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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제 4권 <호수의 여인>(북하우스)이 출간되었다.

<하이 윈도> <빅 슬립> <안녕, 내 사랑>에 이은 네 번째 책......

나는 어떤 위험한 상황에도 쿨한 농담과 적절한 비유를 빼놓지 않는 필립 말로에 기꺼이 매료당한다.

실제로 그와 같은 사람을 현실에서 만난다면 그 오만함과 냉소적 태도에 밥맛 없어할지 모르겠지만, 챈들러가 그려낸 필립 말로는 '스타일리스트'이고 '쿨 가이'이다!

[챈들러의 독특하고 뛰어난 묘사에 대해서는 5월 29일 '독서일기' 에 적은 바 있다. http://www.aladin.co.kr/foryou/mypaper/525710]

 

"여기 이 비열한 거리를 지나가야만 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도 않으며 세속에 물들지 않았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

챈들러의 에세이 <간단한 살인 기술>에 나오는 이 문구는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를  간명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마틴 스코세지 감독은 이 구절에서 따와 <비열한 거리>를 자신의 영화 제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오늘은 웹에서 이런 글을 찾았다.

이 글은 하루키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단편에 대한 오마쥬로 쓴 글이라고 한다.

 

 

 

 

 

사우스베이 스트리트「サウスベイストラット」

 

<캉가루 날씨 (カンガル-日和)>(1983, 헤이본샤(平凡社)

 

무라카미 하루키

 

 

 

남캘리포니아의 대부분의 지역이 그러한 것처럼, 사우스베이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물론 전혀 내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비가 내린다는 현상이 어떤 반응을 수반하는 기본적 관념으로써 사람들 속에 깊이 스며들 만큼 내리지는 않는다. 즉 보스턴이나 피츠버그에서 온 누군가가 "정말 비가 내리는 것처럼 지긋지긋하군" 하고 말했다고 해도, 사우스베이 사람들이 그 뉘앙스를 이해하는 데는, 남들보다 반 호흡 정도 시간이 더 걸린다는 말이다.

남캘리포니아라고 해도, 사우스베이에는 서프 포인트도 없고, 핫 로드 코스나 영화 배우의 저택도 없다. 단지 비가 거의 내리지 않을 뿐이다.

이 도시에는 레인코트보다는 불량배가 훨씬 많고, 우산보다는 주사기의 수가 더 많다.

만의 입고 부근에서 근근히 생계를 꾸려 가고 있는 새우잡이 어부가 가슴에 45구경 총알 세 발을 맞은 사체를 끌어올렸다고 해도, 그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사건이 아니며, 롤스로이스를 탄 흑인이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달고 있었다 해도, 게다가 그가 은빛의 시가렛 케이스로 젊은 백인 여자를 후려치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그다지 보기 드문 풍경이 아니다.

요컨대 사우스베이는, 젊은이들이 영원히 젊고 그 눈동자는 바다 색과도 같은 블루라는, 그러한 타입의 남캘리포니아는 아닌 것이다. 우선 사우스베이의 바다는 푸르지 않다. 거기에는 중유가 떠 있고, 선원들이 내던진 담배꽁초 때문에 때아닌 바다의 불길을 구경하게 되는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영원히 젊다고 할 만한 것은 죽은 젊은이들뿐이다.

물론 나는 관광을 하러 사우스베이를 찾아온 게 아니며, 모럴을 구하러 찾아온 것도 아니다. 어느 경우든 간에, 사우스베이 시티보다는 오클랜드의 시립 동물원으로 가는 편이 훨씬 낫다.

내가 사우스베이를 찾아온 것은, 한 젊은 여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나에게 그 일을 의뢰한 사람은 로스엔젤레스의 교외에 살고 있는 중년의 변호사며, 내가 찾는 젊은 여자는 이전에 그의 비서였다. 그녀는 어느 날 몇 장의 서류와 함께 모습을 감추었는데, 그 서류에는 매우 개인적인 한 통의 편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흔히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1주일 후에, 그 편지의 복사본과 조심스러운 요구라고는 보기 어려운 액수의 돈을 요구하는 편지가 날아든다. 편지에는 사우스베이 시티의 소인이 찍혀 있다. 변호사는 그 정도의 돈이면 지불해도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5만 달러 정도의 돈 때문에 세계가 뒤집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만일 편지의 원본 자체가 되돌아왔다 하더라도 협박자에게는 아직 몇 다스의 복사본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도 흔히 있는 이야기다. 그래서 사립 탐정이 고용된다. 하루에 120달러와 필요한 경비, 그리고 2000달러의 성공 보수가 주어지는 싼 일거리다.

