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장소는 '그린 하우스 앞'이었다. 지난해 이맘때 약속 장소도 같았다. 그때는 건물이 공사 중이었다. 올해는 아예 낯선 간판과 산뜻한 인테리어로 새롭게 단장한 신축 건물이다. 이제 그린 하우스는 사라졌다. 사라져 버렸으나 우리의 기억 속에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그린 하우스 앞에서 우리는 만났다. '그린 하우스 앞'이란 말은 '*대 앞'이란 말처럼 그 언저리에서 한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는 하나의 독립된 고유명사인 셈이다. 추억은 때로 융통성 없이 고집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아직 그 거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추억의 공간 가운데 하나인 '오리지날'에 찾아 들어가 추억의 메뉴를 주문했다. 야채와 오징어 튀김, 그리고 라면과 쫄면 사리가 들어 있는 떡볶이. 식초와 간장과 약간의 설탕과 고춧가루가 적당히 배합된, 그 위에 송송 썬 실파와 깨소금이 섞여 있는 양념 간장의 맛 또한 정감 있는 튀김의 모습과 함께 여전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맛은 달라져 있었다. 어쩌면 달라진 것은 구체적인 맛이 아니라 공기였을지 모른다. 오랜 시간의 빛과 기억의 먼지를 통과해 온 공기의 질감. 오래 입어 날긋날긋해진 옷소매처럼 고단하고 원숙해진 공기의 질감. 오랜 시간을 지나오면서 추억을 저장하는, 추억과 버무려진 맛을 기억하는 회로는 어느 지점에선가 자의적인 왜곡과 조작을 거쳤을지 모를 일이다. 기억은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해서 우리가 기댈 만한 기록이지만, 언제나 과거의 공정한 영수증이 돼주지는 못한다.

 



가미분식 앞을 지날 때는 첫 임신 때 입덧을 하면서 눈물겹도록 가미의 주먹밥이 먹고 싶었다던, 당시 미국에 가 있었던 친구 J가 생각났다. 나는 가미의 주먹밥만큼이나 가미 우동에 딸려 나오는 그 달착지근한 짠지무침의 맛을 때때로 그리워했다. 어느 해인가는 혼자 학교 앞을 배회하다가 가미에 들러 우동을 사먹기도 했다. 그 즈음에 남편이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J를 만나기도 했으나, 이제 나는 J와 연락이 끊어졌고 혼자 가미 우동을 먹는 순간 같은 건 다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억의 한 토막은 거리를 걷다가 문득 발부리에 채이는 돌멩이처럼 돌연 의식의 수면 위로 튀어 오르곤 하는데, 그 숨어 있는 맥락과 뿌리를 추론하는 일은 난해하고도 흥미롭다.
우리가 지녔던 감정들이 어떤 공간에 희미하게나마 각인된다고 생각하면, 평소에 무심결에 스쳐 갔던 곳이라도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때가 있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의 감정이 흘러서 쌓여 현재 '여기'의 느낌과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면 '여기'는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공간이 된다.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이나 한 시절을 보낸 학교 앞 거리에 대한 애착 같은 것도 어찌 보면 그 공간이 간직하고 있었던 기억에 기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곳에 가면 그 기억들이 나에게 다시 말을 걸어서 그때의 감정과 기분을 불러내 주는 것 같은....... 

 


