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나오키의 홈피(www.naokis.net)에 들어갔다가-- 나오키, 나는 뒤늦게 그를 알게 됐지만, 이 홈피로 제법 많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일본인의 문화와 시각에서 체험하는 한 국의 생활상이 제법 정감 있으면서도 예민한 데가 있고, 무엇보다 '외국인스러운' 한국어 표현과 문장들이 독특한 재미와 묘미가 있다. 시시콜콜하면서도 꼼꼼한 일상의 스케치들을 보고 있자니, 나오키란 이 남자,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어쨌든 오늘 그의 '식사일기'를 기웃거리다가 '오코노미야키'를 만났다.
음식에 대한 추억은, 마치 유행가에 실려 있는 '한 시절에 대한 환기력'과 같이, 단번에 생생한 맛과 냄새와 그때의 분위기까지가 모두 뒤섞여 있는 어떤 시간, 어떤 공간으로 우리를 실어다준다.



7년 전, 그러니까 1997년 3월에서 6월까지 석 달간 일본의 오카야마란 작은 도시에 머무른 적이 있다. 남편이 그곳 대학병원에서 연수를 받게 돼서 3개월간 체류하게 됐다.
다들 알다시피 일본은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물가가 높은 나라인 데다, 연수생 신분으로 외국 생활을 해야 하는 우리는 가난했다. 무엇보다 교통비가 부담스러워, 일본에 가자마자 우리는 중고 자전거점에 가서 낡은 자전거를 하나씩 구입했다. 그때 자연스레 확인했다. 몸으로 한번 익힌 것은 아무리 시간이 오래 흐른 뒤라도 재생, 복기(服忌)된다는 것을. 열 살 무렵 익혔던 자전거 타기, 그 뒤 십 수 년을 한번도 자전거 타볼 일이 없었는데 나는 곧바로 자전거를 타고 집 앞 슈퍼까지, 삼사십 분 거리의 기차역까지 달려갈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일본 체류 기간 중 그래도 일본 음식을 한두 가지쯤은 제대로 습득해 가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 미각에 짧은 이국 생활의 추억과 체험을 담아가리라는 게 내 야무진 계획 중 하나였던 것. 자전거 타기에서 보듯이 몸에 남긴 기억은 그 생명력이 길고도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유난히 새로운 음식에 대해 도전 의식과 탐구심이 있는 나로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종목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탐색 중이었다. 살던 동네 어귀의 그야말로 '동네 우동집'의 수타 우동도 기가 막히게 맛나기는 했다. 허나 집에서 가끔 별미로 해 먹기에 수타 우동은 그리 적합한 메뉴가 아니었다. 스시 초밥도, 돈까스도 나름대로 '일본 음식의 대표 주자' 격이지만, 나만의 레시피로 삼기에는 뭔가 2% 부족한 느낌....... 그러다 오코노미야키를 발견했다. 이탈리아에 피자가 있고, 한국에 파전 또는 빈대떡이 있다면, 일본의 그것은 오코노미야키(お好み燒き, おこのみやき). '자신이 좋아하는 기호에 따른 부침'  정도의 뜻...... 워낙 갓 부쳐낸 부침개 종류를 좋아하는 내 기호에 딱 맞았다. 오코노미야키, 그래 이거다!




우리나라에서 파전 같은 부침개가 서민들이 간단한 요기나 안주거리로 친숙하게 먹는 음식이듯이, 일본의 오코노미야키도 그리 고급스럽거나 값비싼 요리는 아니다. 이름 그대로 제 입맛에 맞게 다양한 재료를 섞어서 후라이팬에 노릇노릇하게 구워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단 다 구운 위에 반드시 가다랭이포를 살랑살랑 얹어 주고, 우스타 소스 비슷한 소스와 마요네즈로 격자 무늬 장식을 해 주는 것으로 끝을 맺어야 하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뜨거운 오코노미야키의 몸체 위에 가다랭이포를 뿌리면 마치 얇고 투명한 깃털들이 하늘거리듯, 그 종잇장처럼 얇디얇은 연살구빛 생선포가 열기 위에서 살아 움직인다. 이 순간이 오코노미야키 시식 과정의 백미!




그리하여, 나오키상 덕분에 잠시 회상 속의 여정을 순례하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니 오늘 저녁 메뉴는 자연스럽게 오코노미야키로 결정됐다!



자, 요리 시작!













 








 


 오늘 내가 준비한 재료는 양배추와 새우와 오징어. 양배추는 항상 기본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돼지고기나 베이컨이나 낙지 등을 쓰기도 하는데 좀 값싸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해물 두 가지를 주재료로 선택. [새우 3000원 어치, 오징어 두마리에 2500원...]