남캘리포니아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아무도 갖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는 여자의 사진을 손에 들고, 사우스베이 일대의 바와 클럽 등을 모조리 찾아다녔다. 이 도시에서 재빠르게 누군가를 찾아내고 싶으면, 이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비프스테이크를 한 쪽 손에 들고 상어의 무리 속을 걸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반드시 누군가가 덤벼들게 마련이다.

그 반응은 기관총의 총알일지도 모르고, 도움이 되는 정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반응인 것은 분명하고, 내가 원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나는 사흘 동안 돌아다니면서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의 이름을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 다음에, 방에 틀어박혀 캔 맥주를 모조리 비우고 45구경 권총을 소제하면서 그 반응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반드시 무엇인가가 찾아온다는 것을 직업적인 직감력으로 알고 있다 하더라도, 역시 기다리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틀이나 사흘 동안 방안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신경이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이런 데서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는 밖에 나가 세상 사람들을 들쑤시고 돌아다니는 편이 더 빠르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캘리포니아 주의 사립 탐정의 수명을 단축시킨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기다렸다. 나는 서른 여섯 살이라 아직 죽기는 이르고, 그리고 적어도 사우스베이의 소변 냄새가 풍기는 골목 안에서 죽고 싶지는 않다.

사우스베이에서는 사체보다는 손수레가 더 정중히 다루어진다. 일부러 그러한 거리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반응은 사흘째가 되는 날 오후에 나타났다. 나는 테이블 뒤에 45구경 권총을 껌 테이프로 부착하고, 소형 리볼버를 손에 들고 방문을 2인치쯤 열었다.

"양손을 방문에 대고 있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나는 일찍 죽고 싶지는 않다. 비록 싼 일거리긴 해도, 나는 나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인간인 것이다.

"알았어요, 쏘지 말아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방문을 열어, 여자가 안으로 들어오게 한 다음에 문을 잠갔다.

사진과 같은, 아니 사진 이상으로 멋진 여자였다. 근사한 금발과 로켓과도 같은 유방 --- 중년 남자가 열중해 버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녀는 몸에 꼭 맞는 원피스 차림에, 구두 뒤축이 6인치나 되는 하이힐을 신고, 에나멜 핸드백을 손에 든 채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버본밖에 없는데 마시겠어요?"

"마시겠어요."

나는 손수건으로 잔을 닦은 다음, 거기에 올드 크로우를 절반쯤 따라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여자는 한 모금을 맛보고는 절반쯤 쭉 마셨다.

"아름다운 우정의 시작인가요?"

"그러면 좋겠지만 우선 편지 이야기를 합시다" 하고 나는 말했다.

"좋아요. 편지 이야기요. 로맨틱하군요. 하지만 대체 무슨 편지에요?" 하고 여자가 물었다.

"당신이 훔쳐가고, 그것을 증거로 삼아 누군가를 협박한 편지말이오. 아직 생각나지 않나보죠?" "생각나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편지 따위를 훔치지 않았는데요." "그럼 로스엔젤레스의 변호사 밑에서 비서로 일한 적도 없어요?" "물론이에요. 나는 다만 이리로 와서 당신과 좋은 일을 하면 100달러를 받을 수 있다고......"

검은 덩어리가 내 위의 입구로 치밀어 올라왔다. 나는 여자를 바닥에 쓰러뜨리고는, 테이블 밑의 45구경 권총을 뜯어내고, 침대 밑에 엎드렸다. 이와 거의 동시에 기관총의 총알이 진 크루퍼의 드럼롤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것은 문을 부수고, 잔을 깨고, 벽지를 찢어 버리고, 꽃병의 조각들을 방 안에 흩뜨리고, 매트리스를 솜사탕처럼 만들어버렸다. 톰프슨 기관총풍 세계의 재구축인 셈이다.

