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그루의 매화, 얼마나 보기 좋은가

하나는 일찍 피고

하나는 늦게 피고

 

-- 부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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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4-06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락와인님, 반가워요.
미역국에 만 밥 애들 앞에 앵겨놓고 알라딘에 들어와봤더니
멋들어진 시와 그림이......

비로그인 2005-04-06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 잘 보고 갑니다 :)

2005-04-24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탈한 자가 문득

김 중 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몇 날 며칠을 아무 데도 가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없는 길 위를 헤맨 듯싶다. '나의 서재'라고 팻말 붙여 둔 이 방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난 말하자면 도망을 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 사이 밤마다 희안한 꿈을 꾸다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어느 것이 현실인지, 정신을 차리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몸은 여기 있는데,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어릴 적부터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 선잠에서 깨어나면 방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리기까지 한참 마음속으로 사방 벽을 더듬거리곤 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는 데 좀 오래 걸리는 부류인 것이다. 

'도망중'인 사이 한 해가 가고 새해가 밝았다.  문득 고개 들어 휘 둘러보니 그리 멀리 도망치지도 못했다. 그러면 그렇지. 네가 가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 줄 알았느냐.   

읽다가 밀쳐둔 책들로 어지럽혀진, 그 사이 문 한번 열어 보지 않은 먼지투성이 서재의 창문으로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햇살 한 줄기 비쳐 들어온다.  엄살 떨지 말고, 변명 따위 하지 말고, 방 청소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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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1-04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몸으로 돌아왔을 때...

이 아침 가슴을 칩니다.

그나저나 님, 히잉 너무 반가워요.^^

urblue 2005-01-04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

로드무비 2005-01-14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3000
 

 

공익근무 끝! 컴백 홈! 감독 이창동 독점 인터뷰 [5]

소설로, 영화로 이어진 힘
 

조선희 무엇이 이창동 감독을 작가로 만들었을까요.

이창동 아, 이건 어려운 단답형 질문이다. 외로움 같아. 외로움. 십대 초반에 이미, 나 스스로 작가라고 생각했거든. 그때 소설도 썼어요. <삼국지>도 썼고. 촉나라 오나라 위나라 그림도 그려가면서 내 나름대로 쓴 거예요. 누구한테 보여준 적은 없지만 내가 그 무엇과 통신하는 방법이야. 외로우니까, 현실하고 소통이 안 되니까 그랬던 거 같아요. 지금도 그 정서나 심리상태가 거의 변하지 않은 거 같아요.

조선희 소설 쓰다가, 아 이거 못해먹겠다 해서 딴 데로 간 게 또 다른 작가의 길이었잖아요.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소설로, 영화로 끌고 온 힘이 뭘까요.

이창동 글쎄요, 힘이 있었나? 그냥 흘러오다보니까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는데. 조선희씨가 잘 알겠지만 그건 있었어요. 이른바 80년대에 내가 글을 썼잖아. 우린 20대 때엔 인문학적 감수성이었거든. 그런데 80년대는 인문학 말도 못 꺼내는 분위기였어요. 과학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거예요. 나 개인으로는 글 쓰는 쾌감이랄까, 즐거움이랄까, 글에 대한 도취, 그런 게 문창 초기엔 굉장히 강했거든요. 근데 정작 작가가 되고부터는 그게 완전히 휘발돼버렸어요. 의무감만 남은 거예요. 자기검열을

 

하게 되고부터 글쓰기가 힘들어진 거죠. 벽에 머리를 찧으면서 고민은 하는데 정작 글은 쓰지 못하는. 그런데 90년대로 넘어오면서 갑자기 세상이 바뀌었다고. 포스트모던이니 신세대, 이런 것들이 화두가 되었잖아요. 굉장히 허탈했지요. 우리가 고민했던 가치들이 유효기간을 지난 것도 아니고 한국사회가 그런 문제를 해결한 것도 아니야. 근데 갑자기 유통기한 지난 의제들처럼 되는 분위기였죠. 그래서 글쓰기가 싫어졌던 거야. 나 자신에 대한 것도 많았어요. 내가 지겨워졌다고 할까. 그러면서 핑계를 찾은 거죠. 글쓰지 않을 핑계를. 그러다 우연찮게 영화판까지 오게 됐죠. 그때 <그 섬에 가고 싶다> 촬영장에서 만났잖아. 그때 어떤 기자가 그렇게 썼는데, 꼭 수행자 같았다고. 실제로 그냥, 혼자 고생을 하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영화를 하게 된 건 주변에서 떠밀어서 한 측면도 있어요. 나 혼자, 다른 영화감독 지망생처럼 시나리오 들고 왔다갔다하라 그랬으면 못했을 거예요.

