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책은 무조건 즐겁게 읽어라”(3)

P.S. 책읽기에 대한 얘기가 세상 얘기로 번져간 것은 책이 곧 세상이기 때문이다. 즉 책-무한이기에 책의 바깥은 없다. 때문에, 책은 무조건 즐겁게 읽어라라는 정언명령은 나에게 다니엘 페나크가 의도했던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걸 조금 밝혀보았을 뿐이다(괴로운 책읽기에 대한 내용도 집어넣을까 했지만, 분량상 참아두기로 한다).  



이제 2004년도 곧 마지막 한 달을 남겨놓게 된다. 대부분의 시간을 모스크바에서 보내면서 감회가 없지 않다. 12월은 그러한 감회를 풀어볼 수 있는 책들을 읽어볼 계획인데, 내가 고른 12월의 책은 두 권이다. 하나는 데리다의 <법의 힘>(문학과지성사)이고, 다른 하나는 러시아 작가 다닐 하름스의 <한 남자가 집에서 나왔다>(청어람)이다(하름스의 책 제목은 정확한지 모르겠다). 그리고, 둘 다 얇은 책이긴 하지만, 이 두 권이 개인적으로 내가 꼽은 올해의 책이다 



데리다의 책을 꼽은 건 물론 지난 달에 그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나는 그가 20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그의 책을 읽는 일은 언젠가 고백했듯이 내 생전에는 종료되지 않을 듯하지만, 그래도 그를 읽고 또 읽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 나는 얼마전에 니콜라스 로일(N. Royle) <자크 데리다>를 다 읽고, 지금은 비어즈워스(R. Beardsworth) <데리다와 정치적인 것>을 읽고 있는데, 그 책은 사실 데리다가 사유하는 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올해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도 다시 번역돼 나왔지만, 요즘에 좀더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의 책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읽어보기로 했다(번역도 믿을 만한 것 같아서).  



비문학 분야의 또 다른 올해의 책들은 지젝의 (제목은 언제나 헷갈린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나이다>(인간사랑)와 리처드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을유문화사)이다(이 두 책에 대해서는 통신문 <최근에 나온 책(30)에서 언급한바 있다). 두 저자의 두번째 책이란 얘기도 이전에 했지만, 비유컨대, 지젝에게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그들은>, 그리고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확장된 표현형>은 각각 최강의 완투 펀치(1-2선발)라 할 만하다(올 월드시리즈 우승팀인 보스턴 레드삭스에 견주면, 페드로 마르티네스와 커트 실링쯤 될 것이다). 거꾸로 얘기하면, 어느 한 권만 읽어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나는 이런 책들을 한 권만 읽고 떠드는 사람과는 얘기하고 싶지 않다). 해서, 이 두 권이 나로선 서울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챙기게 될 책들이다. 하지만, 현지사정상 12월엔 <법의 힘>만 읽는다   



문학분야의 책으로 내가 꼽은 다닐 하름스(Daniil Kharms; 1905-1942)는 러시아에서도 9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복권되고 다시 읽히고 있는 작가이다(지금은 고리키보다는 훨씬 더 책이 많이 나와 있고 더 많이 읽힌다). 본명은 다닐 이바노비치 유바초프인데, 소위 러시아의 마지막 아방가르드 작가로서 전위적 예술단체였던 오베리우의 주도적인 인물이었고, 이오네스코나 베케트보다 거의 20년 이상을 앞서서 부조리극과 부조리문학을 개척한 작가이다(그게 숙청의 빌미가 되었는바, 스탈린의 사회주의는 넌센스를 용인하지 않았다). 더불어 아동문학가 



이미 <도스토예프스키의 기하학과 부조리극의 기하학>이란 통신문에서 약간 소개한바 있기도 한데, 올해 나온 그의 작품집 <한 남자가 집에서 나왔다>는 국내에서 처음 출간/소개되는 책이다. 물론 올해 문학분야에서 나온 책으론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돈키호테> 등의 재번역본 등이 중요하지만(현지사정상 나의 시야는 한정돼 있다), 나는 적어도 러시아문학 쪽에서 나온 책으로는 가장 의미있는 책을 올해의 책으로 꼽겠다(체홉 사망 100주년이었지만, 체홉의 책으로 아주 새롭게 출간된 책은 없었다).  



한국어판 하름스의 표제작은 그가 1937년에 쓴 것인데, 그의 문학적 유언으로 흔히 읽히는 작품이다(대부분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한 페이지밖에 안되지만). 1931년에 1차로 체포된바 있었던 그는 1941년에 2차로 체포되며 42년 초에 수용소에서 (어처구니없지만) 기아로 죽음을 맞는다. 그런 그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경우, 이 부조리한 작품의 의미는 증폭된다. 하지만, 이 작품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은 중편인 <노파>(1939)이며, 1939 5월말에서 6월 중순 사이에 완성한 그의 정말 마지막 작품이다(확인하진 못했지만, 나는 우리말 번역본 목차의 <노파>가 이 중편일 거라고 믿는다).  



하름스(Kharms)란 필명은 영어의 Charm Harm을 결합시킨 것이라고도 하는데, 한편으론 그가 좋아했던 노르웨이의 작가 크누트 함순(1859-1952)을 떠올리게도 하는 이름이다. 그리고, <노파>에는 “이어서 그들 사이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갔다”라는 말이 에피그라프로 들어가 있다(한편으로 별로 세간이 없던 그의 방에는 함순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도 한다). 함순의 <미스터리>(1892)와 종종 비교되기도 하지만(우리말로는 번역돼 있지 않다) <노파>에는 함순의 대표작 <굶주림>(1890)과의 연관성도 곳곳에 보인다(함순의 <굶주림>은 번역돼 있다. 더불어 폴 오스터의 산문집 <굶기의 예술>도 참조).  



