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으로 21세기 리폼드 시리즈 4
존 맥아더 외 지음, 신호섭 옮김 / 지평서원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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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입장에서, 정확히 개혁교회 입장에서 로마카톨릭에 대해, 칭의에 대한 교리적인 논쟁을 주제로 5명의 신학자의 논고를 담은 책이다. 존 매가더, R. C. 스푸롤, 조엘 비키, 존 거스너, 돈 키슬러 이상 5명의 신학자는 개신교-개혁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 들이다.

 

종교개혁의 반 종교개혁이라는 정점에 트렌트 공의회가 있다. 트렌트 공의회는 종교개혁의 시대에 기독교 전체를 아우르지도 못하고, 카톨릭만의 공의회(당연히 개신교는 제외)로서 더구나 이탈리아와 스페인 교구 중심의 공의회 였는데(한스 큉의 책에서), 당시 공의회 답지 못한 공의회 였는데 지금은 카톨릭의 논리의 근거가 되고 있다. (1960년 바티칸 공의회에선 재확인 했다) 트렌트 공의회는 종교개혁의 교리를 이단으로 못 박음으로서, 돌아 올 수 없는 길을 건넜고, (그 전만해도 카톨릭 내에서 개혁하는 정도로 생각했었지만) 개신교가 분리 되었다.

 

칭의 교리도 이 공의회에서 제시된 근거로 대척점에 서있기는 마찬가지 이다. 즉 카톨릭은 성경에서 믿음에 행위를 더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놓치고 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단번에 영원히 의롭다 칭하신 것도 (카톨릭의 교리에 의하면) 인간이 의롭괴 되기 위하여 인간의 행위(선행)이 필수적이 되면서, 불완전한 언약으로 만들어 버렸다.

 

정리하자면, 카톨릭의 칭의(의화) = 믿음 + 행위

개신교의 칭의 = 믿음 (선행은 행위의 결과로 나올 뿐이며 의롭게 되기 위해서 아무런 역할이 없다)

 

기독교-개혁교회와, 카톨릭, 알미니안과의 칭의 교리에서 차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오직 그리스도 -> 오직 믿음 -> 오직 은혜 -> 칭의 (p72, 마틴 루터)

* 오직 믿음이 아니라 믿음+행위(카톨릭)

* 오직 은혜가 아니라 은혜+공로(알미니언)

 

따라서, 이처럼 구원론에 있어서, 주입된 의(카롤릭)과 전가된 의(개신교-개혁교회)에 대하여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데도, 이런 칭의 교리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나 합의 없이 묻어 두고 넘어가면서 (혹은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통합만을 이야기하는 에큐메니컬 운동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이 책은 말한다. (저 개인적으로 역시 동의한다)

 

* 이 책을 읽어 가면서, 개인적으로 R. C. 스푸롤의 내용이 가장 도움이 되었다. 내 신앙의 수준이 R. C. 스푸롤께서 알아 듣는 정도 수준은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안타깝게도 R. C. 스푸롤은 지난 2017년 12월 돌아 가셨다. 그가 남긴 책으로만 도움을 얻을 수 밖에.

 

* 이 책을 통해 또 하나 새롭게 배운 지식은 스콧 한이었다. 장로교 목사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한 유명한 사람이 있다 했었는데 그게 누군가 했더니 바로 스콧 한이었고,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Rome Sweet Home>이 있다. 이 책의 부록으로 스콧 한에 대한 존 거스너가 답변이 실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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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 마크 존스 대표작
마크 존스 지음, 오현미 옮김 / 복있는사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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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대해서, 즉 신론을 쉽게 풀어 정리한 책이다. 수요예배 때 시리즈로 신론에 대한 말씀이 있었다. 여러 실례나 내용으로 볼 때 이 책을 근거로 하셨던거 같다. 책에서 강단에서 하셨던 말씀이 다시 묻어 나온다. 그래서 복습하는 개념이랄까 이해에 도움이 된다.

