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하, 빈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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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이야기





세사르 바예호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내가 살아 있고, 내가 나쁘다는 걸
모두들 압니다. 그렇지만
그 시작이나 끝은 모르지요
어쨌든,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나의 형이상학적
공기 속에는 빈 공간이 있습니다.
아무도 이 공기를 마셔서는 안 됩니다.
불꽃으로 말했던
침묵이 갇힌 곳.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형제여, 들어보세요, 잘 들어봐요.
좋습니다. 1월을 두고
12월만 가져가면
안 됩니다.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다니까요.


모두들 압니다. 내가 살아 있음을,
내가 먹고 있음을…… 그러나,
캄캄한 관에서 나오는 無味한
나의 시 속에서
사막의 불가사의인 스핑크스를 휘감는
해묵은 바람이 왜 우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모두들 아는데…… 그러나 빛이
폐병 환자라는 건 모릅니다.
어둠이 통통하다는 것도……
신비의 세계가 그들의 종착점이라는 것도……
그 신비의 세계는 구성지게
노래하는 곱사등이이고, 정오가 죽음의 경계선을
지나가는 걸 멀리서도 알려준다는 것을 모릅니다.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아주 아픈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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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2004-12-01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새벽까지 깨어 있으셨나봐요, 그리 부랴부랴 달려와 볼 것까지는 없는데......

'타인의 취향'이란 말을 좋아하신다니, 고집스럽고 편협하게 내 안에만 갇혀 있지 않고 나와 다른 것에 창을 활짝 열어 두고 계신가 봅니다...... 타인의 취향, 시선, 기준을 그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나쁘다'거나 '별 의미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있는 힘도 아름다운 힘이 아닐까 싶어요.

2004-12-01 18: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로쟈 > “책은 무조건 즐겁게 읽어라”(3)

P.S. 책읽기에 대한 얘기가 세상 얘기로 번져간 것은 책이 곧 세상이기 때문이다. 즉 책-무한이기에 책의 바깥은 없다. 때문에, 책은 무조건 즐겁게 읽어라라는 정언명령은 나에게 다니엘 페나크가 의도했던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걸 조금 밝혀보았을 뿐이다(괴로운 책읽기에 대한 내용도 집어넣을까 했지만, 분량상 참아두기로 한다).  



이제 2004년도 곧 마지막 한 달을 남겨놓게 된다. 대부분의 시간을 모스크바에서 보내면서 감회가 없지 않다. 12월은 그러한 감회를 풀어볼 수 있는 책들을 읽어볼 계획인데, 내가 고른 12월의 책은 두 권이다. 하나는 데리다의 <법의 힘>(문학과지성사)이고, 다른 하나는 러시아 작가 다닐 하름스의 <한 남자가 집에서 나왔다>(청어람)이다(하름스의 책 제목은 정확한지 모르겠다). 그리고, 둘 다 얇은 책이긴 하지만, 이 두 권이 개인적으로 내가 꼽은 올해의 책이다 



데리다의 책을 꼽은 건 물론 지난 달에 그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나는 그가 20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그의 책을 읽는 일은 언젠가 고백했듯이 내 생전에는 종료되지 않을 듯하지만, 그래도 그를 읽고 또 읽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 나는 얼마전에 니콜라스 로일(N. Royle) <자크 데리다>를 다 읽고, 지금은 비어즈워스(R. Beardsworth) <데리다와 정치적인 것>을 읽고 있는데, 그 책은 사실 데리다가 사유하는 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올해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도 다시 번역돼 나왔지만, 요즘에 좀더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의 책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읽어보기로 했다(번역도 믿을 만한 것 같아서).  



비문학 분야의 또 다른 올해의 책들은 지젝의 (제목은 언제나 헷갈린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나이다>(인간사랑)와 리처드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을유문화사)이다(이 두 책에 대해서는 통신문 <최근에 나온 책(30)에서 언급한바 있다). 두 저자의 두번째 책이란 얘기도 이전에 했지만, 비유컨대, 지젝에게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그들은>, 그리고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확장된 표현형>은 각각 최강의 완투 펀치(1-2선발)라 할 만하다(올 월드시리즈 우승팀인 보스턴 레드삭스에 견주면, 페드로 마르티네스와 커트 실링쯤 될 것이다). 거꾸로 얘기하면, 어느 한 권만 읽어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나는 이런 책들을 한 권만 읽고 떠드는 사람과는 얘기하고 싶지 않다). 해서, 이 두 권이 나로선 서울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챙기게 될 책들이다. 하지만, 현지사정상 12월엔 <법의 힘>만 읽는다   



문학분야의 책으로 내가 꼽은 다닐 하름스(Daniil Kharms; 1905-1942)는 러시아에서도 9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복권되고 다시 읽히고 있는 작가이다(지금은 고리키보다는 훨씬 더 책이 많이 나와 있고 더 많이 읽힌다). 본명은 다닐 이바노비치 유바초프인데, 소위 러시아의 마지막 아방가르드 작가로서 전위적 예술단체였던 오베리우의 주도적인 인물이었고, 이오네스코나 베케트보다 거의 20년 이상을 앞서서 부조리극과 부조리문학을 개척한 작가이다(그게 숙청의 빌미가 되었는바, 스탈린의 사회주의는 넌센스를 용인하지 않았다). 더불어 아동문학가 



이미 <도스토예프스키의 기하학과 부조리극의 기하학>이란 통신문에서 약간 소개한바 있기도 한데, 올해 나온 그의 작품집 <한 남자가 집에서 나왔다>는 국내에서 처음 출간/소개되는 책이다. 물론 올해 문학분야에서 나온 책으론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돈키호테> 등의 재번역본 등이 중요하지만(현지사정상 나의 시야는 한정돼 있다), 나는 적어도 러시아문학 쪽에서 나온 책으로는 가장 의미있는 책을 올해의 책으로 꼽겠다(체홉 사망 100주년이었지만, 체홉의 책으로 아주 새롭게 출간된 책은 없었다).  



