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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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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마누엘 푸익 원작, 송병선 옮김, 민음사)

(헥토르 바벤코 감독)

 

 

삶이라는 이 난해하고 부조리한 과정을 한두 마디 말로 표현하라고 한다면(이렇게 과감하고도 허황된 요구를 과연 누가 할 수 있으랴만....),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관계'와 '영향'이다. 이 세상에 내던져진 우리는 누구도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멀고 가까운 관계 속에서 미처 다 감지하지 못하는 크고 작은 영향들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고,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미워하면서, 일상의 삶이 기우뚱거릴 만큼 누군가를 그리워하거나 때로는 아주 무심하게 그냥 지나치면서, 어떻게든 누군가의 삶과 겹쳐지려 애쓰거나 아니면 누군가를 자기 삶에서 지워 버리려 애쓰면서, 누군가를 알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알지 못한 채, 또는 자신은 의식하지 못한 사이 누군가와의 보이지 않는 관계망 속에 일찍부터 들어가 있으면서, 그렇게 우리는 자기 앞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만나 어떤 관계를 이루고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느냐가 어쩌면 그 삶의 궤적 전부일지도 모른다. 나는 때때로 '영향(影響)'이란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곤 하는데, 그 말이 가리키는 그대로 '그림자'와 '메아리'― 바로 그것이 관계라는 것의 본질을 놀랍도록 명쾌하게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그가 만난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언가가 조금씩 달라진다. 둘은, 둘의 사이는 변화한다. 내가 그의 그림자가 된다. 그가 나의 메아리가 되어 울린다. 둘은 서로 만나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세상 속에서 산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란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여기 두 남자, 아니 두 사람이 있다.
비좁고 음습한 감방,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동성애자와 혁명을 꿈꾸는 냉소적인 정치범. 이 둘은 서로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지니고 서로 너무도 다른 성격과 방식으로 살아 왔고, 그 '다름'은 감방이라는 이 좁은 공간 안에서 자연히 부딪히게 된다. 경멸과 혐오와 차별과 몰이해...... 그 부딪힘은 '갇혀 있는 현실'을 잊기 위해 시작된 다섯 편의 영화 이야기가 전개되는 가운데 진행된다. 그리고, 마지막 영화 이야기가 끝날 즈음 두 사람은 어느덧 서로에게 잊을 수 없는 그림자가 되고 서로의 삶에 깊은 메아리를 울리게 된다.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두 죄수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 끌고 나가는 한 권의 책, 무척 흥미롭고 뜻밖에도 이야기가 풍부하다.
 
발렌틴(라울 줄리아)은 기자 출신으로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검거된 정치범이며, 또 다른 한 명은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으로 구속된 몰리나라는 동성애자이다. 몰리나(울리엄 허트)는 교도소 쪽으로부터 발렌틴의 조직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알려주면 석방해 주겠노라는 제안을 받는다.
감성적인 몰리나는 감옥 생활의 따분함을 잊기 위해 그가 보았던 영화를 발렌틴에게 이야기한다. 헐리우드 영화에 빠진 순진한 동성애자와 단호한 좌파 행동가의 거리가 쉽사리 좁혀질 리 없다. 처음에 몰리나는 나치 치하에서 적을 사랑하는 여가수의 이야기를 발렌틴에게 들려준다. 그리고 발렌틴은 마르크시즘에 입각하여 그 영화에 대한 평을 한다.

"이건 더럽고 추잡한 나치 영화란 말이야!"
"아니야, 더럽고 추잡한 것은 바로 너지, 영화가 그런 것이 아니야."(81쪽)

현실의 고통을 잊고 싶은 몽상가와 현실을 직시하려는 투사의 팽팽한 관계는 소설 속 영화 이야기를 통해 조금씩 누그러지고 변화한다. 몰리나와 발렌틴은 생각과 감성의 차이를 계속 드러내지만, 어느 시점부터 두 사람의 언어엔 촉촉한 기운이 번진다. 모두 여섯 편의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이 서서히 둘은 서로의 그림자가 되고 메아리가 된다.

두 사람의 대화 가운데 무척 인상적이었던 대목 하나. 자신이 생각하는 '남자다움'에 대해서 나누는 두 사람의 견해는 이렇게 서로 다르면서도 아름답다. 

― 몰리나 : "남자에게 가장 근사한 점은 멋지게 생기고 힘이 센 거야. 힘이 세다고 과시하지 않지만, 자신있게 나아가는 그런 태도지...... 자기가 뭘 원하고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야. 물론 전혀 겁내지 않고."
― 발렌틴 : "그 누구에게 허풍 떨지 않는 것...... 심지어 권력을 쥐고 있더라도. 아니, 남자가 된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엇이야. 그건 명령이나 팁 따위로 그 누구도 깎아 내리지 않는 것이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 네 옆에 있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또 마음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지." (89 - 91쪽)

혁명 투사로부터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 존중의 자세를 배우는 몽상가. 그리고, 처음에는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동성애자로부터 진정한 사랑의 자세와 인간애를 배우는 혁명 투사. 그리하여 두 사람은 마침내 '몸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고 하나가 된다. 그 육체적 합일의 순간이 막 지나고 나서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는 그 어떤 연인의 사랑의 장면보다도 아름답고도 슬프다.