 
미고에서 치즈 케이크와 티라미슈 등 조각 케이크 몇 가지를 골라 가지고(미고는 인기가 있는 곳이어선지 빈자리가 없는 데다가 전 좌석이 금연이었으므로) 바로 옆 건물 2층의 카페로 올라갔다. S가 얼마 전 외국 여행길에 샀다는 디카를 꺼냈다. 적당히 어둡고 따뜻한 불빛 아래서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 창에 포착돼 있는 바로 몇 초 전의 내 모습이 낯설고도 기묘해 보였다. 녹음기를 통해서 듣는 자신의 목소리, 카메라의 필터를 통해 비쳐지는 자신의 얼굴은 왜 그리도 불안정하고 생경한 느낌을 주는지....... 과학적인 설명에 따르면, 그건 모두 거리와 [시간] 속도의 차이에서 오는 낯섦이라고 한다. 내 입에서 귀까지의 거리와 시간, 내 두뇌가 기억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실제 한 대상으로서 외부에 보여지고 있는 나의 모습간의 거리에서 오는 차이. 어쩌면 기억이 갖고 있는 환상과 왜곡 역시 같은 원리에 기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S는 요즘 회사에서 임원진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경영 마인드 익히기 트렌드에 부응해 '도요타 자동차 회사'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었다고 토로한다. Y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시민단체에서 원불교 교무 집에서 마련한 식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원불교 교무는 어떤 식단을 먹는지 무척 궁금했으나...) 미묘한 이유로 동료에게 양보했다는 얘기를 꺼낸다. K는 한동안 이유 모를 불면증과 식욕 부진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데다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는데, 병원에서 우울증 초기에 나타나는 증세라고 진단했다는 얘기를 담담하게 한다. 그 탓에 오랫동안 몸과 마음이 두루 시달렸을 테지만, 그 결과 지금 겉모습은 보기 좋게 가뿐해져 있다. 우리는 '나이 듦'을 어느 지점에서, 어느 순간에 실감하는지를 저마다 얘기하며 쓸쓸하게 웃었다.


훈훈한 등불 같은 추억과 몇 장의 흑백사진 같은 기억과 희미한 미래의 희망이 교직되어 흐르는 시간. 그 시간들 속을 목소리와 이야기와 말들이 가볍고도 무거운 공기 입자처럼 채워 갔다. 경락 맛사지와 요가와 맨손체조의 효과와 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방법, 별거와 이혼과 성공적인 재혼 케이스와 쿨한 관계의 몇몇
사례들에 관한 이야기들, 주변 사람들의 성공과 실패, 인생의 부침에 관한 간략한 코멘트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 말하지 못한, 말로 되어 나오지 않은, 발자국 남기지 않은 채 슬쩍 지나가 버린 저마다의 은밀한 생각과 감정들. 
시간은 흐르고, 밤은 깊어 가고, 2004년 12월 어느 저녁 S와 Y와 K, 그리고 내가 함께 한 기억 또한 그렇게 쌓여 가고 있었다.


한 시절을 같이 보냈으며 오랫동안 서로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란 '같이 살지 않는 가족'과 같은 관계가 아닐까. 일상적으로 밥상머리에서 마주하다가 집 밖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왠지 낯설고 부끄러운 기분에 외면하고 싶어지면서도 마음 한 켠 애잔한 연민이 느껴지는. 어쩔 수 없이 수긍하게 되는 동질감과 뿌리 깊은 동류 의식에 서글프고 누추한 감정 뒤켠으로 뜨끈한 국밥 한 그릇 뱃속에 채운 듯이 마음 든든해지는.


지난 주말, 내가 걸었던 거리의 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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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면을 쓰고 있었으며 그 가면을 수시로 바꿨다.....

가면 밑에 다른 가면이 있고, 그 연속적인 숨김 밑에 진정 본질적인 인간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몇 명의 푸코가 있는 것일까? 수천 명의 푸코가?

그렇다. 물론이다.

 

--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시각과 언어) 중에서

 

 


Duane Michal, Mirr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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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12-20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반가워라. 너무 오래 쉰 거, 알고 계시죠?

플레져 2004-12-20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텔레파시가 통했나요. 아까 밖에서 볼일을 보다가, 라일락 와인님이 모습 본 지 오래됐구나 싶었어요.... 반가워서 눈웃음 ^^

물만두 2004-12-20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을 잊었다는 그래서 님을 사마로 못 올렸다는 죄송 ㅠ.ㅠ

라사마님 라쟈냐 사마!!! 와인하고 먹음 좋을 것 같으니 와인도 한병^^ 찔러족 만두의 찌름 사마이옵니다. 궁금하심 제 서재와서 보시와요^^

2004-12-20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은 버젼이군요..


물만두 2004-12-21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라압스타^^
 

 

"난 혼자요"하고 말하자

여인숙 주인이 숙박부에 그렇게 적었다.

이 추운 겨울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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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12-20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퍼의 그림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군요. 아름답습니다.

hanicare 2004-12-20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입니다. 호퍼의 저 그림처럼 알라딘의 한 켠이 비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조선인 2004-12-20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쿵... 심장을 건드시는군요.

로드무비 2004-12-22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셨군요.

