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과 되새김질, 역사적 의미에도 어떤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에 이르면 인간이든 민족이든 문화든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해를 입고 마침내 파멸한다.

 - 니체

 

 * * *

 

어느날 갑자기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핫이슈로 떠오른 한일 간의 갈등을 통해 새롭고도 뚜렷하게 목도하는 현상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역사의 과잉'이 아닐까 싶다. 과거의 역사가 현재와 미래의 삶까지도 송두리째 삼키는 게 과연 얼마만큼 가치있는 일인지를 우리는 너무 쉽게 불문에 부치고 있는 건 아닌가.

 

이번 사태의 원인 제공 책임은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도 간악무도한 '아베 일당'에게 따지고 묻는 게 맞다. 그는 태생적으로 우리나라를 업신여기는 고약한 피를 지닌 극우 이데올로기로 찌든 인물이다. 오늘날 일본 사회에 크게 확산된 혐한 분위기마저도 아베 정권 출범 이후에 두드러졌다는 분석도 있는 걸 보면 그가 우리나라에 끼친 해악이 얼마만큼 작위적인 것인지를 새삼 돌아볼 필요도 있다. 또한 그가 자신의 태생적인 성향과 정치적인 야심 때문에 한국 때리기에 유난히 골몰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 이토록 치졸하고도 무모한 도발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터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일본의 경제 보복을 둘러싼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이 '이러다간 우발적인 무력 충돌까지도 우려된다'는 식으로까지 무분별하게 확산된 건 청와대와 집권 여당의 방심과 과잉 대응이 단단히 한 몫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제는 반복하기도 지겨운 레토릭이 되어 버린 죽창가와 의병 운동과 국채 보상 운동 언급부터 과잉이었다. 그런 말들을 재빨리 꺼내 든 사람들이야말로 이번 사태에 대해 최일선을 떠맡은 고위급 핵심 당사자들이었다. 그 정도의 수사로도 부족했는지 곧바로 성웅 이순신의 12척의 배가 소환되었고 신흥무관학교와 헤이그 밀사 파견까지도 뉴스에 오르내렸다. 기야 한미일 군사동맹의 중요한 고리 가운데 하나인 지소미아 파기가 검토 단계를 넘어 실행 압박에까지 이르렀고, 올림픽 보이콧 문제와 도쿄 여행 금지 구역 선포가 언급되는가 싶더니, 마침내 'No Japan' 깃발이 서울 한복판을 삽시간에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도대체 이토록 무분별한 '과잉 대응'이 어디에 있는가.

 

이토록 무책임하고도 자극적인 대응이야말로 우리의 지혜 부족과 경박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소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죽창가가 지배계층의 학정을 견디다 못해 맨몸으로 저항하다가 끝내 맥없이 쓰러지고 만 민초들의 최후의 저항을 상징하고, 의병 운동조차 국가적인 대재앙을 미리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조정과 관군 부족 때문에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초들의 항일 구국 운동이었음을 왜 모르는가. 신흥무관학교나 헤이그 밀사 파견 또한 억울하게 나라를 빼앗긴 처지에서 조국을 구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나 간절한 노력을 상징하는 아픈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이토록 아픈 과거의 역사가 왜 하필 이런 시점에 빠짐없이 다시 불려나와야 하는가. 국민들의 삶이 정부의 거듭된 외교적 무능과 경제 실정 등으로 하루하루 나락에 빠져드는 데도 정부에서는 스스로 수습할 능력이나 대책이 없어 애꿎은 국민들을 '한일 경제 전쟁의 최일선'으로 가열차게 내모는 듯한 느낌을 주는 건 왜인가. 우리나라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이 단 이틀 만에 75조원이나 사라지고, 원화의 가치가 수년래 최저치로 급격하게 추락한 이유 가운데 하나를 '일본의 경제 침공'에 놀라 허둥대며 다급하게 죽창가와 의병과 이순신의 12척부터 호출한 무능한 지배층의 언급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다면 너무 지나친 억측일까.

