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출어람 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을 새삼 느꼈다.
성공작의 속편이 더 성공하기보다는 지지부진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몇가지 매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리는 평은 C+ 정도에 머무른다.
- 설경구의 집념어린 투지, 유엔빌리지에서 바라본 한강의 아름다운 모습
  화려한 골프 코스,
  검찰청사 안 - 아직 불려가보지는 않았지만

우선 극의 기본인 스토리의 탄탄함이 너무나 떨어진다. 선과 악이 초반에 갈리고 나서는
그대로 예상한 결말로 밀려간다. 반전도 없고 긴장도 없는 그런 구성이 못내 아쉽다.
곳곳에 검찰 띄우기는 또 얼마나 지나친지 부담 갈 정도에 이른다.
대한 민국 검찰이 과연 이정도 과찬을 받아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당장 이 영화에 나온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한보의 정태수는 수조원의
공적자금을 꿀꺽하게 만든 한보철강의 비리를 저지르고도 꿋꿋이 살아남아
해외에서 유유작작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또 이태원 버거킹에서 벌어진 사건을 해결못해 둘다 풀어주고 만 검찰은 또 어디로갔는지?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대부분의 검찰에 대해 극도의 찬미를 퍼붓고 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노무현과 논쟁할 때 검사들이 호소하던 우리도 일하느라 너무나 고생하고 있습니다라는 식의...

1편의 강철중이 삐딱하지만 우직한 면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는데 이건 그냥 우직하기만
하니 현실감이 떨어진다. 2편과 가장 유사한 인물은 현재 한나라당 의원인 홍준표다.
나이 먹어서 평검사 하면서 출세 생각하지 않고 조직의 힘 빌리지 않으면서
슬롯머쉰 수사 강력하게 밀고나갔고 고위직 포함해서 왕창 잡아들인 개가를 이루었다.
그에게 자신의 일을 알아주는 누군가가 검찰 밖에 있고 언젠가는 자신의 브랜드가
먹힐 것이다라는 기대도 하지 않으면 그렇게 사방에서 주어지는 압박 물리치고
수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인물을 그린다면 미래의 야망과 현실의 욕구를
대비시켜 보여주는 쪽이 좋았을 것같다. 1편의 인물이 가끔 삥도 뜯듣이.

강우석 감독이 승부사라고 생각해왔는데 이 작품 보면서 요즘에는
너무 쉽게 돈벌려고 하는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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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아드소라는 수도사가 뛰어난 예지를 가지고 있는 스승 바스커빌의 윌리암을 쫓아 오래전 어느 수도원에서 발생했던 연쇄 살인사건을 추적한 경험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서술된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커넬리 주연의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 소설을 접했다. 소설에서는 상대적으로 영화가 보여주는 극적인 흐름의 재미를 맛보기 힘들었지만 대신해서 매우 풍부한 내용을 발견할 있었다.

영화가 소설의 구성을 바꾼 부분도 얼마간 있다. 가장 인상적인 예로는 영화에서 무척 아름답게 그려진 어느 이름 모를 여인과의 짧은 사랑이 실제 소설에서는 하나의 지나가는 인연일 뿐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시대 배경

 

배경은 1300 전후의 유럽 기독교 사회다. 기독교가 제도화되다보니 초기의 순교자들의 희생에 의해 만들어진 믿음의 집단이라는 모습이 많이 퇴색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외적으로는 교황의 내세를 향한 인간의 마음에 대한 통치권과 황제의 세속권력이 점차 강하게 대립하였다. 반면 기독교 이념 내에서는 평등 사상을 강조하는 다양한 분파가 나타나 제도화되고 형식화된 현실의 권력 다툼에 혈안이 기성교회를 비판하였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평등주의를 강조하며 교회의 탐욕을 비난하던 분파에 속해있던 수도사가 던지는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단심문관의 답은 다음과 같다.

 

어떤 교회를 참 교회라고 믿으시는 지 ...

교황 성하와 추기경들이 주도하는,유일한 교회,신성한 교회,사도적인  교회인 로마 교회가 아니겠느냐? 589 쪽

 

이렇게 여러 세력들이 다투는 모습은 소설속에서도 참담하게 묘사된다.

