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초년병 시절. 회사에서 해외 SW 패키지를 도입하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2년 정도 후배들 약 10여명이 교육을 받았는데 영어로 진행되는 단기간 집중 코스다 보니 성적차가 확연하게 나타났다. 전산 전공자들이 월등하게 앞서나갔다. 새로운 것을 깨닫는 힘이 강했고 이를 남들에게 전파하는데 열심이었다. 반면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건지 헤메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대학도 떨어지고 신혼초라 밤늦게 비디오 보느라 꾸벅꾸벅 조는 친구도 있었다. 당연히 성적은 10여명 중 제일 바닥. 그런데 10년 가까이 지나서 가장 돈을 많이 벌어들인 친구는 오히려 꾸벅꾸벅이었다. 왜 그럴까? 우선 환경적으로 이 패키지가 일대 붐을 일으켜버렸기 때문에 프리랜서 시장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회사에서 우직하게 나중에는 프리랜서 흐름을 잘 타서 활동하게 된 이 친구는 결과적으로 아파트를 여러채 장만했다. 반면 가장 앞서나갔던 명문대 전산과 출신은 이 패키지를 너무 지겨워해서 중간에 다른길로 돌렸다. 우수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평균에서 좀 앞서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교훈은 무엇일까? 자신에게 특별한 능력이 없다면 줄이라도 잘 서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혼자 뛰어다닌다고 해서 줄이 잘 세워지지는 않지만 우연이라도 제대로 된 줄에 섰으면 놓치지 말고 계속 잡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 역량이 딸리기 때문에 잡은 기회에 보다 감사하고 집중한 사람이 결국 제법 큰 보답을 받게 되었다. 반면 역량이 앞서는 사람은 이것 말고 또 다른 것이 없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며 이곳 저곳 두드려본다. 마지막에 보면 전문성이나 집중도에서는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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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들어갈 때 회사에서는 여성인력을 대거 채용했다. 처음에는 직장의 이쁜 꽃 같이 보이던 그들도 세월이 지나자 성패가 갈린다. 그런데 생각보다 명문대 출신의 성과는 기대만큼 좋지 않았다. 왜 그럴까? 유심히 지켜본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명문대 출신들이 먼저 대접받기를 원했던 데서 잘못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흔히 이쁜 아가씨들이 먼저 밥값 내는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명문대 출신들은 대체로 회사에서 먼저 밥값 내기 - 즉 기여,헌신 - 보다는 회사가 밥값 내주기 - 보직 등에서 좋게 배치해주기를 - 를 원했다.

하지만 비명문대들은 달랐다. 회사가 채용해준 것에 대해 감지덕지 했고 이들은 퇴로 없는 싸움에 들어갔다. 사기의 한신이 처음 제시한 배수진의 싸움을 한 것이다. 회사가 돈을 주고 사람을 쓰는 이유 중 가장 핵심은 책임감있게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처음 회사에서 맡게되는 역할은 대부분 매우 단순하고 지겨운 일이다. 만화 초밥왕을 봐도 접시닦고 청소하고 잘 해야 밥짓지만 기술은 결코 가르쳐주지 않는다. 회사도 매한가지다. 하지만 명문대생들은 그동안 대접받으냐 오냐오냐해서 살아오던 가락이 있어 이것을 못참는다. 부서를 옮겨달라, 업무를 바꾸달라. 그런 응석도 한두번 치르다보면 눈밖에 나게 마련이다.

남자들과 달라서 여자들은 업무상 만나서도 여자 - 이쁠수록 심함 - 로서 대접받기를 원하는 경우가 더 빈번하게 발생한다. 결과는 이른바 왕따다. 조직의 정보가 제대로 안흘러들어오고 뒷소리가 나오면서 서서히 밀려나는 것이다. 반면 비명문대생들 중에는 다는 아니지만 끈기로 승부하는 사람들도 나온다. 이들은 대접받는다.