"또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알아, 발렌틴?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주 짧았지만, 내가 여기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 여기도 아니고 밖도 아닌 것 같은 그 어떤 느낌......"
"........."
"나는 없고....... 너 혼자만 있는 것 같았어."
"............"
"내가 아닌 것 같았어. 지금 난...... 네가 된 것 같아." (289쪽)

결국 몰리나가 교도소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뇌와 갈등 속에서 석방하게 되면서, 둘은 작별을 나누게 된다. 

"내 생각 많이 할 거야?"
"너한테 많은 것을 배웠어...... 몰리나......."
"발렌틴, 너한테 한 가지 약속할게. 널 떠올릴 때마다, 난 행복할 거야. 네가 나한테 가르친 대로 말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약속해 줘....... 다른 사람이 널 무시하지 않도록 행동하고, 아무도 널 함부로 다루게 하지 말고, 착취당하지도 말아. 그 누구도 사람을 착취할 권리는 없어." (344쪽)

꽃은 봉오리로 바쳐져도 헛된 희생은 아니라고 했던가. 투사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배운 몽상가는 헌신이라는 이름의 사랑에 마침표를 찍는다. 발렌틴의 전갈을 동료에게 전하려던 몰리나는 거리에서 총격을 당하고, 전기 고문을 받은 발렌틴은 교도소 의무실에서 몰리나라는 거미여인을 꿈꾸면서, 몰리나가 이야기한 영화를 자신의 영화로 만들면서 이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동성애자는 혁명가에게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러 달려가다 죽어 가고, 혁명가는 사랑을 깨달으며 죽어가는, 다시 말해 사랑이 혁명이 되고 혁명이 사랑이 되는 경이로운 역설과 화해의 드라마.......

"나는 성에 있어서 음성적이고 터부시되는 모든 것을 탈신비화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한 마누엘 푸익 영화 감독이 되려다 실패한 사람이다. 1932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푸익은 6살 때부터 극장에 출근하다시피 한 헐리우드 키드였고 실험영화에 심취한 적이 있으며 조감독도 거쳤으나, 결국 감독으로 이름을 남기진 못했다.  대신 소설을 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소설은 영화보다 더욱 영화적이었다. 왕가위 감독은 자신의 <아비정전>과 <해피투게더>가 푸익의 <상심의 탱고>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1976년에 첫 출간된 소설 <거미여인의 키스>는 푸익의 대표작이며, 그의 이름을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거장 마르케스와 보르헤스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은 걸작이다.

<거미여인의 키스>는 1985년 헥토르 바벤코 감독의 영화로 일반인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왔지만, 원작의 풍부하고 섬세한 울림을 뛰어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영화에서 몰리나가 이야기하는 기억 속의 영화는 황색 톤으로 그려지고, 현실 속의 감옥은 푸른색으로 채워진다. 환상으로서 영화와 폭력만 남은 환멸의 시대가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는 셈이다. 핵토르 바벤코 감독이 지휘한 '갇힌 자유인'의 노래는 끝까지 부드럽고 크게 울린다. 윌리엄 허트는 감성적인 동성애자 몰리나 역을 맡아 빼어난 연기로 아카데미와 칸느 영화제에서 남우 주연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는 가슴을 적시는 빼어난 연애 소설이다.  몰리나가 "맹세컨대 내 영혼은 모두 당신의 것이고, 내 생각과 삶도 당신의 것입니다.  마치 이 고통처럼..."이라고 '내 편지'라는 곡을 노래할 때, 두 사람의 사랑엔 어떤 이물질이 끼어들 틈도 보이지 않는다. 몰리나의 애절한 노래와 죽음은 동성애에 대한 어떤 변호보다 깊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거미여인의 키스>에 대해 시인 황인숙은 이런 시를 썼다.

"몰리나의 사랑이 불쾌하지 않은 건 몰리나가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육체를 벽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몰리나의 가슴은 평화와 우아함과 미소로 가득했다. 몰리나는 진정한 여성이며 진정한 인간이었다. 나는 이 기묘한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한 편의 판토마임을 생각했다."


나는 몰리나의 사랑의 자세에 대해 이런 군말을 덧붙인다.

"사랑하는 방식이 그 사람의 존재하는 방식이다"라고. 이 시대는 한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다양한 잣대로 규정 짓는다. 가령 당신이 소유하는 것이 당신을 말해 준다고 한다. 또, 당신이 보는 것, 당신이 읽는 것, 당신이 만나는 사람이 당신을 말해 준다고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잣대보다도 이것을 믿고 싶다. "당신이 사랑하는 방식이 당신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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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07 1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레혼 2004-09-07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제 것이 될 수 없는 과찬의 말에 잠시 멈칫거렸습니다.
제 서재의 품격과는 상관없이, 앞으로도 님의 '고혹적인' 발걸음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래요.
제 방은 아직 어수선하고 산만하지만, 가끔 들러서 쉬다 가시기를.... 마음 풀어놓고 쉬기에는 너무 깔끔하고 완벽하게 정돈된 곳보다는, 좀 어질러져 있는 허접한 구석 공간이 더 나을 때가 있잖아요......
문득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이란 영화가 떠올랐어요, 님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게 되는 건 무슨 까닭인지......

내가없는 이 안 2004-09-17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덧붙인 말이 적확하군요. 사랑하는 방식이 존재하는 방식이라니... 오래전 영화로만 접한 작품인데 옆으로 미뤄만 둬왔던 이 책을 님의 리뷰가 읽으라고 종용하는 듯하네요. ^^

에레혼 2004-09-18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는 방식이 존재하는 방식이란 말... 그 정언과 맞닥뜨리는 순간들이 종종 있지요.
그 말을 믿으면서도, 그 말을 실천하며 살기란 쉽지 않네요.