 

이교도 사라센 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벌이는 싸움 같았다.그러나 어느 편도 기독교인들 같지는 않았다. 548 쪽

 

당시 기독교가 고수하려던 세계관은 로마제국 붕괴 이후 발전된 교부철학이다. 종교를 위해 모든 다른 부문이 봉사하는 형태의 삶을 합리화시킨 철학에 대해서 도전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연역적으로 설계된 거대한 이념에 대한 반격은 주로 이론과 경험이 불일치하는 사례를 들어보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론 중심의 지식은 서아시아의 아랍 문명권에 의해 보전되었다가 이즈음해서 기독교세계로 유입되고 있었다. 이런 세계관의 위기 상황에 대한 두려움은 호르헤의 다음과 같은 비난에 담겨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가 이 서책의  저자였기 때무이오.아리스토텔레스의 서

책을 하나같이 기독교가 수세기에 걸쳐 축적했던 지식의 일부를  먹어 들어갔소.

736 쪽

 

주인공 - 윌리암 수도사

 

주인공은 통찰력이 뛰어나지만 가끔은 너무 지나쳐서 허영심으로까지 보여지는 윌리암이라는 영국출신 수도사다. 로저 베이컨을 시봉한 경력에서 나타나듯이 다분히 섬나라 특유의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이제 나이도 50 줄에 접어들어 세상을 관조하는 여유와 평형감각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다음 구절에서 있듯이 진리에 대한 불타는 욕구가 있다.

 

진정한 앎이란,알아야 하는 것,알 수 있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야.알 수 있었던 것,알아서는 안되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165 쪽

 

이를 추구해가는 과정에서는 출신 배경의 영향을 받아 경험론을 기반으로 대륙의 합리론의 부분적 수용의 자세를 보인다. 제자 아드소는 가끔 합리론 옹호자의 역할에서서 맞서기도 한다. 한번은 주제넘은 표현으로 아예 "이제야 보편적인 지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시는군요"라는 말까지 묻는다. 윌리암은 여기에 대해 "애초부터 수학의 보편성은 인정하였다" 답한다. 이와 같은 논쟁은 당시 합리론과 경험론이 상대를 공격하고 방어하던 논쟁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문제는 시간이 많이 지난뒤 칸트에 의해 풀리게된다.

 

아드소가 어느 이름 모르는 여인과 갑작스런 사랑을 나누고 나서 수치심에 여인이 댓가를 바라며 몸을 파는 것을 매춘이라고 비난하였다. 윌리암은 그들의 처지에 대해 깊은 이해심을 발휘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매음이 아닙니까

가난한 촌색시라고 부르거라.

404 쪽

 

책에 대한 이야기

 

소설은 실제 존재하지는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 부가 정말로는 있었다고 가정하였다. 귀중한 문화유산이 맹신에 빠져 종교외적인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소멸되고 만다는 스토리 전개로 되어 있다. 문제의 발단과 갈등의 대상이 되는 것이 책이기에 자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서책이라는 것은 긴 줄에 꿰여 있는 것 같은 물건이거든.종종 이 서책의 이야기와 저 서책의 이야기는 이어져 있는 수도 있다.

<중략>

서책이라는 것은  서책 자체의 내용도  다루고 있는 것이었다.말하자면  서책끼리 대화를 주고 받는다는 것을 ... 452-453 쪽

 

서책끼리 대화를 나눈다는 명제는 문제가 문제를 만든다는 명제로 바꿔 서술 있을 같다.다음 서술에서 기호라는 개념으로 책이 가지는 모호함을 표현하고 있다.여기서 기호란 특수한 의미를 가진 단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성이나 종교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를 모른다고 없다.하지만 종교라는 단어는 것에 빠져 있는 사람이 단어를 매개로 관념속에서 일으키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읽는 이에게 전달할 없는 기호의 수준에 머무를 따름이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선해야만 그 대상에 기울이는  사랑이 참사랑일 수 있는 법이다.

서책의 선은  읽혀지는 데 있다.서책은 하나의  기호를 밝히는 또  하나의 기호로 되어 있다.기호는 이렇게  모여서 한 사상의 모습을 증언하는 게다.이를  읽는 눈이 없으면 기호로 쓰여진 서책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627 쪽

 

장서관을 마음대로  들락날락 할 수 있으면  세상은 더 아름답게 보일  게다. 293 쪽

수도원만이 소장하고 있는 새로운 학문이 수도원  밖에서 자유로이 나돈다면 신성한 수도원은 교구의 부속 학교나 도시의 대학과  다를 바가 없어지고 이로써 수도원의 신성은 허물어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302 쪽

 

장서관과 독자의 사이에 사서가 있는 것은 신과 인간사이에 사제가 있다는 것과 비유될 있다.둘다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가치에 대한 접근통로를 제한하여 권위를 행사하고 있는 집단이다.

