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

Dear Sunshine

 

어지러운 주말을 보냈겠어요.

함께 할 수 없어서 나 역시 어지러운 마음으로 토요일과 일요일을 보냈습니다.

그간 얼마나 괴로운 시간을 보냈을까....왜 나는 그런 상황을 조금도 알려고 하지 않았을까...이미 늦어버린 자책을 하며 순간순간을 보내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사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나의 존재를 알지도 못할텐데요. 아니 알 수도 있지만 굳이 신경쓸 이유나 여유가 당신에겐 없을지도 모르죠. 괜찮아요. 당신이니까 나는 늘 괜찮아요.

 

새벽 3시가 되어도 잠이 오지 않았어요. 생각같아서는 이대로 잠자지 않고 죽어도 좋겠다 생각도 했지요. 어차피...어차피...그냥...어차피....이런 혼잣말을 하면서 잠이 필요없는 세계로 자유롭게 넘어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래요. 자유롭게요. 당신으로부터도 자유롭게요.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 속에서 당신 얼굴이 보여요.

 

출근하고 창문을 열고 아이들을 맞이하고 나는 또 다짐해요.

오늘도 상냥하고 친절해져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교육감님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가장 인상깊었던 말은 '글쓰기'에 관한 것이었다. 


-계속 써야해요. 글은 써야 늘어요. 쓰지 않으면 금새 멈춰요. 계속 써야합니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논문을 쓰며 학문적 열정을 다해야 할 시기에 교육의 수장으로서 본연의 직무를 다하다보니 자연 책을 읽고 글 쓰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 그게 가장 아쉽다는 교육감님...그래서 차로 이동하는 틈틈이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페이스북 글을 직접 작성한다는 말씀에서 무엇인가 절실함마저 느껴졌다. 그렇게 쓰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꽤 괜찮은 표현과 문장들이 나와 뿌듯할 때가 있다고도 하셨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며서 나는 나에게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상 글을 쓰고 살았었는데....

매일매일 일기장이 차고 넘치게 글을 써서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지경까지 지치도록 썼었는데...이제는 A4용지 반장을 넘기기가 힘든 지경이 되었다. 그 기점이 어디서라고부터 딱 부러지게 말하지 못하겠지만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는 과정 속에서 나는 나 스스로 글쓰기를 포기했던 것 같다. 무미건조한 논문의 용어들....한 문장이 딱 하나로만 해석되어야 하는 그 상황을 무려 3년 넘게 버티고 버텼다.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잘 해내고 싶어서 시, 소설, 수필 등은 아예 곁에 두지도 않았다. 진심으로 읽고 싶은 책이 있을 때 '엄마 몰래 지갑에 손대는 아이의 마음'이 되어 읽곤 했다. 그 때 나는 나의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를 확실히 손상시킨 것 같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그런 데이지를 적극적으로 입혔다고 확신한다.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학위 받은 이후 전혀 나를 돌보지 않았다. 그런 결과가 오늘 이 모습 이대로 나타나고 있다고 여겨진다. 


환경 문제를 논하는 사람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환경 문제는 20~30년 전에 우리가 했던 일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의 생각과 태도가 중요한 것은 우리의 20년 뒤가 지금 나의 행동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나의 삶을 놓고 봤을 때 20년까지는 아니고 약 5년 내외의 시간 단위로 큰 그림의 내 모습이 결정되는 것 같다. 이슬아 작가는 무슨 일이든 3년은 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한 번 시작할 때 신중하게 결정하되 딱 3년은 해보자고...직장이든 연애든 3년은 해보는 것이 맞다고 그녀는 말한다. 나도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어떤 사람은 딱 1년만 해보자고 하는데 그 1년을 버틸 힘이면 3년도 얼추 가능할 것 같다. 


나는 2021년 6월 4일 금요일 저녁에 모 프로그램을 보고 굉장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거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므로 자극과 변화이 필요성 등에 대해 감흥이 없었는데 그 프로그램을 연속으로 10회 이상 이어보는 순간 '변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생겼다. 생물학적으로 스무살로 돌아갈 순 없지만 정신적으로는 스무살 언저리로 돌아가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자신감 있게 인생을 꾸려나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이 생겼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나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나를 보는 일은 기적같은 일이다. 