 

 

이 책은 각각의 주제(속성)를 나열하고, 이에 따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설명,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에 통한 적용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작정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제로 보여주셨기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사역을 일치성을 보인다는 것은 당연하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활동 혹은 말씀 속에서 실제 적용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겠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내 마음속에 미리 정해 놓고 그것에 껴다 맞추는 정도의 오해는 객관적인 책의 자료를 통해 어느 정도 풀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어느 속성보다 사랑의 하나님이 강조되는 시기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묘사되는 하나님이 아니라, 영생과 구원의 문제로 자신의 아들까지 보내신 분이시라는 것과 본래 죄를 아주 싫어하는 분이라는 것으로 아는 것만으로, 사랑뿐만 극대화 시켜 강조하는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구원에 이르는 첫번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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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 기니스의 저항 - 신앙의 변절을 요구하는 시대를 살다
오스 기니스 지음, 김진선 옮김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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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책의 서문만으로도 숨가쁘다. 무조건적인 오직 주님만을 믿겠다는 구호 보다 지식적으로 그 근간을 알려 준다. 과학, 사회학, 경제학, 인류학 등 거의 모든 학문의 분야를 망라하며 문명사회를 고찰한다.

 

책은 지금 현재 진보 세속주의로 대체되어 가는 과정, 기로에 서있다고 문제 정의하며, 도전의 상호작용을 설명한다.

1. 서구의 문명사회를 규정하는 신앙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우월성이 지속적으로 약화되면서 거의 퇴출 위기에 있다. 반면 진보세속주의의 공격과 발전된 현대성의 위력에 압도 당하고 있다.

2. 진보 세속주의가 거의 승리함으로써, 서구는 내부에서부터 몰락할 것이고, 오만함과 자기 확신을 통해 서구를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다.

3. 기독교 신앙이 붕괴됨으로써 전세계의 지배력을 두고 강력한 대체 세력들(진보 세속주의와 급진 이슬람)이 전 세계적으로 득세할 것이다.

4. 기독교에 서구의 이중적인 도전으로 다가온다. 기독교 신앙이 발전된 현대 세계와 제도를 이겨낼 수 있을까? 진보 세속주의를 극복할 것인가?

진도는 잘 안나가고 마음은 무겁다. 내용이 어려운 것도 있지만, 책을 읽어 갈수록 기독교가 맞서야 할 대상이 명확하게 규명될수록 점점 막강한 상대라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신앙은 개인적인 문제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나와 죄, 나와 하나님, 나와 교회, 나와 목사님, 나와 다른 성도들. 나를 중심에 두고 혹은 내가 아는 가시적인 범위 내에 한정시킨다. 이 책은 이에 비해 현재 상태의 기독교와 그 주변(진보세속주의)와의 관계 등 영향력을 다루고 있다. 진보세속주의(통틀어 이렇게 본다)의 본질에 대해 다르고, 그 영향력은 과거의 영향력과 비교하지만 상대적으로 훨씬 강력하다는 것과 지금이 쉽지 않다는 상황이라는 것. 그 결과 우리는 위험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관적으로 결론은 이끌려 간다. 지금 상황은 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무신론을 비롯한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와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되겠고 동감한다.

 

이 책은 근시안적인 시각으로 주변을 보지 않고 크게 보라고 이야기 한다. 세상의 시류에 부합하지 말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너는 그들의 신을 경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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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테이션 영적무장 시리즈 2
존 오웬 지음, 마르투스 선교회 옮김 / 마르투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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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태복음 26:4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같이 말씀하시며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뒤흔들어 놓은 것은 그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며, 그들의 영적 상태가 유혹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위험에 처해 있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청교도의 황태자 존 오웬의 책으로 유혹(Temptation)에 관한 책으로, 유혹(Test, Trial, Temptation)에 종류와 심각성에 대해 설명하고,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해결책은 오직 '깨어서 기도'하는 것 뿐이다. 주기도문에서도 나온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악으로 부터 구원하셔서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유혹이 얼마나 우리에게 위험한지 알고 계시며,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유혹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또한 알고 계신다.