그러나 기관총이라는 것은, 그 요란스러움에 비해 그다지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고기를 다지는 데는 적합하지만, 사람을 정확히 죽일 수 있는 무기는 아니다. 말이 많은 여자 컬럼니스트와도 같다. 요컨대 경제 효과의 문제다.

총알이 다 떨어져 철컥 소리가 나는 걸 확인한 다음에 나는 일어서서, 황홀하리만큼 재빠른 속도로 잇달아 네 번 방아쇠를 당겼다. 두 발은 반응이 있었지만, 나머지 두 발은 빗나갔다. 5할의 확률이면, 다저스 팀의 4번 타자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주의 사립 탐정 노릇은 할 수 없다.

"썩 잘하는군" 하고 방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이제야 알겠군. 협박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거야. 편지 이야기도 거짓말이구. 제임슨 사건과 관련하여 내 입을 막고 싶었던 것뿐이지." "그렇소. 머리가 잘 도는군. 당신이 입을 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곤란해지지. 그래서 당신은 사우스베이의 싸구려 호텔에서 매춘부와 함께 죽어야 하는 거야. 틀림없이 좋지 않은 소문이 나겠지."

꽤 훌륭한 계획이었지만, 애석하게도 대사가 너무 길었다. 나는 방문을 향해 45구경 권총의 나머지 세 발을 쏘아댔다. 한 발만 반응이 있었다. 3할 3푼 3리 --- 물러나야 할 때가 되었다. 누군가가 15달러짜리 화환쯤은 보내 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납의 샤워가 퍼부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두 개의 총성이 진 크루퍼와 버디 리치의 드럼 배틀처럼 서로 겹쳐졌고, 10초 후에 모든 일이 끝났다. 일단 유사시에는 경찰의 행동이 빠르다. 유사시가 될 때까지 시간이 걸릴 뿐이다.

"이제 안 오는 줄 알았어" 하고 나는 외쳤다.

"물론 오지. 단지 조금 지껄이게 하고 싶었던 거야. 자네는 정말 훌륭하게 해냈네." 하고 오보니언 경위는 말했다.

"상대는 누군가?"

"사우스베이의 대수롭지 않은 불량배야. 누구의 부탁을 받았는가 하는 것은, 내가 있는 힘껏 자백시켜 보겠네. 로스엔젤레스의 변호사도 붙잡을 거고. 기대해도 좋네." "꽤 열심이군 그래."

"사우스베이도 이제 산뜻해질 때가 되었으니까. 자네가 어떻게 증언하느냐에 따라 시장의 의자마저 흔들릴 거네. 자네 취향에는 맞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세상에는 매수당하지 않는 경찰도 있지." "그런가?"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 나의 사건이 함정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알고 있었네. 자네는?"

"나는 의뢰인을 의심하지 않네. 그 점이 경찰과 다른 점이지."

그는 히죽 웃으며 방을 나갔다. 경찰의 웃는 모습은 언제나 똑같다.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사람만이 그런 식으로 웃는다. 그가 나간 뒤에는 나와 여자와 수백 발의 납으로 된 총알만이 남겨졌다.

사우스베이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사체보다는 손수레가 더 정중히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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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7 0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포르노 여배우? 그건 나의 과거일 뿐"
[스타뉴스 2004-10-28 08:55]
獨시벨 케킬리 데뷔작 '미치고 싶을 때'서 놀라운 연기

[머니투데이 스타뉴스 김현록 기자]'포르노 스타로 시작해서 오스카로 가는 것이 그 반대보다 낫다.'

독일 언론이 영화 '미치고 싶을 때'의 여자 주인공 시벨 케킬리를 두고 내린 결론 중 하나다.

시벨 케킬리는 첫 영화 '미치고 싶을 때'로 2004년 베를린 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거머쥔 독일 영화계의 차세대 기대주. 그러나 영화제 수상 이틀만에 하드코어 포르노 배우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곤욕을 치렀다.

