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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방울이 반짝반짝 마음별 그림책 29
윤여림 지음, 황정원 그림 / 나는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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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좋은 날 우리의 마음이 환해지는 건 빛방울 하나하나에 담긴 다정한 마음과 따뜻한 시선과 맑은 희망 때문이란 걸 알게 되었어요. 지금 우리 사이에도 작은 빛방울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팡팡 터지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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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을 만나서 마음별 그림책 23
코비 야마다 지음, 나탈리 러셀 그림, 김여진 옮김 / 나는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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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약하고 여린 마음을 지닌 아이를 지금의 내가 되도록 보듬어 주고 이끌어 준 내 인생의 선생님들을 떠올려 준 책이에요. ˝실수할 때가 바로 배움의 순간이며˝ ˝내가 가진 힘을 믿게˝ 되는 게 진정한 용기라는 걸 깨닫게 해 준 세상의 모든 선생님들께 드리는 감사와 그리움의 꽃다발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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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나무 마음별 그림책 18
코리나 루켄 지음, 김세실 옮김 / 나는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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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당신 안에, 우리 안에 나무 한 그루씩 자라고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다정하고 아름다운 발견인가요. 그 깊은 지혜를 이토록 예쁘고 환한 그림과 글로 펼쳐 보여주는 코리나 루켄, 믿고 보는 작가입니다. 그의 상상력이 이 새봄에 활짝 꽃을 피웠네요! 책장을 넘기고 나면 마음이 환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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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
어빈 D. 얄롬 지음, 최윤미 옮김 / 시그마프레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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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관계 맺기가 어렵다.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도 늘 혼자라고 느낀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다. 삶의 문제는 있지만 해답은 없을지 모른다고 회의한다. 완전한 소멸을 두려워하면서도 종종 죽음에 이끌린다..... 이런 증세를 가진 사람이라면 심리 분석이라든가 정신과 상담 같은 데 호기심과 관심이 있을 터이고, 그 관심의 뿌리는 근본적으로 자기만이라도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와 사는 동안 잘 살고 싶다는 본능에 닿아 있을 것이다.

스탠포드 대학 교수인 정신과 의사 Irvin D. Yalom이 자신의 치료 사례 열 가지를 묶어 낸 사례집 <나는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는 그런 욕구를 가진 사람들에게 좋은 읽을거리가 되는 동시에 진지한 성찰의 계기가 돼 주리라 믿는다. 
Yalom이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례들은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실존적 삶에서 부딪힐 수 있는 문제들이다. 우리가 겪는 실존적 문제들이란 이런 것들이다. 우리 모두,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이 모두가 불가피하게 죽는다는 사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대로 우리 삶을 만들어야 할 자유, 궁극적으로는 혼자라는 것, 그리고 분명한 삶의 의미나 의식이 빠져 있다는 것. 우리 모두는 이 문제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하다. 
Yalom 박사를 찾아와 상담했던 이들의 문제를 따라가다 보면 그들의 문제 중 어떤 부분은 놀랍게도 나의 그것과 비슷하게 닮았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 사랑의 처형자 / "8년 전 나는 치료자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 이후로 내 마음에서 그가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밖은 너무나 춥고 내 안은 텅 비어 있어요. 나는 한 번 자살을 시도해서 죽을 뻔하다 살아났지만, 다음 번에는 틀림없이 성공할 거라고 믿습니다. 당신은 나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 뚱뚱한 여인 / "무시무시하게 몇 달이 흘렀다. 그녀는 모든 걸 미워했다. 삶은 고문이었다. 지긋지긋한 액체 다이어트 음식, 자전거 운동 기구, 기아의 고통, 사악한 TV 맥도날드 광고 그리고 냄새, 도처에 깔려 있는 냄새들... 극장의 팝콘 냄새, 볼링장에서 나는 피자 냄새, 상가를 지날 때 나는 빵 냄새......"