 

유혹이 우리에게 왔을때, 이 유혹이 어디서 왔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로 부터 온 유혹이라면 이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단련시키기 위함이고(test, trial), 우리의 내면에서나 우리 주변, 혹은 사탄에게서 나왔다면 우리를 무너뜨리고 지배하려 함이다(temptation). 사탄의 유혹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히고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 일단 유혹에 빠지면 궁극적으로 유혹을 물리쳤더라도 우리의 영혼에 더러운 자국을 만들고, 어떤 경우건 아무런 영적인 손실없이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때문에 절대로 자신을 방치하거나 유혹에 대해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늘 은혜의 방편(말씀, 기도, 경건 훈련) 아래 있어야 하고, 무조건 빠져 나와야 한다.(요셉처럼 도망쳐라)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지도 말고, 섣부른 행동은 금물이다. 사실 성경의 인물 중에 시험을 모두 이긴 사람은 예수님 빼곤 아무도 없다. 하물며 허물 투성이인 우리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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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역사
한스 큉 지음, 배국원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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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 - The Catholic Church (2003)의 번역판이다.

 

저자의 특이한 약력이 눈길을 끈다. 저자 한스 큉은 가톨릭 신부로서 교황의 무류설을 의심해서 오랫동안 몸 담았던 튀빙겐대학교 교수직을 박탈당한다. (지금도 신부, 일반인 자격으로 강의) 교회사 학자는 아니고 그냥 신학과 교수인 듯 하고, 번역자의 이력도 독특하다. 침례교 목사. 굳이 저자와 번역자의 공통점을 찾자면 교회 통합 에큐메니컬 운동과 종교철학자쯤 될 듯 하다.

 

책의 서론(p23)에서 저술 목적도 밝히고 있다. 1) 가톨릭 교회의 기본 정보 제공 2) 역사에 대한 객관적 분석과 비판 3) 개혁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구체적 도전

 

나의 태생상 기독교를 개신교의 관점에서 보고 있었다. 한 쪽에서만 보기에 관점이 편향적이지 않았나 궁금하였다. 개인적으로 가톨릭의 입장(비록 주류에서 약간 벗어난 학자이지만)에서 가톨릭을 평가하는 책을 옆에서 들여다 보는 의미가 있다.

 

몇 가지 초기 기독교인들의 생활을(지금의 상황으로는 예상하지 못한) 짐작해 볼 기회가 되었다.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였다는 것을 의심한다. 또한 베드로는 로마에서 죽었으나 로마의 감독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베드로는 로마 시민이 아니라, 잠시 방문한 갈릴리 지방의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초기 기독교의 중심은 로마가 아닌 예루살렘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한 명 이었지, 수제자로 볼 수 없다. 당연히 당시 수제자라는 제도도 없었다

 

얌니아 의회(AD 90)은 예루살렘 성전파괴 직후에 열렸다. 이 바리새인들이 주축인 유대인 의회에서 두 가지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하나는 기독교 이단에 대한 저주로 기독교인을 파문한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여러 분파 중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믿는 유대교의 한가지 분파였었다. 또 다른 하나는 구약 정경의 확립이다. 참고로 유대교의 구약과 개신교의 구약은 동일하다. 위경은 정경에 포함되지 않는다.

 

감독-장로-집사의 위계질서는 예수님 시대 때 제정했던 제도도 아니고,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나왔으며, 기독교에서만 고유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 다만 교회를 합리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생겨난 도구 형태로 기능적으로 유리함이 있다. 다만 사제들의 권력을 우상화하거나 유지 시키기 위해 이용되는 것이 문제이다.

 

베드로가 반석을 말하는 구절은 성경에 있으나, 전체 교회의 심판권이 로마 재판권에 있고 신의 뜻이라는 주장은 처음 나왔던 4,5세기 당시에는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또한 교황을 통해 베드로가 직접 말씀하신다’(이는 중세 시대에 교황을 통해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로 변질)는 초기에는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이를 2세기 로마의 대주교를 베드로의 후계자로 확정된다문서로 근거 삼고 있으나 이는 5세기에 위조로 판명되었다.