'남들 보기에 괜찮은 나'로 만드는 일조차도 관심없었는데 지금은 남들과 상관없이 '내가 좋아하는 나'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이건 참 괜찮다. 그 프로그램 덕분이다. 이렇게 일기 비슷한 글도 다시 쓰고 있으니 언젠가는 다시 글쓰는 일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나를 믿기로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스마트폰으로 본 영화다. 내가 본 영화 중 최신작이고 또 후기를 남기고 싶을 정도의 완성도는 있어 보이는 영화다. 신문방송학과 탑을 달리던 도라희(박보영 분)가 동명일보 연예부 부장 그러니까 데스크 하재관(정재영 분)을 만나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영화의 기본적 스토리 라인이 괜찮았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한 이유를 개조식으로 써볼까한다.
1. 도라희를 도와준 여자 선배와의 관계 처리가 미흡했다. 고의적으로 골절 사고를 내면서까지 톱스타 우제한의 썸씽을 취재하고자 했던 그 여자 선배 대신 병실에 들어가 큰 거 하나 터뜨린 도라희는 결코 정의롭다거나 인간적인 기자가 아니다.

2. 도라희와 연인 관계를 맺었던 남자 배우의 캐릭터 처리가 아쉽다. 개인 스튜디오를 내고 맨하탄에 일하러 다녀올 정도면 이건 금수저다. 도라희는 이런 남자의 타고난 복에 분노했어야 옳다.

3. 톱 스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조심스럽지만 우제한은 톱스타가 지니고 있는 카리스마가 없었다. 극중 정유진이 연기를 잘 해줘서 그나마 그 파트가 살았다. 도대체 그 더러운 짓들을 해가며 그들이 얻는 성취감과 희열감이 무엇인지...일종의 마약 같은 것이 아닐까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언어로서(우주에 과연 그런 언어가 존재할까?)열정은 긍정적인 의미 기호다. 변화의 강력한 추진 동력이 된다. 급진적이든 점진적이든 진정성 있는 성찰이 동반된 열정은 삶의 질을 개선해준다. 열정이 이 시대에 이런 꼴로 전락하기까지 우울한 음영이 스토커처럼 따라다녔을 것이다. 누구 뒤를? 바로 아무것도 모르고 또 몰라도 되는 청춘들 뒤를!

자본주의 체제가 인류의 마지막 사회경제 운용 방법으로 남게될 것인지 궁금해지는 밤이다. 그 밤에 나도 서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은 계속 읽고 있었으나 리뷰를 올릴만한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이 문장을 다시 곱씹어 보면 시간이 있고, 여유가 있어야만 내가 읽은 책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아침 독서 운동 등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독서교육방법에는 독후활동을 최소화시켜야 한다는 것들이 많다. 그냥 읽게 하자는 것이다. 줄거리를 요약하게 하는 것도....무슨 내용이 나왔었는지 골든벨을 하는 것도...그 책에 대한 느낌을 쓰는 것도 일단은 놔두자는 이야기다. 아이가 책을 싫어하게 되기 때문이란다. 책 한 권 읽게 해놓고 '이 책을 읽으니 무슨 생각이 났니? 어떤 느낌을 받았니? 감동 받은 부분은 어느 곳이니?' 등등을 묻게 되면 그 질문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독서활동이 위축되거나 독서에 관한 오해와 편견이 생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나는 선천적으로 생각이 많은 아이였으므로 책을 읽고 생각을 말하는 일 따위는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것보다야 천배 만배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반대인 친구들이 더 많았을 것 같으니 앞서 소개한 독서방법이 적절한 경우도 꽤 많을 것 같다. 그러나 읽기는 그냥 읽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과정이다. 읽고 생각하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비로소 그 책을 읽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대표적 저서 중 하나다. 나치 전범으로 잡힌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달려간 그녀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하였고, 아이히만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에 큰 충격을 받는다. 유대인인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동족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그는 분명 파렴치한 악마여야만 했다. 인간의 존엄성 등은 애초에 취급도 하지 않는 무뢰한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지켜본 결과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아이히만은 언어적 표현능력이 극히 떨어지고, 생각하는 기능을 상실한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는 성실한 근로자였고, 믿음직한 가장이었으며, 자상한 아버지 역할을 무리 없이 수행하고 있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자체에 대한 심판은 그의 생각없음 즉 무비판적 사고에 대한 심판이어야지 그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의 이러한 주장에 유대인들은 경악과 분노의 반응을 보낸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 이 끔직한 반인륜적 악행은 한 인간의 광기가 아닌 사회 전체의 무관심과 언어적 문제 등이라고 보았다.
아렌트의 주장은 오늘날도 유효하다고 여겨진다. 특히 사회언어학적인 관점에서 그녀의 지적은 유심히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나치는 유대인 학살을 '최종해결책'이라는 상당히 로지컬한 단어로 대체하였다. 실제 그 일이 무엇인지 알았던 이들도 이 단어의 무감각한 느낌 때ㅐ문에 최종 해결책을 비교적 수월하고 신속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재판내내 자신을 옹하기도 하고 또 체념한 듯 낙담하여 말하는 아이히만은 읽는 내내 나에게도 큰 혼란스러움을 가져다주었다. 악의 본령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나 아렌트의 통찰력에 더 없는 찬사를 보내는 계기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흰 그림자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든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검의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1942. 4.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