본원적인 지적 욕망에 이끌려 책에 대해 접근하려던 사람들에 대해 기존의 질서를 수호하던 사람들은 자신이 행사하던 권리를 더욱 강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신에 대한 통로가 열렸을 바꿔말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절대적인 해석이 부정되었을 일어난 것은 대중의 종교질서에 대한 폭팔적인 참여였고 이의 결과 일어난 종교전쟁이라는 갈등과 대립은 상당히 오랜 시간을 통해 희생을 겪고 나서야 상대방에 대한 관용을 내면화 시킴으로써 해결될 있었다. 금단의 문을 무조건 열어젖혔을 결과는 처음 기대했던 것과 사뭇 다르게 나타날 있다.

 

종교에 대한 견해

 

종교에 대한 논란이 여러 주체들 간에 가장 심각 하게 전개 된다.

 

어디어디까지가 하느님 뜻이라고 우리가 울타리를 쳐서는 안된다 41 쪽

 

교회는 이단자에게 믿는 백성들의 모듬살이를 해치고 있다고 경고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경고해야 합니다만 이땅에서 이단자를  심판하거나,그 이단자의 자유 의지에 반하는 강요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황은 이 땅에서 남을 섬겨야 하는 것이지  남으로부터 섬김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 겝니다. 562 쪽

 

이단 심판의 권능을 거부하고 교회가 가지는 권능의 한계를 명시한 말들은 윌리암 자신이 이단심판관의 직무에 봉직하면서 스스로 짙은 회의를 느끼고 물러섰던 경력과 연관이 있다.자신과 길이 다른 믿음을 가진 자들을 절멸 시킬 것이 아니라 그들이 타인에게 외형적인 해를 행하지 않는 천부의 권리 사상의 자유를 박탈할 권능은 교회가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논리다.

엄청난 수준의 관용을 발휘하고 있다.실제 유럽 기독교 사회가 이러한 관용을 내면화하게될 있었던 것은 종교전쟁이란 격렬한 대립 이후의 이야기다.결국 후대인의 눈으로 과거를 돌아보는 모습이다.그것이 가야할 길이지만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하지만 삶에서는 바른 인식보다는 인식이 중요하고 교훈은 문장이나 격언에서 체득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치러야 댓가가 있다.

 

코란이라면 이교도의 경전인 사서邪書가 아닙니까?

사서라고 하지 말고 우리 성서와는 유가 다른 지혜가 담긴 서책이라고 부르거라.

501 쪽

 

구절에 이르러서는 아예 종교 자체를 상대화 시켜 버린다. 신앙 까지 공정하게 바라 있는 것은 자신까지 객체화할 있다는 의미다.

 

호르헤의 이야기

 

지식의 역사에는 발전이나 진보가 있을 리 없읍니다.

오로지 연속적이고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한 요점 약설이 있을 뿐입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 두 진리의 무서운 주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은 마땅히 파기되어야 합니다.

631-2 쪽

 

여기에 대한 윌리암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미소를 모르는  신앙,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742 쪽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때로는 저보다 먼저,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762 쪽

 

종교라는 의미를 떠나서 하나의 절대선이 인간에게 있는 폐해를 지적한 구절들이다. 같은 현상은 시대를 뛰어 넘어 절대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 일반적인 메시지를 전달 해준다.

동구에서의 공산주의 권력이 붕괴되면서 중국에서도 유사한 대중운동이 있었다.베를린 장벽이 피를 흘리는 사태 없이 무너진데 비해서 천안문의 대중들에게 중국지도자들은 무력을 사용할 것을 명령하였다.베를린 장벽과 천안문에서 서로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은 총구를 당사자가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에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서독으로 넘어가려는 사람들에게 경비병들이 총격을 가할 없었던 것은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스스로 가지지 했기 때문이다.결국 아무도 명령은 내리지 못했다. 것은 행위이전에 이를 뒷받침 하던 하나의 신념이 내부적으로 붕괴되어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아직 혁명 1 세대로 채워져있다.하나의 사상에 목숨을 걸어본 사람은 그만큼 굳은 결의와 신념이 있었다는 이야기고 논리적인 설득으로 이것을 바꾸는 것은 무척 힘이 것이다.그들은 아직도 진리를 가지고 있고 것을 위해 스스로 죽을 있다고 생각한다.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도 저와 함께 죽게 있는 것이다.