 

레오1세부터 전통 교황을 시작이고, 그의 후계자들이 신학적, 정치적 사고의 이어 나갔다. 세상의 권력은 황제에게 있고, 영적 권리는 교황에게 있다. (세속에서부터 성직자를 분리) 영적 권리가 보다 우월하다(그래서 황제보다 교황이 위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 당시(6-7세기)엔 이런 논리가 인정 받지 못했고, 다음 교황인 비길리우스는 교리의 모순적 견해로 무시당했고(5차 공의회), 다음 교황 호노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6-8차 공의회). 당시엔 교황의 무류성은 없었다. 심지어 교황은 선출 된 후 황제로부터 승인 받아야 헸고, 검증 받아야 했고 폐위 당하기도 했다. 황제로부터 특별한 임무를 띄고 특사로 보내지기도 했고, 임수를 잘 못 수행 할 경우엔 처벌 받아 감옥에서 죽기까지 했다(요하네스 1). 

 

초기 가톨릭은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엔 게르만 족의 지지를 받아야 했다. 개종전 야만족이었던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도시의 파괴, 문화의 파괴로 황폐화 되었지만, 이들이 개종하면서 가톨릭의 강력한 지지자로 떠올랐다.

 

중세가 시작(6세기)되면서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나와 신비주의, 연옥, 수도원 운동을 펼친다. 그는 겸손하고 평등하게 교황직을 수행했으나, 이후의 교황들은 그레고리우스 보다 위압적인, 로와 황제 같은 레오1세의 전철을 따랐다. 군주적인 헌법과, 통치의 수장으로서 계급적인 교회를 이끌었으며, 그 결과 동로마와 서로마 제국의 분열을 가져 온다. 이후 7세기 들어 이슬람의 약진이 시작된다. 기독교는 동서교회로 분열을 이룬 반면, 이슬람은 단순함으로 단합하여, 동로마제국을 약화 시키고, 반면에 프랑크 왕국이 새로운 번영을 이룬다. 이는 중심의 이동이 동유럽에서 서유럽으로 넘어 왔다는 의미이고, 교육 유산과 고대 문명을 계승할 유일한 문화 세력은 오직 가톨릭 교회뿐이라는 의미도 된다.

 

니롤라우스 1(9세기) 교황은 권력을 황제에게서 교회로 가져온다. 교황의 결정을 준수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한다. 이는 프랑크 왕국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로 분할되던 정치적 혼란했던 기간으로, 거짓 문서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는 <거짓 이시도르 교서(Pseudo-Isidorean Decretals)>로 알려진 거짓 문서이고, 종교개혁 이후에 거짓 문서로 증명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교황 권력의 강화로 이어진다. 이 문서를 근거로 이전에는 결여 되었던, 신학적, 법적, 정통성은 교황에게 새로이 부여되었다.

 

10세기는 암흑의 시기로, 교황과 대립교황(Anti-pope) (심지어 3명의 교황이 있었던 적도 있었다), 폐위와 즉위, 심지어 교황의 살해가 반복되던 시기이다. 그 결과 교황제도는 재구성된다. 이는 신약 성서의 규약이나 초기 천 년을 이어온 전통과는 상관없었으나,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세우기에 알맞은 형태였다.

 

13세기 초 인노켄티우스 3세로부터 로마 교황의 중앙 집권과 로마화의 정점을 이룬다(4차 라테란 공의회). 1) 중앙집권화 신앙, 법령, 규율, 조직이 교황에게 향하는 교회 2) 법제화 교회법과 교회법에 관한 학문에 바탕으로, 교회법에 따라 통치하는 교회이고, 교회법의 최고 심판자는 교황이 된다 3) 정치화 교회는 전세계를 지배한다. 최상의 지배세력이 된다 4) 군사화 호전적인 교회는 십자군운동 같은 성전을 수행한다 5) 교권주의화 독신주의 남자들로 구성된 교회는 결혼을 강제로 금지시켰다. 무조건적인 복종, 결혼의 포기, 공동생활을 요구하여, 일반신도와는 분리되며, 성직자만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는 교회를 구성하였다.