브리즈 2004-10-27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도 영화도 상당한 울림을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영화 속 몰리나 역을 연기한 윌리엄 허트는 최고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뒤늦긴 했지만, 잘 읽었습니다. ^^..

에레혼 2004-10-27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즈님, 제 방에서 뵈니 반갑습니다......

제 생각에는 영화도 수작이었지만, 원작의 깊이랄까 시각을 충분히 담아 내지는 못한 것 같아요, 두 장르 간의 본질적 거리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전 윌리엄 허트의 열연만큼이나, 마누엘 푸익의 길고 긴 각주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각주의 분량이 버겁게 느껴졌지만, 읽어 갈수록 아주 쫀득쫀득한 묘미가 있더라구요.

딸기 2004-12-21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 투...입니다

runic 2006-04-29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작년에 쓰신 리뷰군요. 느닷없이 제게 잊을 수 없는 대사가 생각나서 남깁니다. 영화에서 윌리엄 허트가 이런 말을 하지요. "행복할 때 가장 좋은 건 다시는 불행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야" 책에도 이 대사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좋은 리뷰 잘 봤습니다.
 
솔라리스 그리폰 북스 7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강수백 옮김 / 시공사 / 1996년 6월
평점 :
절판


<솔라리스>

(스타니스와프 렘 원작, 강수백 옮김, 시공사 그리폰 북스 007)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그럴 때가 있다.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데도, 이렇게 무언가를 먹고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잠자고 사람들과 얘기하고 있는 이 순간이 비현실이고, 진짜 나 자신은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 여기 있는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거나, 그런 나를 기억하는 또 다른 내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 그럴 때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확실하고 유일한 하나의 삶 속에서만 살고 있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고. 두 겹, 세 겹, 때로는 몇 겹의 삶을 동시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일상이라는 분명해 보이는 현실을 살면서, 기억이라는 이름의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기도 하고, 아직 살아 보지 않은 시간을 마치 '산 것처럼' 살고 있기도 하다. 거기에는 내가 아는 나와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나와 내가 잊고 싶어하는 나와 언젠가 한번은 만나 보기를 꿈꾸는 나가 함께 살고 있다.
SF란 장르는 바로 이런 데서 출발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러 겹의 삶이 동시에 가능하다는 생각,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꼭 지금 여기만이 아닌 다른 세계가 동시에 가능하리라는 상상과 믿음에서...... 그리고, 어쩌면 세계란, 우주란 실은 우리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리가 기억하고 상상하는 바로 그런 모습일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의 기억이 만들어 내는 세계...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시작이자 끝인 세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 소통도, 현존도 없는 세계... 그러나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은 본질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부질없는 허공의 개념인 그런 세계. 
   
스타니스와프 렘의 원작 소설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영화로 만든 <솔라리스>는 바로 그런 세계의 밑그림에서 탄생한 우주의 한 공간이다.
붉은 태양과 푸른 태양, 두 개의 태양 주위를 복잡한 궤도를 그리며 돌고 있는, 바다로 뒤덮인 행성 솔라리스. 조사 결과 그 바다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가진 자율적인 세계인 것으로 판명된다. '생각하는 바다' '현자의 바다' 또는 '자폐증적 바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바다에 둘러싸인 행성 솔라리스의 신비를 캐기 위해 지구에서 파견된 우주 심리학자 크리스 켈빈.
솔라리스에 도착한 켈빈은 여기에 먼저 와 있던 두 과학자를 만난다. 스나토우와 사르토리우스 두 사람이며, 물리학자 기바리안은 이미 자살한 후였다. 도착한 직후부터 이상한 일들을 겪으면서 켈빈은 행성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에 대해서 체험하게 된다. 솔라리스의 바다는 인간 의식의 가장 깊숙한 내면에 감추어진 기억을 읽어내고, 그 이미지를 구체화해서 다시 그 기억의 주체에게로 되돌려 보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켈빈이 만나게 된 것은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자신의 아내 레야(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는 '하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켈빈의 기억에서 재생된 아내 레야는 아련한 추억의 입자처럼 허망하면서도 꿈결처럼 아름답다. 실제로 그녀는 말 그대로 켈빈의 꿈이기도 하다.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가 자료로 삼은 건 바로 켈빈의 기억과 욕망과 죄의식이었으니까. 10년 전, 레야는 켈빈과 한바탕 다툼 끝에 그만 홧김에 그가 실험하려고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약품을 먹고 자살해 버렸다.

"그녀는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는 열 아홉 살의 소녀였다. 살아 있다면 지금은 스물 아홉 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죽은 자는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76쪽)

지금 켈빈 앞에 나타난 이 여자는 진짜 레야가 아니라 레야의 복제물이다. 그것도 레야의 기억이 아니라 켈빈의 기억이 만들어 낸..... 자신의 기억이 만들어 낸 존재와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은 실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억의 복제물에게 느끼는 사랑은 예전에 실존했던 인물, 과거에 자신이 사랑했던 '진짜 그 사람'에 대한 배반이자 불륜은 아닐까.

