법 돈 많은 남자와 결혼을 했으며, 그 결혼에 들어가는 모든 혼수도 역시 어머니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결혼을 한 이후에도 이 인물은 특별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녀가 하는 경제활동이라고는 옆집 중학생에게 과외를 하는 정도이다. 즉, 이 인물은 경제적인 독립성을 갖추지 못한 인물인 것이다. 그에 비해서 그녀가 관찰하고 평가하고 서술하는 인물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경제능력을 갖춘 인물들이다. 비록 그들은 무식하고 천박하고 비겁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생활에 책임을 지고 있다. 그들이 무식하고 천박하고 비겁한 것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익혀온 삶의 태도일 뿐이다.


  서술자가 아무리 지식인이라고 하더라도, 시장판의 사람들보다 많은 공부를 했고, 글을 쓰는 인물이라고 해도, 이 인물은 주변 인물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수 없다. 적어도 그녀가 경제적인 독립을 할 수 있기 전까지는 그렇다. 삶이란, 생활이란 홀로 우뚝 선 사람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지,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서술자에게 행동이 결여되어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행동은 생활하는 사람들의 양식이다. 자신의 삶의 기반을 이루지 못한 사람, 스스로의 생활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에게 행동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오직 질문하고, 고민하고, 회의할 뿐이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의 결말이 대부분 의문형 문장, 혹은 회의적인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 그리고 그때, 그녀가 들고 돌아올 그 가방 속에 하나 가득 지폐다발이 들어 있기만 하면, 우리들은 어쩌면 터럭 한올의 미움도, 증오도 없이 그녀를 다시 받아들일 것만 같다. 왠지 꼭 그럴 것 같다. (「까라마조프가의 딸들」, p.83.)


  * 나는 엄마의 그 혼잣말이 어머니 당신의 남은 세월을 향한 것인지, 저기 저만치 멀어져가는 큰딸 내외를 향한 것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엄마의 무릎」, p.110.)


  *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건물 주인이 3, 4층의 보일러를 왜 굳이 2층 세입자의 가게 안에 설치해놓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리고 또, 잔금을 치르기 전에는 4층과 옥탑방 모두를 4층 세입자가 사용하기로 약조한 것과는 달리 건물주인은 왜 내게 아직도 옥탑방의 열쇠만은 넘겨주지 않는 것일까? (「보일러실 쟁탈전」, pp.145-146.)


  * 제 몫의 치료기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영선은 그러나, 내가 그녀를 데리고 나가기도 전에 판촉사원의 독촉에 못 이겨 벌써 치료기 위에 올라가 눕고 말았다. 판촉사원의 손에 팔뚝을 잡힌 채로 치료기 위에 올라가면서 영선은 내내 나를 쳐다봤는데 그 순간의 영선의 얼굴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의 얼굴이었다.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또렷이 들려왔던 영선의 외침을 그 순간에 나는 왜 외면했을까? 왜 그랬을까? (「결승선에서」, p.196.)



[ 3 ]


  민중언어를 구현해내는 소설은 분명히 가치를 가진다. 그것은 민중언어가 가지고 있는 특징, 즉 특유의 생명력과 풍자의식, 그 카니발적인 성격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기록하는 사람이 스스로 민중이 되지 못한다면, 생활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단순히 기록자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접 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민중언어야 말로 몸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 언어에 대한 올바른 전달이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이 작품의 한계이다. 이 작품은 리얼리즘 소설의 계보를 잇고 있기는 하지만, 이전 소설들에 비해서 발전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아니, 오히려 생활력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사실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박완서와 양귀자의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생활하거나, 혹은 생활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것에 비해서), 오히려 퇴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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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털 같은 나날
류진운 지음, 김영철 옮김 / 소나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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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중국은 유사 이래 정치가 사람보다 높다. 정치는 누가 만드는가? 정치는 왜 만드는가? -「1942년을 돌아보다」, p.280.