 








 일본에서는 오코노미야키용 반죽 밀가루[마를 갈아 넣고, 가다랭이 우린 물을 섞은 것이라고 함...]가 따로 시중에 나와 있지만, 오늘은 밀가루와 부침가루를 반씩 섞은 뒤 달걀 두 개를 풀어서 반죽했다.













 








 


그 반죽에 준비한 재료들을 뒤섞어 준다. [이렇게 재료를 한데 뒤섞어 요리하는 것이 '오사카식'이고, 재료들을 하나씩 단게적으로 익혀나가는 방식을 '히로시마식'이라고 한단다. 어찌 됐든 간단한 것이 좋은 법!]













 








 


반죽을 후라이팬에 얹는다.[철판구이집처럼 널찍한 철판이 있으면 금상첨화이지만...]













 








 


  두 번째  부칠 때는 응용편으로 김치를 얹어 보았다.[역시 이 편이 우리 입에는 덜 느끼한 것이 맛있었다.]















 








 


다 부친 뒤에 그릇에 옮겨 담고, 이걸 잊어 버리면 안돼요!  가다랭이포를 그 뜨거운 위에 듬뿍 뿌려주세요! 가다랭이포의 팔랑거리는 춤을 잠시 감상하면서.....



 








 








 


 우스타 소스와 마요네즈로 적당히 모양을 내 준 다음,




자, 이제 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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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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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25 0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ika 2004-11-25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이게 웬 한밤의 테러랍니까? (괜히 왔어..괜히 왔어..)

뜨거울때 저 위에서 꿈틀거리는거 그거 너무 좋아하는데..ㅠ.ㅠ

urblue 2004-11-25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사카 갔을 때 오코노미야키를 제일 맛있게 먹었는데. 종류가 무지 다양하더라구요.

이렇게 손쉽게도 만들 수 있는거구나.

언제 한번 도전해보렵니다.

플레져 2004-11-25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인님, 장 필립 뚜생의 사진기 있으세요? 그거 보내드릴까 하는데...

에레혼 2004-11-25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한밤의 테러, 였습니까?

그래도 이맘때 올리면 다들 내일 아침에나 보실 듯해서... 나름대로 시간 조절한 건데... 라이카님, 자신의 의지를 시험해 보세요^^[그 꿈틀거리는 거, 정말 ~~@@]

언제 알라디너들의 포트락 파티 같은 게 열리면 제가 오코노미야키 부쳐 갈게요^^

그리고, 제 방에서 만나서 반가워요!


에레혼 2004-11-25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아블루님, 우리 입맛에 친밀감있는 음식이지요? 특히 부침개 좋아하는 여자들한테는요... 생각보다 쉽고, 간단하고, 맛도 잘 납니다, 친구들 왔을 때 한번 도전해 보세요!



플레져님, 어쩌죠? 그 책도 있는데... 님의 책장과 제 책장이 거의 겹쳐 있는 듯..... 정말 오랜만의 이벤트 참가만 즐겁게 해도 되는 건데[요즘 알라딘 리듬이 좀 그랬잖아요...]... 그래도 서운하시다면, 제가 궁리 좀 해보고 님 방에 쪽지 남길게요^^

에레혼 2004-11-25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알겠습니당!

에레혼 2004-11-25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아직 안 주무셨어요? 김치를 넣어도 되구요, 치즈를 얹어도 되구요, 뭐 마음 내키는대로 응용해 보세요. 응용편은 자유 재량의 범위가 좀 넓지요?^^

내가없는 이 안 2004-11-25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 요리책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땐 이게 맛있을까 내내 의심스럽더만,

라일락와인님 페이퍼 보니까 맛은 보증되는 것 같네요.

글이 맛있어서 그런가? ^^

에레혼 2004-11-25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안님도 안 주무시네.. 오늘밤 달빛의 정기가 사람들을 깨어 있게 하는 건지.....

기회가 있으면 한번 맛보세요, 오코노미야키... 서울에는 신촌이나 강남 쪽에 맛있게 하는 가게가 있다고 들었어요, 또 길거리에서는 타코야키[문어를 넣어 구운 동그랑땡 같은 것...]를 파는 수레도 요즘 인기를 끈다던데요.... 제 글이나 사진이야 평이하지만, 워낙 일본의 대중적인 음식이고 하니까 한번 별미로 먹어 볼 만하지요

2004-11-25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대앞 가면 항상 사먹는 메뉴 중의 하나에요. 깻잎 넣은 순대 볶음이랑..ㅎㅎ 집에서 해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해봤네요..저렇게 도전을 한 번 해볼테야요..이왕이면 마를 갈아넣고 가다랭이 국물로..흐흐, 으 글케요..저도 이시간에 보고야 말았네요.스으읍~!