때로는 줄도 잘 서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되면 정말 충분한 보답을 받는 것이다. 입사동기 중에 돈을 가장 많이 - 100억대 - 번 사람은 D여대를 나온 사람이다. 프로그램 실력 등을 볼 때 A급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끈기와 고집에 더해서 흐름을 잘 만나자 그렇게 까지 올라간다. 반면에 명문대출신들? 조기 퇴직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론적으로 대학의 학벌이 회사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특히 여자들에게서는 더 하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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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내 주변에서 발생한 일부터 하나 예로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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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후배중에 최근 S회사에 연봉 5억으로 입사한 친구가 있다. 주변의 친구들은 여전히 박사 마치고 대학에 자리잡은 경우도 있고 아직 자리 찾으러 시간 강사 노릇하는 경우도 많다. 극단적인 케이스지만 연봉으로 계산해서 비교하면 5억대 3천 내외가 된다. (하지만 세금 내면 꼭 이렇게 비교되지는 않는다.)

뭘했길래 이런일이 발생하냐고?

5억 케이스는 수학박사를 미국에서 받고 월가가 있는 맨하튼의 유명한 대학에서 금융공학(파생상품 관련) 부문의 post-doctor를 마치고 미국회사를 다녔다. 월가의 연봉이 쎄고 필요한 사람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라면 연봉 3-40만불도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이걸 요즘 해외인재 확보에 혈안이 된 S재벌의 증권계열사가 스카웃하니 국내연봉으로 5억이 나오게 된다.

수학 전공이라고 해도 다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길을 잘 찾아가면 확다른 결과가 나오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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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이런 일이 발생하고 어떤 길을 가야할 까?

첫째 노력과 성과가 결코 그대로 비례하지 않는 다는 코치의 80:20의 법칙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래는 관련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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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장과 평사원의 연봉차이가 한국,일본은 10배 이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많게는 수백배죠. 미국 경영자의 어마어마한 연봉에 대해 불만 있는 사람도 많죠. 실효성에 대한 의문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한국도 점차 80:20의 사회로 가는것 같습니다. 삼성전자 사장을 지낸 진대제는 수백억의 스톡옵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원은? 글쎄요 아무리 잘주어도 4000만원 미만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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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최고경영자는 능력이나 도덕 면에서 사원보다 100배 이상 대우를 받아야 할까/ 여기에 대한 논란은 매우 많지만 이제 한국도 그런 시대가 된 것은 사실이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기업 구조조정과 함께 사장들의 월급 올리기에 까지 밀려온 것이다.

만약 나이가 젋다면 이 상황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적응하기를 권하고 싶다. 소위 준비된 인재들을 예로 들면 해외 MBA 출신들이 많다. 미국도 MBA는 자기가 번 돈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분명하게 목표를 가지고 준비했고 비싼돈을 냈기에 열심이다. 결과는? 상대적으로 준비된 인재에 가까워지지 않겠나?

그리고 무엇보다 글로벌 시대를 잘 이해해야 한다. 한국에 밀려드는 개방 압력의 조류는 결국 살아남을 기업 과 그렇지 못한 기업 특히 더 강해질 기업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들 기업이 변화를 위해 배우려고 하는 지식을 미국에서 곁눈질이라도 하고 왔다면 당연히 대우는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처음 내가 들었던 예도 이렇게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우리 모두는 수요공급의 법칙을 배운다. 하지만 자기 삶에서 이 법칙을 활용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답은 간단하다. 한국이 앞으로 필요한 지식 중 아직 없는 것을 미국가서 배워온다면 충분히 대우 받는다. 특별한 대우는 희소성에서 나오고 이는 결국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먼저 갔기에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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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지막을 보면
2000년 뒤 인간은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왜 인간은 우주를 뛰어다니지 않고
외계인들이 인간을 찾아오게 되었을까요?
영화에는 물론 단서가 있습니다.