 

12세기 말, 교회의 결정에 반발하여 여러 이단 조직이 생겼다. 이를 근절하기 위해 종교재판(Inquisition)이 만들어졌다. 교회 법정을 통해 합법적으로 이단을 박해 한 것으로, 평신도가 이단으로 의심되면 개인적으로나 공개적으로 논의하지 않고, 단죄되었다. 더 나아가 자백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고문하기도 하였고, 이 권한은 종교재판관이 부여 하였다. 이는 계몽주의가 나올 때까지 지속되었다. 프란체스코(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맹활약하였으며, 이 수도회는 청빈, 겸손, 소박함을 방향으로 삼고 있으나, 인노켄티우스 3세의 방향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13세기에 이르러, 대학은 황제나 교황과 더불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어 내는 제3의 위대한 세력으로 떠 오르며, 권위와 전통보다 이성과 개념 분석을 더 많이 사용한다. 이 때 나온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신앙에 반대되는 이성을 재평가하였으며, 영적인 의미에 반대되는 직설적 의미, 은총에 반하는 자연, 기독교 도덕과 대조되는 자연법, 신학과 대조되는 철학, 기독교적에 대비되는 인간적인 것들로 재평가 한다. 이는 어거스틴의 신학을 수정하고, 시대에 맞게 개정했을 뿐, 비판하거나 대체하지는 못하였고, 아퀴나스 신학의 한계를 보여 줬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르틴 루터가 아니었다. 또한 11-12세기는 마리아 숭배 사상이 나타나 교황숭배주의와 결합하였고, 독신주의와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하였다.

 

기세등등 했던, 교황의 권세는 100여년이 지난 후 약화되었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프랑스 왕에게 잡혀 구금되었다가 죽었고, 이후 교황은 프랑스에서 나왔으며, 리옹에서 즉위식을 갖고(로마가 아니라) 아비뇽에 자리 잡고, 이후 70년간 유지하며(아비뇽 유수) 프랑스 왕에게 의존한다. 곧 프랑스가 유럽의 중심으로 떠오르며 주도세력이 되었다. 아비뇽의 교황청은 어마어마한 비용이 필요했으며, 전 유럽의 조세 강화, 수탈, 단절, 금융 권력이 되었고,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해 파문하고 추방하기도 한다. 이는 교황제도의 불신으로 이어졌다. 14세기말 무능력한 우르바누스 6세와, 이에 대항하는 클레멘스 7, 이 두 명의 교황 폐위와 새로운 제3의 교황 등 교황제도의 불신과 무능력은 극에 달한다.

 

르네상스가 시작될 무렵 바티칸 교회국가는 대규모 건설공사와 예술장려 활동을 통해 기독교의 수도 로마가 예술과 문화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알렸다. 이후 교황은 이탈리아인들이 계승하였고, 교회 갱신운동은 막고, 타락하기 시작했다. 교황 자신의 조카와 사생아를 등용하였고, 교화 가문들에 세습적 족벌 왕족의 형태를 띠어갔다. 르네상스의 교황들은 타락하였고(대표적으로 세가지 예, 식스투스 4세는 사촌 6명을 추기경으로 승진 시켰다. 인노켄티우스 8세는 자신의 사생아를 바티칸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치뤘다. 알렉산드르 6세는 사보나롤라를 파문하였고 화형에 처했다) 이로 인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탄생시켰다.

 

간단하게 종교개혁의 의미를 설명하고, 명료하게 정리한다. 또한 신학의 근본적 의미와 영원한 기준으로 (트리엔트 공의회, 반종교개혁, 스콜라철학, 과거 교부의 전승이 아니라) 성경, 복음, 초기 기독교 메시지에 동의하고 있다 (신부가 이 부분에 동의한다는 데에 이 부분에서 약간 놀랬음

 

루터가 내세운 신학적 교리로,

1) Sola scriptura – 전통, 법률, 권위에 반대한다(오직 성경)

2) Solus Christus – 신과 인간 사이에 수많은 성인들과 중재자들에 반대 (오직 그리스도)

3) Sola gratia – 경건한 종교적 행위, 업적, 노력에 반대 (오직 은혜), 이로 인한 Sola fide –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 (오직 믿음)

 