  살아가는 일이 팍팍하지 않는 곳이 어디 있으랴? “태어나지 마라, 죽는 게 괴롭다. 죽지 마라, 태어나는 게 괴롭다”라는 신라 시대 승려의 이야기처럼, 살아가는 일이란 그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살아가는 일이 왜 고통스러운가? 작가 류진운이 그 대답으로 찾고 있는 것은 바로 위에 인용된 문장이다.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들이, 사람보다 높이 있기 때문에, 삶은 고통스럽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는 승려와 구분된다. 신라 시대의 승려들이 인간의 근원적인 측면에서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작가는 철저하게 현실적인 측면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잘못된 삶을 만들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것이 류진운의 작품들이 출발하는 지점이다.
  이 책에 수록된 세 편의 작품은 모두 팍팍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작품의 화자는 그 고통의 원인을 모두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 보다 범위를 좁혀서 정치시스템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논리야말로 철저한 유물론적 시각이 아닐 수 없다. 고통의 근원을 내면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외면에서 찾는 것. 물질을 초월하는 정신이 아니라, 정신을 지배하는 물질에 대해 고민하는 것. 그러므로 작가는 같은 주제를 다양한 관점으로 변주해낼 수 있는 것이다. 정신적인 문제야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설명이 끝나버리지만, 물질적인 문제는 관점에 따라서 사항에 따라서 얼마든지 새롭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므로.

  “백성들이 죽어도, 땅은 역시 중국인 것이다. 만약 군인이 굶어 죽으면, 이 나라는 일본군에게 접수되어 관리될 것이다.”
  이 말이 바로 장개석 위원장의 속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문제를 굶어 죽어가는 기아 난민들에게 그대로 묻는다면, 이 문제는 ‘차라리 굶어 죽어 중국 귀신이 될 것인가? 아니면 굶어 죽지 않고 매국노가 될 것인가?“라고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후자를 택했다. (「1942년을 돌아보다」, p.292.)

  그와 같은 논리가 조금 더 확대되어 노골적으로 표현된 작품이 바로 「1942년을 돌아보다」이고, 인용된 후반부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 이르면 작가의 비판 대상은 조금 더 명확해진다. 민중의 사정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 지배계급의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비판 대상을 분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해서 현실과 역사의 문제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다. 작품 속에 신문기사가 끊임없이 인용되는 것도 이러한 때문이다. 이제는 잊혀져 버린 기억, 그러나 분명히 잘못된 역사에 대한 집착과 고집이 그의 작품들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유물론적 인식체계를 무기로 삼고 있는 작가의 비판대상은 유물론을 근본 개념으로 하는 국가시스템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의식만 가지고는 작품의 가치가 분명해지지 않는다. 이런 비판의식을 보인 작가가 어디 류전운 혼자뿐이던가? 잘못된 정치시스템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수많은 작가들이 수많은 작품을 통해서 끈질기게 다루어 오지 않았던가?
  문제는 비판을 통해서 명확해진 문제를 다루는 작가의 솜씨에 있다. 이는 「닭털 같은 나날」을 통해서 잘 나타난다. 보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이 작품을 형성하고 있는 문체를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다. 작품의 시작은 “임(林)의 집에 두부 한 근이 상했다”라는 짧고 간결하면서도 감정이 전혀 실려 있지 않은 문장으로 되어있으며, 그러한 문체는 작품 전반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문체를 영화에 비유하자면 다큐멘터리 필름과도 같은 것이다. 서술자의 개입과 편들기 그리고 감정의 이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극영화가 아니라, 냉정하게 사물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그렇기 때문에 건조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런 문체로 인해서, 오히려 삶의 고통이 강조되고 있다.
  작품의 서술자가 처음 이야기하는 사물이 ‘두부’라는 사실도 주목된다. 그것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필수적인 부분인 음식 중에서도 서민들이 주로 먹는 음식이다. 그러나 두부는 먹기는 먹지만 먹는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음식이고, 먹으면서도 스스로 가난뱅이라고 의식해야 하는 음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두부를 사기 위해 기다리면서 중얼거린다. “젠장, 세상에 가난뱅이도 더럽게 많네.”(p.11.)
  우리는 왜 음식을 먹으면서 스스로 비참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가? 작가가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은 바로 이것으로 압축된다. 그만큼 작가가 파고들고 있는 문제는 일상적이면서도 생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다큐멘터리적 문체가 흔들리는 부분이 있다. 바로 작품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주인공이 지난번에 방문했던 은사가 돌아가셨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는다. 그리고 아래의 인용과 같은 생각을 한다.