시벨 케킬리는 이번 영화에서 구속을 거부하는 열정적인 젊은 여성 '시벨' 역을 맡아 전신 노출과 과감한 베드신을 불사한 연기를 펼쳤다. 그녀의 포르노 이력을 두고 더욱 말이 많았던 건 이같은 영화 속 장면들 탓이 컸다.

그러나 시벨 케킬리는 신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안정된 연기와 '내 과거, 내 삶에 대해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않겠다'는 당당한 태도로 황색 언론의 빗나간 관심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독일 영화계도 '포르노는 과거일 뿐'이라는 이 자신만만한 여배우에게 2004년 독일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기며 연기력을 갖춘 배우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케킬리는 이달 중순 열린 제 9회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차 한국을 방문, 직접 팬들과 함께 영화를 감상하며 한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첫 영화에서 독일에 사는 터키인 역을 맡은 그는 차기작 '케밥 커넥션'을 통해 이탈리아인으로의 변신을 꾀할 예정.

피터 아킨 감독의 영화 '미치고 싶을 때'는 엄격한 집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위장 결혼을 택한 젊은 여성과 마약과 무기력에 찌든 채 그녀를 받아들인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독특한 멜로드라마. 다음달 12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18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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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읽고 있는 40대 여성 사회학자(우에노 치즈코)와 60대 남성 철학자(나카무라 유지로)의 왕복 서간집 <인간을 넘어서>에는 성인 비디오 배우인 구로키 가오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인 그녀는 80년대에 자신의 체험담을 놀랍도록 솔직하고도 분석적으로 기록해 <타락에도 정도가 있다>라는 책을 낸 바 있다고 한다.

도쿄의 중류 가정에서 자랐고, 자폐증이 있지만 성적으로 조숙한 여자아이가 대학생이 되었고 이탈리아에 가서 종교미술사를 연구하기 위해 유학 자금이 필요했다, 그때 우연히 모델 아르바이트를 권유받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성인 비디오 배우가 되면서 헤어나기 어려운 궁지에 처하게 되자 "이젠 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당당하게 그 길에 몸을 던진 여자 배우로 매진해 나간다는 내용......

구로키 가오루의 책에는 엘렉트라 콤플렉스, 억압적인 부르주아 성도덕, 강간당하고 싶어하는 심리, 마조히즘 등 성에 관한 온갖 담론이 생생한 체험의 목소리로 얘기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에 소개된 몇 구절을 재인용해 본다.

"자기의 사적 소유권을 던져버리고 타자가 전적으로 소유하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실로 지상에서 거주할 권리를 얻는 것이며, 동시에 내가 이 세계를 획득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
"어느덧 나는 '형이하(形而下)에서의 패자는 패배를 수용함으로써만이 승자에 대항해서 형이상(形而上)의 승리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법칙을 발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위상에서의 승리, 이거야말로 바로 SM의 진수였습니다."
"드레싱 소스에서 식초와 기름은 결코 뒤섞여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격렬하게 흔들면 각각은 절대 융화되지 않고 자잘한 분자 상태가 되어 뒤얽혀 버립니다. 식초를 이성, 기름을 욕망이라고 바꾸어놓으면, 마구 흔들린 드레싱 소스는 그때의 나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 성인용 비디오 촬영이라는 행위가 불러일으키는 폭력적인 '힘'이 나를 격렬하게 휘저어서 분자 상태의 이성과 욕망이 고속으로 뒤범벅되어 전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내달리게 했던 것입니다."

* 남성 관객은 포르노 속의 여자를 욕망하지만 그 여자는 남성 관객을 욕망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영화 관람이 그렇듯이 이것은 나르시즘의 퇴행적인 환상이다. 포르노를 보는 사람은 욕망하는 주체라기보다는 욕망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김영진, <영화가 욕망하는 것들>, 책세상 문고·우리시대]

포르노에서 나타나는 성교는 일반 사회에서 남녀가 누리는 권력 관계를 정확히 비유하고 있다. 포르노 영화 속에서 대개 남성은 주인[권력자, 지배자]이고 여성은 노예[피지배자]이지만, 실제로 그 세계에서 주체성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관계를 연기하는 여자 배우가 아닐까.