 

 

기호학에 대한 이야기

 

이외에 현대의 기호학이 만들어낸 성과들을 여기 저기에 흩어놓아 사람에게 혼돈을 준다.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말을 상상하면서 이용한 것이 바로  순수 기호라는 것이다.눈 위에 찍힌 발자국과 남은 흔적은 <말>이라고  하는 동물을 나타내는 기호였다는 말이다.기호,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조건이 충분하지 않을 때  이용하면 참으로 요긴한 것이다.

이런 경향은  이분이 브리튼 사람인  데다 프란체스코 수도사인 데서  유래한다고 생각했다.

57 쪽

 

말이라는 것은 참  묘한 것이다.듣기에 따라 이 말이  저 말 되고 저 말이  이 말 될 수 있는 것이니까 456 쪽

 

관념은 만물의 기호요,형상은 기호의 기호,관념의  기호인 것이다.그러나 나는 인간의 육체나 관념이 없어도 이미지로써 이를 재구성한다.

그 이미지라고 하는 것은 사부님 보시기에 넉넉한지요?

아니다.기호에 지나지 못하는  관념에 만족해서는 참 배움이  이뤄지지 않는다.나름의 진실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찾아내어야 한다. 505 쪽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전체에 대한 검토

 

소설 속의 주인공 윌리암은 당대인이라고 포장되었으나 막상 사고방식을 차분히 검토해보면 훨씬 후대의 인물이다. 종교에 대한 여유 있는 태도는 당대의 인물로 이해할 없도록 만든다.

현대의 문제를 과거에 투사했다고 하는데 사실 종교라는 자리에 절대선을 놓고 생각해보면 여기에서 주는 교훈이 지금도 유효한 사회가 많이 있다.

 

소설을 포스트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포스트 모던이라는 의미는 모던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근대라는 기간은 수백년의 시간을 포괄하고 있는데 이것을 문예사조하나 혹은 사상의 지류 두개 가지고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주 간결하게 시도해 보면 증기기관을 필두로 기술의 발전이 물질해방을 가져왔고 해방의 결과 새롭게 대두된 부르조아 중심으로 사회 질서가 재편되며 인간 자체에 대한 해방이라는 문제 경제적인 공동체로서의 민족이라는 단위의 대두되어 서로 간에 갈등이 나타난 등으로 표현 있다. 시대의 문제를 직시한 사상은 마르크시즘이고 민족주의였다. 파시즘은 여기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고 자유민주주의는 특이한 대응이었다. 그렇다면 포스트 모던은 이와 같은 계급간의 대립과 민족간의 갈등이 물리적인 수단으로 쟁취되기 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결되는 사회를 지향한다고 보아야할지 모르겠다.그렇다면 결국 모던한 것의 대체물이라기 보다는 반론 혹은 불만의 집합이라고 보는 편이 알맞은 같다.

시대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크기가 세기가 가지고 있던 것과 비교할 훨씬 작다고 있다. 세대에 의해 산업화를 이룬 한국사회의 경우 다양한 문제를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고 종종 선진 사회에서 소화된 질문이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슬램덩크니 배꼽티니 펑크 문화와 같은 다분히 첨단의 요소와 노사간의 갈등이 분신과 같이 격렬하게 나타나는 사상의 자유가 제한된 이나 지역,남북간의 대립 다분히 그리 현대적이지 않은 요소가 뒤섞여 있었다. 마르크스,레닌,헤겔 시대의 사상가들이 제기한 질문을 이미 넘어선 문제라고 전제한 전개되었던 포스트 모던하다는 사조를 과정을 극히 압축하여 해결해야 했던 사회의 젊은이들은 정신적인 사치로만 여겼던 같다.

