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유비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을 읽다보면 유비가 너무나도 착하고 순진하게 그려져서 심하게 말하면 쪼다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특히 고우영이 그려낸 만화의 경우 그런 이미지를 심어주려고 불철주야 노력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유비라는 인물은 결코 쪼다가 아니다. 하나의 왕조를 세우는 일은 세력을 모으고 목표를 부여해서 한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거대한 작업이다.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환경을 고스란히 물려받는 것이라면 모르되 자신의 손으로 그만한 일을 이루어낸 사람을 어찌 가볍게 있겠나.

유비를 가볍게 보는 것이 오류인 것처럼 그가 한왕실의 종친이라 역사적인 정당성을 갖는다고 보는 것에도 무리가 있다. 유비가 자신의 계보를 한왕조 초기로부터 끌어내는데 사이에는 무려 4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가기 때문에 뚜렷한 물증으로 진위여부를 가리기는 어렵다. 대한민국에 김씨 이씨 박씨가 많지만 이들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정말로 왕족들과 혈연관계가 있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앞서 조조가 조참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것과 마찬가지다.

 

쪼다도 아니고 황족도 아니라면 유비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인물평을 하기가 쉽지 않은 주요 이유 중의 하나는 그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촉나라는 삼국 중에 유일하게 사관을 두지 않아서 체계있게 잡힌 사료가 너무 부족하였다. 그래서 촉나라 본기는 위나라 본기에 비해 반에 반밖에 안되는 정도의 분량이고 유비를 그린 선주전도 조조를 그린 위무제기에 비하면 1/4 안되는 약소한 수준이다. 여기서는 우선 정사를 중심으로 재구성을 해가면서 유비의 행적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유비에 대한 인물을 평하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참고해야 것이 당대인들의 평가다. 그런면에서 조조가 유비를 알아보고 영웅이라고 칭해주었다는 것과 그에 따라 조조의 주요 참모들이 제거하기를 건의했다는 것은 누구도 유비라는 인물을 범상히 없다는 근거가 된다. 유비는 유랑하는 신세였지만 조조 이외에도 항상 당대의 군웅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대우를 받았다. 처음 고향에서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자금을 받아 군사를 일으킨 것이나 서주의 자사 도겸에게서 자리를 물려받은 것도 아무나 없는 일이다. 특히 공손찬, 원소, 유표 각기 열전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역사의 흐름을 만들어가던 인물들 대부분이 유비를 경시하지 못했다.

하나 유비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제갈량과의 관계다. 유비가 성장하는데 제갈량이 도움을 것은 사실이지만 전적으로 제갈량의 도움을 받아서만 생존할 있었던 인물도 아니었다. 물론 제갈량이 여러면에서 커다른 역할을 것은 사실이다. 손권과의 동맹, 삼국정립의 구도, 유비 사후의 내치를 통해 촉을 안정화시킨 모두 범상한 참모가 수행할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제갈량을 만난 이후의 모든 성공과 실패를 제갈량의 유무에 따라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

그런 유비의 일생을 간략히 평한다면 줄곧 의리를 고수하며 살려 노력했지만 장수로서 성과는 아주 뛰어나지는 않았던 지도자라고 있다. 주요 능력은 덕이라고 있다. 포용력이 컸고 한번 인연을 맺은 인물들이 배신하지 않은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하나의 인물이 일을 이루려면 우선 커다란 야망을 가져야하고 다음으로 뜻을 이룰만한 능력과 품격이있어야 한다. 유비는 어려서 집안형편이 어려워 돗자리 장수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본인의 자질은 훌륭하였다고 보여진다. 코흘리개 시절에도 커다란 뽕나무를 보면서 나는 앞으로 이런 거개(황제가 타는 수레를 덮는) 쓰겠다고 했다 한다. 그의 성장가능성을 알아본 가까운 인척의 도움으로 중랑장 노식에게서 고급 교육을 받을 있었다. 후일 스승은 황건족 토벌군 사령관이 되고 동문인 공손찬 또한 주를 지배하는 인물이 되었다. 역시 과거에도 학연은 그가 성장하는데 제법 밑거름이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에는 동향의식이 무척 강했다. 중국이란 땅이 워낙 컸기 때문에 지역은 말투가 다르고 풍습이 다르다. 그래서 향촌은 고대 춘추전국 시대부터 이어져오는 자치체제를 유지하였고 동향인들 끼리 매우 끈끈한 인간관계를 가져갔다. 좋은 예로 한나라 초기의 유방과 부하들과의 관계가 있다. 유방이 패업을 이룰 있었던 힘은 같은 소하, 조참과 같은 향촌의 농민출신들의 단결력에서 나왔다고 평가된다. 그래서 중간에 합류한 초나라 출신 한신, 경포들은 배척을 받아 죽게 되었고 한나라 출신 장량조차 스스로 자리를 물러서게 되었다. 유방은 죽을 황후 여후가 던진 누구를 재상으로 삼을까하는 질문에 대해서 소하, 조참 동향출신 인재들만을 차례로 열거했다고 한다.