소년이 길을 다니다 붙들려서 끌려간
원형경기장을 보셨나요?
그 장면을 보면서
글레디이에터가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로봇을 부수고 열광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보통 사람들로 보입니다.
타인의 고통으로 자신의 즐거움을 취하려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결국 망할 수 밖에 없죠.
바로 로마제국의 종말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영화 속의 로봇은 꼭 진짜 로봇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는 잣대는 여러가지가 가능합니다.
인종,피부색,출신지역(특히 한국),남녀...
그런 잣대에 의해 구분되어 하위로 떨어진 존재들
전체를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소년이 갈구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구별되어진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애타게
바라는 것이죠.
주변을 보고 우리의 사랑을 애타게 바라는 존재가
없는지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뭐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끌었냐고
하시는 분도 있지만
진리는 단순한 곳에 존재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모은 신약 성서의 말씀은
'서로 사랑하라'는 한 마디로 축약됩니다.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 있냐고요?
당연히 별로 없죠?
하지만 문장으로, 머리로, 지식으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아는 것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래서 영화작가는 가슴으로 느끼도록
이야기를 영상에 길게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그 전개가 그럴 듯 할 때 우리가 명작이라고 하죠.

참고로 제가 본 영화관에서는 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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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고의 작품을 영화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 깊이 있는 사색에서 나온 통찰을 소설이 아니고 영화로 보여주는 것은 범상한 감독에게는 무리한 일이다.
그래도 앤서니 퀸 주연의 작품은 수작이라고 평할 만 하다.

영화의 남자주인공은 꼽추다. 어머니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자신에게 주어진 종치는 일만 하고있다. 성당의 종탑에서 내려다보면 세상의 사물들은 조그맣게 보인다. 그 거리만큼 이상으로 그와 세상과의 사이에는 깊은 강이 흐르고 있다. 아무도 그에게 다가오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세상속으로 다가가고 싶다. 적어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욕망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가 주인님인 신부의 명령에 의해 에스메랄다라는 미모의 집시여인을 납치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덕분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여주인공 역할인 이 여인은 매혹적인 춤을 추며 여러 남자들의 유혹이 담긴 시선을 받는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분명 미덕이 있다. 거지들에게 붙들려 죽을 뻔한 3류 시인을 살리기 위해 ‘위장’ 결혼도 해준다. 작은 욕망에 쉽게 분노하는 하류세계 속에서 그녀는 하나의 아름다운 꽃이고 나아가 성녀의 수준으로 대우받는다. 그녀는 거지속에 같이 머무르지만 분명 다르고 그런 다름이 서로를 구별 짓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고 포용해서 한 단계를 높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꼽추는 에스메랄다의 호의에 의해 한결 가벼운 처벌을 받았고 이를 감사하며 한걸음 나아가 죄에 대해서까지 포용하고 베푸는 그녀에 대해 감히 애정까지 품게 된다. 그가 세상으로부터 받게 된 첫번째 호의였기에 이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애정은 그만큼 맹목적일 만큼 절대적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애정이 머무르는 것은 잘생기고 멋진 수비대장이었다. 그는 이미 귀족 처녀를 약혼자로 두었지만 프랑스 남자답게 풍류를 즐겨보려고 시도한다. 둘이 은밀히 만나 서로를 떠보다가 사랑을 맺으려하는 순간에 날카로운 칼로 누군가가 수비대장을 찔러 버린다. 이 사건의 범인으로 에스메랄다가 잡혀서 마녀로 몰려 사형을 선고 받게 된다. 고문에 의한 자백유도를 최선의 수단으로 여겼던 당대의 우울한 풍경을 보여주며 교회와 권력의 우매함을 드러낸다.