루터의 칭의는 가톨릭의 개혁을 공개적으로 촉구한 것으로, 복음 정신을 근거로 하는 개혁으로 교리의 재구성 보다는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적 삶의 갱신에 관한 개혁을 의미하는 것으로 (저자는 루터와 가톨릭의 차이점 보다는 공통점에 주목한다), 이데 당시 타락한 교황 레오10세는 루터의 주장에 동의하거나, 스스로 개혁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고, 교회, 교황, 복음은 동일하다는 가정에 기초하여,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라로 대응하였다. (p164, 가톨릭의 교리 왜곡에 부정하는 이 부분에서 많이 놀람) 루터의 주장과, 심지어 루터의 칭의논리 발견에 엄청남 신학적 업적이라 찬사를 보내고, 면죄부 판매를 틀렸다고 단호하게 말하며, 루터의 공식적인 복원과 파문의 철회를, 더 나아가 교황의 속죄 고백과 일련의 회복조치를 촉구한다. (많이 놀람, 왜 교수직에서 쫓겨났는지 알겠다)

 

이후 발생한 반종교개혁의 중심에 트리엔트 공의회가 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논의없이 교황청에서 원하는 대로, 성경, 교회 전통, 칭의, 성례전, 연옥, 면죄부 등의 교리가 정리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개혁자의 신학적 문제 제기에 파문과 정죄로 응답하였고, 당시 부분적으로 공감되었던 실제적 문제들, 성만찬에서 포도주 나누기, 각 지방 언어로 예배 집전, 성직자의 결혼 문제 등도 심각한 논의 없이 거부하였다(앞선 두 가지는 3백년을 더 지나서 제2차바티칸 공의회 때 허용되었다). 이에 대한 결과로 개신교와 가톨릭은 다시 합쳐질 가능성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30년 전쟁 같은 물리적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제 한 시대가 끝났다. 종교개혁에서 촉발된 종교적 역동성은 거의 소진되었다. 종교는 전쟁의 지옥에서부터 탈출구를 제시하지 못했다. 기독교는 자신이 평화의 능력이 없음을 증명하였고, 그 결과 유럽 전체의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유대감을 비롯한 신뢰를 상실하였다.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결과, 세계와 종교의 분리과정, 즉 새로운 시대인 근대의 성격인 세속화 형성을 돕는 결과를 낳았고, 근대 시대 기독교는 문명세대의 주도권을 잃고 만다.

 

근대는, 원칙적으로 신의 은총이 필요하지 않는 상태에서, 국가는 백성과 정부 간의 협약의 결과가 되었다. 유럽은 더 이상 르네상스 이전처럼, 지나간 고대의 문명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 이성, 기술적 진보와 국가를 이용하여 방향을 잡고 나아간다. 따라서 근대 사회에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이나 교회의 사회의 영향력은 현저히 저하되고, 교회의 권력은 자주 무시된다.

 

갈릴레이에서 뉴턴으로 넘어 오면서 순수이론의 가설로 제시했던 새로운 세계관은 실험을 통해 증명하였고 확증되자 성경적 세계관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든 확실성의 기초는 사유하는 행위를 통해 경험되는 개인에 근거 삼게 되고, 이로서 원초적 확실성의 장소가 신에서 인간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중세나 종교개혁 때처럼 신에 대한 확실성으로부터 시작하여 나 자신의 확실성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확실성으로부터 신에 대한 확실성을 유추하게 되었다. 중세의 가톨릭 패러다임에서 최고의 권위는 교황이었고, 종교개혁 시절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으나, 근대적 패러다임의 최고의 권위는 이성reason이 갖게 되었다. 오직 합리적인 것만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었다. 이에 대해 교회의 반응은 검열, 종교재판, 파문, 화형, 징계, 금지였고, 급속히 교회와 사회는 분리되기 시작한다. 그 결과 가톨릭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주도권을 잃고 한 지역, 바티칸으로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었다.

 

이 후 이 책의 내용은 문명사로 이어진다. 이에 대하여 가톨릭은 무관심, 적개심으로 표출되고, 스스로 고립화된 보수화의 길을 가게 된다. 가톨릭은 시대에 따라 개혁하지 못하고 더욱 교황의 무류설에 따라 권력은 강화되며, 심지어 교황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나치의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동조(나치의 많은 주요한 인물들이 가톨릭 신자), 유대인 학살에 대하여 침묵 같은 역사적 오류를 저지른다.