- 잃은 아이, 남은 아이 / "나는 세 아이를 가졌어요. 하나는 천사이고 나머지 둘은, 걔들을 봐요. 하나는 감옥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약물 중독에. 나는 세 아이가 있는데 죽어서는 안 될 엉뚱한 애가 죽었어요."

- 뜯지 않은 세 통의 편지 / "나는 편지를 집어들고 집으로 돌아가서, 쓸데없는 우편물이 쌓여 있는 데로 던져 버렸어요. 아직 뜯어보지 않았습니다. 왜 열지요? 거기 뭐가 있는지 난 벌써 알고 있는데. 정확한 문구는 내 상처를 더욱 갈갈이 찢어놓을 뿐인걸요."

- 측은해지려고 태어나다 / "내가 바랄 수 있는 최상의 희망은 정신 병원에 있는 것이에요. 난 사랑을 받아 본 적도 없어요. 아이를 갖지도 않을 거예요. 난 친구를 만들 능력도 없지요. 내 생일이라고 전화해주는 사람도 없어요. 나의 어머니는 남을 괴롭히는, 미친 여성인데, 나는 매일 그녀와 비슷하게 되어 있어요."

이들은 저마다 다른 사연과 상처를 갖고 있지만, 또 들여다보면 모두 같은 자리에 서있다. 너무나 많은 소망. 너무나 많은 갈망들. 자신의 삶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그 소망들이 자기 삶을 압도하여 지배하는 상태.
나 또한 그런 시간들, 그런 경험들이 있었다.
이미 나를 떠나가 버렸거나 애초부터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던 대상에 집착하던 때, 사랑이란 낭만적 환상으로 숨어들어 현실을 직면하기를 회피하려 한 때, 나를 형성한 성장 배경 중 어떤 부분을 결코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 친밀감을 맛보기 위해 나 자신을 속인 때, 또는 결국에는 다가올 헤어짐이나 공허가 두려워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꺼리는 것, 슬그머니 과거나 미래로 미끄러져 들어감으로써 현재 이 순간을 회피하는 것......

인간이란 존재는 스스로 자기의 부모가 되거나 영원한 아이로 남거나 둘 중 하나라고 한다. 어느 쪽이 되기를 원하는가. 나는 물리적 나이와 육체적 나이듦과 상관없이 나 자신이 계속 성장하기를 바라고, 스스로 그 성장을 진심으로 돕고 싶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가 공감을 나타내며 인용하고 있는 사르트르의 말에 나 역시 밑줄을 긋는다. "책임이란, 각자가 자기 삶이라는 디자인에 '작가(be the author of)가 되는 것이다." 저자는 자기 삶을 책임지는 방법의 하나로, '검토하지 않은 채 사는 삶은 가치가 없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한다.
그러나, 내가 더 큰 위안과 안도감을 느낀 것은 바로 이런 구절과 만났을 때였다. "인생의 가장 큰 역설 중 하나는 자기 인식(self-awareness)이 불안을 낳는다는 것이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더 잘 이해하면 할수록 안정감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불안의 파도 속에 잠기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만이 자기 삶의 구조를 만든다는 것을 통찰하기란, 지독하게 어렵고, 두렵기까지 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벼랑 끝에 서서 조금의 연민도 없이 냉혹한 삶의 실존적 사실-- 죽음, 소외, 기댈 곳 없음, 무의미 등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물론 거기엔 해결책도 없다. 몇 가지 입장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단호해지느냐(resolute)", "거기 빠지느냐(engaged)", 혹은 철학적으로 수용하느냐, 아니면 합리주의 정신을 포기하고 신비와 경외심을 가지고 신의 존재를 믿느냐 하는 것이다. 나의 선택이 바로 내 인생의 길을 결정해 줄 것이다.

마지막 사례에서 내담자의 회한 어린 말에(그 말은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음에...) Yalom
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 대답은 나에게 힘을 준다. 어두운 밤바다에서 보는 등대의 불빛처럼.
"나는 삶에서 내가 한 것, 아니 그보다는 하지 않은 것에 대해 회한이 많아요."
"우리가 너무 열심히 과거를 들여다보면, 후회에 압도당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미래를 향하는 것입니다."