 

<중략>

조선희 자신의 내부에는 어떤 실마리도 없었어요? 영화에 대한.

이창동 그렇지는 않죠. 한국사회의 변화하고 관련있는 이야기인데,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한국사회의 변화 중에 탈근대의 화두가 있잖아요? 그중 하나가 영화에 대한 거지. 실제로 근대의 중심은 활자거든. 활자의 의미, 관념 이게 근대를 지배했잖아. 근대를 끌고 왔지. 그런데 탈근대는 영상이 또 다른 어떤 세계를 구성하는 거야. 조선희씨가 <씨네21> 편집장을 한 것도 그렇지. 작가들도 모이면 영화얘기를 했어. 영화감독 하겠다는 친구들도 꽤 있었고. 난 상상도 못했어요. 그저 농담이었지. 근데 농담이 진담이 되어버린 거지.

 

소설에서 영화로 넘어가는 건너뛰기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고 그런 배경이 있었던 거예요. 돌이켜보면 그게 내 운명이었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어릴 때 형 때문에 비록 지방도시였지만 연극을 늘 봐왔고 연극이란 장르는 나한테 굉장히 친숙하거든. 그리고 또 열몇살 때 이미 화가였고, 물감 살 돈이 없어서 포기했지만. (웃음) 그러그러한 씨앗들을 내가 품고 있었던 거예요. 나는 흘러간 것처럼 느껴지지만 따지고보면 예정돼 있었던 거 같기도 해요.

 

조선희 93년에 <그 섬에 가고 싶다>가 나왔잖아요. 그리고 97년 <초록물고기>인데, 그때까지가 말하자면 영화감독으로서의 수업기라 볼 수 있는 거네요. 93년부터 4년 정도. 그 기간이 좀 지루하지 않으셨어요?

이창동 일단 수업기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어떤 목표를 갖고 있어야 지루할 텐데 나한테는 목표의식이 없었어요. 꼭 해야지 하는 건 없었어요.

조선희 어쨌든 그러다가 <초록물고기>를 찍게 된 계기는 뭐죠? 낭트영화제를 보고 영화하기로 결심했다는 설도 있는데.

이창동 결심은 아니고, 베낭여행을 가다가 낭트에 들렀어요. 근데 굉장히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야. 그게 나한테는 놀라움이었어요. 보편성이라는 것에 대해 실감한 계기가 됐죠. 국경을 넘는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는 문학보다 영화가 훨씬 쉬운 매체라는 걸 느꼈다는 뜻이에요. 문학은 오래 걸리잖아요. 번역의 문제도 있고, 또 세월의 무게, 시간의 무게를 이겨야 돼요. 영화처럼 금방금방 평가받지 않잖아요. 그게 조금은 영향을 줬을 거예요.


작가로서의 분열과 싸움

조선희 여하튼, 신인 시절에….

이창동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용해. (웃음)

조선희 어떤 기업인 전기를 써주다가 노트북 파일이 날아간 적 있었잖아요. 그게 언제였죠?

이창동 95년이었어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시나리오 쓰는 동안이었죠. 그건 거의 사고를 당한 충격이었어요. 왜 잃어버린 게 더 아깝잖아. 더 훌륭하고. 어떤 기업인 전기소설은 이미 다 썼던 거고 고료도 받았었고. 노트북에 있다 날아간 건 그때 작업하던 장편소설, 중편 등등이었죠.

 

조선희 제가 지금 신인작가잖아요. 근데 정말 신인작가라는 건 정신분열의 다른 이름인 거 같아요. 사회적 냉대, 시스템의 냉대에 시달리다보면, 끊임없이 내가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내가 바보가 아니라는 것, 그걸 사회에 납득시키기 전에 내 자신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책무가 있잖아요. 그 내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든 거 같아요. 또 내가 소설 쓸 재능은 없을지라도 이유는 있다는 걸 자신한테 납득시켜야 하는데, 가장 절망적일 때는 그 이유가 생각이 안 날 때예요.

선배는 그런 신인작가 시절을, 소설가로서, 영화감독으로서 무려 두번이나 했잖아요. 이 신인작가에게 뭔가 용기를 주는 얘기 해주실 거 없어요?

 

이창동 전혀 도움이 안 되지. 어떤 누구의 경험도 도움이 안 돼요. 혼자서 해결해야지. 절망을 좀더해야 해. 가혹하게 이야기하면, 절망을 아직 덜 했구먼.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설득한다고 했잖아. 무가치한 존재라는 걸 받아들여야 돼.