 

정말로 능력 있고 지혜로운 정부라면 '일본의 경제 침략'을 맞아 황급하게 '의병'부터 찾을 게 아니라 튼튼한 관군부터 내세워 수비를 단단히 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헤이그 밀사 파견을 도모할 게 아니라 일본의 불의와 우리나라의 정당성을 세계 만방에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공식 외교 특사들을 내세워야 마땅한 게 아닌가. 지금의 우리나라가 나라마저 빼앗겼던 100년 전의 그토록 나약하고 가련한 나라가 아니라면 말이다.

 

지소미아 파기도 그렇다. 두 나라 사이의 과거사 갈등 때문에 일본이 치졸한 경제 보복으로 나온 게 이번 사태의 본질이다. 우리가 일본의 부당한 조치에 격렬하게 항의하고 상대를 마음껏 비난할 수 있는 토대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과거사 갈등의 경제 보복 무기화에 맞대응해 우리가 경제 문제를 안보 문제로까지 확대시킨다면 국제적인 '아베 비난 여론'이 순식간에 흔들릴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가뜩이나 한미일 안보동맹이 크게 흔들리는 마당에, 한일 사이의 과거사 갈등과 경제 보복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안보 협정까지 끌여들여 우리의 유일한 군사동맹국인 미국까지 자극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일본에 보복하기 위해서라면 미국과의 관계는 이럴 때 적당히 훼손시켜도 좋단 말인가. 이런 일이야말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서울 한복판에 내걸린 '일본 보이콧 깃발'은 지금 생각해도 화가 치민다.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에 켜켜이 쌓인 과거의 앙금들 때문에 이 사단이 났는데, 정부와 여당이든 지자체든 국민이든 어느 누구라도 하루 빨리 이 갈등을 슬기롭게 치유하고 다시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모두에게 '최선'이 아닌가. 모든 정책 목표는 마땅히 거기에 맞춰져야 올바른 일 아닌가. 도대체 중구청장은 '무엇을 위해' 그런 깃발을 서울시민들의 세금으로 만들어 우득부득 내걸어야 했는가. 집권당의 '반일 캠페인'에 더욱 큰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반일 무드가 나부끼는 깃발 덕분에 더욱 드높아지면 문제 해결이 더욱 앞당겨지는가. 하루하루 가슴을 졸이며 생업에 몰두하는 서울 시민들과 대한민국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인가. 일본의 지자체 공무원들은 급감한 방일 관광객 때문에 항공 노선 감축에 나선 국내 항공사까지 직접 찾아와서 '노선 유지'를 간곡히 당부하는 마당에, 어떻게 중구청장의 머리 속에는 그런 상식적인 생각은 떠오르지 않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반일 무드 고취'에만 그토록 정신이 팔려 있는가. 이런 마인드라면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들의 입국부터 미리 막아야 옳은 일 아닌가.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위해 일본과 경제 전쟁을 벌이고 있단 말인가.

 

도쿄를 여행 금지 구역으로 검토해야 된다는 주장이나 올림픽 보이콧을 심각하게 검토해야 옳다는 주장 앞에서는 할 말을 잃을 지경이다. 어떻게 꾀를 내도 죽을 꾀만 낸다는 말인가. '일본 경제 침략 특별 대책 위원회'라는 곳에서는 마치 한일 사이의 온갖 잠재된 갈등 요소를 이번 기회에 최대한으로 부각시키고 극대화하는 게 지상 최대의 목표인 것처럼 활동하는 듯하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도시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여행객만이 아님은 새삼 물어볼 필요가 없다. 정말로 도쿄의 방사능 오염이 문제가 된다면 우리가 미리 나설 필요조차도 없다. 다른 선진국들이 어련히 알아서 그런 문제점을 제기하고 조치를 취할까. 때는 이때다, 마침 잘 됐다 하고 우리나라가 떡 하니 도쿄를 여행금지구역으로 정말로(!) 설정한다고 가정해 보자. 세상 사람들이 도대체 우리를 어떻게 보겠는가. 멀쩡한 이웃나라의 수도까지도 자국 국민들의 여행을 통째로 금지시키는 나라가 등장했다고 얼마나 비웃겠는가. 설마, 이번 참에 정부에서 '도쿄 여행 금지 조치'를 내리게 된다면 눈치 빠르고 똑똑한 우리 국민들은 미리 알아서 '도쿄'뿐만 아니라 일본까지도 여행금지 국가로 찰떡같이 알아 듣고 거국적으로 일본 여행을 기피할 줄 기대했는가. 

