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 18일 화요일 ∥ 독서 정보 나눔
△ 전라북도립미술관 ‘나도 미술비평가’ (http://www.jma.go.kr/)
아래 글은 제가 실제 ‘나도 미술비평가’에 올린 글입니다^^
정부 혹은 지자체가 출자한 문화기관이라면 대부분 관람료가 없거나 매우 저렴한 것이 특징이다. 우리가 흔히 ‘예술의 전당’과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세종문화회관’은 서울특별시에서 출자한 기관으로 서울시민증(최근 모바일로도 받을 수 있게 됐다http://gov.seoul.go.kr/archives/112145)
이 있으면 세종문화회관 일부 공연을 20% 할인 받는다. 서울 시민이기 때문에 서울특별시청이 출자한 문화 공연의 혜택을 받는 것이다. 이외에 ‘천 원의 행복’이라고 하여 ‘세종문화회관 온쉼표(http://happy1000.sejongpac.or.kr/#sec01) 는 수준 높은 공연을 천 원으로 감상할 수 있는 기회이다. 서울특별시민의 규모를 생각하면 당첨되기가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지만 꾸준히 도전해봄직한 퀄리티 높은 공연이 매월 기획되고 있으며 진행되고 있다.
전라북도는 워낙 이 고장 자체가 지닌 높은 예술 역량과 품격으로 인해 일년내내 축제라고 할 수 있을만큼 예술적 감흥이 충분한 곳이다. 특히 모악산 초입에 자리잡은 전북도립미술관은 위치 선정의 탁월함과 전라북도 예술가를 위한 컬렉션에 최선을 다하는 용기와 실험정신이 타 지역 미술관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곳이다. 미술관이 도민들의 일상에 이질감이나 괴리감 없이 녹아들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아닌가 한다.
변방...그리고 파토스...
전라북도립미술관은 ‘아시아 지도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지도리’는 쉽게 말해 ‘문고리’라고 할 수 있다. ‘돌쩌귀’라는 말로 풀어쓰면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서양 중심의 미술 전시 혹은 관람에서 벗어나 아시아의 작가들과 작품에 주목하고 우리들의 연대와 방향성을 만들자는 취지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현재 국내 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전북도립 미술관 아시아 지도리 프로젝트 야심 찬 발거음’ , 프레시안 2018-07-18) 전라북도의 젊은 작가들이 아시아 여러 나라로 진출하고, 전라북도는 그 나라들의 작가들과 작품을 도민에게 소개하는 지도리 프로젝트는 우리 스스로 ‘변방’이라고 생각하는 아시아의 작가와 작품을 다시 재조명하고 이것들이 지니는 역동성을 발견하여 ‘중심부’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려는 시도가 아닌가 한다.
파토스[pathos]는 로고스[logos]와 반대되는 개념의 그리스어다. 개념의 주체가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 로고스와 가장 대비되는 지점이 아닌가 한다. 내가 받아들여야만하는 여러 정념과 정서 그리고 기분 등...파토스는 번역상 ‘충동’ 혹은 ‘열정’ 등으로 풀이된다. ‘파토스’는 그렇기 때문에 ‘기쁨’과 ‘괴로움’ 등 희노애락에 해당하는 정서의 원형 즈음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전시회를 둘러보며 느낀 ‘파토스’는 아주 작은 파동으로부터 비롯된 거대한 울림이었다. 파동의 근원지에서 멀어질수록 거대하고 때로는 파괴적인 모습으로까지 변화되는 움직임이 전시회 가득 느껴졌다. 특히 ‘은탕 위하르소’의 작품은 ‘이 작가를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을 불러일으킬 만큼 탁월했다(미성년자는 관람이 제한되고 있는 작품이다) 언뜻 보면 혐오스러움 혹은 외설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지만 현대 사회와 구성원이 은연중에 향하고 있는 방향과 현재의 위치를 직시할 수 있게 만든 수작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철장 안에 갖힌 혀 내민 인간 군상을 마주했을 때의 충격만큼이나 그 깨달음이 주는 충격 역시 만만치 않아 한참을 그 빨간 공간에 머물렀다.