 

사족 몇 가지.

1. 이 책에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는 다소 직설적인 제목이 붙게 된 배경(저자의 말) /
"나는 사랑에 빠져 있는 내담자와 작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나 역시 매혹적이고 싶은 부러움 때문일 것이다. 또는 사랑과 심리 치료는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치료자는 어둠과 싸워 불빛을 찾는 것인데, 낭만적인 사랑은 신비로워야 지속이 되고 그 사랑을 자세히 살펴보면 신기루가 되어 날아가 버린다."

2. 곳곳에서 멋지고 재치 있는 비유와 사고를 만나는 묘미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크게 해준다.
가령 이런 대목들 /
"가장 나의 심리적인 관심을 끄는 분야는 대부분,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생겨났다. 철학자의 사고 체계는 항상 자기 자서전에서 나온다고 니체도 주장했듯이 이는 모든 치료자-- 사실상 생각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이야기이다.
................
하지만, 니체가 많은 부분에서 훌륭한 시각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대인 관계에는 지침이 될 수가 없다. 그보다 더 고독하고, 더 소외된 남자가 있었던가?(밑줄!!)"

"우정이나 결혼이 실패하는 까닭은, 관계를 맺고 서로 돌보는 대신, 한 사람이 상대방을 소외에 대한 방패막이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무엇엔가 빠지는 것(falling)'이 아니고 오히려 '누군가에게 주는(giving to)' 존재의 한 방식이며 오직 한 사람에게만 향하는 행동이 아니라 크게 관계 맺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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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10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압도당했어요. 이 책과 리뷰의 무게에...^^

에레혼 2004-10-11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그리 무겁지 않은데, 그걸 가볍게 실어 나르는 법을 미처 제가 익히지 못했어요
아직도 앞마당을 천 일쯤 쓸고, 물동이를 삼천 동이는 져 날라야 하려나 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4-10-11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요, 이 책 보지 않았지만 아마 라일락와인님 리뷰가 더 훌륭할 거란 생각이 들어요.
감동스런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전 아직도 상대방을 소외에 대한 방패막이로 이용하고 있는 것 같군요. 게다가 크게 관계 맺는 방법은커녕 오직 한 사람에게도 정성을 다해 향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에레혼 2004-10-11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님, 언제 마음이 動하면 한번 읽어 보세요.웬만한 소설보다 더 재미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질병은, 이지러짐은, 자신이 사랑받고 싶은 만큼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요. 저 역시 많은 관계들이 소외와 쓸쓸함을 피하기 위한 방패막이로 기능하고있는 것 같아요. 이 나약함, 이 본능적인 의존, 제대로 충분히 사랑할 줄 모르는 닫혀 있음을 어떻게 졸업할 수 있을지....... 알라딘 서재에서도 관계의 여러 모습과 자세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요즘....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78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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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문득, 최승자 시집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마 뭔가 이유가, 아니 어떤 引力의 근거라 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채로 존재하는. 미처 다 알지 못하는 마음의 발길이 이끄는 대로 나는 최승자의 세 번째 시집 <기억의 집>을 읽어 간다(이 시집은 1989년에 '문학과지성 시인선' 78번째 시집으로 나왔다). 시인의 발자국을 따라 그 길을 느릿느릿 따라가 보는데 어느덧 몸이 찌르르 아파 오고, 나는 슬며시 자리에 드러눕는다.