한국어판 하름스의 표제작은 그가 1937년에 쓴 것인데, 그의 문학적 유언으로 흔히 읽히는 작품이다(대부분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한 페이지밖에 안되지만). 1931년에 1차로 체포된바 있었던 그는 1941년에 2차로 체포되며 42년 초에 수용소에서 (어처구니없지만) 기아로 죽음을 맞는다. 그런 그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경우, 이 부조리한 작품의 의미는 증폭된다. 하지만, 이 작품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은 중편인 <노파>(1939)이며, 1939 5월말에서 6월 중순 사이에 완성한 그의 정말 마지막 작품이다(확인하진 못했지만, 나는 우리말 번역본 목차의 <노파>가 이 중편일 거라고 믿는다).  



하름스(Kharms)란 필명은 영어의 Charm Harm을 결합시킨 것이라고도 하는데, 한편으론 그가 좋아했던 노르웨이의 작가 크누트 함순(1859-1952)을 떠올리게도 하는 이름이다. 그리고, <노파>에는 “이어서 그들 사이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갔다”라는 말이 에피그라프로 들어가 있다(한편으로 별로 세간이 없던 그의 방에는 함순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도 한다). 함순의 <미스터리>(1892)와 종종 비교되기도 하지만(우리말로는 번역돼 있지 않다) <노파>에는 함순의 대표작 <굶주림>(1890)과의 연관성도 곳곳에 보인다(함순의 <굶주림>은 번역돼 있다. 더불어 폴 오스터의 산문집 <굶기의 예술>도 참조).  



가장 직접적인 건 말 그대로 굶주림인데, 실제로 1930년대 말 하름스는 극도의 물질적 궁핍으로 인하여 고통 받았었다. 가령, “나는 도저히 떨리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무얼 해야 하는지도 생각할 수 없다. 펜과 종이를 집어들어야 하는데, 필요하지도 않은 잡스런 것들만 집어들게 된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쓸 수 없다.(나의 번역이다), 글쓰기의 불가능성은 일차적으로 그의 굶주림에서 비롯된다. 해서, 니진스키를 비틀자면, 나는 배가 고픈데 神은 내게 계속 쓰라고 명령한다가 하름스의 고뇌이다 



<노파> 주인공은 허기를 달래기 위해 날 소시지를 먹고 배탈이 나는데, <굶주림>에서의 이름없는 주인공은 허기를 달래기 위해 고깃집에서 개먹이용 뼈다귀를 얻어 씹어먹다가 토악질에 시달린다. 무엇이 굶주림인가를 가장 잘 요약해 주는 대목이다: “나는 뼈다귀의 고기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아무런 맛이 없었다. 말라붙은 피의 메스꺼운 냄새가 뼈에서 올라와, 곧 삼킨 것을 토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시 시도를 해보았다. 이 고기 한 조작을 속에 집어넣을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그 효과가 나련만. 배 속에 그것이 남아 있도록 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또 다시 구토증이 일어났다. 몹시 화가 났다. 고기를 난폭하게 물어뜯었다. 거기서 조그만 살점이 뽑혀 나와서, 그것을 억지로 삼켰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고기의 조그만 살점들은 위 속에서 발효되자마자 도로 올라왔다. 나는 미친 듯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비탄에 빠져 눈물을 흘리고, 귀신들린 사람처럼 갉아먹기 시작했다. 하도 울어서 뼈는 눈물로 젖어 더럽혀졌다.(눈물에 젖은 뼈!) 나는 더욱 격렬하게 토해내고, 욕설을 퍼붓고, 갉아먹었다. 마치 심장이 터져버릴 듯이 울었고, 또 토해냈다. 그리고 더 큰소리로 온 세상의 신들에게 지옥에 떨어지라고 저주했다.(굶어도 굶어도 굶주림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생각건대, 세상의 굶주림은 세상의 울음만큼이나 질기다. 세상엔 인의와 자비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굶주림>의 이 주인공에게 배속에 뼈다귀가 남아있도록 하는 게 문제였다면, <노파> 주인공에겐 자신의 방을 찾아온 불청객 노파의 시신을 처리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걸 어떻게 밖으로 내다 놓을 것인가? 그는 “도대체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Nu shto mne delat'?)라고 묻는데, 이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Shto delat'?)란 소비에트적 질문방식에 대한 패러디이다. <노파>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단서들이 해독되어야 하는데, 가령, 노파가 무엇을 상징하느냐 하는 것. 흔히 <죄와 벌>의 전당포 노파와 비교되는데, 문제는 이 노파의 경우는 도끼로 내리쳐 죽이지 않아도 제 발로 찾아와 죽어 주었다는 것. 이야기의 첫 장면에서 노파가 가지고 있는 시계의 바늘들을 주인공인 나는 보지 못하지만, 노파는 시계를 보고 시간을 일러준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신의 시계를 저당 잡힌다는 명목으로 전당포를 찾아가고, 또 살인사건 이후에 그의 시간이 시계와 함께 땅에 묻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두 노파가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그냥 맛보기일 뿐이며, 당신의 읽기를 꼬드기는 미끼일 뿐이다. 짧은 작품이지만 <노파> 또한 텍스트-무한이다(이 작품과 종횡으로 연결되는 작품이 또한 여럿이다). 당신도 직접 읽어본다면, 할말이 무척 많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당신은 그걸 써야 한다).  