거대한 질문에 대해 모두들 머리를 젓고 있는 현실에서 짧은 지적 편력을 되돌아 보니 씁쓸한 느낌을 던져 버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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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책을 펴내자 그의 제자였던 알렉산더 대왕이 자신이 비싸게 돈을 주고 배운 것을 아무에게나 공개한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간의 지식은 결코 글귀만으로 얻을 수는 없으므로 대왕이 지불한 비싼 수업료는 헛된 것이 아니라고 대답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책을 통한 진리에의 접근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한 측면은 고대에는 왕이나 초빙할 수 있던 아주 값비싼 선생을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측면은 선생은 모셨는데 배우는 것은 오로지 자기 힘으로만 이룰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독서의 한계에 대한 이야기도 짚어야 하는데 태백산맥 열 권을 읽고 다시 해설서 열 권을 읽었다고 가정하자. 이제 나도 이 책에 대해 할말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신문에 나온 짤막한 한 페이지의 해설을 읽으며 새로운 사실과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파우스트>에 보면 아무리 열등한 친구라 해도 사귀다 보면, 당신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될 것이라는 경구가 있다.지나가면서 들은 평범한 사람의 견해에서도 늘 적어도 하나 대부분 그 이상의 새로운 느낌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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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문자를 발명한 이래로 세대를 넘어서는 기록의 방법은 어떤 식으로든 대상에 문자를 남기는 것이었다. 책이라는 것은 따라서 가장 전통적인 전달의 수단이었다. 전달의 목적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대화다.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문제는 대화를 청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서 평생을 걸려 만나더라도 만나기 어려울 정도라 것이다.그럼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무수한 책들을 어떻게 것인가 라는 물음에서 시작해보자.

 

세르반테스가 어떤 나쁜 책에도 가지 좋은 점은 있다고 했는데 말은 일견 타당하다.

 

명제 하나 

독서란 독자와 저자간에 이루어지는 하나의 대화다.

 

명제 .

대화를 통하여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만한 한가지 정도는 가지고 있다.

역으로 나도 대화를 통하여 다른 누구에게나 가지 정도는 배울 만한 것이 있다.

 

직관적으로 받아들여보면 대학생활을 하면서 교양강좌 괜찮은 강의가 어떤 것이냐고 선배에게 묻는 것은 다들 가지고 있는 경험이다. 택시 운전사에게 길을 묻는 것이나 자동차의 정비요령에 대하여 묻는 것도 자연스럽게 납득할 있다.

 

결론 - 두가지를 결합하면 모든 책에는 배울 만한 것이 적어도 하나는 있다는 명제가 된다.

 

일견 타당한 같은 명제에는 미처 고려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세워본 사람은 누구나 시간이 부족함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이 지금 한가하다면 역으로 눈앞의 목표가 없다는 이야기가 수도 있다. 제한된 시간으로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투자대비 효과의 극대화란 경제 법칙에 충실해야 한다.

교양강좌에 대해서 물으려면 성적이 좋고 후배를 가깝게 하는 선배에게 가는 것이 나을 것이고 자동차의 정비요령도 초면의 운전기사에게 묻는 보다는 가까운 숙련 운전자에게 물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책에는 가치가 있지만 제한된 자원 - 시간과 비용 - 소비하여 많은 효용을 얻을 있는 책을 고르기 위해 독자는 항상 자신의 안목과 기술을 높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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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있는 법을 설명 하기 전에 그렇지 했다고 후회하는 사람의 고백을 들어 보자. 아래 내용은 이문렬씨의 <젊은 날의 초상>,민음사  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내용 중에서 개의 단락이다.

 

책에 대한 턱없는 갈망 - 모든 것에 대해서 그러하지만,갈망은 항상 갈망을 낳기 마련이었다. 나는 무모하리만큼 열심히 읽었지만,읽으면 읽을 수록 도서관의 서가에는 그만큼 많이 읽어야 책들이 늘어났다.  발단은 나와 맞아떨어질 같으면서도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는 전공 때문이었다.

어쨌든 입학한 석달도 안돼 독서는 완전히 전공을 벗어나고 말았다. 나는 무슨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과목 과목의 책들 사이를, 강의실과 강의실 사이를 배회했다. 학구와는 거리가 글자 그대로의 배회였다. 왜냐하면 언제나 내가 읽고 있던 것은 개론서였고, 내가 마치 분야를 알았다는 듯이나 다른 분야를 기웃거릴 대조차도 실은 입문의 단계를 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렇게 읽은 피상적인 지식의 단편들은 약간 고급한 교양이나 찻집 같은 데서 동년배의 감탄을 사기에는 훌륭해도 대신 독서범위를 더욱더 무한정하게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항상 책에 대한 갈망으로 허겁지겁하였지만 느는 것은 새로운 갈망뿐 결국 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바보였다. 

 

나는 떠벌이기 시작했다. 신과 인간에 대해 도덕과 가치에 대해 그리고 세계와 존재에 대해.실제로 처음에는 녀석의 얼굴에서도 전날 내가 만났던 여러 길동무들의 얼굴에서와 마찬가지로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그걸 확인하고 나는 열심히 계속했다.

