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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아이들은 왜 말대꾸를 하지 않을까
캐서린 크로퍼드 지음, 하연희 옮김 / 아름다운사람들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어느 순간 사랑스런 내 딸은 없고, 괴물 아기가 하나 있을 뿐이다.
이 책에서 부모는 사령관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사령관이 뭐냐, 하인들만 있을 뿐이다. No 라고 말 하지만, 울음 소리가 커지면 바로 Yes가 된다. 나 라도 그러겠다. 울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고, 더 크게 울면 더 빨리 얻을 수 있는데, 뭐하러 참고 뭐하러 기다리겠는가.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으로 부모인 우리의 교육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다짐을 하지만 실제론 잘 되지 않는다. 나는 그래도 좀 나은데, 애기 엄마는 잘 버텨내지 못한다. 어린이집에 떼어 두고 직장을 다니는 원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선 산부인과 의사 외엔, 주변 사람들과 블로그에게 육아 방식에 대해 묻지 말라고 한다. 동의 한다. 책이나 블로그의 정보는 (일부 쓸모있는 정보를 제외하곤-제한적이다) 많은 부분 과장되어 있다. 아마 마케팅과 접목이되어 운영되기 때문일 것이다. 겁을 잔뜩 줘야지 물건을 살테니까. 그러다 보니 피해망상을 불러 일으키기 딱 좋은 조건이 된다. 또한 경험자라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도 한번 걸러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경험상 육아 전문가는 그리 많이 않은 듯하다. 섣부른 전문가는 넘쳐 난다. 한 두명의 아이를 낳고 길러본 엄마들이 정답일까? 그들은 자신의 경험이 맞다고 주장한다. 아줌마의 특성상 자신이 아는 것만 맞다고 단호하게 단정지으며, 때로는 인정하기를 강요한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듯, 진리에 이르는 길은 이세상에 딱 한가지 방법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육아의 경우 특히, 어떤 사항에 대해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데, 정답으로 단정 짓기엔 무리가 있다. 이 책이 바로 그 증거이다. 이 책을 보면, 미국식 육아 전문가는 전부 틀렸고, 미국 아이들은 전부 잘 못 자라고 있다. 우리는 미국의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받는, 일종의 문화적 사회적 식민지가 아닌가. 우리의 육아 방식도 이 책에서 묘사되는 '버릇없는' 아이들의 형상을 그대로 따라간다. 프랑스 아이들은 안 그렇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른의 <미니미>가 아니다. 그들은 작지만 (우리 어른들처럼) 스스로의 완전한 인격체이다. 아직 육체적으로 완성되지 않아서 도움이 필요할 뿐이다. 엄마가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면서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없다. 세상은 젖과 꿀이 흐르기만 하는 곳이 아니며, 쵸코렛으로 가득차 있지도 않다. 세상은 때로는 차갑고, 때로는 단단하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스스로 단단해 질 필요가 있다. 아주 어린 아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면역력, 과잉보호, 오냐오냐, 그냥 혼자할 수 있게, 혼자 찾아 갈 수 있게 내버려 둬!
우리 어른들은 아이의 인생에 과도하게 껴드는 경향이 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우리 아이들은 아기고래가 아니다. 아이들도 다 알고 있다. 입에 발린 칭찬 쯤은 구별할 줄 안다. 무뎌지게 된다. 혹은 반대로 인정받기 위해서만 행동하기도 한다(좋은 점수를 맞기 위해 부정한 방법을 쓰기도 한다, 그래야 부모가 좋아할테니까).
장난감도 돈으로 해결하려 든다.(이 책의 예에서 처럼) 어차피 장난감은 몇 번 가지고 놀다가 구석에 처박힐 것이다. 그것이 비싼 장난감이든, 싸구려 장난감이든 동일하다. 하지만 아이기 커갈 수록 금액이 큰 장난감을 요구할 것이고, 비싼 장난감으로 대체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선물과 장난감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부모들의 자기만족이나, 대리만족을 위한 이유가 더 클 것이다. 아이들이 커서 풍성한 장난감이 있었던 것을 만족해 하며 고마워 할 것을 기대하는것 아니겠나.
현대 가정에서 어린아이에 대한 교육의 목적은, 어떠한 댓가를 치루고라도 아이를 만족하게 해줘야 한다고 모아진다. 여기서 근본적이면서 심각한 두가지가 한계가 나온다. (1) 그 다음엔, (2) 언제까지. 사실, 아이들의 만족은 커녕, 물욕만 키우게 되고, 만족을 모르게 될 것이다. 우리 스스로를 돌이켜 보면, 우리가 언제 돈과 쾌락에 대해 만족을 오랜기간 동안 느낀 적이 있었나. 점점 더 많은 재물과 쾌락을 기대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아이들은 만족할 것이라고 착각하는지 모르겠다. '안분지족'은 유전적으로 타고난 덕목이 절대 아니다. '돈의 가치' 역시 교육의 범주에 들어간다 (교황의 종교는 천주교다 만큼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기 전, 돈의 가치를 모르는 상태에선 교육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겐 물건으로 직접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역할 모델은 무엇보다 어른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모이다. 부모가 주관을 갖지 못하거나 규칙을 정해 놓은 후 흔들어 대면, 아이들 역시 그 규칙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가정의 중심에 어른이 제자지를 잡고 서 있어야 한다.
프랑스식 교육이 능사는 아니다. 미국식 교육도, 한국의 전통적인 교육 방식도 마찬가지 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좋은 참고는 될 수 있다. 사안에 따라 내 아이에게 가장 알맞은 항목을 뽑아 '내 것'을 만드는 것이 최고일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교육(양육이라고 해두자)은 항상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내 딸에게 성인이 되면 더 많은 자유를 주려고 한다. 우리 집은 어렸을 때 무한정의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운신의 폭이 점점 줄어 들었다. 그것이 우리 형과 나를 숨막히게 했다. 그래서 나는 그 반대로 할 것이다. 그래서 내 딸이 어릴 때는 엄격하게 하려고 할 것이고, 성인이 되어 갈 수록 더 많은 자유를 줄 것이다. 자아가 자라는 만큼 책임감도 자라길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그 나이가 되면 훈육은 먹혀들어가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