삼국지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발견된다. 조조 집단의 중추가 조씨와 하후씨라는 동향출신의 괜찮은 호족이었는데 비해서 유비는 출신배경이 미약했기 때문에 그런 가문의 배경은 없었다. 대신 자기가 인연을 맺는 사람 사람을 확실히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키워나갈 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가깝게 사람은 동향에서 만난 관우와 장비라는 인재였다. 사람에 대한 평가도 소설과 정사가 제법 차이 나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다루겠다. 한가지 먼저 지적할 것은 소설에 나온 것처럼 유비가 관우, 장비 사람과 도원결의를 했다는 기록은 정사에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항상 사람과 밥을 같이 먹고 잠을 같이 잤다는 기록은 배송지의 주석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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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영웅들의 등장

 

1.1.1               조조

 

조조의 가계는 불확실하다. 정사에보면 한나라의 초기 공신이었던 조참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허풍이라고 생각된다. 한왕조는 400년을 지속하였는데 과정에서 가문이 계보를 제대로 이어가지는 못했다고 보여진다. 조조의 아버지는 잘나가던 환관의 양자로 들어가서 손쉽게 영달하려고 했는데 조조는 이런 가계에 대해서 별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조의 가문이 3대에 걸쳐 정승을 배출했던 원소의 가문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촌민의 수준까지 영락한 수준에서 올라와야 했던 유비와는 비길 바가 아니었다.

조조 개인으로 보면 주변이 자신에게 강요하는 틀을 따르지는 않았다. 공부도 억지로 시키면 안하지만 필요하면 부단히 노력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수도의 대문을 지키는 지위에 있을 때는 나가는 환관의 숙부도 법을 어기는 보고 바로 처형을 해버렸다.

조조의 인물을 평한 중에 유명한 것이태평시대에는 유능한 신하요 난세에는 효웅이 것이다라는 짤막한 문장이다. 사실 난세란 평시에 유능한 신하가 될만한 인물들이 충성을 거두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뛰어다니는 세상이다. 애초에 조조도 한의 충실한 신하로 출발했지만 한이라는 체제가 이상 희망이 없다고 보여지자 점차 자신의 야심을 발휘해 나가게 되었다.

조조의 강점은 역시 지혜다. 특히 전장에서의 병법에 기초한 전략의 효과적 구사와 국가경영을 위한 초석만들기에 있어서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사물을 전체적으로 알았고 인간의 심리를 읽는데 매우 뛰어났다. 덕분에 때로는 싸우지 않고 이겼고 일일이 이익과 원한을 다투지 않아 많은 이질적 세력들을 평화적으로 흡수해서 통일과업의 속도를 빨리 있었다. 또한 피지배층인 농민들의 고통을 알고 있었어 조세부과 정치를 되도록 부담 없이 수행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본다면 정치가로서 높은 점수를 밖에 없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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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는 세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성장이다.
시간이 갈수록 지식은 늘어가고 지위는 올라가고 월급액도 많아진다.
아이들 커가는 재미, 가정을 꾸리는 것이나 옷과 차 등 소비도 커진다.
시간이 갈수록 축적해가는 재미가 있다.