그런 건 <법의 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개인적으론 데리다의 책을 셰익스피어의 <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와 겹쳐 읽은 예정이다. 참고로, <자에는 자로>는 푸슈킨이 <햄릿> <오델로> 레벨의 작품으로 꼽은바 있고 그 자신이 번역을 시도하다가 아예 번안작을 쓰기까지 했다. <안젤로>란 작품인데(열린책들의 전집에 들어 있을 것이다), 드라마가 아니라 서사시이고, 자비를 주제로 셰익스피어를 교묘하게 비틀고 있다. 그러니 흥미롭지 않은가? 한번쯤 읽어들 보시길. 지극한 즐거움들을 누리면서. 하여간에, 이 모든 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2월에 쓰도록 하겠다(나는 두 권의 책을 열흘쯤 후에나 받아볼 예정이며, <노파>에 대한 소개는 이전에 써둔 걸 부분적으로 따온 것이다)    



P.S.2. <푸슈킨-도스토예프스키-데리다>란 글에선가 푸슈킨이 곤차로바와의 사이에서 1 3녀를 두었다고 했는데(이건 열린책들 전집의 연보를 참조한 것이다), 2 2녀가 맞는 듯하다(러시아책에 그렇다니까). 우리말 전집의 연보에는 1833년에 둘째 딸 사샤가 태어난 걸로 되어 있는데, 사샤는 사내 아이 알렉산드르의 애칭이다(역자는 딸 알렉산드라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그가 러시아 시인이므로 내가 더 믿게 되는 건 우리말본보다는 러시아어본이다. 사소한 사항이지만, 남의 집 가계를 바꾸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라서 교정해둔다.


P.S.3. 다음주에 모스크바에서는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를 휘날리며>가 <38선>이란 제목으로 개봉된다. 한국 영화, 즉 '김기덕과 블록버스터들' 중에서 후자에 속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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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책은 무조건 즐겁게 읽어라”(2)

이번호 <텍스트>에는 <백범 김구 평전>(시대의 창)에 대한 서평도 실려 있었는데(서평자도 쓰고 있지만, 이 책이 최초의 평전이라는 건 다소 믿기지 않는다. 정말로 그런가?), 백범의 <나의 소원> 중에서 자주 인용되지만 언제 읽어도 자긍심을 느끼게 되는 대목을 옮겨본다: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큼이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반 세기도 더 전의 글이지만,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류가 불행한 것은 인의와 자비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보다 근본적인 건 계급적 적대인가?). 그런데 그걸 키워줄 수 있는 건 자연과학이 아니라(예컨대, 인간복제가 아니라) 문화이고 문화의 힘이다(그렇다면, 백범의 이데올로기는 민족이 아니라 문화이다. 우리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 있는가?). 문화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다. 앞에서 책읽기의 즐거움에 대해서 말했지만,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고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그게 독서문화이고 출판문화이다(거꾸로 괴로움을 주는 건 문화가 아니다. 날림출판은 문화가 아니다). 그런 즐거움 속에서야 우리는 인의와 자비와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다(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을 줄 수 있다. 즐거움이 뭔지를 아는 사람이 남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런 즐거움의 향유는 사실 유교적 전통에서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알다시피 공자의 어록인 <논어>는 즐거움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되지 않는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즉 배우고 수시로 그것을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여기서 익히다란 말은 (1)(완전히 자기 걸로 만들기 위해) 암기/습득하다 (2)(생활 속에서) 실천하다 등으로 해석되는 듯한데, 러시아어 번역은 이 대목을 배우고 완성을 향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면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옮기고 있다(세메넨코의 번역). 러시아어본에 따를 때, 군자(君子)자기완성의 인간이고, 유교는 자기완성을 위한 종교이다. 문제는 무엇이 완성인가라는 점. 무엇이 배움의 완성이고 자기완성인가 


열심히 사서삼경(혹은 육법전서)을 암기해서 과거에 급제하고 고시에 패스하는 것이 배움의 완성인가? 그건 어떤 단계(혹은 집안의 부흥)를 뜻할 수는 있을지언정 완성으로는 좀 모자라 보인다(요즘은 특히나 그럴 것이다. 고시도 자격증화되었다고 하니까). 그리고 생활 속에서 실천한다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소 막연하다(사실 막연하기 때문에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익힌다는 말을 보다 적극적/구체적으로 가르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싶다. 비록 공자가 학이시교지(學而時敎之)라고 말하고 있진 않지만 말이다(()자는 너무 딱딱하긴 하다). 왜냐하면, 배움의 완성은 가르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건 아주 단순한 논리인데, 군자의 모델로서의 공자야말로 (자신이 배운/터득한 걸) 가르치는 사람 아닌가? 더불어 실습(實習), 즉 실제로/진짜로 배운다는 건 무엇인가? 자신이 배운 걸 해보는 것인바, 교사들의 교생 실습이란 자신이 배운 걸 실제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걸 말한다 


직접 가르쳐보는 경험 속에서 자신이 배운 건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그러니까 공자는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행위 속에서 비로소 군자가 된다. , 자왈(子曰) 이전에는 공() 선생도 군자도 없는 것이다(군자이기에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에 군자이다). 이것이 배움의 변증법이다. , 우리가 진정으로 배우는 것은, 배움을 완성하는 것은 가르침으로써이다(가르칠 수 없는 앎은 완성된 앎이 아니다). 그러니까 학이시습지의 즐거움, 학습(學習)의 즐거움은 가르침으로써 배움을 완성하는 즐거움이다. 학습이란 말이 (주로 사무/행정적인 용어로만 남아있고) 일상어에서는 공부(工夫)(=쿵푸)로 대체된 것은 그래서 좀 아쉽다(동무란 말처럼 북한에서 너무 자주 쓰기 때문일까? 그래서 동무 대신에 친구를 갖게 됐듯이, 우리는 주로 학습하는 대신에 공부하는 것일까?). 공부란 말에는 즐거움이 왠지 빠져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부비변증법적이다(거기에 대비되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들에서의 유물변증법 학습일 것이다).  