조선희 그것까지 받아들이고 나면 쓸 기력이 없잖아요.

 

이창동 절망을 하고 나면 할 일이 쓰는 거밖에 없게 돼요. 베스트셀러를 쓰려고 하니까 그렇지. 무인도에서 구원의 글귀 한 구절을 써가지고 병에 집어넣어서 코르크 마개를 닫고 바다에 던지는 심정이 돼야 해. 누구 하나라도 이걸 주워서 봐줬으면 좋겠다, 에서 시작하는 거 아닌가? 무인도에서 베스트셀러작가가 되는 걸, 이 체험을 수기로 써서 베스트셀러가 돼서 비단옷 입고 진주목걸이 하고 그런 거 상상하면 미치지.

 

조선희 신인작가가 자기의 존재가치를 입증하려다보면 조급해지잖아요. 그런데 <초록물고기>는 데뷔작으로서 그렇게 조급하게 만들어지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건 뭘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이창동 무슨 이야긴지 정확히 이해하겠는데, 한 가지 납득이 안 되는 건, 지금 조선희씨 이야기 중에, 뭐라 그럴까, 세속적 잣대의 용어가 섞여 있어. 작가는 작가지, 신인작가라는 말은 없어.

그건 저널리즘 용어라고. 난 열두살에 이미 작가였다고. 그전엔 화가였고. 내가 글을 쓰면 이미 작가예요. 신인작가, 추천작가, 무슨 수상작가. 이건 그야말로 세속적인 거라고.

 

또 시스템으로부터의 냉대, 인정 이런 것들도 세속적 가치라고. 요즘 예술가를 찾기가 어렵다는 말들 하잖아요.

세속적인 가치가 아닌 자기 내적 충동, 내적 가치로 창작을 하는 예술가를 만나는 게 어렵다는 얘기 같아.

보면 알거든. 예술가의 폼을 내는지. 진짜 예술가인지. <초록물고기> 때? 말할 나위가 없죠. 그때 경험했던 냉대와 쪽팔림이라는 거. 나이도 사십이 넘어서. 그런 외로움은 내가 열두살 때 이면지에다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을 쓸 때나 큰 차이가 없거든. 그게 힘 아닌가. 영화 촬영할 때 어떤 장면 찍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와 이 장면 하나 몇만이다, 이런 얘길 덕담처럼 하는 경우 있어요. 그럼 난 즉각적으로 의심을 해요. 이거, 없애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보여지는 것엔 뭔가 위험한 요소가 있다는 거지. 소통 자체를 거부하는 건 아니에요. 교감하는 게 좋지. 그런데 그 방식이 중요한 거지.

조선희 자기 재능에 절망한 적은 없어요?

이창동 그걸 나에게 물어선 안 되지. 조선희씨 왜 절망하는데? 뭐 땜에 절망해? 스팀이 잘 안 들어와서 절망해, 볼펜이 잘 안 들어와서 절망해, 마누라가 바가지를 긁어서 절망해?

(웃음) 결국은 자기 욕망과 그 욕망으로부터 동떨어진 재능과의 싸움이지. 피흘리는 싸움. 그게 운명이지.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있군.

 

조선희 그런데 영화를 찍을 때마다 그 절망과 싸움이 늘 반복되나요?

이창동 그렇지. 그럼 술술 나오나? 안나오지.

<중략>

 

조선희 그러면 작품이라도 빨리 찍어야 할 텐데 다음 작품은 언제 나올까요. 내년쯤?

이창동 모르겠어요. 사실은 소설을 쓰고 있거든. 몰라, 끝냈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아직 절반도 안 됐는데.

 

조선희 영화로 만들 걸 소설로 쓰는 거예요?

이창동 그건 아니고. 공무원 생활하면서 갑자기 글을 써보고 싶더라고. 언어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문학은 언어가 가진 환기력을 수단으로 삼는데 무엇 때문인지 그걸 다시 경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근데 너무 오랫동안 안 해서 다 까먹었어요. 어떻게 써야 하는지. 과거에도 잘 못썼지만. 거의 실어증 환자가 말 배우는 수준이야.

 

시네마서비스에서 알면 화낼 텐데. 계약금 받아먹고 말이야.

조선희 어쩔 수 없이 이창동 감독이 문자세대라는 게 아닐까요. 문학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또 영화로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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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인가,  초여름에 친구들과 제법 오랜 여행을 마치고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 기내에서 만나게 된 빅 뉴스는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 소식이었다. 너무 급작스런 뉴스여서, '정말? 아니, 언제 저렇게까지 일이 진척됐지?'싶은 어리둥절함과 함께 '공중 위'에 떠 있다는 공간감각이 덧붙여져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들었었다.

