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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
어빈 D. 얄롬 지음, 최윤미 옮김 / 시그마프레스 / 200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과 관계 맺기가 어렵다.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도 늘 혼자라고 느낀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다. 삶의 문제는 있지만 해답은 없을지 모른다고 회의한다. 완전한 소멸을 두려워하면서도 종종 죽음에 이끌린다..... 이런 증세를 가진 사람이라면 심리 분석이라든가 정신과 상담 같은 데 호기심과 관심이 있을 터이고, 그 관심의 뿌리는 근본적으로 자기만이라도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와 사는 동안 잘 살고 싶다는 본능에 닿아 있을 것이다.
스탠포드 대학 교수인 정신과 의사 Irvin D. Yalom이 자신의 치료 사례 열 가지를 묶어 낸 사례집 <나는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는 그런 욕구를 가진 사람들에게 좋은 읽을거리가 되는 동시에 진지한 성찰의 계기가 돼 주리라 믿는다.
Yalom이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례들은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실존적 삶에서 부딪힐 수 있는 문제들이다. 우리가 겪는 실존적 문제들이란 이런 것들이다. 우리 모두,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이 모두가 불가피하게 죽는다는 사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대로 우리 삶을 만들어야 할 자유, 궁극적으로는 혼자라는 것, 그리고 분명한 삶의 의미나 의식이 빠져 있다는 것. 우리 모두는 이 문제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하다.
Yalom 박사를 찾아와 상담했던 이들의 문제를 따라가다 보면 그들의 문제 중 어떤 부분은 놀랍게도 나의 그것과 비슷하게 닮았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 사랑의 처형자 / "8년 전 나는 치료자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 이후로 내 마음에서 그가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밖은 너무나 춥고 내 안은 텅 비어 있어요. 나는 한 번 자살을 시도해서 죽을 뻔하다 살아났지만, 다음 번에는 틀림없이 성공할 거라고 믿습니다. 당신은 나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 뚱뚱한 여인 / "무시무시하게 몇 달이 흘렀다. 그녀는 모든 걸 미워했다. 삶은 고문이었다. 지긋지긋한 액체 다이어트 음식, 자전거 운동 기구, 기아의 고통, 사악한 TV 맥도날드 광고 그리고 냄새, 도처에 깔려 있는 냄새들... 극장의 팝콘 냄새, 볼링장에서 나는 피자 냄새, 상가를 지날 때 나는 빵 냄새......"
- 잃은 아이, 남은 아이 / "나는 세 아이를 가졌어요. 하나는 천사이고 나머지 둘은, 걔들을 봐요. 하나는 감옥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약물 중독에. 나는 세 아이가 있는데 죽어서는 안 될 엉뚱한 애가 죽었어요."
- 뜯지 않은 세 통의 편지 / "나는 편지를 집어들고 집으로 돌아가서, 쓸데없는 우편물이 쌓여 있는 데로 던져 버렸어요. 아직 뜯어보지 않았습니다. 왜 열지요? 거기 뭐가 있는지 난 벌써 알고 있는데. 정확한 문구는 내 상처를 더욱 갈갈이 찢어놓을 뿐인걸요."
- 측은해지려고 태어나다 / "내가 바랄 수 있는 최상의 희망은 정신 병원에 있는 것이에요. 난 사랑을 받아 본 적도 없어요. 아이를 갖지도 않을 거예요. 난 친구를 만들 능력도 없지요. 내 생일이라고 전화해주는 사람도 없어요. 나의 어머니는 남을 괴롭히는, 미친 여성인데, 나는 매일 그녀와 비슷하게 되어 있어요."
이들은 저마다 다른 사연과 상처를 갖고 있지만, 또 들여다보면 모두 같은 자리에 서있다. 너무나 많은 소망. 너무나 많은 갈망들. 자신의 삶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그 소망들이 자기 삶을 압도하여 지배하는 상태.
나 또한 그런 시간들, 그런 경험들이 있었다.