변증법적인 학습배우다-가르치다란 의미쌍을 조금 확장하면, 얻다-베풀다가 될 것이다(배움은 얻음이고, 가르침은 베풂이니까). 우리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얻는 것은 무엇을 베풂으로써이다. 그리고, 그것은 덕()이란 말이 진정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뜻하는 바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을 베풂으로써 덕을 쌓는 것이니까 말이다(김용옥은 ()얻음으로 옮긴다). 그러한 사정은 읽다-쓰다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가 어떤 책을 진정으로 읽게 되는 것은, 그러니까 그 책에 대한 읽기를 완성하는 것은 그에 대한 글을(혹은 책을) 씀으로써이다(지젝은 라캉에 대해 계속 씀으로써 비로소 라캉을 읽는다. , 읽기 위해서 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독자가 읽어내는 텍스트(readerly text)와 독자가 써나가는 텍스트(writerly text) 사이의 바르트식 구별은 사소하다. 모든 텍스트는 씌어지는 텍스트이어야 하며, 그리고 그 씌어짐을 통해서 비로소 읽히는 것이기 때문이다(예컨대, 리뷰를 쓰는 건 책읽기를 통해 얻은 걸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책읽기를 완성해나가는 건 그러한 베풂이다). 그러한 쓰기/베풂의 여정은 끝이 없는가? 그렇다. 그것은 무한이기에 그렇다 


<도덕경>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이 나오는데(대기만성인과응보와 함께 중학생때 교내 가훈전시회를 위해서 급조해낸 우리집 가훈이었다. 사자성어 사전에서 뜻이 좋다고 골라낸 것인데, 인과응보에 나는 아직도 시달리고 있다. 대기만성이라나!), 그 뜻은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큰 그릇은 이루어짐이 없다이다(만약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크지 않다!). , 큰 그릇이란 무한을 가리킨다. 아무리 큰 유한도 무한보다는 작기 마련이기에 가장 큰 유한이란 곧 무한인 것. 해서, 큰 그릇의 바깥은 없다! 공자가 말하는 성인, 곧 군자도 마찬가지이다 


군자란 완성된 인간이지만, 그 자기완성이란 건 미래완료형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니까 진정 완성된 인간(=가장 큰 유한)이란 끊임없이 완성되어 가는 인간(=무한)이다. 그래서 자왈 한 마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 하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베풀고 또 베풀어야 하며, 끊임없이 쓰고 또 써야 한다. 글쓰기가 자동사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무엇을 이룬다는 타동사는 자동사의 극한이며, 자동사의 미래완료형이다. 모피를 뒤집어쓴 잉크(=사르트르)가 끊임없이 써댄 것은 그런 때문이다(해서, 앙가주망은 그런 자동사적 글쓰기와 대립/모순되지 않는다). 데리다가 끊임없이 써댄 것은 그런 때문이다.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데리다의 이 말은 많은 오해를 부른바 있는데, 그는 그 말을 (다소 상식적인) 컨텍스트의 바깥은 없다와 등가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텍스트-무한은 곧 컨텍스트 아닌가?)  


해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즐거움 또한 끝이 없다. 그런 즐거움을 배우고 익히는 것, 즉 다시 가르치고 베푸는 것이 나는 교육의 몫이라고 생각한다(해서 우리가 배우는 지식은 언제나 즐거운 지식이며, 새로운 계몽주의즐거운 계몽주의이다). 그것이 시민의식의 함양이고 시민교양의 양생(養生)이다. 시민의 학습이고 합창이다. 끊임없이 읽고 쓰고 떠들어대라! 그것이 한편으론 시인 이성복의 말을 빌자면(그는 한동안 경전 공부를 했었다), 세상과의 연애이다: 세상과의 연애를 통해서 제가 깨우친 바가 있다면 삶의 의미는 끊임없는 배움에 있으며, 그 배움은 공경하는 마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더 자세하게 살피자면 배움은 다름 아닌 공경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앞도 뒤도 알 수 없는 막막한 세월 속에서 구원도 해탈도 아닌 막막한 걸음걸이, 우리는 모두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막막함을 함부로 제 멋대로 제 편한 것으로 바꾸어 버리지 않고 그 길을 끝까지 가는 것, 모든 공부는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 같은 것입니다. (이성복, <세상과의 연애>)  


물론 매일같이 읽고 쓰는 우리의 공부, 혹은 학습이 당장에 좋은 세상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백범의 표현을 빌면, 인의와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세상은 데리다의 민주주의만큼이나, 혹은 메시아만큼이나 더디게 (하지만 언젠가는 예기치 않게) 올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울음 또한 당장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詩를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이성복, <아들에게>)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작부들과 물수건과 속쓰림은 또 그 나름대로 자동사이다. 울음이 그러하듯이. “한 여인이 웬 서류 봉투를 손에 쥐고 흐느끼며, 흐느껴 울며 갔다 콸콸대는 물소리 같은 울음을 거푸 울며 여러 번 길을 건너갔다 아무한테도 그 울음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고 세상 끝까지 울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듯이 울며 갔다 비교도, 비유도 허락되지 않는 울음, 꽃핀 벚나무의 검은 가지처럼 검은 길을 그 울음으로 적시며”(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27>)  


우리는 그렇듯 비교도, 비유도 허락되지 않는 울음에 대해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면서 다만 기다려볼 따름이다. 배우고 가르치고 베풀면서 고대해볼 따름이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는 날을. 하지만 그때의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장 큰 나라와 마찬가지로 경계와 구별이 없는 나라일 것이니, 세계 자체와 등가일 것이다(우리나라=세계). 우리 나라도 너네 나라도 없는 세상 말이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준비하며 기다려야 한다. 매일같이 변기에 물을 갖다 부으면서, 세상을 밥 먹듯이 구원하면서, 읽고 쓰고 떠들면서, 속쓰림을 참아가면서, 사랑하면서 실연하면서, 가끔은 못살겠다고 도망치면서, 저항하면서 이를 갈면서, 이빨을 갈면서, 즐겁게 아주 즐겁게   


04.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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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책은 무조건 즐겁게 읽어라”(1)


낮에 (점심이 아니라) 아침을 먹고서 수업에 들어가기 위해 나서는 참에 문 우편함에 인쇄 우편물이 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 북매거진 <텍스트>(23)였다. 지난 22호부터 20일 간행 체제로 바뀌고서 두번째로 나온 것인데(22호에 나는 체홉론을 기고한바 있다), 표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실용적이었지만, 책과 시대란 가볍지 않은 주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었다. 제목의 인용구는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문학과지성사)에 대한 서평의 제목이기도 한데, <텍스트>의 표지에는 그의 글이 조금 더 인용돼 있다.