"이게...... 나일까요?"
내 입술이 그녀의 이름을 소리 없이 불렀고, 그녀는 나를 대신해서 질문했다.
"레야라고요? 하지만...... 난 레야가 아니에요. 그럼 난 누구죠? 그리고 당신, 당신은 누구예요?"
...................
"당신은 여기 있어. 당신은 존재하고 있어. 내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긴 침묵이 흘렀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당신은 나를 레야라고 부르지만...... 나는 내가 당신이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요." (201- 203쪽)

솔라리스의 레야는 진짜 레야의 복제물이 아니라 켈빈이 '기억하고 있는' 레야를 재구성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은'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마치 뭔가를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기억나는 건 당신일 뿐이고 그 외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요."(83쪽)


내가 나인 것은 '나의 기억' 때문일까. 내가 나라고 알고 있고,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기억이 나라는 존재를 만드는 것일까. 나의 육체가 소멸해도 나의 기억을 다른 육체에 옮겨 놓으면 내 정체성은 유지되는 것일까. 켈빈의 기억을 통해 다시 물질화된 레야처럼......

이런 '기억과 존재'의 상관 관계에 대한 질문과 함께 <솔라리스>는 우리와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란 주제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에게 다른 세계란 무엇일까.

"그건 마치 해독 불가능한 언어로 씌어진 책으로 꽉 찬 도서관 안에서 헤매는 것과 마찬가지야.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책표지 색깔이나 바라보는 주제에!" (226쪽)

"우리는 모든 별과 행성에 이름을 붙였지만, 그러나 그 모두가 처음부터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이 행성의 바다는 "우리와는 다른 방법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보는 것처럼 우리를 지각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251쪽)

이처럼 원작 소설 <솔라리스>는 인간과 미지의 외계 존재와의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이 우주에는 인간이 아무리 애써 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있을 수 있고, 그러한 현실은 이 광막한 우주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고 미약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해줄 것이라는 얘기다. 렘은 소설에서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주의 척도로 볼 때 단지 고독한 군중의 일부인 것은 아닐까?"라고.
이런 소설의 시각을 타르코프스키는 자기 식으로 해석해서 펼쳐 보여준다. 영화는 완전한 이해와 소통이 불가능한 단절을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상실한 데 대한 아픔으로 승화시켰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 바로 사랑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켈빈을 비롯한 솔라리스의 우주인들은 지구를 멀리 떠나 온 광막한 우주에서 비로소 잊고 지냈던 양심과 죄의식과 수치심을 되찾게 된다. 켈빈은 양심의 고통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힘인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고 새롭게 태어나 지구로 돌아온다.
 
"우리가 원하는 건 인간 이외의 그 어느 것도 아니야. 지구 이외의 다른 세계 같은 건 필요 없어. 다만 우리를 비출 거울이 필요한 것뿐이야. 다른 세계 같은 건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어. 우리에겐 지구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렇지만 그 지구만으로는 뭔가 불충분한 것같이 느끼지. 그래서 우주에서 이상향을 찾아보려고 하는 거야. 우리는 지구 문명보다 더 완전하고 우수한 문명을 가진 세계를 찾아 우주로 나가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미개했던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는 존재를 찾아 헤매고 있는 거야." (105쪽)

영화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온다. 켈빈은 집을 향해 걸어간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안을 들여다본다. 그 안에 아버지가 보인다. 두 사람은 서로 창문 사이로 마주 본다. 집에서 천천히 나온 아버지 앞에 켈빈은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를 감싸 안는다. 그때 카메라는 빠르게 하늘로 날아오르고, 두 사람은 하나의 작은 점이 되고, 이제 지구는 우주의 광활한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 하나의 작은 행성일 뿐이다.
 
 SF는 은유와 상징의 언어이다. 알 수 없는 거대한 우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현실'을 말하고 있다. 솔라리스를 방문해 자신의 기억과 잠재 의식의 상처와 싸우고 돌아오는 크리스 켈빈의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매순간 타자와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조건을 보여주는. 자신의 궤도를 돌다 가끔씩 같은 궤도를 지나는 또 다른 행성과 조우하는 밤하늘의 별들처럼, 불확실하고 막막한 '타자'라는 거대한 우주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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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 2004-11-15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작인 소설은 읽지 않았지만,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솔라리스"는 혼란과 매혹을 동시에 전해줬던 작품이었습니다. 대학 때 영문 자막이 달린 비디오로 본 후 DVD를 통해 제대로 영화를 본 것도 불과 1, 2년 전이네요.

영화와 소설을 동시에 들여다보는 일.. 참 재미있는 일이지만, 수고도 만만찮을 것 같습니다. 저같이 게으른 사람에겐 말이죠. ^^..
 
피아노 치는 여자 - 2004 노벨문학상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199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피아니스트>

 (원작 엘프리데 옐리네크 , <피아노 치는 여자>, 이병애 옮김, 문학동네)

(미카엘 하네케 감독, 이자벨 위페르 주연)
)

 

 

닫힌 세계, 출구 없는 공간, 지금보다 조금도 더 나아질 것 없는 미래 안에서 사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자신의 욕망과 관능과 생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마음의 감옥, 정신적 폐허에 갇혀 있는 사람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그 방의 문을 어떻게 열고 나와야 할까.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만든 영화 <피아니스트>는 이런 물음을 그 배경음으로 깔고 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언제나 논쟁적인 작품을 발표해 온 오스트리아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이다. <피아노 치는 여자>는 음악과 독문학, 연극학을 전공한 옐리네크 자신의 자서전적인 성격이 강한 소설이며, 프로이드와 라캉의 심리 분석적인 틀로도 분석할 수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에리카처럼 옐리네크도 자신을 피아니스트로 만들려고 했던 어머니를 증오했다고 한다.