플레져 2004-11-25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누르려고 다시 왔어요........ 재주도 많으셔라~ ^^

에레혼 2004-11-25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으읍... 우우, 생생합니다!

참나님, 신촌 현대백화점 지하에 가게가 하나 있다고 알고 있는데, 이대앞에도 있군요... 뭐, 파전이나 김치전 같은 것 하는 정도의 품만 들이면 쉽게 할 수 있는 요리예요. [어쩌다 보니 오늘 여기가 요리 강습소 같은 분위기...^^*] 한번 도전해 보세요. 술 손님들 왔을 때 안주로 내놓아도 괜찮을 듯싶구요. 참나님은 저보다 더 확실한, 정통 오코노미야키를 선보일 것 같군요, 마를 갈고 가다랭이 국물까지 우려내서.... 홧팅!

에레혼 2004-11-25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이래저래 감사!

2004-11-25 0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11-25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 놓쳤네요.

안 그래도 얼마전 조제 보러 강동 CGV 갔다가 식당가 한 코너에서

문어빵과 오코노미야키 파는 것 보고 침을 질질 흘렸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 먹고 왔어요.

가다랭이포가 춤을 추는 뜨거운 오코노미야키 한입 덥썩

베어물고 싶네요.^^

조선인 2004-11-26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배고파요. ㅠ.ㅠ

에레혼 2004-11-27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다음에 여기까지 발걸음 하실 일 있으면.... 그때 돼지국밥에 이어 오코노미야키도 접대 목록에 넣어두지요^^



조선인님, 어느새 11월의 마지막 주말이네요. 지금은 점심 드셨겠지요? 마로, 목욕 가운 입은 사진 너무 예쁘더군요..... 아이들은 지저분할 때도, 막 씻겨놓았을 때도 다 나름대로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아요. 마로와 함께 행복한 주말 보내시기를.
 

 


 


      11월


       


         이성복



          1


         등 뒤로 손을 뻗치면 죽은 꽃들이 만져지네


         네게서 와서 아직 네게로 돌아가지 못한 것들


         손을 빼치면 온통 찐득이는 콜타르투성이네


         눈을 가리면 손가락 사이로 행진해가는 황모파(黃帽派)


         승려들, 그들의 옷은 11월의 진흙과 안개


         김밥 마는 대발처럼 촘촘한 날들 사이로 밥알


         같은 흰 꽃 하나 묻어 있었네 오랜 옛날얘기였네


 


           2


         그대 살 속에 십 촉짜리 전구 수천 빛나고


         세포 하나하나마다 곱절 크기의 추억들


         법석거리니 너무 어지러워 눈을 감아도


         환하고 눈뜨면 또 어지러워 늘 다니던


         길들이 왜 이리 늙어 보이는지 펼쳐놓은


         통치마 같은 길 위로 날들은 지나가네


         타이탄 트럭에 실려 시내로 들어가는 분홍빛


         얼굴의 돼지들처럼, 침과 거품 흐르는 주둥이로


         나 완강한 쇠창살 마구 박아보았네 그 쇠창살


         침과 거품 흘러내려 흰 고드름 궁전 같았네


 


          3


         11월, 천형의 땅 삶긴 번데기처럼 식은


         국물위에서 11월, 기다리지 않았으므로


         노크 한번 하지 않았으므로 11월, 미구에


         감긴 눈으로 쏟아져들어올 흰 눈 흰 밀가루


         포대 터져 은박지로 구겨질 겨울 11월,


         이젠 힘이 부쳐 일어서지 않는 성기


         포르노처럼 선명한 욕망의 밑그림 11월,


         삼켜지지 않는 뜨거운 수제비알 같은 여름


 


           4


         겨울의 입구에서 장미는


         붉은 비로드의 눈을 뜨고


         흰 속눈썹처럼 흔들리는 갈대


         돼지 멱따는 소리로 우는


         가을꽃들의 울음을 나는


         듣지 못한다 초록 네온사인


         '레스토랑 청산' 위로 비가


         내리고 나는 세상의 젖은 몸


         위에 "사랑한다"라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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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4-11-24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지인께서 이성복의 시집을 선물해주셨어요. 읽고 싶었던 시집이나 왠지 너무 가까운 사이가 될까봐 일부러 피해 다녔던 시집이에요. 어쩔 수 없이 읽고, 가슴에 품어야 할 것 같은 예감이네요..