지금까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해온 책읽기란 대개는 순응하고 따르는 책읽기라기보다는, 무언가에 반하고 맞서는 책읽기였다. 즉 이제껏 우리가 책을 읽어온 것은, 마치 세상과 등지듯 현실을 거부하고 현실과 대립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때론 우리가 현실 도피자처럼 여겨지고 현실마저 우리가 탐닉하는 독서의 매력에 가려져 아득해질지언정, 어디까지나 우리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도망자,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탈주자인 것이다. 모든 독서는 저마다 무언가에 대한 저항 행위이다.(<소설처럼>, 103-4)
두 개의 인용구를 종합하면, 책읽기는 즐거운 도망이고, 즐거운 저항이다. 도망치면서 저항하는 것인지, 저항하면서 도망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한없이 도망치고 한없이 저항한다. 아니, 도망치기 위해서, 저항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건지도 모르겠다. (페나크에 따르면) 그것이 책읽기의 의의이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는 것. 만약에 당신이 책을 읽으면서 즐겁지 않()다면, 당신은 제대로 도망가지도, 저항하지도 못한 것이 된다(그건 당신이 변변찮다는 얘기이다). 그러니, 책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악착같이 즐겁게 읽을 필요가 있다(물론 애초에 그럴 만한 책을 고르는 안목이 중요하다).


'즐거운 책읽기와 관련하여 나에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책이 두 권 있다. 그건 김현의 평론집 <책읽기의 괴로움>(민음사)과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동문선)이다. 기억에 <책읽기의 괴로움>은 최인훈의 <회색인>에 대한 평문의 제목을 표제로 한 책이었다. 나는 김현 전집으로 다른 책과 묶여서 나온 <책읽기의 괴로움>도 갖고 있지만, 내가 더 아끼는 건 민음사판의 초판본이다. <분석과 해석> 이전에 나온 것이니까 아마도 80년대 초반에 나왔을 법한데, 내가 중학교 때부터 문학평론집을 읽은 건 아니므로 내가 이 책을 구한 건 당연히 훨씬 나중이다(물론 책은 이미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다 읽은 뒤이다). 
절판됐던 그 책을 구한 건 아마도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90년대 초반에 새로 개장한 영풍문고에서였다. 아마 재고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책이 나온 듯한데, 나는 한 권 남아 있던 이 책을 집어들고서 쾌재를 부른 적이 있다(요컨대, 이런 게 책 구하기의 즐거움이다). 그게, 마지막 한 권이었는지는 어떻게 아느냐고? 그걸 확인해보려고, 책을 사고 며칠 안 돼서 서점에 또 가봤기 때문이다(더는 진열돼 있지 않았다). 해서, 한동안 내가 가장 즐겨 들르던 서점이 영풍문고였고, 영풍문고는 내게 <책읽기의 괴로움>으로 각인돼 있다. 사실, (내 기억에) 김현이 말한 책읽기의 괴로움은 책을 통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 세상 읽기의 괴로움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 자체로는 즐거운 책읽기를 괴롭게 만드는 건 세상인 셈. 하지만, 책읽기의 즐거움은 그런 괴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도록 하는 즐거움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쾌락원칙을 넘어선다. , 책읽기의 즐거움은 쾌락이 아니라 향락이다.   


바르트의 책 <텍스트의 즐거움>은 우리말로 두 종의 번역서가 나와 있는데(나에겐 이 두 번역본과 영역본이 있다), 읽은 만한 건 김희영 교수가 옮긴 동문선본이다(연대출판부본은 책읽기의 괴로움을 강요하는 번역이다). 바르트의 책들은 우리말 전집이 기획/출간되고 있을 정도이니까 우리에게 친숙한 편이지만, 아쉽게도 그의 유미적인/유희적인 문체 때문에 쉽게 읽히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사랑의 단상>이나 <카메라 루시다> 정도가 예외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우리말로 번역된 바르트의 책들은 대부분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카메라 루시다>, <밝은 방>만 아직 보지 못했다). 더 번역된 건 두툼한 선집 외에 <S/Z> 정도. 그 중에서 내가 산 건 아직까지는 <기호의 제국> 한 권뿐인데, 그건 내가 영역본을 따로 갖고 있지 않아서이다. 


<텍스트의 즐거움>을 읽기 위해서 먼저 읽어야 하는 것은 <저자의 죽음> <작품에서 텍스트로(From Work to Text)>라는 바르트의 두 짧은 평문이다(동문선본에 같이 번역돼 있을 듯하다). 어떤 책을 작품(Work)으로 간주하는 건 간단히 말해서, 그걸 산출한 주인 혹은 아버지로서의 저자를 상정하고, 그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을 작품 읽기의 목적으로 삼는 태도이다(따라서 신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인 태도이다). 반면에 어떤 책을 텍스트(Text)로 간주하는 건(교재란 의미의 텍스트가 아니다), 더 이상 그런 의미작용의 중심으로서의 저자를 고려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래서, 저자의 죽음이다(이건 반형이상학적이며 탕아적인 태도이다). 바르트는 작품의 은유로 유기체를 드는 반면에 텍스트의 은유로는 을 든다. 하나는 채워져 있고, 다른 하나는 비어 있다. 그래서, 작품은 독자가 읽어내는 것이지만, 텍스트는 독자가 채워넣는 것이 된다. 해서, (바르트의 다른 용어로 표현하자면) 작품이 독자가 읽어내는 텍스트(readerly text)에 대응한다면, 텍스트는 독자가 써나가는 텍스트(writerly text)에 대응한다.  