 

엊그제는 우리가 그토록 가슴 절절히 불러 왔던 애국가마저 도마 위에 올랐다고 한다. 애국가를 작곡한 사람이 친일인명사전에까지 오른 인물이니 전혀 근거없는 문제 제기는 아닌 셈이다. 그 문제는 과거에도 이미 충분히 다뤄졌고, 가슴 절절한 애국심을 고취시킨 애국가의 기나긴 역사에 비춰봐서도 그걸 새삼스럽게 부정할 까닭이 없다는 쪽으로 정리된 터였다. 그런데도 왜 하필 이럴 때 애국가가 또다시 문제인가. 아무리 일본과의 싸움이 중요하다고 쳐도 수천만 동포들에게 그토록 가슴 뜨거운 애국심을 불러일으킨 애국가마저 '친일'이라는 이름 앞에 간단히 내동댕이쳐져야 한다면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는 도대체 무엇이고 버려야 할 하찮은 가치란 무엇이란 말인가. 친일이 그토록 문제가 된다면 같은 우리 민족에게 탱크와 총칼로 무참히 짓밟고 수백 만의 생명까지 앗아간 북한에게는 왜 그토록 너그러운가. 일제의 강제 징용이나 위안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온갖 최악의 만행을 저지르고 전국토를 잿더미로 바꾼 걸로도 모자라 아직까지도 철책 너머로 무시무시한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사일을 연거푸 쏘아대는 북한을 무턱대고 감싸고 옹호하는 태도를 취하는 '친북파'들은 도대체 어떤 형벌로 다스려야 마땅하다는 말인가.

 

애국가를 지은 작곡가의 친일 행위 정도는 너그럽게 용서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는 거기에 마땅한 죗값을 치러야 마땅하고, 한번 친일 행위를 했으면 영원히 그에 상승하는 대접을 받아도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그렇더라도 그 사람이 가슴 절절한 애국심으로 애써 지어 만들었고 지금까지 물경 수억 명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그토록 눈물겹게 불러온 애국가마저 부정하지는 말자는 얘기다. 무분별하게 과거에 매몰되고 집착하고 떠받드는 자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친일이 그토록 중차대한 흠결이라면 친일 행위에 조금이라도 가담했던 조상을 둔 후손들은 지금이라도 모든 공직에서 배제되어야 마땅하고, 피선거권까지 박탈당해야 옳은 일 아닌가. 또한 독립 유공자나 전쟁 유공자의 후손들에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혜택이 부여되어야 마땅한 일 아닌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다가 목숨을 잃은 전사들의 고귀한 희생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제발 정신들을 좀 차리자. 과거의 역사는 영광스러운 것도 있을 수 있고, 부끄럽거나 치욕스러운 역사도 있을 수 있다. 영광스러운 역사는 그에 마땅한 만큼 기리면 된다. 부끄럽거나 치욕스러운 역사는 그에 마땅한 만큼 반성하고 훗날을 도모하는 바탕으로 삼으면 족하다. 그러나 끊임없이 과거사에 집착하고 매달릴 필요는 없다. 그럴수록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그만큼 침식당하고 억눌리기 때문이다. '역사의 과잉'은 어쩌면 철학의 빈곤으로부터 느닷없이 끌려나온 부끄러운 사생아일지도 모르겠다. 현재와 미래의 삶이 중요하다면 '역사의 과잉'은 그만큼 절제될 필요가 있다.