  피아노 치는 여자, 에리카의 삶에서 미소를, 윤기를, 관능을, 감각을 빼앗아간 건 무엇일까. 영화는 그걸 냉혹하고도 건조한 시선―이미 <퍼니 게임>으로 우리에게 오래도록 잊지 못할 충격을 안겨 준 바 있는 미카엘 하네케답게―으로 우리 앞에 펼쳐 보여준다. 우리, 그 여자의 삶을 따라가 보자.(여기서 굵은 글씨체는 건조하고도 격정적인 옐리네크의 표현, 소설의 문체를 그대로 옮겨 온 것이다.)
 
  오스트리아 빈 음악원 피아노 교수인 에리카는 어머니와 둘이 산다. 어머니는 마흔이 다 된 딸의 귀가 시간을 일일이 체크해서 정해진 시간표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득달같이 전화를 해대고, 옷 하나 사는 것도, 옷차림도 일일이 간섭한다. 어머니에게 딸은 모든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자, 지금은 자기 곁에 없는 남편이자, 연인이자, 말벗이자, 함께 밥을 먹는 식구이자,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자, 자기 삶의 약탈자이다. 그 딸과 어머니는 매일 밤 한 침대(커다란 부부 침대!)에서 나란히 잔다. 에리카의 집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충만한, 잔인한 잿빛 나라이다. 이 닫혀 있는 집에서 에리카는 하나의 공식을 유추해 낸다. 즉 그렇게 오랜 세월을 어머니에게 종속되어 살아온 자신이 이후에 결코 한 남자에게 종속될 수는 없다는 그런 공식이다.
  에리카는 집을 나설 때마다 버버리 코트로 몸을 감싸고 장갑을 낀다. 그녀의 맨손이 세상과 악수하는 건 오직 피아노를 치는 순간에만 허용된다. 에리카의 얼굴에서는 마치 장갑 낀 그녀의 손처럼 표정을 읽을 수 없다. 표정이 지워져 있는 냉랭한 얼굴의 그녀가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들르곤 하는 또 다른 닫힌 세계들. 
  포르노 비디오 가게의 밀폐된 방안에서 남녀의 성기가 클로즈업된 화면을 보며 쓰레기통에서 정액 묻은 휴지를 집어들어 냄새를 음미하는 에리카. 그녀는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라 훔쳐보는 주체이다. 어두컴컴한 자동차 극장에서 연인들의 카 섹스를 훔쳐보며 참을 수 없는 요의를 느끼고 배설하는 에리카. 그것은 음악과는 거리가 먼 느낌, 오직 몸 속에 꽉 차 있는 걸 뜨겁게 오래도록 쏟아내고자 하는 방뇨이다.
  어머니가 저녁을 차리는 동안 욕실에 들어가 거울로 자신의 음부를 들여다보며 아버지가 쓰던 면도칼로 다리 안쪽 살을 저며 내는 에리카. 그녀의 취미는 자신의 몸을 자르는 것이다. 그녀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자신이 무엇을 잘랐는지 알아볼 수 없다. 그녀 자신의 육체였지만 이 육체는 그녀에게 무섭도록 생소하다.  배설과 배출이 혼동되는 무채색의 닫혀 있는 이 세계. 소통 없는 공간. 여기가 에리카가 사는 세계이다.     
  그런 그녀 앞에 훔쳐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닌 진짜 살아 있는 남자, 젊고 잘생긴 제자 클레머가 등장한다. 그는 에리카가 다른 여자들처럼 자신의 부드러운 키스와 달콤한 속삭임에 취할 것이라 믿는다. 마침내 찾아온 격정의 시간, 클레머는 에리카를 바닥에 눕혀 그녀의 몸을 정복하려 하지만 에리카는 클레머를 애무하다 멈추고 자신의 말에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에리카는 자신이 원하는 종속의 형태를 편지에 써서 클레머에게 요구한다. "사슬에 묶은 채 나를 여러 시간 동안 쓰러뜨려 두고, 내 몸의 모든 곳을 때리고 밟고 채찍질하는 거야!" 에리카는 말하지 않고 글로 적는다. 그녀가 그의 아래에서 완전히 사라지거나 소멸되기를 원한다고. 자신을 묶고 때리고 입을 틀어막고 물어뜯으라고. 이제부터는 "네가 명령해!"라고. "나를 고통스러운 상태로 몇 시간이고 헐떡이게 놔둬서, 그러는 사이에 내가 전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완전히 나 자신과만 그리고 내 안에서만 존재하게 해 줘."
  클레머는 한때 자신에게 성적 환상을 불러일으켰던 이 여자가 이제 더없이 끔찍해진다. 빨리 그녀 곁을 떠나고 싶다. 그러나, 혐오감과 모멸감에 난폭해진 클레머는 다시 에리카를 찾아온다. 에리카는 자신이 간절히 원했으나 결코 실현되지 않기를 바랐던(그녀는 클레머가 자기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을 행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소망을 처참하게 이룬다. "이게 바로 네가 원했던 거야!" 잔혹하게 펼쳐지는 클레머의 폭력과 강간. 그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에리카가 거부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기존의 '사랑의 방식'이라는 것을. 자신과 그녀, 두 사람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자, 여기까지 에리카의 길을 따라온 당신... 이 여자를 비난하고 싶은가. 이 여자가 혐오스러운가. 이 여자로부터 도망치고 싶은가. 혼란스러운가. 아니면, 이 여자 때문에 아픈가.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가. 자신이 제 몸에 꽂은 칼로 입은 상처를 감싸안고 '집으로' 걸어가는 이 여자의 그 피 흘리는 어깨를, 천천히 피가 식어 가고 있는 심장을, 당신은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당신의 그 시선이 바로 지금 당신이 세상에 서 있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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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4-09-17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영화, 막상 보고 나면 할 이야기는 무척 많은데 정작 보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려요. 전요... 굳이 편안한 영화를 원하는 건 아니지만, 마음이 지나치게 다칠 것 같은 영화는 결국 보게 되면서도 안 본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게 되지요. 이 영화의 리뷰는 님의 훌륭한 글까지 벌써 여러 글들을 보면서 속으로 또 한번 덧칠하네요. 그래도 안 봐, 하면서요. 끝내 안 보게 될까요? ^^