나는 러시아 문학 이전에 문학이 전공이다 보니까 문학이론/비평 또한 관심에서 제쳐놓을 수가 없()는데(해서 문학이론서들을 지겨울 정도로 많이 읽었다. 그런데, 이론이라는 게 말 그대로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다. 공부하기엔 좋은 동네인 셈), 이른바 이론 20세기 후반 인문학의 주도적인 담론이었다. 그 기폭제가 (프랑스) 구조주의였다면(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구조주의는 현실구조로 대체/환원했다) 문학비평에서 구조주의 혁명을 주도했던 바르트의 위치는 간과될 수 없다(물론 그는 <텍스트의 즐거움>(1973)을 경계로 포스트 구조주의로 넘어간다).


특이한 건 그가 주로 아카데미즘의 바깥에서 활동했다는 것.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기호체계의 사상을 가르치는 교수로 취임하는 것이 1977년이니까 1953 <글쓰기의 영도>(이 또한 우리말 번역이 있는데, 번역의 0쯤으로 불릴 만하다)데뷔한 지 22년이 지나서야 그는 변변한 직업을 갖게 된다(이전에 그가 몸담았던 연구소 등에서의 지위나 보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는 것은 불과 몇 년 후이다(내 기억에는 1980년이고 그의 유작이 <밝은 방>이다).     


아마도 그런 전기적 이력이 보다 본격적인 구조주의 비평가라는 제라르 주네트보다 바르트에게 더 친밀감을 갖게 하는 듯하다(나는 두툼한 영어판 바르트 전기도 갖고 있으며, 1/3쯤 읽었더랬다). 그건 불문학자 김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프랑스비평사: 현대편>(문학과지성사)에서 주네트 대신에 바르트에게 한 장을 할애한다(곽광수 교수 같은 이는 바르트를 딜레탕트 비평가, 재치 있는 비평가 정도로 평가절하한다). 참고로, 김현이 재구성한 프랑스 현대비평은 <사르트르-바슐라르-바르트-블랑쇼> 4각형으로 이루어지는바, 이들의 키워드를 차례대로 나열하면 <참여-상상력-언어-죽음>이다(나는 문학을 구성하는 네 원소가 사랑과 가난과 죽음과 언어라고 생각하는바, 사랑과 상상력, 가난과 참여를 등가화시키면, 두 사각형은 동일한 매트릭스의 변주가 된다). 


어쨌든 <책읽기의 괴로움> <텍스트의 즐거움>, 두 권의 책이 생각난다는 얘기이다. 물론 텍스트가 그러하듯이 모든 생각에는 꼬리가 있다(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김현의 유작은 사후에 출간된 일기 <행복한 책읽기>인데, (내 기억에) 생전에 제목을 정해두었다는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책읽기의 괴로움>이었을 것이다(돌이켜 보건대, 그의 죽음은 90년대 한국문학의 최대 손실이다. 비평가와 불문학자로서 그의 열정업적을 넘어설 만한 이는 아직 없으며, 앞으로도 당분간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건 한편으로 고인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행복한 책읽기 10년 정도만 더 연장됐어도, 우리는 (그는 4년에 한번 꼴로 책을 냈으므로) 최소한 두 권의 문학비평집과 (그가 <프랑스비평사>에서 포부를 밝힌바) 리쾨르와 데리다 등의 연구서를 더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현재까지 우리말로 씌어진 리쾨르, 데리다 단독 연구서는 각각 한 권씩이다. 아마도 일본의 1/10 정도 수준이지 않을까 싶다. 학문어로서의 한국어는 아직도 한참 가난하다).


주인/아버지로서의 저자의 죽음을 선언한 바르트였지만, 사실 그에겐 아버지가 없었다(일찍 여읜 걸로 기억된다). 그래서 그에겐 내내 어머니밖에 없었으며(<밝은 방>은 그 어머니의 죽음에 바쳐진 책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교통사고이긴 했지만) 그는 얼마 더 살지 못했다(참고로 그는 동성연애자였다). 유복자 혹은 아비 없는 자식이란 점에서 바르트는 한 세대 선배인 사르트르를 따르고 있다(프랑스의 20세기 지성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들은 사르트르-바르트-데리다이다. 데리다의 죽음으로 이들은 모두 고인이 됐다. 1980년부터 2004년까지이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시절 나에게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79년 박정희의 죽음이 아니라 80년 사르트르의 죽음이었다. 나는 신문지상에 보도된 그의 죽음에 매료됐고, (정치가가 아닌) 작가의 길을 선망하게 된다(그 길이 이 길이었다니!).


