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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오식당
이명랑 지음 / 시공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 1 ]
최근에는 주로 비판과 반성의 대상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우리 소설사(小說史)에 있어서 리얼리즘적인 전통은 적지 않은 성과가 누적되어 있는 분야이다. 그중에서도 소시민적 일상을 리얼리즘적인 시각에서 다룬 작품은 특히 주목되어왔다. 박완서의 일련의 작품들을 비롯하여, 양귀자의『원미동 사람들』연작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 작품『삼오식당』도 그러한 전통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는 작품이다. 영등포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지극히 서민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인물들의 이야기, 그리고 질펀하게 구사되는 서민언어(작품집 말미에 달려 있는 강상희의 해설에서는 특히 언어적 측면에 주목하여 ‘시장 언어의 유쾌한 카니발’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등은 모두 전통적 기반을 표현하는 예이다.
특히 하나의 생활공간을 상정하고,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연작형식으로 다루어내는 기법은, 박태원의『천변 풍경』과 양귀자의『원미동 사람들』(특히 그 중에서도 양귀자의 작품)에서 익히 시도되었던 방법이다.
그만큼 이 작품의 출신성분과 작가의 의식지향은 분명한 것이다. 이런 것들이 분명하다는 것이 그대로 좋은 작품으로 이어진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나, 우선 독자와 평론가들에게 익숙하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 2 ]
뭐니 뭐니 해도,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장점은 언어의 힘이다. 영등포 시장 바닥의 생생한 민중언어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 그것이 이 작품의 재미를 만든다. 이것은 분명히 장점이다. 특히나 리얼리즘적인 전통이 급격히 사라지면서, 민중들의 언어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 줄어들고 있는 최근의 경향에서 이 소설이 가지는 가치는 더욱 부각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장점뿐만이 아니라, 분명한 한계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 연작소설들을 이끌고 있는 서술자의 시각이 문제가 된다. 민중언어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으면서도, 작품의 서술자는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물론 서술자가 지식인으로 설정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뭇 철저하게 고수되고 있는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작품 전반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버린다. 즉, 영등포 시장에서 살아가는 억척스럽고 다소 무지하면서도 천박한 민중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바라보기만 하는 지식인의 구조인 것이다.
서술자는 수시로 자신이 명문 여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 소설가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서술자의 주변 인물들도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서술자를 대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간혹 존경의 의미로, 더 많은 경우에는 자존심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그리고 더욱 많은 경우에는 비하(卑下)와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라고 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서술자와 그의 주변 인물들 사이에는 결코 좁혀질 수 없는 거리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서술자는 지식인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허리를 곧추 세우고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입으로는 민중을 외치면서, 글로는 민중언어를 기록하면서, 눈을 낮추지는 않는다. 민중의 눈높이에 맞춰 엎드리지 않고서, 끝까지 일어선 자세를 유지한다.
서술자가 별다른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설정이 그와 같은 자세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삼오식당에서 나오는 돈으로 대학을 다녔고, 천박하긴 하지만 제법 돈 많은 남자와 결혼을 했으며, 그 결혼에 들어가는 모든 혼수도 역시 어머니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결혼을 한 이후에도 이 인물은 특별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녀가 하는 경제활동이라고는 옆집 중학생에게 과외를 하는 정도이다. 즉, 이 인물은 경제적인 독립성을 갖추지 못한 인물인 것이다. 그에 비해서 그녀가 관찰하고 평가하고 서술하는 인물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경제능력을 갖춘 인물들이다. 비록 그들은 무식하고 천박하고 비겁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생활에 책임을 지고 있다. 그들이 무식하고 천박하고 비겁한 것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익혀온 삶의 태도일 뿐이다.
서술자가 아무리 지식인이라고 하더라도, 시장판의 사람들보다 많은 공부를 했고, 글을 쓰는 인물이라고 해도, 이 인물은 주변 인물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수 없다. 적어도 그녀가 경제적인 독립을 할 수 있기 전까지는 그렇다. 삶이란, 생활이란 홀로 우뚝 선 사람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지,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서술자에게 행동이 결여되어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행동은 생활하는 사람들의 양식이다. 자신의 삶의 기반을 이루지 못한 사람, 스스로의 생활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에게 행동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오직 질문하고, 고민하고, 회의할 뿐이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의 결말이 대부분 의문형 문장, 혹은 회의적인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 그리고 그때, 그녀가 들고 돌아올 그 가방 속에 하나 가득 지폐다발이 들어 있기만 하면, 우리들은 어쩌면 터럭 한올의 미움도, 증오도 없이 그녀를 다시 받아들일 것만 같다. 왠지 꼭 그럴 것 같다. (「까라마조프가의 딸들」, p.83.)
* 나는 엄마의 그 혼잣말이 어머니 당신의 남은 세월을 향한 것인지, 저기 저만치 멀어져가는 큰딸 내외를 향한 것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엄마의 무릎」, p.110.)
*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건물 주인이 3, 4층의 보일러를 왜 굳이 2층 세입자의 가게 안에 설치해놓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리고 또, 잔금을 치르기 전에는 4층과 옥탑방 모두를 4층 세입자가 사용하기로 약조한 것과는 달리 건물주인은 왜 내게 아직도 옥탑방의 열쇠만은 넘겨주지 않는 것일까? (「보일러실 쟁탈전」, pp.145-146.)
* 제 몫의 치료기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영선은 그러나, 내가 그녀를 데리고 나가기도 전에 판촉사원의 독촉에 못 이겨 벌써 치료기 위에 올라가 눕고 말았다. 판촉사원의 손에 팔뚝을 잡힌 채로 치료기 위에 올라가면서 영선은 내내 나를 쳐다봤는데 그 순간의 영선의 얼굴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의 얼굴이었다.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또렷이 들려왔던 영선의 외침을 그 순간에 나는 왜 외면했을까? 왜 그랬을까? (「결승선에서」, p.196.)
[ 3 ]
민중언어를 구현해내는 소설은 분명히 가치를 가진다. 그것은 민중언어가 가지고 있는 특징, 즉 특유의 생명력과 풍자의식, 그 카니발적인 성격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기록하는 사람이 스스로 민중이 되지 못한다면, 생활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단순히 기록자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접 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민중언어야 말로 몸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 언어에 대한 올바른 전달이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이 작품의 한계이다. 이 작품은 리얼리즘 소설의 계보를 잇고 있기는 하지만, 이전 소설들에 비해서 발전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아니, 오히려 생활력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사실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박완서와 양귀자의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생활하거나, 혹은 생활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것에 비해서), 오히려 퇴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