다른 하나는 소멸이다.
인간은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몸은 자연에서 빌려쓴 것이고 거기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오늘 하루도 나는 내게 주어진 가장 젊고 건강한 날 하루를 소모하는 것이다.

마지막은 순환이다.
해가 다시 떠오르듯, 한 해가 가면 다른 한해가 시작되듯
우리는 일종의 순환구조를 만들어서 거듭남을 경험한다.

이 세가지 유형을 잘 이해하면서 자기 조절을 해야 한다.

소멸하는 능력인 암기력의 비중을 줄이고 젊어서만 할 수 있는 것들
어학, 프로그래밍 능력,업무 기본지식, 학위 취득 등을 알맞게 배치해야 한다.
다음으로 나이들수록 강해지는 것들 지위,자본,경험에서 나오는 지혜의 힘을
이해해서 자신의 힘을 레버리지 하여 활용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가끔 자신을 채근하며 리프레쉬해야 한다.
새로운 결심 다짐을 하면서 목표를 향해 도전하도록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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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를 읽고 나면 이번에는 정사 삼국지 읽기를 시도해볼 만하다. <삼국지연의> 소설이라면 <삼국지> 중국의 정사 25 가지 중의 하나에 들어가는 역사책이다. 전체 내용이 한국에 번역된 것은 최근이지만 중요도는 결코 낮지 않다. 조선에 대한 기록으로 높이 평가받는 위지동이전에는 조선 사람들이 음주가무를 무척 즐긴다는 지금도 널리 받아들여지는 특성을 담고 있다. 역시 당대 중국의 사관들의 관찰력의 예리함과 기록의 정밀함을 다시 있는 대목이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촉나라의 사관출신으로 촉이 망하자 진에 귀속하여 명을 받아 먼저 제갈량에 대한 일고를 저술하였고 다음으로 삼국에 대한 역사서를 저술하였다. 사마천의 기전체 서술 방식을 따르면서 삼국간의 대립에 대해서 나름대로 객관적인 서술을 하려고 한다. 전체적으로 매우 간소한 서술법을 취하고 있는데 가장 중심으로 삼는 인물은 역시 조조다. 권을 읽고 다음의 인상은 인물들이 소설에서 보다 규모가 작다는 생각이었다.  제갈량이나 관우 <삼국지연의>에서 중심으로 서술되는 인물들에 대해 기록이 장을 넘지 못한다. 삼국지에서 형성된 소설로서의 허구에 대해 실제 있었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생각의 균형점을 잡기 위해 책을 차분하게 읽어 보는 것이 괜찮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땀을 쥐게 하도록 흥미가 있지는 않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촉나라를 내세우고 삼국지에서는 위나라를 내세워서 독자를 헷갈리게 하는데 정말 진실은 무엇인지 궁금할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으로 촉한 정통론이 남송 이후에야 나왔다는 점을 이해야 한다. 남송이라는 사회는 여러 측면에서 명분을 매우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현실정치에서 북방유목민족과의 대결이 만들어 낸 굴욕감의 반작용이라 할 수 있다. 문화를 가졌다는 자부심은 반작용으로 일으켜 세워 정의,전통과 같은 가치를 매우 강조했다. 이 시기에 저술된 주희에 의해 저술된 <자치통감 강목>은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이라는 사서를 명분론을 바탕으로 재 서술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촉한이 한을 계승하였다는 근거로 명분을 삼아 유비의 촉을 정통으로 삼는 역사서술이 시작되었고 소설 <삼국지 연의>로 이 분위기가 이어져 갔다.