인도네시아가 사랑하는 작가인 헤리도노의 그것 역시 나에겐 낯설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멈추지 않는 소리가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영국 제복을 입은 듯한 남자가 운전하는 자동차는 천사를 뒤에 태우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디테일 하나하나 그 의미를 따지기엔 내가 가지고 있는 미술에 대한 배경지식이 미천하고 또 우리 민족과 또다른 역사적 문화적 숨결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한 작가이기에 그저 느껴지는 대로 최대한 작가쪽으로 기울어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았다.
시끄러웠다. 작품을 보는 내내 시끄러웠고 어서 좀 저 소리가 멈췄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는데(실제 누군가가 계속 소리를 못내게 지키고 있었다면 조용할 수도 있는 전시공간 환경이었다) 막상 그 소리가 안들리면 뭔가 큰 하자가 생긴 작품이 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헤리도노는 유럽에서 사랑받는 작가라고 한다. 그가 추구하는 작품 세계를 살짝 엿본 것 같았다. 유럽에서 그를 아끼는 이유가 단지 유럽풍 제복과 천사의 노란 머리색 뿐만은 아닐 것이다.
▲ 헤리도노 작품 ‘라덴 살레’
(출처 : 전북일보 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2010995)
이 외에도 난민을 떠올리게 만드는 나시룬의 작품도 인상 깊었다. 우리나라 역시 난민문제와 무관할 수 없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배에 새겨진 그림의 행간을 이해하는 과정이야말로 인류 삶의 가치와 힘겨움 그리고 연대의 소중함을 깨닫는 기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 나시룬 작품 ‘배’ (출처 : 전북일보)
개인적으로 이중희 선생님의 만다라를 만나게 된 건 큰 행운이자 기쁨이었다. 전라북도의 큰 작가이자 대한민국 작가 중 손꼽히는 그림꾼(좋은 의미로서 그림꾼이다. 화가들도 인정하는 화가라는 의미이니 오해 없으시기를....) 이중희 선생님은 일흔이 넘은 적지 않은 연세에도 작업을 하신다고 들었다. 익산에 화실이 크게 있다고 전해 듣기만 했을 뿐 미술학도가 아닌 이상 찾아뵙기는 어려운 일....그런데 여기서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었다. 그림에서 힘이 느껴졌다. 한참을 만다라 앞에 서 있었다. 옆에서 두 딸이 보채길래 ‘그래...이만 가자...’하고 말하고 돌아섰는데 어쩐지 아쉽고 그리운 마음이 들어 나도 모르게 막내 딸의 손을 스르르 놓고 다시 그림 앞으로 갔다. 엄마 이제 그만 보고 가자는 짜증 섞인 아이의 목소리가 만다라 뒤로 웅성거리며 사라졌다. 아마도 나는 꽤 오랫동안 딸들과 실갱이하며 그 앞에 있었던 것 같다.
젊은 예술가 김병철 역시 내 발자국을 오래도록 잡아둔 사람 중 하나다 뒤집어 놓은 단상을 관람객이 앉을 수 있도록 고안한 작가의 명민함이 돋보였다. 그는 스스로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지 몰라도 감상하는 입장에서는 작가와 함께 작업 과정을 거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십여년 전 서울 한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작품을 감상하면서 내 모습이 비춰져야만 백남준 선생님의 그 설치 작품이 완성되는 구조를 맞닥뜨렸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나 따위가 어떻게....라는 생각에서 내가 들어가야만 하나의 작품이 온전히 완성되는 그 창작의 순간에 동참할 수 있도록 배려받음은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는 말이다.
전라북도의 힘찬 정기를 품고 있는 모악산 자락에 터잡고 도민들의 바람과 소망을 담고 있는 곳이니 앞으로 ‘아시아 지도리’로서 역할을 더욱 충실히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그림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으로서 바람을 말해본다. ‘식자층의 눈으로 도민을 계몽하려 하지말고, 다양한 계층과 범위로서 전라북도민을 나누어 바라보며 그 수준과 여건과 환경에 맞는 향유로서의 컬렉션을 구성하고 기획’해주었으면 한다. 도민은 절대 한 뭉텅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기획을 했는데 사람들이 그 가치를 몰라준다고 속상해하지 말고, 이런 수준 낮은 컬렉션을 기획하는 데 세금을 낭비했다는 말에 속상해하지 말고 타켓 계층 혹은 그 프로젝트의 목표에 충실하여 내실있게 운영하는 도립미술관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