이미 나를 떠나가 버렸거나 애초부터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던 대상에 집착하던 때, 사랑이란 낭만적 환상으로 숨어들어 현실을 직면하기를 회피하려 한 때, 나를 형성한 성장 배경 중 어떤 부분을 결코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 친밀감을 맛보기 위해 나 자신을 속인 때, 또는 결국에는 다가올 헤어짐이나 공허가 두려워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꺼리는 것, 슬그머니 과거나 미래로 미끄러져 들어감으로써 현재 이 순간을 회피하는 것......
인간이란 존재는 스스로 자기의 부모가 되거나 영원한 아이로 남거나 둘 중 하나라고 한다. 어느 쪽이 되기를 원하는가. 나는 물리적 나이와 육체적 나이듦과 상관없이 나 자신이 계속 성장하기를 바라고, 스스로 그 성장을 진심으로 돕고 싶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가 공감을 나타내며 인용하고 있는 사르트르의 말에 나 역시 밑줄을 긋는다. "책임이란, 각자가 자기 삶이라는 디자인에 '작가(be the author of)가 되는 것이다." 저자는 자기 삶을 책임지는 방법의 하나로, '검토하지 않은 채 사는 삶은 가치가 없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한다.
그러나, 내가 더 큰 위안과 안도감을 느낀 것은 바로 이런 구절과 만났을 때였다. "인생의 가장 큰 역설 중 하나는 자기 인식(self-awareness)이 불안을 낳는다는 것이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더 잘 이해하면 할수록 안정감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불안의 파도 속에 잠기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만이 자기 삶의 구조를 만든다는 것을 통찰하기란, 지독하게 어렵고, 두렵기까지 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벼랑 끝에 서서 조금의 연민도 없이 냉혹한 삶의 실존적 사실-- 죽음, 소외, 기댈 곳 없음, 무의미 등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물론 거기엔 해결책도 없다. 몇 가지 입장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단호해지느냐(resolute)", "거기 빠지느냐(engaged)", 혹은 철학적으로 수용하느냐, 아니면 합리주의 정신을 포기하고 신비와 경외심을 가지고 신의 존재를 믿느냐 하는 것이다. 나의 선택이 바로 내 인생의 길을 결정해 줄 것이다.
마지막 사례에서 내담자의 회한 어린 말에(그 말은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음에...) Yalom
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 대답은 나에게 힘을 준다. 어두운 밤바다에서 보는 등대의 불빛처럼.
"나는 삶에서 내가 한 것, 아니 그보다는 하지 않은 것에 대해 회한이 많아요."
"우리가 너무 열심히 과거를 들여다보면, 후회에 압도당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미래를 향하는 것입니다."
사족 몇 가지.
1. 이 책에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는 다소 직설적인 제목이 붙게 된 배경(저자의 말) /
"나는 사랑에 빠져 있는 내담자와 작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나 역시 매혹적이고 싶은 부러움 때문일 것이다. 또는 사랑과 심리 치료는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치료자는 어둠과 싸워 불빛을 찾는 것인데, 낭만적인 사랑은 신비로워야 지속이 되고 그 사랑을 자세히 살펴보면 신기루가 되어 날아가 버린다."
2. 곳곳에서 멋지고 재치 있는 비유와 사고를 만나는 묘미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크게 해준다.
가령 이런 대목들 /
"가장 나의 심리적인 관심을 끄는 분야는 대부분,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생겨났다. 철학자의 사고 체계는 항상 자기 자서전에서 나온다고 니체도 주장했듯이 이는 모든 치료자-- 사실상 생각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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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니체가 많은 부분에서 훌륭한 시각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대인 관계에는 지침이 될 수가 없다. 그보다 더 고독하고, 더 소외된 남자가 있었던가?(밑줄!!)"
"우정이나 결혼이 실패하는 까닭은, 관계를 맺고 서로 돌보는 대신, 한 사람이 상대방을 소외에 대한 방패막이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무엇엔가 빠지는 것(falling)'이 아니고 오히려 '누군가에게 주는(giving to)' 존재의 한 방식이며 오직 한 사람에게만 향하는 행동이 아니라 크게 관계 맺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