"내 과거, 내 삶에 대해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않겠다"[사과라니! 사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는 시벨 케킬리의 당당함과, "있어야 하는 것을,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을, 없는 것처럼 처신하는 이상한 상태의 우스꽝스러움이란!"하고 꼬집는 구로키 가오루의 태도는 그 체험의 단순한 겹침을 넘어서는 인식의 일맥 상통함을 보여준다.

* 포르노의 환상은 현실에서 가질 수 없는 어떤 욕망을, 넘어설 수 없는 어떤 경계를 잠시 꿈꾸듯이 체현하고 넘어서게 한다는 점에서 슬픈 욕망의 세계이다. 그건 자정까지만 빛나는 신데렐라의 구두 같은 것이다.
나는 포르노 영화를 즐겨 보지 않지만[사실 제대로 본 것도, 아는 바도 거의 없다...], 포르노 영화가 상징하고 있는 욕망의 세계에 대해서는 늘 관심과 시선이 간다. 위반의 욕망과 연결돼 있는 판타지의 세계...... 내게 그 판타지는 어떻게 내재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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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4-10-28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여자들.사람들은 대개 환상에 넋을 저당잡히죠.실체는 바람빠진 풍선처럼 왜소하고 초라한 것인데 환상과 거짓말은 풍선기구처럼 거창하고 매혹적입니다.

로드무비 2004-10-28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치고 싶을 때', '타락에도 정도가 있다' 등 제목들이 너무 재밌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글이군요.

코코죠 2004-10-28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르노 스타로 시작해서 오스카로 가는 것이 그 반대보다 낫다.'

이런, 멋져버리쟌아요. 그래서 오즈마는 덜컹, 그리고 뭉클, 해버렸다는.

에레혼 2004-10-29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니케어님, 병든 구조나 상황 속에서 주눅들거나 상처로 좌절하지 않고 자기를 똑바로 응시할 줄 아는 '어른 여자'들의 당당함이 때로 나의 머리를 내려치곤 합니다.... 나의 나약함, 나의 비겁함, 나의 거짓, 나의 타협들을 씁쓸하게 돌아보게 하는.....

로드무비님, 님처럼 뜨겁고 다정한 여자의 마음에 꼭 들만한 제목들이지요.

오즈마님, 나의 사랑스런, 마이 퍼니 오즈마님(ㅋㅋㅋ 전염!), 그 말의 반대 순서로 가는 쪽도 분명 있으니, 지당한 말이 아닐까요? 오즈마님은 세상의 모든 멋진 것에 그렇게 덜컹, 뭉클할 수 있는 열정과 촉촉함으로 가득차 있어서 그리도 이쁜 청춘을 보내고 있는 듯....
그나저나 가을 엽신이 왜 아직 안 올까, 날마다 포스트맨의 벨이 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건만...
 

 

아침에 청소를 하다가, 문득, 그냥, 불현듯, 오래 걸어 온 끝에 밀려드는 갈증처럼, 영화를 보러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디오도,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더빙된 영화도 아닌 '고전적으로' 극장에서 보는 영화....... 무엇이 목말랐던 것인지, 무엇이 그리웠던 것인지.......

알렉산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21그램>을 보았다. 극장 안에는 나를 빼고 한 쌍의 젊은 연인이 있을 뿐이었다.

<아모레스 페로스>의 그 강렬하고 지독한 운명적 우연과 인연의 교차를 기억하고 있는 나는 <21그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고 있는 바가 없었다. 첫 장면이 시작될 때  아, 숀펜이 나오네... 했을 정도로. 난 외우기 어려운 이름의 이 감독의 진지하고 엄숙한 질문법이, 실수로 뒤엎은 직소 퍼즐처럼 시간의 조각들을 한데 뒤섞어 제멋대로 배열해 놓는 그의 스타일이, 흐릿하고 탁한 모래알을 뿌려놓은 듯한 거친 화면 색감이 마음에 들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의 방식이 좋았다. 요즘 유행하는 유머와 따뜻한 가벼움을 외면할 수 있는, 그의 뜨거운 묵직함이.