에스메랄다가 위기에 빠졌는데 누가 구하러 나설 것인가?
그녀는 짧은 기간이지만 자신이 마음을 주었던 수비대장이 나서주기를 바라지만 그는 진실을 밝히는 것을 비롯해서 아무것도 도와주기를 거부한다. 그냥 될대로 되도록 놓아둔채 파리를 빠져나가 버린다. 꼽추의 신부는 이 대목에서 이중적인 자세를 보이며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아예 존재조차 없애버리려 한다.
그의 약혼녀와 그 어머니들이 잠시 보여진다. 이들에게는 결코 남을 이해하려는 배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저런 것들과는 접촉하고 싶지도 않을 뿐이다.
이들을 모습을 차례대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지배계급들의 무책임, 위선, 허위의식들 이다. 겉으로는 뻐기고 자기들만 고귀한 척 나서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요모양 요꼴로 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그럼 누가 나서야 하냐면 역시 주인공인 꼽추밖에 없을 것이다.
위기에 빠진 여인을 구하기 위해 그는 두 가지 미덕을 보인다. 하나는 용기다. 창칼을 치켜든 군병들 사이로 뛰어들어 여인을 낚아채는 것은 보통 사람이 발휘하기 어려운 용기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혜다. 성당이 가지고 있는 불가침 특권을 교묘하게 활용해 안전한 보호처로 만들어가는 작업 또한 보통 사람을 넘어서는 지혜를 보여준다.

영화의 앞부분이 보여주었던 조화롭고 질서 있던 사회를 제대로 보니 이렇게 뒤집어지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가장 무시 받던 꼽추 보다도 용기도 없고 지혜도 없는 모순덩어리의 인간들로 꽉 찬 세상을 보며 위고는 답답함을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꼽추에게는 사랑의 메아리가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에스메랄다는 달아나려고 하고 거지들이 몰려온다. 꼽추와 거지의 대결은 어쩌면 안타까운 행동이다. 에스메랄다를 구한다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각기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지만 결과는 서로간의 충돌이다.
이들의 뒤에 권력이 움직인다. 왕의 명령에 따라 궁수들과 창검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는 빠르게 움직여 거지들을 해치운다. 한점의 고려도 없이 그들의 화살은 거지들의 가슴에 꽂이고 창검은 살을 베인다. 바로 이 것이 중세 사회였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결정과 시행에 대해 단 한 순간의 주저함도 없다. 하층민의 목숨이란 그저 그런 것일 뿐이다. 이런 비참한 모습은 단지 중세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1800년대 후반까지도 프랑스 사회에서는 주기적으로 민중들의 봉기가 있었고 몇번의 성공을 제외하고는 이런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위고의 말년에 있었던 파리코뮨의 봉기와 실패도 영화의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위고는 과거를 그려나가면서 현재를 제대로 보게하도록 만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영화 속의 에스메랄다는 그 화살 중 하나를 맞고 숨을 거둔다.
허무한 죽음 뒤에서 꼽추는 자신에게 군림하던 신부를 멀리 던져버리고 에스메랄다의 시체 옆에 가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그리고 세상 이편에서 이루어지지 못했던 사랑은 저편에서는 이루어진 듯 보인다.

영화속에서 벌어진 일들의 기록자는 누구일까? 당연히 시인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둘러본다. 그리고 열심히 기록하지만 그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보전해야만 하기 때문에 자신의 명목상 아내이며 목숨의 은인인 에스메랄다를 구하러가는 행렬에는 유감스럽지만 동참할 수 없다는 자세를 보인다.

늘 세상을 위해 발언하고 변화를 위해 더욱 노력하고 싶었던 위고였지만 항상 스스로에게 부족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런 아쉬운 점을 반영시킨 인물이 바로 여기의 시인이 아니었을까? 조금 더 나아가면 세상의 모든 지식인들이 보이는 말과 삶이 일치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자세를 비판한다고도 보여진다.

이 소설을 텍스트로 사용해서 최근에 디즈니에서 나온 영화도 있다. 하지만 이건 졸작이다. 최근의 헐리우드 영화에서 비극적인 결말로 마무리되는 작품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원작에서 슬프게 죽어야 했던 인어공주를 살려내는 솜씨야 나도 동감하며 어물쩍 넘어갔지만 그건 동화고 <노틀담의 꼽추>의 주인공들의 역할을 제멋대로 바꾼 것은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운 행위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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