  그는 그 편지를 읽고, 하루 종일 괴로웠다. 선생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지난번에 선생님이 진찰하러 오셨을 때도, 병원에 찾아가지도 못했다. 집에서 세수도 못 시켜 드렸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그가 얼음 웅덩이에 빠졌을 때, 선생님은 입고 있던 면 코트를 벗어 자기에게 입혀 주셨다.
그러나 퇴근 버스를 타고서, 집에 쌓아 둔 배추 더미를 널어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하루 종일 그를 상심하게 만들었던 선생님의 일은 기억 저편으로 던져지고 말았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 더 생각해 봐야 소용이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은 역시 배추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는 또 생각했다. 배추를 다 정리하면, 아내가 전자렌지로 닭을 구워줄 것이고, 맥주를 내 줄 것이다. 그러면 그로서는 전혀 불만스럽지 않은 것이다. (「닭털 같은 나날」, p.96.)

  이 부분에서는 분명한 서술자의 개입이 이루어진다. 선생의 죽음과 주인공의 일상을 동시에 배치하여 독자들의 반감을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식 역시 지극히 다큐멘터리적이다. 극영화처럼 직접적인 감정의 토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저 사실을 교차해서 보여줄 뿐이다. 이것이 류진운의 작품이 가장 큰 힘이다. 그의 작품은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더 큰 감정의 깊이를 만들어내고, 손쉬운 동정이나 비판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더 큰 측은함과 각성을 유도한다. 이런 서술방법이야 말로 고도로 세련된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작품인 「관리들 만세」의 문체는 조금 다른 색깔을 보이고 있다. 앞서의「닭털 같은 나날」의 문체가 건조하다면, 이 작품의 문체는 조금 더 축축하다. 앞서의 작품이 현미경처럼 세밀한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면, 이 작품의 시야는 보다 넓고 유연하다. 그러나 직접적인 감정의 토로가 이루어지지 않는 점에서는 상통한다. 역시 같은 다큐멘터리 계열인 것이다.
  작품의 다큐멘터리적 특징이 잘 나타나는 부분은 단연 인물의 심리를 표현할 때이다. 앞에서 인용된 「닭털 같은 나날」의 마지막 부분이 그러했듯, 이 작품에서도 한 인물의 감정이 표현되기는 하지만, 직접 제시되지 않는다. 인물들은 자신의 감정상태를 토로하기 보다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고민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심리도 사색적이기 보다 활동적인 것이 되고, 그들의 심리가 활동하면 할수록, 그들의 성격은 더욱더 극명하게 제시된다. (똥통 위로 기어오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더 빠져버리는 구더기처럼.) 이 역시 사실만을 제시하여 독자들의 평가를 유도하는 다큐멘터리 기법인 것이다.
  이 작품의 시작이 “2층 화장실 변기가 고장 났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는 것도 역시 주목된다. 앞서의 작품이 음식(두부)에서 시작되었다면, 이 작품은 배설로 시작되는 것이다. 음식과 배설, 다르지만 사람들의 생활에서 필수적인 것들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앞서의 작품에서 ‘두부’가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소재였던 것처럼, 이 작품에서의 ‘변기’ 역시 같은 기능을 한다. 관료시스템은 결국 똥통이다! 서술자의 주장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 작품의 번역된 제목은 좀 아쉽다. 물론 작품의 기본적인 분위기가 풍자에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발랄하고 가벼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냉소적이고 무거운 풍자라고 할까? 그런 점에서 “관리들 만세”라는 번역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히려 원제목인 “관인(官人)”이 냉정하고 담담한 느낌을 잘 살리고 있지 않은가?)



  내 관심은 다시 우리 문단으로 돌려진다. (어쩔 수 없다. 외국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그 자체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의 상황을 돌아보기 위해서이니까.) 류진운과 같이 세련된 리얼리즘 기법을 구사하는 작가가 우리에게는 없는가?
글쎄…… 황석영의 초기 작품 정도가 그러하지 않을까?「삼포 가는 길」이나, 「객지」같은 작품들. 그래 그 정도라면 이것과 견줄 수 있을 듯 하다. 하지만 그것은 70년대 작품이 아닌가? 류진운의 작품들과는 근 20년 가까운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설에서 리얼리즘 기법은 1970년대 이후로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이후 우리의 소설은 리얼리즘에서 멀어지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하지만 지금쯤 다시 한번 리얼리즘을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리얼리즘만이 최고의 가치를 가진 방법론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복고 취향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어느 쪽이든 한쪽으로만 기울어진 것은 균형 잡힌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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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내게로 왔다 1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시가 내게로 왔다 1
김용택 지음 / 마음산책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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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기본적인 취지야 십분 이해한다.
좋은 시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독자들에게 소개한다는 것.