에레혼 2004-09-18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없는 이 안님, 그래도 끝내 안 보실 건가요?^^
님의 안에는 이미 이 여자 에리카가 들어가 있을 것 같은데요......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황봉득 옮김 / 세종(세종서적) / 1994년 5월
평점 :
품절


 

  <남아 있는 나날>

( 원작 가즈오 이시구로,  황봉득 옮김, 세종서적)
(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 주연 안소니 홉킨스, 엠마 톰슨)


 

 

이 영화가 개봉되던 시절(1994년이다) 처음 봤던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나날>은 '영국 귀족 가문의 한 충성스런 집사가 바보처럼 놓쳐 버린 옛 사랑을 회상하는 이야기'라는 어렴풋한 윤곽만 남아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한 늙은 집사의 사랑 회고담'이라고 간단히 얘기하고 넘어가기에는 좀 마음에 걸릴 만큼 아주 섬세하고 내밀한 삶의 여러 국면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는 영화였다. 마치 무도회장에 차려입고 나온 귀부인의 풍성한 드레스 자락에 잡혀 있는 자잘한 주름들처럼 한 사람의 인생 갈피 갈피에 자국을 남기는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 자신의 평생을 바친 일의 세계, 그 사이를 헤집고 지나간 숨겨진 감정들, 크고 작은 갈등과 상처, 관계를 먹고 자라는 사랑과 오해와 연민과 그리움과 엇갈림들이 섬세한 날실과 씨줄로 직조돼 있는 영화 <남아 있는 나날>.

1958년, 스티븐스(안소니 홉킨스)는 영국의 서부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는 충직한 영국인 집사로서 지금은 미국인 갑부 루이스 씨(크리스토퍼 리브)의 소유가 돼 버린 '달링턴 장원'에서 평생을 바쳐 일해 왔다. 여행을 하며 스티븐스는 1930년대 중대한 국제회의 장소로 유명했던 달링턴 홀, 그리고 달링턴 경(제임스 폭스)을 위해 일해 왔던 지난날을 회고해 본다. 당시 유럽은 나치의 태동과 함께 전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스티븐스는 주인 달링턴 경의 인품과 정치적인 신념을 믿고 그에게 충성을 다하지만, 독일과의 화합을 추진하던 달링턴은 친 나치주의자로 몰려 종전 후 폐인이 되고 만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스티븐스는 자신의 맹목적인 충직스러움과 투철한 직업 의식 때문에 사생활의 많은 부분이 희생되었음을 깨닫는다.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다다른 스티븐스는 오래 전 달링턴가에서 하녀장으로 일하다 결혼으로 이곳을 떠난 켄튼(엠마 톰슨)을 만나러 길을 나섰다. 켄튼과 함께 지내며 꾸려 왔던 시간들, 그 시간의 갈피에 남아 있는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자취들을 되짚어 보며.......

영화 속의 스티븐스란 인물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내 인간이란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방향으로든 자신을 한없이 단련시켜 나갈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새삼 했다. 그 방식과 방향이 저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자기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쪽으로 자기를 끝없이 밀어부치는......

아주 흔하고도 거친 이분법으로 얘기하자면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는데, 그 하나는 성공과 명예(바깥 세계)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과 영혼의 고양(내면 세계)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스티븐스처럼 공적인 세계가 자신에게 부여하는 책임과 권한, 거기에서 발휘되는 능력에서 존재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다른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그 만족감과 성취감을 계속 지키고 키워 나가려면, 사사로운 감정 따위에 흔들리거나 해서는 안 된다. 개인적인 호오(好惡)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거나 그 마음의 기류에 영향을 받아서는 곤란하다. 이런 사람에게 특히 '사랑' 같은 감정은 가장 위험한 바이러스다. 그런 것에 감염돼서는 자기 분야의 최고 경지, 히말라야 등정만큼이나 어려운 인생의 정점에 도달하기에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일에 빈틈이 없고, 실수하는 법이 없고, 업무에 필요한 말 말고는 입을 여는 법도 없고 쓸데없이 웃지도 않는 스티븐스. 깔끔하게 차려입고 절도 있게 복도를 걸어 다니며 세심하게 집안을 둘러보는 그는 언제나 자기 방 창문 뒤에서, 또는 방문 뒤에 몸을 감추고 미스 켄튼을 바라본다. 미스 켄튼은, 어쩐지, 자꾸 스티븐스의 시선을 끈다. 유리창 또는 방문 뒤는, 그 정도의 거리와 차단은, 스티븐스가 목까지 단추를 꼭꼭 채우듯 견고하게 지켜 온 자기 삶을 흩뜨려 놓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바이러스의 감염으로부터 안전하니까.
이 두 사람의 억제된 은밀한 감정의 밀고 당기기가 가장 극적으로 그려진 대목. 스티븐스의 방에 노크 없이 들어온 미스 켄튼이 혼자 쉬는 시간에 그가 읽고 있던 책에 강한 호기심을 나타낸다. 스티븐스는 무척 당황하고 긴장해서 책의 표지를 얼른 가린다. 집요하게 그 책을 빼앗아 보려는 켄튼. '당신의 세계를 알고 싶다'는 여자의 강렬한 욕구에 맞서서 '누구도 나만의 방에 들어올 수 없어'라며 자기 방문을 완강하게 지키려는 남자. 두 사람은 책 한 권을 놓고 '처음으로' 손이 맞부딪힌다. 육체의 가볍고도 강렬한 접촉은 꾹꾹 눌러놓은 감정의 수위를 위험하게 높이고 만다. 그러나 오랜 세월 속에 단련된 스티븐스의 자제력의 수문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스티븐스가 읽고 있던 책은, 켄튼의 기대와는 달리 그다지 야한 장면이나 선정적 묘사도 없는 순수 연애 소설이었을 뿐. 스티븐스는 다시 자신의 책을 돌려받고 옷매무새를 한번 가다듬으며 켄튼 앞에서 자신의 방문을 안전하게 닫는다.