고등학교 때부터 사르트르의 소설들을 읽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책들을 모두 읽은 건 아니다(나는 <존재와 무>도 아직 읽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에서 나온 사르트르에 대한 책들은 거의 다 읽었다. 얼마 전에는 헌책방에서 러시아어로 된 사르트르 연구서를 샀는데(333쪽이고 1,600) 레오니드 안드레예프란 저자의 이름은 낯설지만, 1994년에 나온 이 책이 러시아에서 나온 최초의 사르트르 연구서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레이몽 아롱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좌파였던 사르트르 세대의 프랑스 지식인들이 과거 소련체제, 그리고 소련의 작가들과 가졌던 친분을 고려하면(이들의 서신교환도 두툼한 책 한 권 분량이다), 90년대에 들어서야 그의 연구서가 나왔다는 점은 다소 의외이다(소련에서는 부르주아 철학도 열심히 연구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1994년에 책이 나온 건 1964년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거부 3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갖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올해는 그의 노벨상 수상/거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어제 날짜 <니자비씨마야>엑스 리브리스의 표제기사가 그걸 상기시켜주었는데, 러시아(소련)에 사르트르가 제일 처음 소개된 것이 바로 그 해 1964년이고, <노브이 미르>란 잡지(1962년에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발표됐던 잡지) <>이 번역/소개됐다(그의 자서전 <>읽기쓰기 두 대목으로 구성돼 있다). 계기는 물론 그가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 스웨덴 한림원의 선정에 대해서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상은 거부한다. 하지만, 돈은 받겠다.(이를 인용한 러시아 필자는 이것이 진정한 철학적 행위라고 평한다. 그는 사르트르를 무척 좋아한다고 하니까, 반어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는(나부터도) 흔히 나는 노벨상을 거부한다란 그의 선언을 사르트르 철학(=자유의 철학)의 상징적인 제스처로 이해해왔는데, 알고 보면 그건 절반의 이해였던 셈이다. 거기에 덧붙여져야 할 것은 하지만, 돈은 받겠다!이다. 그럴 때에라야,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같은 구호가 아주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는가?(, 실존주의는 마음이 약하고, 돈에 약하다!) 그리고, 그럴 때에라야 실존주의가 왜 프롤레타리아 철학이 아니라 부르주아 철학인가가 명료해지지 않는가? 더불어, 우리는 사르트르를 더 좋아하게 되지 않는가?..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 사르트르는 <> <구토> 등이 포함된 작품집과 <보들레르>, <상상적인 것>(그의 초기 상상력 연구서) 등이다(<존재와 무>는 너무 고가여서 사지 못하더라도 전쟁일기 <이상한 전쟁의 기록>이나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은 형편을 봐서 구할 생각이다. 어린시절 영웅에 대한 예의로서). <상상적인 것>은 그가 후설의 영향하에 쓴 것으로 흔히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 연구와 비교된다(김현의 연구가 있다). 더불어, 얇은 분량의 <보들레르>는 그의 실존적 정신분석이란 방법론이 구체적으로 적용된 사례이다. <상상적인 것>은 우리말 번역이 없지만, <보들레르>(문학과지성사)는 오래 전에 번역/출간돼 있다(아마 절판됐을 것이다). 나는 지난 달에 2권짜리 보들레르 선집도 구했기 때문에(1권은 시집이고, 2권은 산문집이다) 이젠 좀 읽어보는 일만이 남았다(보들레르를 읽는 건 나의 오랜 숙제 중의 하나이다. 그가 현대시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한국어와 영어와 러시아어로(들뢰즈가 인용한 프루스트의 말을 빌면, 훌륭한 작품은 모두 외국어로 씌어져 있다니까 읽는 것도 외국어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어 사르트르는 제법 풍족한 편이다. 작품도 <자유의 길>을 포함해 대부분 번역돼 있고(그의 일기와 플로베르론인 <집안의 백치>, 철학서인 <변증법적 이성비판> 정도를 제외하면) 정명환, 박이문, 박정자 선생들의 소개도 충실하고 수준도 높다. 사실 다른 작가/철학자들의 경우도 이런 정도의 소개 수준만 되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이에 견줄 만한 작가는 김화영 교수의 카뮈 정도이다). 사르트르의 전기로는 코헨-솔랄의 3권짜리 전기 <사르트르>가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바, 규모에 맞게 충실하면서도 재미있다. 


실존주의 세대(4-50년대)와 구조주의 세대(60년대)를 대표하는 사르트르와 바르트는 각각 타동사자동사로서의 문학을 주창한 걸로 흔히 비교되는데(하지만 사르트르 자신도 시는 앙가주망(=참여)에서 제외시켰다), 폴 존슨이 쓴 <지식인들>을 보면, 딱히 그렇게 대조적인 것만도 아니다(지식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는 그의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브레히트 비판이다). 그는 사르트르를 모피를 뒤집어쓴 잉크라고 불르는데, 하여간에 이 인간은 평생 끊임없이 뭔가를 써댄 것이었다(그렇게 써대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으니 할말은 없지만).


, 그에게서 글쓰기의 발화주체는 타동사적 주체였지만(사르트르의 글쓰기 주어로서의 ), 발화행위주체인 사르트르 자신은 자동사적 주체였던 것이다(쉽게 얘기하면, 앙가주망(=타동사)을 주창하는 글들을 그는 자동사적으로 썼다). 그러니, 사르트르의 참여란 것은 좀 의심스러운 것일까? 거꾸로인 것 같다. 그는 모든 지식인의 참여가 갖는 자동사적 성격(자위행위적 성격)을 상기시켜주는바, 그런 의미에서 그의 앙가주망은 진짜 앙가주망이다(오히려 우리가 의심해 보아야 하는 것은 그런 자위행위적 성격을 부인/배제하는 앙가주망이 아닐까?).


미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사르트르인바(문체의 기원이란 제목인가로 책이 나와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형식>(<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로 번역됨)에서도 (여느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사르트르를 중요하게 다룬다. 하지만, 제임슨을 필두로 한 미국의 강단 좌파들의 정치적 행위(사르트르와 비교해 보더라도) 대학 등의 지식인 사회에만 한정된 것이다. , 그들의 참여는 의미론적으론 타동사이지만, 화용론적으론 자동사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물며 대부분의 미국 학문은 기능주의적이지 않은가? (직접적인 경험담은 아니지만) 철학이 그렇고, 심리학이 그렇다. 분업화된 분석철학은 철학의 자기소외를 자기존립의 당위적인 조건으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자폐적이며, 자아(에고) 심리학은 사회에 대한 (병리적) 개인의 적응을 중심적인 과제로 설정함으로써 정작 사회의 병리성 자체는 사고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직면한다. 가령, 소비자심리학이나 유권자심리학이 자본주의나 민주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까? 가령, 분석철학이나 자아심리학은 파농의 탈식민주의를 문제로서 사유할 수 있는가?(최근 파농의 <대지의 저주 받은 사람들>(그린비)이 번역돼 나온 걸로 돼 있다. 기억에, 재번역이다.)      