 

반일 열기가 한여름 폭염만큼이나 뜨거운 이 때 이토록 고리타분한 글을 쓰는 일이야말로 '반시대적 고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거가 지닌 무게를 그에 합당한 만큼 지혜롭게 다루는 일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침식하지 않도록 슬기롭게 다루는 문제에서 니체만큼 깊게 천착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 * *

 

 

가장 작은 행복에서도, 또 가장 큰 행복에서도 행복을 행복으로 만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다. 잊을 수 있다는 것, 또는 학문적으로 표현한다면, 자신이 지속되는 동안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순간의 문턱에서 모든 과거를 잊으면서 정착할 수 없는 사람은, 또 승리의 여신처럼 현기증이나 두려움 없이 한 지점에 서 있을 수 없는 사름은 행복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더 나쁜 것은, 그가 결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한번 생각해 보라. 망각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인간이 어디에서나 생성만을 봐야 할 형벌을 받았다면, 그런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밎지 못할 것이고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할 것이며, 모든 것이 움직이는 점으로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만을 볼 것이며 이 생성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진정한 제자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행위에는 망각이 내재한다. 모든 유기체의 생명에는 빛뿐만 아니라 어두움도 속하듯이. 철저하게 역사적으로 느끼려는 사람은 잠을 자지 못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이나 되새김질로만, 반복되는 되새김질로만 살아가야 하는 동물과 비슷할 것이다. 다시 말해, 동물이 보여주듯이 기억 없이 살아가는 것,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또는 좀더 단순하게 내 주제를 설명한다면, 불면과 되새김질, 역사적 의미에도 어떤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에 이르면 인간이든 민족이든 문화든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해를 입고 마침내 파멸한다.(292∼293쪽)

 

 - 니체, 『반역사적 고찰 』 중에서

 

 

 * * *

 

 

과거의 것이 현재의 것의 무덤을 파지 않으려면, 과거의 것이 잊혀야 할 한도와 한계를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인간, 한 민족과 한 문화의 조형력이 얼마나 큰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조형력이란 스스로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과거의 것과 낯선 것을 변형시켜 자기 것으로 만들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한 것을 대체하고 부서진 형식을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이 힘을 거의 소유하고 있지 않아 단 한 번의 체험으로도, 단 하나의 고통으로도, 종종 단 하나의 연약한 불의로도, 단 하나의 조그만 성처로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피를 흘리는 사람이 있다. 다른 한편 가장 거칠고 끔찍한 삶의 재난이나 자신의 악한 행위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아, 그 와중이나 그 직후에도 평상시의 건강과 일종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한 인간의 가장 깊은 천성의 뿌리가 강할수록, 그가 과거로부터 습득하거나 갈취하는 것은 더 많아진다.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천성이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특성은 역사적 의미가 너무 무성해서 유해한 영향을 끼질 수 있는 한계가 그 천성에는 없다는 점이다. 이 천성은 자기 것이든 가장 낯선 것이든 과거의 모든 것을 끌어당기고 집어삼켜서 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그런 천성은 정복하지 못하는 것을 망각할 줄 안다. 정복하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지평은 닫혀 완전하며, 동일한 인간의 저편에 열정, 학습과 목표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단지 지평 안에서만 건강하고 강하고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 법칙이다. 하나의 지평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 능력이 없거나, 낯선 지평 안에 자신의 관점을 포함시키기에는 너무 이기적이라면, 그것은 지치거나 급격한 몰락으로 시들어갈 것이다. 명랑함, 양심, 즐거운 행위, 다가올 것에 대한 신뢰 ㅡ 이 모든 것은, 개인이나 민족에게서, 한눈에 개괄할 수 있는 것과 밝은 것을 밝힐 수 없는 것과 어두운 것으로부터 구분하는 하나의 선이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또한 우리가 제때에 기억하는 것처럼 제때에 잊을 줄 아느냐, 우리가 힘찬 본능을 가지고 언제 역사적으로 느껴야 하고 언제 비역사적으로 느껴야 할지 감지해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이것이 독자들에게 한번 고찰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명제이다. 즉 비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은 한 개인이나 한 민족 그리고 한 문화의 건강에 똑같이 필요하다.(293∼294쪽)

 

 - 니체, 『반역사적 고찰 』 중에서 

 

 

 * * *

 