에레혼 2004-11-24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멋진 조화라고 말씀해 주시니, 정말 '조화'스럽다고 느껴지는걸요^^ 11월이 어느새 져 버리고 있는 이즈음, 가슴에 저며드는 몇 구절이 밟히더라구요 "네게서 와서 아직 네게로 돌아가지 못한 것들" .... "세포 하나하나마다 곱절 크기의 추억들 법석거리니 너무 어지러워 눈을 감아도 환하고 눈뜨면 또 어지러워 늘 다니던 길들이 왜 이리 늙어 보이는지"..... 이렇게 날들이 흘러가고 있네요.



플레져님, 그런 기분 알 것 같아요, 오래 기다려 왔던 것을 막상 갖게 되었을 때 바로 끌러 보지 못하고 밀쳐 두는 기분...... 이성복도 오랫동안 찬탄과 애모의 염을 강하게 품고 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턴가 환멸과 피곤으로 바라보게 되는 그런 시인이 아닐까 싶어요.

그나저나 방금 님의 방에서 헤이리 사진이랑 단아한 님의 모습을 보고 오는 길이었는데..... 역시 플레져님은 플레져답더군요!




선인장 2004-11-24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에 치여 한 시간이 아까운 와중에는 이런 시를 읽으면 안 되는건데... 마음이 자꾸만 얼마 남지 않는 11월을 붙들고 밖으로만 헤매입니다. 돌아오지 않을까봐 걱정이네요.

2004-11-24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세상의 젖은 몸 위에 사랑한다라고 쓴다..비교적 원만한 싯구군요..ㅎㅎ 추억이 떠오릅니다. 정겨워요...

에레혼 2004-11-25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인장님, 요즘 월말이라 일이 무척 바쁘신가봐요.... 그럴 때일수록 마음이란 녀석은 자꾸 밖으로만 나돌아 다니려고 하지요. 마음 꼭 붙들어다 앉히고 따뜻한 목도리로 친친 감아 두세요... 마음의 감기가 더 지독하고 힘들어요...... 우리 선인장님한테 뜨겁고 달콤새콤한 유자차 한 병 보내 드리고 싶네!

에레혼 2004-11-25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교적 원만해서 안심하셨나요, 참나님? ^^

대충, 재밌게, 자신을 마음껏 사랑해 주며 사는 참나님이 보기 좋아요
 


 

 

 

 

 

 

 

 

 

 

 

 

 

 

낮에서 밤으로 건너가는 시간. 프랑스 사람들은 이 짧고 진한 저녁 시간을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부른다고 했던가. 해가 지면서 설핏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면 저만치 보이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애매 모호한 시간대, J는 하루 중 이 무렵을 가장 좋아했다. 하늘이 새까만 어둠으로 완전히 뒤덮이기 직전 희부연 어둑함에 막 젖어들기 시작할 즈음의 세상은 온기와 물기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공기는 부드럽게 그녀를 감싸고 보호해 주듯이 미묘하게 부풀어오른다. 그 공기 속으로 희다 못해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홑이불 같은 빛이 가벼운 구름처럼 가득 차 있다. 그제서야 J의 몸은 개운하고 가뿐하게 깨어나는 듯했고, 마음은 그리운 어딘가를 향해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무작정 나서 보고 싶은 충동 같은 물결이 은밀히 일렁이다가, 아무런 까닭도 없이 스물스물 물기가 잦아드는 눈으로 물끄러미 풍경을 바라보게 되는 것도 이 무렵에 종종 겪는 일이었다.
한 사람의 일생이라는 주기 곡선으로 치자면 이즈음 J의 나이대가 바로 그 저녁 무렵에 해당되지 않을까. 헌데 어렴풋하고 불분명하고 모호한 저녁 무렵을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과는 이율배반적으로, J는 이제 막 당도해 여장을 풀고 있는 이 저녁 무렵을 닮은 자신의 나이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이 나이쯤의 나는 이런 모습이리라, 마음속으로 그려왔던 자화상이 개의 형상인지, 늑대의 형상인지조차 명확히 깨닫지 못한 채 여기까지 흘러온 탓일까.   