 

이러한 점을 놓고 볼 때는 조조가 역사에 공헌한 점을 바로 인정해야 한다. 실제 조조는 파괴와 재건을 모두 수행한 인물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역사서들은 그가 한왕조와 신의를 저버리고 파괴해갔다는 점을 주로 보았지 그가 붕괴된 질서를 꾸준하게 재건해서 민중들에게 끼친 혜택에는 공정한 점수를 주지 못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런 배경을 안고 당대에 실제 발생했던 사건들과 소설을 비교해가면서 교훈을 찾는 작업을 쭉 진행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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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중앙정부의 붕괴 지방군벌의 발호

 

당장 눈앞에 닥친 황건적의 난에 대처하기 위해 잠시 중지된 중앙의 권력투쟁은 난이 어느 정도 진압되자 재발되었다. 외척의 대표인 황후의 오라버니 대장군 하진은 지극히 무능하고 유유부단한 인간이었다. 환관과 사이가 나빴지만 직접 제거할 자신감이 없었다. 그래서 멀리 변방의 정예군을 이끌고 있는 동탁을 수도로 불러들였다. 이정도 했으면 환관들이 숙이고 들어오겠지 했지만 군대의 이동을 전해 듣고 이제 막바지에 몰렸다고 생각한 환관세력이 먼저 하진을 암살해버렸다. 여기에 원소라는 청년장교가 앞장서서 환관들을 모두 죽여버리는 피의 보복을 하게 되자 궁전의 안팎이 모두 피바다로 변했다. 나이 어린 황제와 황후는 난리속에 도망다니기 바빴고 조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시기에 동탁은 이민족이 많이 포함되어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수도에 도달한 상태였다. 그는 권력의 공백을 보고 자연스럽게 군대의 물리력을 기반으로 자기식의 군정체제를 수립해나갔다.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첫번째로 시도하는 것이 우두머리를 직접 자기손으로 세우는 것이다. 동탁도 황제를 바꾸어 새로 옹립하니 이가 마지막 황제 헌제다. 이어서 기존 조정의 권위를 이용해서 새롭게 중앙과 지방의 질서를 재편하려고 시도했지만 전반적으로 민심이 따르지는 않았다. 먼저 청년장교들의 대표주자인 원소와 조조가 각기 자신의 본거지로 떠나버렸다. 표면적으로 이들은 아직 조정의 중간급 장교이기 때문에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변에 흐르는 반감을 나타내주는 지표 정도로는 있다. 나아가 동탁은 중앙의 기존 고관들의 추천을 받아 새로 지방수령들을 임명했는데 이렇게 임명된 수령들이 일제히 힘을 모아 동탁에 대해 토벌군을 일으키게 되자 동탁은 위기를 맞게된다.

 

동탁군은 크게 나누어 동탁에게 임명장을 받은 지방관들이 부류이고 조조와 원소, 손견과 같이 직급은 낮지만 황건적의 난을 통해 한차례 자기 세력을 형성하고 전투에 참여했던 청년장교들이 부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이 모여서 동탁을 꺾어보자는 시도는 좋았지만 색깔이 다른 세력들이 너무 많이 모여서 다들 자기 욕심을 가지게되니 힘이 한데 모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변방의 이민족을 끌어안고 있는 동탁군이 너무 강했다. 조조는 지정학적인 인식을 통해 수도로 들어가는 물류를 막아 장기전을 승리로 가져가기 위한 대국적인 전략을 제시했지만 대다수가 그를 따라주지 않았다. 결국 동탁 토벌은 실패하고 말았는데 결과는 다들 물러서서 각기 독자적으로 지방권력을 수립하는 무정부 상태였다. 다음부터는 나름대로 자신의 힘을 키워서 주변을 하나씩 병합해나가는 약육강식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명분이야 어찌하던 간에 순간부터 중앙정부의 인사권이 지방에 작용되지 않게 되어 중앙은 중앙대로 지방은 지방대로 서로 갈라서게 되는 대난리가 시작된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한왕조는 이때 무너진 것이다.

대결의 과정에서 지방권력들은 자신의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서 민초들에게는 엄청난 수탈을 가했다. 자기 지역의 군벌이 전쟁에 이기면 그나마 낫지만 졌다면 민초들은 승자에 의해 다시 한차례 약탈을 겪게 된다. 소농들은 몰락해 주변의 권세있는 호족에게 자진해서 예속되거나 자신의 고향을 떠나 여러곳으로 유랑하게 되었다. 정상적인 질서와 생산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식량의 값은 천정부지로 올라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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