몇 해 전, 다시 여행길에서[아마 헝가리 부다페스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에 전화를 했더니, 상기된 목소리로 들려주는 몇몇 소식 중에 이창동 감독이 칸느인지 베니스인지  아무튼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는 뉴스가 끼어 있었다. 외지에서 듣기에도 가슴 설레는 뿌듯한 뉴스였다. 누군가의 성공(浮上)에 관한 일화 뒤에는 의례 또 그와 비견되는 누군가의 실패(가라앉음)가 빛과 그림자처럼 떠오르는 법이기도 했고.

그 뒤로도 이창동은 때마다 인상적이고 놀라운 변신을 해서 그 해에 기억할 만한  화제의 인물이 되곤 했다.  

영화감독 출신 장관에서 이제 다시 '소설가'로 돌아온 그의 인터뷰 기사[씨네 21]가 여러 모로 곱씹을 만하다.

몇몇 구절, 특히 "절망을 덜 했구먼!"이란 그의 표현에 공감하면서 속으로 웅얼거려 본다......  "자네, 아직 절망을 덜 했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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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장소는 '그린 하우스 앞'이었다. 지난해 이맘때 약속 장소도 같았다. 그때는 건물이 공사 중이었다. 올해는 아예 낯선 간판과 산뜻한 인테리어로 새롭게 단장한 신축 건물이다. 이제 그린 하우스는 사라졌다. 사라져 버렸으나 우리의 기억 속에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그린 하우스 앞에서 우리는 만났다. '그린 하우스 앞'이란 말은 '*대 앞'이란 말처럼 그 언저리에서 한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는 하나의 독립된 고유명사인 셈이다. 추억은 때로 융통성 없이 고집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아직 그 거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추억의 공간 가운데 하나인 '오리지날'에 찾아 들어가 추억의 메뉴를 주문했다. 야채와 오징어 튀김, 그리고 라면과 쫄면 사리가 들어 있는 떡볶이. 식초와 간장과 약간의 설탕과 고춧가루가 적당히 배합된, 그 위에 송송 썬 실파와 깨소금이 섞여 있는 양념 간장의 맛 또한 정감 있는 튀김의 모습과 함께 여전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맛은 달라져 있었다. 어쩌면 달라진 것은 구체적인 맛이 아니라 공기였을지 모른다. 오랜 시간의 빛과 기억의 먼지를 통과해 온 공기의 질감. 오래 입어 날긋날긋해진 옷소매처럼 고단하고 원숙해진 공기의 질감. 오랜 시간을 지나오면서 추억을 저장하는, 추억과 버무려진 맛을 기억하는 회로는 어느 지점에선가 자의적인 왜곡과 조작을 거쳤을지 모를 일이다. 기억은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해서 우리가 기댈 만한 기록이지만, 언제나 과거의 공정한 영수증이 돼주지는 못한다.

 



가미분식 앞을 지날 때는 첫 임신 때 입덧을 하면서 눈물겹도록 가미의 주먹밥이 먹고 싶었다던, 당시 미국에 가 있었던 친구 J가 생각났다. 나는 가미의 주먹밥만큼이나 가미 우동에 딸려 나오는 그 달착지근한 짠지무침의 맛을 때때로 그리워했다. 어느 해인가는 혼자 학교 앞을 배회하다가 가미에 들러 우동을 사먹기도 했다. 그 즈음에 남편이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J를 만나기도 했으나, 이제 나는 J와 연락이 끊어졌고 혼자 가미 우동을 먹는 순간 같은 건 다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억의 한 토막은 거리를 걷다가 문득 발부리에 채이는 돌멩이처럼 돌연 의식의 수면 위로 튀어 오르곤 하는데, 그 숨어 있는 맥락과 뿌리를 추론하는 일은 난해하고도 흥미롭다.
우리가 지녔던 감정들이 어떤 공간에 희미하게나마 각인된다고 생각하면, 평소에 무심결에 스쳐 갔던 곳이라도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때가 있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의 감정이 흘러서 쌓여 현재 '여기'의 느낌과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면 '여기'는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공간이 된다.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이나 한 시절을 보낸 학교 앞 거리에 대한 애착 같은 것도 어찌 보면 그 공간이 간직하고 있었던 기억에 기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곳에 가면 그 기억들이 나에게 다시 말을 걸어서 그때의 감정과 기분을 불러내 주는 것 같은....... 