집에 돌아가면 분명 텅 빈 기분에 휩싸이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J는 별 도리 없이 집으로 향했다. 무언가 이 빈 시간을 색다른 것으로 채우거나 잠시 눈이나 마음이 현혹될 무언가에 기대 흘려 보낼 방법을 궁리할 여력도 없었다. 이런 기분이 들 때 하릴없이 어둠이 내리는 거리를 서성거리거나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볼 염(念)을 내지 않는 데서 전과 달라진 자신을 느낀다. 그런 마음의 기웃거림이 시들하고 귀찮고 부질없는 짓이라고 느껴지는 건 분명 나이 든 탓이려니.

J는 옷을 갈아입은 뒤 곧바로 아침에 개지도 않고 놔둔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간다. 지금 같은 때는 잠 속으로 도망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충전과 회복의 방책이란 걸 알고 있기에. 베개에 머리를 뉘이면서 J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알 수 없는 일이야, 나한테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는데,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고 일단 발을 들여놓았으니 끝을 맺어야 한다는 식의 의무감과 책임감에 떠밀려 여기까지 오게 된 일인데, 그 일이 끝났다고 이렇게까지 허탈할 이유가 있을까...... 헌데 새삼스레 내게 중요한 것, 의미가 있고 없고 따위를 따지다니...... 이제 사사건건 혼자 생각 많은 척하며 그런 의미나 가치를 재는 일에는 정말 지쳐 버렸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그리고 내일이라는 새로운 날이 오면 또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세수 한번 하고 나면 졸음이 달아나듯, 그렇게 말짱한 얼굴로 또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J는 좀 분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막막하고 어두워진 길을 삶으로 채워 가야 하지 않겠냐고 자신을 설득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이 나이까지 줄곧 J는 눈가리개를 하고 정해진 궤도를 달리는 말처럼 자기 앞에 주어진 길에 순응하며 단순한 낙관과 희망으로 자신을 달래 왔던 것이다.   

 

http://user.chollian.net/~bemyhoney/trollsconcerto12.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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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22 1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정된 시간(timw transfixed)

 

 

 르네 마그리트는 1967년 8월 15일 오후 2시무렵에 브뤼셀의 자신의 침대에서 숨졌다. 그는 익숙한 우리의 감각을 뒤집고 관습을 거부하며 실제의 세계를 시험하기 위하여 홀로 애쓰며 인생을 보냈다. 그는 매우 창의적인 자신의 의지를 표명함으로써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가정하며 지내려고 하였다. 그리고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와 마찬가지로 결국 그 자신의 명석함을 남김없이 다 써버렸다.

  그는 고통과 모든 불행의 근본 원인인 '우울증'으로 대단히 괴로워하였다. 그는 지적 의도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행동, 인생과 작업에서 이 우울증을 형이상학적으로 활용하였다. 외화 작품에서 그는 거의 천부적인 싫증을 보여주었으며, 권태, 피로, 혐오감 사이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꾸며냈다. 즉 '은퇴한 곡예사의 쇠약함'과 같은 것을 강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는 특히 미술가라는 이름을 거부하면서 자신은 '생각하는'  사람이며 다른 이들이 음악이나 글로 생각을 나누듯이 자신은 회화를 통하여 사고를 교류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회화란 정신이 지닌 두세 가지 기본적인 문제들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빛으로 표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고, 특히 존재의 평범함에 대항하는 영원한 반란을 의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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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21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레혼 2004-11-21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고마워요!
 

 



 

 

 

 

 

 

 

끝없는 정찰
(Reconnaissance Without End)

 

 



 

 

 

 

 

 

 

 

 

사적인 일기(private diary)


 


 

 

 

 

 

 

 

 

 

상류사회(high society)

 


 


 

 

 

 

 

 

 

전사술(decalcomania)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나의 그림을 상징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은 작품의 진정한 본질을 무시하는 것이다.  ......  사람들이 물건을 사용할 때는 그 물건 속에서 상징적 의도를 찾지 않지만, 그림을 볼 때는 그 용도를 찾을 수 없고 회화를 접하면서(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의미를 찾게 된다  ....  사람들은 편안해지기 위하여 의지할 만한 것을 원한다. 안전하게 매달릴 만한 것을 원하고 그렇게 하여 공허함에서 자신을 구할 수 있다. 상징적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본질적인 시적 요소와 이미지의 신비함을 간과하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신비함을 감지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떨쳐 버리고 싶어할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라고 물음으로써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만약 신비함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다른 반응을  할 것이다. 다른 것을 묻게 될 것이다.

 

                                                                                                          - 르네 마그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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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1-21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이 안 보이네요.

플레져 2004-11-21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안보여요.

에레혼 2004-11-21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했어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