호퍼의 그림이 적막강산입니다.

누에 2007-11-01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퍼호퍼
 

 

 

두 번 쓸쓸한 전화

 

한 명 희

 

 

 

시 안 써도 좋으니까

언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조카의 첫돌을 알리는

동생의 전화다

 

내 우울이, 내 칩거가, 내 불면이

어찌 시 떄문이겠는가

 

자꾸만 뾰족뾰족해지는 나를 어쩔 수 없고

일어서자 일어서자 하면서도 자꾸만 주저앉는 나를 어쩔 수 없는데

 

마흔,

실업,

버스 운전사에게 내어버린 신경질,

세번이나 연기한 약속,

냉장고 속 썩어가는 김치,

오후 다섯 시의 두통,

햇빛이 드는 방에서 살고 싶다고 쓰여진 일기장,

 

이 모든 것이 어찌 시 때문이겠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

한번도 당당히 시인이라고 말해보지 못한 시

그 시, 때문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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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2-06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락와인님, 딱 제 상황이군요.

시 쓰는 것 빼고......

추천하고 가져가요.^^

에레혼 2004-12-06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빠른[자꾸 '바른'이라고 오타가 나는 이유는?...] 응답.....

지금 막 십시일반의 자세, 에 관한 님의 글 보고 오는 길인데.....

12월이라는 시절 탓일까요, 이 시에 이토록 감정이입이 되는 건.....

로드무비 2004-12-06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은 좀 괜찮으세요?

우리 이제 힘 좀 내어 서재활동에 매진해 볼까요?

서로 열심히 댓글 달고 추천 눌러주고......^^

urblue 2004-12-06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분이 서재 활동에 매진하시면 반갑지요. ^^

딸기 2004-12-06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분 서재활동 열심히 하시라고, 추천 꾹 누르고 갑니다.

에레혼 2004-12-06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미한 편두통과 밤의 농도와 함께 시작되는 기침을 친구처럼 데리고 가기로 했습니다, 사이 좋게 지내보려구요....

로드무비님, 좋아요! 우리, 힘냅시다! 재미있게 살고, 읽고, 쓰고, 그리고 잊지 말고 꼬옥 추천하고!^^

12월이라는 숫자의 무게와 압박이 그렇잖아도 어디엔가 마음을 좀 묶어 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이즈음... 이번 주만 지나면 좀 여유가 생길 것 같아요. 그때부턴 나도 보란듯이 누구처럼[!] 찜해 둔 영화도 보러 다니고, 빵빵하게 리뷰도 써서 올리고, 짬짬이 연애 편지도 쓰고 그래야지! -- 마치 시험만 끝나 봐라,하는 수험생처럼 요즘 속으로 되뇌고 있답니다.

에레혼 2004-12-06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도 대열에 동참하시지요! 추위에 웅크리고 있지 말고!

에레혼 2004-12-06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여기에 추천을 누르시니 쬐끔 부끄럽사옵니다! 막후 조율 작업인데.....^^

일본에도 첫눈이 내렸으려나... 일본의 겨울, 우리와 다른 난방 시스템으로[일본에서 생활해 보면, 우리의 온돌 난방 구조가 얼마나 과학적이고 선진적인 것인지 절감하게 되던데...]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지지 않나요? 이국에서의 겨울, 건강하게 보내시기를.....

플레져 2004-12-06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퍼가요. 어찌나 내 것 같은지...

mira95 2004-12-07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라일락와인님 서재에 처음 방문하는데, 덜컹 와서 시만 퍼갑니다. 플레져님 서재에서 보고 왔어요. 가슴에 와닿는 시네요. 잘 퍼갈게요^^

비로그인 2004-12-07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고도 슬프네요.

2004-12-18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전 한명희란 이름 못 보고 와인님 얘긴 줄 알았어요..으..시쓰시는 구나 그러면서...시쓰는 것만 빼면 나하고 똑같다..그러면서...하하하..다들..하하..
 

 


밝은 불빛에서 보아도


이 얼굴은


여전히 추워 보이네


-- 이싸(자신의 초상화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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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12-06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 무서버요...

에레혼 2004-12-06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얼굴이?

거울 속 얼굴을 들여다보는 저 얼굴이?

아님 그대의 얼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