그녀는 잠과 죽음 속에서 산다. 아니, 잠과 죽음이 곧 그녀의 삶이다.
그녀가 사는 시간들은 "흐르는 잠과 하품과 구역질의 시간들"이다. "졸리워 졸리워 오늘도 나는/ 내 무덤을 미리 파고" 있는 시간들을 산다. 그 "시간의 사막 한가운데서/ 죽음이 홀로 나를 꿈꾸고 있다."고, "꿈꾸기 가장 편리한 나는/ 무덤 속의 나"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 시간 속에서는 늘 죽음이 그의 "주위를 물결처럼 공기처럼/ 어둠처럼 맴돌며/ 급소를 노리고 있다."
"그대들이 나를 찾을 때/ 나는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살아 헤매며/ 이 세계의 모든 문들을 두드릴 때/ 나는 무덤의 따뜻한 실내에 있을 것이다."
간혹 잠결에 무엇인가 그녀의 꼬리를 물기도 한다.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을 때/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이 미끄러짐 끝에 확인이 있을까./ 삶의 확인 아니면 죽음의 확인이"


그녀는 무덤 같은 자기 방에서 누워 있거나 벽을 응시한다.
그 방의 내부는 그 "방의 내부 속에 닫혀 있다."
그녀가 그리는 방의 풍경. "불을 켜도 골방의 내부는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 죽음만이 홀로/ 심장의 불을 켜들고/ 환히 녹으며 타오른다." 죽음이 켜든 그 환한 불빛을 바라보며 누군가가 외친다. "각성하라!/ 타오르는 죽음 곁에/ 깜깜히 누운 삶이여!"
그녀가 "몸 눕히는 곳 어디서나/ 슬픔은 반짝인다./ 하늘의 별처럼/ 地上의 똥처럼." 그녀는 "슬픔의 소화기관을 갖고 있지 못"해서 "슬픔을 먹는 대로 곧바로 토해 버린다."

그렇게 토해내진 슬픔들이 벽에 얼룩을 남기고 습기를 퍼뜨리고 부식의 균을 증식시킨 탓일까. 그녀의 방을 이루고 있는 벽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자세히 보면 고요히 흔들리는 벽,/ 더 자세히 보면 고요히 갈라지는 벽"....... 그래서, 시인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가 "벽이 꾸는 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고요히 흔들리는 벽 안에서 그녀는 자신의 병을 응시한다("내가 응시하고 있는 나를 응시할 뿐"). 어쩌면 그렇게 고요히 흔들리고 갈라지는 벽이 그녀의 병인지도 모를 일.
"어떤 아침에는,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또 어떤 아침에는, 내가 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그런 자각 뒤에 그녀는 자신의 방문을 더 꼭꼭 잠그며, 허술한 틈을 경계한다.
"잘못하면 자칭 詩가 쏟아질 것 같아서/ 나는 모든 틈을 잠그고/ 나 자신을 잠근다.
(극소량의 詩를 토해내고 싶어하는/ 귀신이 내 안에 살고 있다.)"
그녀는 허술한 틈 사이로 시를 마구 토해낼지도 모르는 자신을 경계하고 단속한다. 그렇게 내뱉어진 시들은 가짜 희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말하기 싫다./ 말하기 싫다는/ 말을 나는 말한다.
(희망은 감옥이다.)"


때로 그녀가 제 몸을 뉘어놓은 그 방의 창이 붉게 물든다. 
"봐, 봐, 저 붉은 노을 좀 봐.
죽을동 살동 온 유리창에 피칠을 하며/ 누군가 나 대신 죽어가고 있잖아."
그녀는 인큐베이터 같은 방 안에서 세상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다.
"심혈을 기울여 해가 지고/ 심혈을 기울여 한 사람이 죽고/ 심혈을 기울여 지구가 돈다, 돌 때,/ 나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세계를 내다보고"
그녀의 그 무심한 듯한 응시에는 세계에 지금 막 당도한 죽음이 나 대신 죽어가는 누군가의 것이자 내 것이라는 엄정한 인식이 깔려 있다. 
"그렇다, 가혹하다./ 누가 이렇게 내 피를 빨아먹는 건지.
--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내 피를 빨아먹었다는 것을,/ 빨아먹다 죽는다는 것을.
그러나 또 나는 안다./ 내가 언제나 나이듯/ 내가 언제나 남의 남이라는 것을."