영화를 보고 나와 친구의 서점에서 책을 한 권 골랐다.  나카무라 유지로와 우에노 치즈코의 왕복 서간집<인간을 넘어서-- 늙음과 젊음, 남과 여>. 우연히, 세상의 인상적인 만남의 순간이 알 수 없는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그저 우연히 이 책의 차례를 보고 마음이 확 쏠렸다.  아라비아해의 석양, 늙음의 섹슈얼리티, 어린아이의 시간, 다극화하는 자아, Never say "Next time"....... 이 책의 부제인 늙음과 젊음, 남과 여의 문제는 언제나 그래 왔고, 특히 이즈음 내가 집중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주제이다.

친구를 보면서, 나는 나의 '나이듦'을 실감한다. 그의 피로한 얼굴, 물기 빠져 버린, 되풀이된 세탁으로 적당히 탈색돼 버린 듯한 표정, 열정이 채 증발하지 않은 그 위에 심드렁함을 걸치고 있는 몸의 언어, 그리고 간간이 별뜻없이 찾아드는 가벼운 침묵. 그 공기. 그리고 지는 시월의 석양. 이렇게 우리의 2004년 시월이, 또 한 번의, 그러나 어느 것과도 닮지 않았을 이 가을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알라딘의 적립금으로 주문한 디브이디 타이틀 두 개를 저녁 무렵 받았다. 쟈크 리베트의 <알게 될 거야>와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 지난번에 주문했던 오즈의 <가을 햇살>과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은 품절이라고 나중에 연락이 왔었다. 이번엔 내가 원하던 것들이 무사히 나에게까지 당도했다. 늘 원하던 것을 무사히, 그리고 쉽게 얻게 되는 건 아니다.

 

...................

갑자기 모든 것이 하나의 상징으로, 하나의 맥락을 가진 숨겨진 의미로 느껴지는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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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10-22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만간 21그램 볼 생각입니다. 최근 기대되는 영화 중 하나네요.

에레혼 2004-10-23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rblue님, 저는 좋았어요. 전작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터라, 이 감독의 작품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몇 해 전 우연히 보았던 <아모레스 페로스>는 그 뒤 비디오로도, 디브이디로도 구할 수가 없어요, 소장하고 싶은데......

님, 이 영화에 대해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보는 게 더 좋으리란 생각입니다.

2004-10-23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레혼 2004-10-23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귓속말님, 그런 계기로도 우리는 만나게 되곤 해요, 이름, 목소리, 어떤 말 한마디에 이끌려서......
들러주셔서 반갑구요, 물론 여기 있는 것은 어떤 의미로 다 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시기를.
 

* 이번 주에 산 책

 

 

 

 

 

 

 

 

* 지금 읽고 있는 책

크리스토프 하인, <낯선 연인>, 현대소설사

아니 에르노, <아버지의 자리>, 책세상

잉마르 베리만 자서전, <마법의 등>, 이론과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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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24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사고 싶었던 책이구요...김혜순 시집은 신간인가요? 검색하러 가야 겠당 휘리릭~!

2004-09-24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는 책, <떡갈나무 바라보기><중국문화기행><톨킨><곤충일기> 연휴 기간안에 다 읽어뿌려야지...캬캬캬.

에레혼 2004-09-25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살 때는 어떤 이끌림과 욕심 때문에 이것저것 집어들게 되는데...... 집에 가져와서는 표지와 차례만 한번 살펴보고는 또 한참 밀쳐져 있곤 합니다, 순서가 밀려서요
님이 독서중인 책들은 모두 제가 읽지 않은 책들이네요
저는 <떡갈나무 바라보기>에 마음이 동하지만, 일단...... 참나님의 리뷰 기다릴게요!
 