이런 생각은 얼마전 미 대선 결과에 대한 김우창 교수의 시론(時論)을 읽고서 든 것인데, 정작 9.11 테러사건이 발생한 맨하탄 지역에서 부시의 지지율이 20% 미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케리가 패배한 것은 도시 지역의 진보적 지식인/중산층들과 그와는 전혀 다른 사고와 가치관을 가진 전통적/보수적 시골 사람들이 서로 유리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건 마치 제정 러시아시절, 인텔리겐치아와 민중 간의 유리를 상기시킨다). 아무리 대학은 좌파 혹은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어도 그 영향력은 대학가 주변에 한정돼 있는 것(한국이라고 사정이 다른 건 아니다. 80년대 대학가와 지방 소도시의 공기는 너무도 달랐다). 그러니까 미국사회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네트워킹이 부족한 고립사회이다(아메리카는 들로 이루어진 대륙이다). 개방된 고립사회(서로 문은 열어두고 있지만, 아무도 왕래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리 (좌파)이론이 첨단을 가고, 좌파 지식인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하더라도 그 사회의 보수성은 쉽게 개선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좀더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사회적 의사소통의 네트워킹을 강화하는 것이다(데리다의 새로운 계몽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건 흔한 말로 시민의식의 강화이면서 시민교양의 확충이며, 그로써 지식인과 대중간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지식인이 대중화되고, 대중이 지식인화되어야 한다. 마치 모든 노동자가 예술가이어야 한다는 사회주의의 구호처럼, 모든 노동자는 지식인이 될 필요가 있다. 의사나 교수보다 응급차 운전기사가 더 많은 월급을 받았던 과거 소련에서처럼). 그리고 거기에 기본이 되는 것은 기본적인 책들을 읽()는 것이고(가령, 시카고시에서 <앵무새 죽이기>를 단체로 읽듯이), 서로 대화/토론하는 것이다(학교에서 왜 말하기를 교육하지 않는가?).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것이 생활의 기본이 될 경우에(학교에서 왜 글쓰기를 교육하지 않는가?), 민주주의(=존재적 차원) (지젝이 지적하는바) 포퓰리즘(=존재론적 차원)으로 추락하지 않게 될 것이다(이런 경우엔 하이데거가 아니라 레비나스를 따라서, <존재에서 존재자로>라고 말해야 할 듯하다). 이 정도도 너무 거창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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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2004-11-29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하필 알라딘에...?"

알라딘에 서재를 만들었다고 하니 한 친구는 네이버나 엠파스 따위의 블로그 대신에 왜 알라딘이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그냥... 이란 말은 대답할 이유가 딱히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간단히 말할 수 없는 이유라면 이유란 게 여럿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중 하나가 이런 글을 만날 수 있는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을 둘러싸고 오가는 따뜻한 소통과 즐거운 담소도 서재놀이의 묘미이지만, 그 한켠에서 '책읽기'에 관한 이런 깊고도 뜨거운 글을 읽을 수 있는 즐거움은 어쩌면 알라딘 서재가 아니었다면 어려운 일 아니었을까.....



로쟈님은, 이 글에 나와 있듯이, 지금 러시아에서 러시아문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책과 영화와 러시아에서의 생생한 일상이 종횡으로 어우러져 있는 이분의 리뷰는 날카롭고도 섬세하게 빛난다. 언젠가 이분이 쓴 리뷰 -- 니진스키의 자서전 "영혼의 절규"를 읽고 내 몸을 관통하고 지나간 전류를 기억한다. 그 뒤 나는 한동안 니진스키의 영혼의 독백과 광기와 함께 지냈다.


앞으로 기나길 겨울날, 생각날 때마다 아랫목에 발 넣고 찬찬히 읽어 보고 싶은 욕심에 이 글을 내 방에 옮겨 왔다. 로쟈님께 감사 드린다.
 


 






 






 






 






 






 



가을 저녁의 詩




 
- 김춘수


누가 죽어 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이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山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김춘수 시인이 세상을 떠나셨다.




장정일은 김춘수의 시를 변주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속 버튼을 눌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이제 시인은 우리에게 하나의 전파로, 꽃 같은 한 떨기 별로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 빛나고 있으려나




김춘수 시인의 별세 소식에 잠시 그를 생각한다.




최근에 읽었던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밤의 시'를 떠올리며........ 



나는 얼마 전 이국의 여행을 떠나는 누군가에게 긴 밤기차 여행길에 이 시를 하나 가슴에 품고 가라고  메일에 적어 보내 주었다. 그이는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고, 시인은 이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밤의 시()








                                                                                                                            
왜 저것들은 소리가 없는가




집이며 나무며 산(
)이며 바다며




 
왜 저것들은




죄()지은 듯 소리가 없는가




바람이 죽고




물소리가 가고




별이 못 박힌 뒤에는




나뿐이다 어디를 봐도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이 천지간(天地間
)에 숨쉬는 것은




나 혼자뿐이다.




나는 목메인 둣




누를 불러볼 수도 없다




부르면 눈물이




작은 호수(湖水
)만큼 쏟아질 것만 같다




―이 시간(時間)




집과 나무와 산(
)과 바다와 나는




왜 이렇게도 약(
)하고 가난한가




밤이여




나보다도 외로운 눈을 가진 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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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11-29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 길목에서 더욱 쓸쓸해집니다... 이제 그 분 꽃이 되셨을까요. 아님 우리가 부르는 소리에 님이 봄 꽃으로 다시 태어나실까요... 찡한 마음으로 퍼갑니다...

2004-11-29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일요일 퀴즈프로에 김춘수란 이름이 나왔을 때 와~ 시집을 24권이나 하고 놀랐던 기억이 채 가시기 전에 또 이런 소식을 접하네요..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