 

비로소 요하네스23, 2차 바티칸 공의회에 가서야 종교 개혁과 계몽주의 및 근대의 패러다임을 통합하려 한다. 가톨릭 이외의 다른 교회 모임도 교회로 인정되고, 그동안 기피해 왔던 근대적 발전, 세속 사회, 과학,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다

 

책의 막판으로 갈수록(시대가 현대로 올수록) 교황을 거의 까고 있다. 2001년에 처음 출판된 책이니 당시 교황은 요한바오로 2세인데, 20세기 가장 모순된 교황으로 표현한다. 그 외에도 가톨릭의 문제를 다수 기록하고 있으나, 개인적으로 타종교에 대해 잘 모르고, 이러 쿵 저러 쿵 할 입장이 못되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저자는 요하네스 24(기대하는 의미에서)의 제3차 바티칸공의회를 열고 로마가톨릭주의에서 진정한 가톨릭 교회로 전환하여 참다운 보편적 교회로 이끌어 가길 바라고 있다. 결론으로, 교회의 미래를 위하여 제언으로 마치고 있다.

 

1) 교회는 과거로 돌아가선 안되고, 기독교 기원에 뿌리 내리고 현대의 임무에 집중하는 교회

2) 가부장주의를 타파하고 교회 직책과 봉사에서 여성을 받아 들이고 협력하는 교회

3) 배타성, 관료주의에 굴복하지 말고, 교회 일치 운동, 파문조치 폐지, 교파간 성만찬 교제, 다양한 목회 활동인정으로 범 교회 적으로 열린 교회

4) 포용적이고 포괄적인 교회, 각 국가 지역 지방 교회들에게 적절한 자율권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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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여페이지에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교회사와 온 문명사를 아우르고 있어 책이 다루고자 하는 영역을 매우 크고 넓었다. 또한 가톨릭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어 개인적 개신교도로서 차이점과 공통점을 구분하여 읽어 가자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사전 지식의 부족을 많이 경험하였다. 근세 이후의 세속사와 기술역사는 나름 알고 있었으나, 고대, 중세,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사는 생소한 부분이 많았다. 기초 지식을 찾아가며 더듬어 읽어 가서 새로운 것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아직 명확하게 정리된 것을 아니지만.

 

가톨릭 인물(특히 교황, 주교 등)에 관한 배경 지식이 거의 없고, 가끔씩 낯 설은 가톨릭 교리 용어가 튀어나와 생소했다. 대부분 짐작으로 이해했다 치고 넘어 갔다. 그렇다 해도 전체 문맥을 헝클어트리거나 맥락을 무너트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저자는 가톨릭의 아웃사이더 학자로 (특히 교황 무류설 주장) 근본 원리의 근거로 하는 가톨릭 역사서가 정론인지 저자의 의견인지 일부 혼동되기도 하였다. 더군다나 명확한 논리로 자신의 근거로 교황을 까기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마치 소설 원문을 읽지 않고 소설 비평으로 원문을 추론하는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의 안목과 평가를 통해 내 자신을 되돌아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 같이, 가톨릭 교회의 역사를 통해 개신교의 역사가 어떻게 비춰지는가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참고로 (내가 보기에) 루터에 대해선 후한 평가이고, 칼뱅에 대해선 박한 점수를 주었다. 물론 가톨릭 내부는 아주 가혹한 점수를 준다.

 

어차피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사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동일한 역사를 가지므로 이해를 돕는 참고서 역할을 하였다. 교회사를 아는 것이 구원을 얻고 못 얻고의 문제는 아니지만, 알고 있는 교리의 형성과정을 본다면, 지식의 측면과 이해의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책 근대부분에서 교회사와 문명사가 대비되고, 그 중에서 교회의 역할이 구별해 내는 구성으로, 그 당시 시대와 교회가 영향을 주고 받았던 자잘한 지식들로 당시 시대적 상황을 갸름해 볼 수 있었다. 교회가 주류에서 밀려나고 세속화가 가속화된 원인과 배경에 대해선,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가장 큰 수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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