 


 
미고에서 치즈 케이크와 티라미슈 등 조각 케이크 몇 가지를 골라 가지고(미고는 인기가 있는 곳이어선지 빈자리가 없는 데다가 전 좌석이 금연이었으므로) 바로 옆 건물 2층의 카페로 올라갔다. S가 얼마 전 외국 여행길에 샀다는 디카를 꺼냈다. 적당히 어둡고 따뜻한 불빛 아래서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 창에 포착돼 있는 바로 몇 초 전의 내 모습이 낯설고도 기묘해 보였다. 녹음기를 통해서 듣는 자신의 목소리, 카메라의 필터를 통해 비쳐지는 자신의 얼굴은 왜 그리도 불안정하고 생경한 느낌을 주는지....... 과학적인 설명에 따르면, 그건 모두 거리와 [시간] 속도의 차이에서 오는 낯섦이라고 한다. 내 입에서 귀까지의 거리와 시간, 내 두뇌가 기억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실제 한 대상으로서 외부에 보여지고 있는 나의 모습간의 거리에서 오는 차이. 어쩌면 기억이 갖고 있는 환상과 왜곡 역시 같은 원리에 기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S는 요즘 회사에서 임원진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경영 마인드 익히기 트렌드에 부응해 '도요타 자동차 회사'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었다고 토로한다. Y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시민단체에서 원불교 교무 집에서 마련한 식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원불교 교무는 어떤 식단을 먹는지 무척 궁금했으나...) 미묘한 이유로 동료에게 양보했다는 얘기를 꺼낸다. K는 한동안 이유 모를 불면증과 식욕 부진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데다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는데, 병원에서 우울증 초기에 나타나는 증세라고 진단했다는 얘기를 담담하게 한다. 그 탓에 오랫동안 몸과 마음이 두루 시달렸을 테지만, 그 결과 지금 겉모습은 보기 좋게 가뿐해져 있다. 우리는 '나이 듦'을 어느 지점에서, 어느 순간에 실감하는지를 저마다 얘기하며 쓸쓸하게 웃었다.


훈훈한 등불 같은 추억과 몇 장의 흑백사진 같은 기억과 희미한 미래의 희망이 교직되어 흐르는 시간. 그 시간들 속을 목소리와 이야기와 말들이 가볍고도 무거운 공기 입자처럼 채워 갔다. 경락 맛사지와 요가와 맨손체조의 효과와 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방법, 별거와 이혼과 성공적인 재혼 케이스와 쿨한 관계의 몇몇
사례들에 관한 이야기들, 주변 사람들의 성공과 실패, 인생의 부침에 관한 간략한 코멘트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 말하지 못한, 말로 되어 나오지 않은, 발자국 남기지 않은 채 슬쩍 지나가 버린 저마다의 은밀한 생각과 감정들. 
시간은 흐르고, 밤은 깊어 가고, 2004년 12월 어느 저녁 S와 Y와 K, 그리고 내가 함께 한 기억 또한 그렇게 쌓여 가고 있었다.


한 시절을 같이 보냈으며 오랫동안 서로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란 '같이 살지 않는 가족'과 같은 관계가 아닐까. 일상적으로 밥상머리에서 마주하다가 집 밖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왠지 낯설고 부끄러운 기분에 외면하고 싶어지면서도 마음 한 켠 애잔한 연민이 느껴지는. 어쩔 수 없이 수긍하게 되는 동질감과 뿌리 깊은 동류 의식에 서글프고 누추한 감정 뒤켠으로 뜨끈한 국밥 한 그릇 뱃속에 채운 듯이 마음 든든해지는.


지난 주말, 내가 걸었던 거리의 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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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면을 쓰고 있었으며 그 가면을 수시로 바꿨다.....

가면 밑에 다른 가면이 있고, 그 연속적인 숨김 밑에 진정 본질적인 인간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몇 명의 푸코가 있는 것일까? 수천 명의 푸코가?

그렇다. 물론이다.

 

--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시각과 언어) 중에서

 

 


Duane Michal, Mirr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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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12-20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반가워라. 너무 오래 쉰 거, 알고 계시죠?

플레져 2004-12-20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텔레파시가 통했나요. 아까 밖에서 볼일을 보다가, 라일락 와인님이 모습 본 지 오래됐구나 싶었어요.... 반가워서 눈웃음 ^^

물만두 2004-12-20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을 잊었다는 그래서 님을 사마로 못 올렸다는 죄송 ㅠ.ㅠ

라사마님 라쟈냐 사마!!! 와인하고 먹음 좋을 것 같으니 와인도 한병^^ 찔러족 만두의 찌름 사마이옵니다. 궁금하심 제 서재와서 보시와요^^

2004-12-20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은 버젼이군요..


물만두 2004-12-21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라압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