그런데 - 시간이 갈수록 녀석의 표정은 담담해져 갔다.

<중략>

참고 참았던 녀석의 웃음소리와 거기에 자극된 기침소리가 함께 어울려 나에게 그렇게 들려왔을 뿐이었다

<중략>

하이데거는 콜록,콜록, 잘못 이해되고,콜록, 일상언어학파는 전혀 읽지 않은 것이 ... 분명하지만, 콜록,콜록,콜록 ..... 186

 

그래, 나는 권의 책을 읽었다. 그렇지만 또한 탐구였다고 말할 있는가. 가슴에 불타고 있던 것이 진정한 이데아의 광휘였을까. 아니었다. 아니었다. 소년의 허영심으로, 목로주점의 탁자를 위하여, 어쭙잖은 숙녀와 마주 앉은 다방의 찻잔을 위하여 읽었을 뿐이다.

 

번째 단락은 대학을 들어서자 지식에 대한 갈망으로 책이라는 바다에 빠져 버린 부분이고 다음 단락은 길가다 만난 사람에게 철학 이야기를 늘어놓다 아주 혹독한 비웃음을 사는 이야기다. 마지막은 자신의 헛된 독서에 보낸 시간들을 절망 어린 탄식을 늘어놓으며 반성하는 장면이다.

소설을 읽어 보면  이문열 씨가 가지고 있는 장점과 한계가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그의 책을 권이라도 읽은 사람들은 넓은 지적영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해박함과 남과 다르게 있는 색다른 시각 등에서 놀라움을 참지 못한다. 권의 책이라고 감히 말하는 것에도 나타나는데 그의 독서는 엄청나게 광범위하였을 것이다. 문학에 관한 도서 목록이 시경과 일리아드부터 시작하는 것을 보아도 결코 다이제스트 독서물이나 비평적 지식의 짜집기에 만족하지는 않았을 같다.모든 분야에서 개설서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자조하는 그이지만 자신의 독서의 범위를 나름대로 넓게 잡았고 특히 문학에 있어서는 남다른 노력을 같다.

결국 좌절을 느꼈다는 것은 모든 분야에 걸쳐 다르게 구축된 두터운 지식도 전문가와 대화하기에는 보통사람의 넓은 지적 관심 밖에 되지 않았다는 데서 느낀 실망감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문열씨도 자신의 문학을 세계화하는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해 적이 있는 같다. 그럴 지금 시대의 넓은 독자를 가진 밀란 쿤데라 같은 작가와 은연중에 비교해 보지는 않았을까? 밀란 쿤데라의 글에서 느껴지는 해박함은 니체의 개념에서 출발하여 톨스토이,성경 등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아예 영역을 넘어 베토벤의 음악까지 인용하는 자유로움에서 비롯된다. 서구의 명저라는 책을 보면 백년 동안 읽힐 같지는 않은 그냥 수십 동안 분야에서 좋은 읽을 거리로 남을 같은 책들에서도 헤겔,마르크스,칸트,톨스토이 등과 같은 대사상가의 저서와 이론이 자유롭게 인용되며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을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저술되어진 책들에서는 이와 같이 고전을 넓게 구사 경우가 매우 드물다. 한국의 문화 내지 학문이 세계적인 보편성을 취득하는데 한계를 가지게 되는 이유는 역으로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하는 고전의 수용에서 그만큼 취약했다 점이  원인으로 작용할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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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5-03-12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울고 싶습니다 사마천님이 인용하신 이문열이 쓴 그 부분, 저도 읽으면서 무력감에 싸였던 적이 있습니다 실은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전 비교적 책을 많이 읽는 편인데 아빠가 늘 제 독서열에 대해 경고하곤 합니다 저 많은 책을 그저 글자만 읽는 게 아니냐, 대체 몇 %나 소화시켰다고 생각하느냐... 저도 그저 관심의 폭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넓혀 가지만, 정작 제대로 읽은 건 하나도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이야 그저 교양인의 독서 정도로 한계를 짓고 있지만, 과연 어떻게 책을 읽는 것이 제대로 읽는 것인지, 한숨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marine 2005-03-12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제가 이 글 좀 퍼갑니다 ^^

사마천 2005-03-12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대목읽으면서 한참 고민을 했습니다.
올바른 독서법이라는 문제는 늘 어렵죠. 모티머의 독서법이라는 책을 한번 보시기를. 평생 도움이 많이 됩니다.

marine 2005-03-1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