가장 직접적인 건 말 그대로 굶주림인데, 실제로 1930년대 말 하름스는 극도의 물질적 궁핍으로 인하여 고통 받았었다. 가령, “나는 도저히 떨리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무얼 해야 하는지도 생각할 수 없다. 펜과 종이를 집어들어야 하는데, 필요하지도 않은 잡스런 것들만 집어들게 된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쓸 수 없다.(나의 번역이다), 글쓰기의 불가능성은 일차적으로 그의 굶주림에서 비롯된다. 해서, 니진스키를 비틀자면, 나는 배가 고픈데 神은 내게 계속 쓰라고 명령한다가 하름스의 고뇌이다 



<노파> 주인공은 허기를 달래기 위해 날 소시지를 먹고 배탈이 나는데, <굶주림>에서의 이름없는 주인공은 허기를 달래기 위해 고깃집에서 개먹이용 뼈다귀를 얻어 씹어먹다가 토악질에 시달린다. 무엇이 굶주림인가를 가장 잘 요약해 주는 대목이다: “나는 뼈다귀의 고기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아무런 맛이 없었다. 말라붙은 피의 메스꺼운 냄새가 뼈에서 올라와, 곧 삼킨 것을 토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시 시도를 해보았다. 이 고기 한 조작을 속에 집어넣을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그 효과가 나련만. 배 속에 그것이 남아 있도록 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또 다시 구토증이 일어났다. 몹시 화가 났다. 고기를 난폭하게 물어뜯었다. 거기서 조그만 살점이 뽑혀 나와서, 그것을 억지로 삼켰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고기의 조그만 살점들은 위 속에서 발효되자마자 도로 올라왔다. 나는 미친 듯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비탄에 빠져 눈물을 흘리고, 귀신들린 사람처럼 갉아먹기 시작했다. 하도 울어서 뼈는 눈물로 젖어 더럽혀졌다.(눈물에 젖은 뼈!) 나는 더욱 격렬하게 토해내고, 욕설을 퍼붓고, 갉아먹었다. 마치 심장이 터져버릴 듯이 울었고, 또 토해냈다. 그리고 더 큰소리로 온 세상의 신들에게 지옥에 떨어지라고 저주했다.(굶어도 굶어도 굶주림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생각건대, 세상의 굶주림은 세상의 울음만큼이나 질기다. 세상엔 인의와 자비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굶주림>의 이 주인공에게 배속에 뼈다귀가 남아있도록 하는 게 문제였다면, <노파> 주인공에겐 자신의 방을 찾아온 불청객 노파의 시신을 처리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걸 어떻게 밖으로 내다 놓을 것인가? 그는 “도대체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Nu shto mne delat'?)라고 묻는데, 이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Shto delat'?)란 소비에트적 질문방식에 대한 패러디이다. <노파>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단서들이 해독되어야 하는데, 가령, 노파가 무엇을 상징하느냐 하는 것. 흔히 <죄와 벌>의 전당포 노파와 비교되는데, 문제는 이 노파의 경우는 도끼로 내리쳐 죽이지 않아도 제 발로 찾아와 죽어 주었다는 것. 이야기의 첫 장면에서 노파가 가지고 있는 시계의 바늘들을 주인공인 나는 보지 못하지만, 노파는 시계를 보고 시간을 일러준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신의 시계를 저당 잡힌다는 명목으로 전당포를 찾아가고, 또 살인사건 이후에 그의 시간이 시계와 함께 땅에 묻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두 노파가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그냥 맛보기일 뿐이며, 당신의 읽기를 꼬드기는 미끼일 뿐이다. 짧은 작품이지만 <노파> 또한 텍스트-무한이다(이 작품과 종횡으로 연결되는 작품이 또한 여럿이다). 당신도 직접 읽어본다면, 할말이 무척 많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당신은 그걸 써야 한다).  



그런 건 <법의 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개인적으론 데리다의 책을 셰익스피어의 <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와 겹쳐 읽은 예정이다. 참고로, <자에는 자로>는 푸슈킨이 <햄릿> <오델로> 레벨의 작품으로 꼽은바 있고 그 자신이 번역을 시도하다가 아예 번안작을 쓰기까지 했다. <안젤로>란 작품인데(열린책들의 전집에 들어 있을 것이다), 드라마가 아니라 서사시이고, 자비를 주제로 셰익스피어를 교묘하게 비틀고 있다. 그러니 흥미롭지 않은가? 한번쯤 읽어들 보시길. 지극한 즐거움들을 누리면서. 하여간에, 이 모든 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2월에 쓰도록 하겠다(나는 두 권의 책을 열흘쯤 후에나 받아볼 예정이며, <노파>에 대한 소개는 이전에 써둔 걸 부분적으로 따온 것이다)    



P.S.2. <푸슈킨-도스토예프스키-데리다>란 글에선가 푸슈킨이 곤차로바와의 사이에서 1 3녀를 두었다고 했는데(이건 열린책들 전집의 연보를 참조한 것이다), 2 2녀가 맞는 듯하다(러시아책에 그렇다니까). 우리말 전집의 연보에는 1833년에 둘째 딸 사샤가 태어난 걸로 되어 있는데, 사샤는 사내 아이 알렉산드르의 애칭이다(역자는 딸 알렉산드라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그가 러시아 시인이므로 내가 더 믿게 되는 건 우리말본보다는 러시아어본이다. 사소한 사항이지만, 남의 집 가계를 바꾸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라서 교정해둔다.


P.S.3. 다음주에 모스크바에서는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를 휘날리며>가 <38선>이란 제목으로 개봉된다. 한국 영화, 즉 '김기덕과 블록버스터들' 중에서 후자에 속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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