한 사람의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책,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그가 있던 자리에 펼쳐져 있는 책 한 권만큼 그 사람의 내면 세계를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이 장면은 아주 매혹적이었다. 스티븐스라는 인물이 가질 만한 '사랑의 예감에 두려워하며 자기를 지키려는 안간힘'을 꼭 그에 적합한 정도로 기가 막히게 묘사해 냈는데, 특히 이 장면에서 안소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의 앙상블은 절정의 묘를 보여준다. 안소니 홉킨스가 아닌 다른 얼굴의 스티븐스를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이 영화에서 안소니 홉킨스는 그 표정에서, 몸의 움직임에서, 침묵에서, 입꼬리만 살짝 올리는 오묘한 웃음에서 스티븐스란 인물을 생생하게 살려냈다. 자기를 가둬 두고 있는 이의 이중적인 자존감과 자애심과 내면 저 깊숙이에서 오래오래 끓고 있는 감정의 미열을......

이 영화의 원작은 일본계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쓴 같은 제목의 소설이다. 영국의 부커 문학상을 받은 원작의 작가가 뜻밖에도 일본인인 것처럼, 영화를 만든 제작진도 인도 출신 제작자 이스마일 머천트와 미국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이다. (이 머천트- 아이보리 팀은 <전망 좋은 방> <하워즈 엔드> <남아있는 나날> 등을 통해 영국 영화의 주요 장르인 '유산 영화(heritage film)' 전문 프로덕션으로 자리잡아 왔다.) 어찌 보면 영국인이 아니었기에 더 세밀하고 완벽하게 영국적인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영국적인 분위기를 묘사해 낸, 특히 영국의 유서 깊은 귀족 문화의 일면과 그 몰락의 과정을 보여주는 데에서도 역시 적절한 거리(바깥과 안의 문제, 내부인과 외부인의 시각)는 나름대로의 힘이 된 것 같다.

"그의 충고 가운데는 지나치게 과거를 뒤돌아보지 말 것과, 좀더 진취적인 태도를 가짐으로써 남아있는 나날들을 보다 즐겁게 지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자기 삶의 행로를 스스로 좌우하지 못했다고 회한에 빠져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단지 우리들은 참되고 가치 있는 무언가를 위해 작은 몫이나마 동참하면 그로써 충분한 것이다. 만일 그러한 공의의 추구에 자신의 일생을 헌신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설령 종국에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행위 자체로써 긍지와 만족을 삼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쓴 원작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지나치게 과거를 뒤돌아보지 말고 '남아 있는 나날'을 풍요롭게 보내라는 충고에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는 나를 보니, 나는 이미 젊지 않은 것이다! '남아 있는 나날'은 이미 우리가 살아 온 시간들, 우리 뜻과는 달리 흘러가 버린 나날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인데도,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면서도, 우리는 꿈꾼다. 우리 인생의 남아 있는 날,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 무엇을 만나게 될 것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꿈의 주위를 맴도는 것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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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9-05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시 들어와 읽고 가요.
무언지 뻐근하게 여운을 주는 영화였어요.^^

에레혼 2004-09-05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뻐근한 여운... 제가 생각하기에 원작 소설보다 좋은 영화 베스트 10 중 하나예요
요즘 같은 시대에는 기적 같은, 희귀한 사랑의 모델이지요, 어쩌면 현실에서 내 얘기라면 좀 끔찍할 수도 있을 것 같구요, 남의 이야기로 '바라볼 때'는 아련한 아름다움이 느껴지지만요.......

내가없는 이 안 2004-09-17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스 켄튼에게서 자신의 책을 돌려받은 스티븐스이 그녀 앞에서 "자신의 방문을 안전하게 닫는다"는 표현이 왜 이렇게 날카롭게 느껴지는지... ^^

에레혼 2004-09-18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장을 닫는 건 한 세계를 열었다 닫는 것과 같은 게 아닐까요?
우리의 이 서재들은, 자기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는 거구요...
 
갈라파고스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마더 나이트>

커트 보네거트 원작(오늘의 세계문학 28 "태초의 밤", 중앙일보)

키스 고든 감독

 

나는 아직도(이만큼 나를 살아 봤으면서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한다. 내가 명랑한 사람인지 우울한 사람인지, 세상과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지 비관적인지, 나의 가장 큰 장점과 결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란 사람이 관념론과 유물론, 보수와 진보, 몽상가와 활동가, 이오니아식과 도리아식,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원심력과 구심력... 그런 이분법의 다리들 사이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지..... 어느 것 하나 나 자신에 대해 망설임 없이 명쾌하게 단정지어 얘기하기가 어렵다.