그렇지만, 문제는 기준이다.
이 작품들을 선정한 이유도, 설명도 없다.
저 모든 기준은 김용택이라는 인물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역시, 김용택이라는 인물이 선정자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오랜 시작활동과 감식안 자체를 좋은 선정자가 되기 충분하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기준과 설명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표현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詩라는 장르가 점점 일반 독자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요즘,
이런 식으로라도 시에 호감을 가지도록 만드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다.
그것만은 변함이 없다.

단지, 조금만 더 자세했다면, 조금만 더 친절했다면,
여기 선정된 작품들이 왜 좋은 시이고,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감상해야 하는지,
보다 자세하게 설명했다면,
보다 명확한 기준과 이유를 가지고 제시되었더라면,
훨씬 좋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구태여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쉬움 마음이 40에, 좋은 작품을 만나게 되어서 기쁜 마음 60으로 버무려진 책이라고 할까?

아마도 나의 아쉬움은 좋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좋은 것이 더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러나 어쩌랴? 때로는 맹목적인 미움보다도 애증이 더 무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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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0
구스타프 마이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책세상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세상에는 풍문(風聞)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분명히 세상 어딘가를 끊임없이 흘러 다니고 있지만, 그 정체는 확인해 볼 도리가 없는 것들. 그것들은 입에서 입으로, 귀에서 귀로, 의혹에서 의혹으로, 저자거리를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증폭되고 또 증폭되어 간다. 쇠를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몸이 커져가는 불가사리처럼.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풍문을 다루고 있다. 풍문이 가지고 있는 의구심을, 풍문이 가지고 있는 위력을, 풍문이 가지고 있는 공포를. 그것은 물론 이 작품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아니다. 공포/그로테스크/미스터리 등을 표방하는 대부분의 장르에서 통용되는 법칙이다. 기괴하고 두렵고 잔혹한 사실 그 자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만들어내는 풍문을 다루는 것.

여기에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살인과 도륙이 난무하는 것들, 무차별적인 학살로만 점철된 것들, 이를테면 '13일의 금요일'이나 '스크림', 혹은 '주온' 따위의 것들은, 공포 장르라고 할 수 없다. 의미 없는 살인, 의미 없는 방화, 의미 없는 쾌락이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엽기(獵奇)에 지나지 않는다. 항간에 유행하는 가벼운 의미의 ‘엽기’가 아니라, 사전 그대로 ‘기괴한 것이나 이상한 일에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다니는 변태적인 행각’이라는 뜻에서의 엽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최근의 경향이 공포/그로테스크/미스터리 등과 엽기를 구분하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죽이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무서움을 만들어내는 원인에 대한 성찰이 되어야 한다. 이것 없이는 끝없는 '양(量)의 가속논리', 즉 더 큰 흥미를 주기 위해서 점점 더 잔인한 방법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에 빠지게 될 뿐이다. 그렇지만 이미 이러한 '양의 가속논리'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는 이런 종류의 작품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한 지루함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혹은 지루함을 극복하고 공포 장르의 정수를 파악할 수있게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교육이다. 해답은 교육밖에 없다. 클래식 음악을 전혀 모르던 사람이, 반복해서 음악을 듣고, 음악사적 사실을 학습하고, 음악이론을 습득하면서 나름대로의 재미를 찾아갈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장르문학에 대한 독서행위도, 문학의 이론이나, 장르적 특성과 본질, 혹은 창조행위를 경험하면서 보다 고품질의 장르문학을, 더 나아가서는 문학 그 자체에 대한 감식안을 높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동안의 논의, 특히 인터넷을 통한 논의에서, 어려운 문학작품을 죄악시고, 그것이 마치 현학적인 태도에 불과한 것으로 몰아붙이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그렇지만, 어느 한쪽만의 일방적인 잘못이라는 것이 있을 리가 없다. 현학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도 잘못이지만, 자신의 수준은 고려하지도 않고 무조건 현학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도 잘못이지만, 자신의 수준은 고려하지도 않고 무조건 ‘어렵다’/‘지루하다’는 말만 거듭하는 독자들도 분명히 문제가 있다.

한쪽만 변해서는 소용이 없다. 작가와 독자가 모두 변해야한다. 작가들도 장르 문학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하고, 독자들도 자신들의 무지를 깨우쳐 나가야 한다. 문제는 교육이다. 교육이 없으면, 문화의 발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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