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바로 받아들여지는 머리에 구성되어 있는 기존의 지적체계와 자동적으로 결합하여 반응을 일으킨다. 강의 중에 언뜻언뜻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내가 지금 순간 의식적으로 찾으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평소에 가지고 있던 문제들 중에서 나름대로의 해결에 대한 실마리가 같다는 계기가 있다.

순간적으로 떠올랐다는 것은 의식 저변에서 연관 작용을 통해 하나의 화두가 주어지는 것이다. 화두를 가지고 연관된 사실이나 명제를 의식의 상층부로 떠올리고 정렬시켜 문제의 제기에서 해답까지 일관된 논리의 연관체를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들은 주목할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 나가는 진도에 방해되지 않기위해 일단 쪽에 메모를 하여 부담을 더는 것이 필요하다.

 

참고로 강의와 관련되어 이와 같이 다양한 문제를 수용하기 위해 노트는 되도록 펀치 것을 활용하도록 한다. 작성된 내용을 주제나 내용별로 나누어 보관 있기 때문에 재활용을 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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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15 분씩만 책을 읽어서는 어떤 책읽기 법도 익힐 없다.  하버드 대학 고전부

 

15 이라는 시간은 수학 공부를 한다면 문제 개를 풀다 넘길 밖에 없는 정도의 시간이다. 문제 개만 풀고 다시 책을 덮는 어리석은 학생은 별로 없다. 그럴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수학책을 펴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독서행위가 하나의 완결성을 가지려면 대상의 수준에 따라 일정한 기본 단위시간을 가져야 한다. 15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을 소설을 읽는 것은 어느 정도 의미가 있지만 철학책의 구절 하나를 들고 고민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20분에서 시간 정도의 여유라면 두터운 전공 책을 차분하게 읽을 있는 시간도 아니다.

정도의 시간적인 공간에는 짤막한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 두개를 택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주간지는 짤막한 글들의 집합이라 하나 하나의 문장으로 읽기를 완결 지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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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5-03-12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사실 저도 잠깐 짬이 날 때 이상하게 책을 펴기가 싫어져요 남들은 짜투리 시간에 읽는다는데, 전 가운데 끊기는 게 싫더라구요 이런 이유에서 제 무의식 중에 읽기 싫어졌나 봐요 바로 완결성의 문제였군요 ^^
 

정확히 표현하면 시간을 다투어 의사결정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침에 굳이 신문을 보지 말라는 이야기다.

신문이란 다양한 분야에 대해 짤막짤막한 사실들을 잔뜩 모아 놓은 것이다. 이렇게 많은 조각 사실들을 아침부터 머리에 집어 넣고나면 혼란스러울 것이다.

머리에 집어 넣어진 하나하나가 생각으로 이어질 것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신문의 경우 언뜻 눈으로 전체를 훑어 보면 수십 이상의 사실이 들어오는데 하나하나가 자신을 의식 있게 분석해 달라고 요구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것이 기억의 아래 저장소로 내려가거나 잊혀지기를 바라는 것은 일정한 시간이 지난 다음이다. 따라서 동안 머리가 맑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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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5-03-12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마천님의 서재에는 좋은 글들이 참 많군요 저도 꼭 신문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어요 특히 신문에 어떤 기사가 나면 그 쪽으로 생각이 미쳐 괜한 불안증을 유발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문을 안 보면 시대에 뒤떨어질까 봐, 불안감에 보곤 했어요 앞으로는 굳이 열심히 안 읽어도 될 것 같네요 ^^
 

영국의 철학자 러셀은 가장 젊어서 머리가 좋을 때는 수학을 공부해 업적을 남기고 조금 머리가 나빠지자 철학을 공부해서 <서양철학사> 저술하였다. 머리가 나빠진 생의 후반부에는 사회과학 연구나 평화운동에 종사하였다.

가장 맑은 시간 아침에는 머리가 비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고교 시절에 입시공부를 해았을 것이다. 아침나절에 무슨 과목을 공부했는지 되돌아보자. 대부분 수학 아니면 영어였을 것이다. 아침에 머리가 맑을때는 오랫동안 머리를 자유롭지 못게 하던 일에 마음을 집중하라. 이러한 문제들은 가끔씩 잠깐 주의를 기울이른 것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기에 그만큼 집중이 필요하다.

조금 긴장이 풀리면 지속적으로 노력이 필요한 부문에 시간을 들인다. 이러한 예는 암기과목을 있다. 접근이 어려워지면 짤막하고 흥미를 유지해주는 분야 가령 신문이나 소설 읽기에 시간을 들인다.

아주 아무 것도 싫다면 나름대로 유용한 분야에 시간을 투입한다. 비디오와 같이 자신은 수동적으로 있어도 내용은 진행되는 쪽으로 시간을 보내고 밖에 적당한 오락물을 주위에 놓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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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비자다. 내가 하나의 물건을 있기 까지는 생산자와 유통업자가 있어야한다. 지식에도 마찬가지로 생산자와 유통업자 소비자라는 서로 다른 계층이 있다.

학문을 추구한다는 것은 이러한 여러 단계 중의 하나에 자신을 자리 매김하는 것으로 생산과정에 종사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 외국에서 공부하시던 서울대학교의 교수님 분이 자신은 소비자 약간 유통업자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것을 들었다.

한국에서 인문사회과학 분야 학문에 뜻을 두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좌절을 느끼게 하는 것에는 가지 원인이 있는 하나는 고전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어다. 고전은 앞에 묘사 한대로 지식의 산에서 중간 중간의 굵은 능선이다. 다른 사람의 지적인 축적물을 정확히 파악하지 한다면 그들이 도달해 놓은 한계가 어느 곳인지 방법도 없다.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언급한다. 기껏 고민을 하다 보면 이전에 누가 깔끔히 정리해 놓은 것을 발견할 있다. 얼마나 허탈할 것인가?

어지간히 뛰어난 사람도 역사 속에서 지적 능력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 났던 사람들을 무수히 만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다른 사람의 노력이 만들어 결과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중턱의 무수한 쉼터나 앞선 등반객의 자취를 무시하고 밑바닥부터 혼자 힘으로만 오르겠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이 용기 있다는 이야기가 듣고 싶겠지만 적어도 현명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할 것이라고 있다. 가령 누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들고 산에 올라가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헤겔의 <정신현상학> 만들어 내려왔다고 가정해 보자 이미 시대는 헤겔의 시대를 넘어 마르크스를 거쳐 포스트 모던까지 흘러갔다. 심하게 말하면 그는 고대인간일 따름이다.

 

따라서 창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이 소화한 고전의 범위를 알아야 한다. 이를 기반으로 하고 지금까지 인류가 도달한 한계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다시 앞으로 나아갈 있는 힘이 된다. 자연과학과는 다르게 인문사회과학에서는 자신이 섭렵한 고전의 범위를 따져 보아야 한다. 그것이 창조를 이룰 있는 가능성의 한계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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