어쩌면 우리는 아주 사소한 한두 가지의 인상과 편견을 가질 정도의 거리가 있는 것에 대해서만 '선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 그와 같은 이치로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하지 않는 것, 자기 마음이 가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선택하며 사는 것이 가장 '잘사는 삶'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내 멋대로' 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더러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것이 온전하게 내 의지에 따른 생각과 행동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때가 종종 있는 탓에 '잘 살기'란 마음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처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단순 명쾌하지 못하고 생각이 혼란스럽고 불안정하고 소심한 사람은 늘 자신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회의하는 습성대로 다른 이의 진실에 대해서도 종종 물음표를 품은 채 바라보곤 한다.

그 생각이, 그 말이, 그 선택이 그의 진실일까. 그는 자신의 진실을 알고 있을까. 그가 자신의 진실이라고 믿는 것 가운데 혹시 '대외용'과 '대외비'가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의 현재 모습이나 본질과 자기가 되고 싶었던 모습 또는 자기가 연출한 이미지 사이에서 헷갈리거나 자기 자신도 속아넘어가는 경우는 없을까. 누군가의 말처럼 "끝까지 '위선'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 위선도 또 하나의 진실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진실과 거짓 게임에 얼마나 들어맞는 법칙일까.
 


키스 고든 감독이 연출하고, 허스키한 저음의 목소리와 거칠거칠한 질감을 지닌 배우 닉 놀테 '하워드 W 켐벨 2세' 역을 연기하고 있는 영화 <마더 나이트>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에 살고 있던 한 미국인 작가의 기묘한 인생 역정을 그린 드라마이다. 헌데 내게는 이 영화가 표면에 드러난 것처럼 전쟁 상황에서의 뒤틀린 운명과 인간 비극을 그린 것이기보다는 인간의 진실과 가면의 문제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으로 다가왔다.


전쟁 당시 나치의 선전성에서 대 연합군 방송을 맡아 극악한 반(反) 유대인 선전으로 악명을 떨친 하워드 캠벨. 그러나, 실은 그의 그런 활동은 미국 정보국의 은밀한 제안에 따라 이루어진 스파이 활동이었지만, 세상은 나치 아래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한 그의 발언과 행동을 그의 진실로 받아들이고 낙인찍는다. 그가 겉으로 드러내 말하고 행동한 대로, 보여진 대로..... 그의 진실은 그렇게 역사로 남는다. 전쟁이 끝난 후 '진짜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수도, 입증할 수도 없는 상황에 빠져 전범 재판을 받기에 이른 캠벨. 그는 자신의 기묘하게 꼬인 생애를 돌아보며 경계가 불분명한 진실과 거짓, 참 얼굴과 가면, 선과 악의 문제를 규명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그가 깊숙이 바라보면 볼수록 두 개념의 경계선은 점점 더 모호하고 알 수 없게 될 뿐이다.


영화 <마더 나이트>는 우리나라에서도 열렬한 매니아 독자군을 갖고 있는 미국 작가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Mother Night"라는 표제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말 가운데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밤, 즉 암흑은 빛보다 오래된 태초에서부터 존재하던 만물의, 우주의 모체라는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예언한 것처럼, 이 세계에서 '빛'은 사라지고 다시 태초의 '밤'이 지배하게 된 것일까? <마더 나이트>는 인간의 부조리함과 고독을 절절하게 그려 나가면서, 그 고독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차 있는 어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려 한다.


영화에서는 그대로 담아내기가 어려워서 건너뛰었겠지만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마더 나이트>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이 첫 구절이 <마더 나이트>가 말하고 싶은 전부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내가 쓴 이야기들 중에 이 작품만은 내가 그 교훈으로 삼고 있다. 별로 대단한 교훈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단지 그 교훈을 내가 안다 뿐이지-- 즉, 우리의 가면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가면에 대해서 조심해야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남자든 여자든 간에,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사람, 자기 자신에게 '착한 내 자신, 진짜 나, 천국에서 만들어진 나는 내 내부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라고 말하면서 악을 행한 것을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그런 어떤 인물에게 바쳤으면 한다."

커트 보네거트가 교훈으로 삼고 있는 그 생각처럼 나는 지금도 때때로 나 자신에게 묻곤 한다. 내 진짜 얼굴은 어떤 것일까. '진짜 나'는 나만이 아는 내 내부 깊숙이 감추어져 있고, 그래서 내가 아는 나 자신과 세상에 보여지는 나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간극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 간극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그리하여 나의 진실이 왜곡 없이 그대로 세상에 보여지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짜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 아닐까.

 

[검색해 보니, 현재 알라딘에서는 이 책을 구할 수 없다. <고양이 요람>이나 <갈라파고스> 등의 다른 책에서 저자에 관한 설명을 옮겨 왔다.]

 

저자소개
커트 보네거트 (Kurt Vonnegut Jr.) - 1922년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서 태어났다. 코넬대학, 카네기 대학, 시카고 대학 등에서 수학하고 1965년부터는 아이오와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연합군 폭격에 의한 드레스덴의 파멸을 목격하기도 했다. 100여편의 단편과 <갈라파고스>, <제5도살장>, <타임 퀘이크>등의 장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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