이 세계의 문법을 "매번 배우지만 매번 잊어버"리는 그녀는 자신의 삶이 "성공한 실패들의 집적"이자 "무의미의 집대성의 神殿"이라고 단언한다.
'허약한 난간'과 '허약한 삶의 규율들'에 기대어 지어진 자신의 방에 누워 그녀는 종종 희구한다.
"아- 영원한 단식만이 있다면./ 아- 영원한 無의 커튼만이 흔들리고 있다면.
(그러나 그보다는 차라리/ 빨리 나를 죽여주십시오.)"
그녀가 지어 올린 '기억의 집'에서 울려 나오는 마지막 기도......
"잠시만 기다려다오.
내가 이 잔을 다 비울 때까지/ 내가 꿈속에서 다시 한번만 돌아누울 때까지/ 내가 내 시야를 스스로 거둘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다오,
죽음이여/ 잠시만,/ 영원히."


그런 기도 소리가 그레고리안 성가처럼 울려 퍼지는 최승자의 <기억의 집>에 들어갔다가, 나는 오래 빠져 나오지 못하고 그 유령 같은 자리에 눕고 만다. 아프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아프다,고 쉽게 발음하는 내가 얼굴 없는 초상처럼 낯설고 아득하다.  여기는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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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9-21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에레혼 2004-09-23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최승자 시인과 코드가 잘 맞질 않으신 걸까요? 아님 너무 아프게 하는 걸까요?
어쨌든 이런 계기로, 평소에 잘 안들어오던 시인이나 책과 잠시 만나 보는 것도 환기에 도움이 되겠지요.
찬찬히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로드무비님도요...)

hanicare 2004-09-23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시집 가장 황량한 시절의 일용할 양식이었지요.(그래서 진작 읽고 나서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 오스트리아의 어떤 남자말마따나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는 게 맞나봐요. 그 작자의 얇은 책을 읽느라 회백질이 쪼그라드는 줄 알았던 기억끝에 딱 그 한마디만 생각나는군요. 기형도 시인처럼)번역은 -_-; 앤디 듀프레인님의 서재에서 퍼온거랍니다. 게으른데다 싫증을 잘 내고 천학비재한 터(결코 엄살이나 겸손이 아닙니다.)라 번역은 엄두도 못내고 있다지요. 주문했던 동화책이 가득 와서 지금 무척 아동스럽게 즐거운 모드랍니다.어릴 때 딱다구리 그레이트 북스에서 본 걸로 기억되는 메리포핀스. 지금 읽으니 왜 더 재미있는지.귀절귀절에 숨은 야유와 익살은 씀바귀김치처럼 어른이라야 더 맛있을 거 같네요.저는 푸른 사과를 무척 좋아한답니다.언젠가 이젠 지겨워진 잡지 페이퍼에서 푸른 사과만 가득한 표지를 낸 적이 있었어요. 그 사진이 내내 그리웠는데 라일락와인님의 서재이미지에 한 알 들어 있네요.미숙하고 서투른 맛이 나 자신하고 좀 닮은 듯 하여 좋아하지요. 아 참 이자벨 아자니의 모습을 좋아해서 자주 걸게 됩니다. 저렇게 예뻤다면 인생관리능력이 아동수준인 나로서는 사는 게 견딜 수 없이 피곤했을 듯 합니다. 모자라는 게 많아서 지금은 편안합니다. 이렇게 구멍투성이 현무암같은 사람에게도 햇빛과 토실한 알밤이 가득하니 기쁠 따름입니다.즐거운 추석 보내시길. 미리 인사드립니다.요즘 읽을 책이 즐비해서 알라딘은 좀 멀어지는군요.내내 가을과 겨울 약간의 봄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에레혼 2004-09-23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먼저 받은 추석 인사네요, 하니케어님...
아, 그러니까 벌써 시즌 기분 나네요, 분주함 가운데 밀려드는 쓸쓸함, 괜히 어깨 무거워지고 우울해지는...... 전 부치는 기름 냄새에 머리가 몽롱해지는......

이자벨 아자니와 푸른 사과의 이미지... 가슴 한켠 밭뙈기에 심어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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