"....... 시 쓰는 것이 어떤 구원과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기에는 나는 너무나 심각한 비관주의자이다. 시를 쓴다는 것이 만약에 내게 무언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구원도 믿음도 아니고, 내가 더없이 마음 편하게 놀고 먹은 것만은 아니라는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을 뿐이며, 내가 해야만 했던 그러나 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한 작은 변명-- 모기 흐느끼는 소리만한 작은 변명--이 될 수 있을 뿐이다.
....... 시에 대한 신앙도 믿음도 열정도 없고, 시를 쓰고 나면 다시 읽어보기도 싫고, 시를 쓰고 나서도 마뜩지가 않고, 그러면서도 결국은 뭔가 미진하고 아쉬워서 뭉기적뭉기적 시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시인, 메마른 불모의 시인.
그런데 내가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게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보자면 나는 낭만주의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단 한 가지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임을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내가 믿지 않는 것들 속으로 천연덕스럽게, 어기적거리며 되돌아오는 것이다."

-- 최승자 시집 <기억의 집>(문학과지성 시인선) 뒷표지의 말 중에서

 


 

 

 

 

 

* '아무 것도 하지 않고도 마음 편하게 놀고 먹을 수 있는 경지'도 만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유전자를 타고나야 가능한 것 아닐까. 누구나 그렇게 하자고 작정한다고, 또는 오랜 시간 수련이나 행공을 통해 다다를 수 있는 경지는 아닌 듯싶다.

* 구원과 희망을 아직 믿고 있는가...... 하지만, 꼭 그런 이름이 아니라 해도 무언가를 믿지 않고서야 또 어찌 이 길을 계속 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 역시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 내가 믿지 않는 것들 속으로 천연덕스럽게, 어기적거리며 되돌아오는" 방도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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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9-20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달을 사는 것, 파는 것은 어쩜 희망을 사고 싶기 때문이라고 하더이다. 희망,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한가지가 아닌가 싶네요...

에레혼 2004-09-20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달을 사고 파는 것... 그런 풍습이 있나요?
희망, 순진하게 삼킬 수도, 그렇다고 뱉어낼 수도 없는... 삶의 묘약이자 굴레가 아닐까요

근데, 물만두님은 요즘 정말 바지런하게 이미지 변신을 하시는군요!

hanicare 2004-09-20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 것도 하지 않고도 마음 편하게 놀고 먹은 것만은 아니다.'음. 저역시 이 귀절이 탁 날아와 꽂히는군요. 한 통의 물. 김종삼시인의 시나 그걸 꾸어온 나희덕시인의 산문집제목을 보면 두 분 모두 구체적이지 않은 몽롱한 문자를 가지고 놀았다는 부채의식이 있었나봐요.

에레혼 2004-09-20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역시..... 저도 그 구절이 탁 꽂히더라구요, 양궁에서의 골든 샷처럼, 심장 한가운데 명중! 몸으로 온전히 살지 않고, 엄살과 치장과 자기 위안에 적당히 기대서 사는 제 꼬라지 때문에 늘 부채감과 죄책감이 따라다녀요.

언뜻 보고 처음엔 이미지를 바꾸셨구나 했더니, 이름까지! 심상에 무슨 변화가? 좋은 변화겠지요?


hanicare 2004-09-20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hanicare란 워낙에 라이프파트너 김모씨의 닉네임이어서 어째 남의 속옷을 걸친 듯 거북했지요.그래서 제가 전에 종종 쓰던 아이디로 바꿨답니다. 그리고, 좀 알록달록해지고 싶어서요^^ 제가 아동스러운 것도 남몰래 좋아한답니다.(아직도 몰래 어린 시절의 동화를 거푸 읽곤 하지요.)

2004-09-20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괴로움의 실체는 놀고 먹지 못해서 라고 생각하곤 했는데..마음에 와 닿는 글귀입니다.

마녀물고기 2004-09-20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랄프 깁슨이로군요. 종전까지 제 방 이미지로 썼더랬는데, 바꾼 것보다 이전 것이 좋다고들 해서 다시 쓸까 어쩔까 생각 중이었는데, 예서 보게 되다니요.

에레혼 2004-09-21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그 대목에서 걸려넘어지는군요, 참나님...

마녀물고기님, 찾아와 주셨네요
그러셨나요? 저런 '유령' 같은 사진을 방의 이미지로 쓰다니... 역시 마녀물고기님답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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