이제 여기서 각자는 우선 다음과 같은 관찰을 제시할 것이다. 한 개인이 가진 역사적 지식과 감각은 아주 제한적이고 그의 지평은 알프스 골짜기의 주민처럼 매우 협소하며, 그는 얼마든지 부당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자신이 모든 경험에서 최초의 경험자라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 ㅡ 모든 부당함과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고 있으며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반면 그의 바로 옆에는 그보다 훨씬 더 정의롭고 학식 있는 사람이 병약하고 쇠약한 상태로 있다. 그것은 그의 지평에 보이는 선들이 불안하게 항상 이동하기 때문이며, 그는 훨씬 더 부드러운 자신의 정의와 진리의 그물망에서 빠져나와 억센 의지와 욕망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반면 우리는 동물을 본다. 동물은 완전히 비역사적이며 거의 하나의 점과 같은 지평 속에 산다. 그러나 동물은 적어도 권태와 왜곡이 없는 생활 속에서 살아간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느 정도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더 중요하고 더 원초적인 능력으로 간주해야만 할 것이다. 즉 올바르고 건강하고 위대한 것,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 자라날 수 있는 토대가 그 안에 놓여 있는 한 그렇다. 비역사적인 것은 무언가를 감싸는 분위기와 비슷하다. 그 안에서 삶은 스스로 생성되고, 이 분위기의 파괴와 더불어 다시 사라진다. 인간이 사유하고 숙고하고 비교하고 분리하고 결합하면서 저 비역사적인 요소를 제한함으로써, 그리고 삶을 위해 과거를 사용하고 이미 일어난 것에서 다시 역사를 만드는 힘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된다. 그러나 역사의 과잉 속에서 인간은 다시 인간이기를 중지한다. 비역사적인 것의 껍질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며 감히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사실이다. 인간이 먼저 비역사적인 것의 안개층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할 수 있는 행동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제 비유는 제쳐두고 예를 들어 설명을 해보자. 여자나 위대한 사상에 대한 격렬한 열정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남자를 한번 상상해보라. 그의 세계는 그에게 얼마나 달라졌는가! 뒤를 돌아보면 그는 자신이 맹목적이라 느끼고, 옆의 낯선 사람의 말을 들어도 그는 그저 둔탁하고 무의미한 음향만을 지각할 뿐이다. 그가 지각할 수 있다 한다 해도, 마치 모든 감각으로 동시에 포착하듯이 가까이 만질 수 있는 것처럼 지각하지는 못하며, 화려한 색채를 느끼지도 못하고, 미세한 음 하나하나까지 선명하게 지각하지는 못한다. 모든 가치 평가는 변했고, 가치가 없어졌다. 그는 이제 느낄 수조차 없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것을 이제 소중히 여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문한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낯선 말과 낯선 의견을 지닌 바보였는가 하고. 그는 자신의 기억이 지치지 않고 하나의 원을 돌지만 너무 약하고 너무 피곤해 이 원 밖으로 한 걸음도 뛰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당한 상태이며, 과거에 대해서는 편협하고 배은망덕하며, 위험에 대해 맹목적이고 경고에 귀를 막는 것이며, 밤과 망각의 죽은 바다에서 생동하는 작은 소용돌이다. 그러나 이 상태는 ㅡ 철저하게 비역사적이고 반역사적이지만 ㅡ 부당한 행위뿐만 아니라 모든 정당한 행위의 모태이기도 하다. 그 정도로 비역사적인 상태에서 먼저 갈망하고 추구하지 않고는 어떤 예술가도 자신의 그림을, 어떤 장군도 승리를, 어떤 민족도 자유를 얻을 수 없다. 행위자는, 괴테의 표현에 따르면, 양심이 없는데, 마찬가지로 그는 아는 것도 없다. 그는 하나를 행하기 위해 대부분의 것을 망각하며, 그는 자신의 배후에 있는 것에 대해 불의를 행한다. 그가 아는 유일한 권리는 이제 생겨나야 할 것의 권리다. 그렇게 모든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를 사랑받아 마땅한 정도보다 훨씬 더 사랑한다. 최고의 행위는 그처럼 사랑의 충만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 행위의 가치가 다른 면에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하더라도 이 사랑에 비할 바가 못 된다.(294∼296쪽)

 

 - 니체, 『반역사적 고찰 』 중에서  

 

 * * *

 

어떤 사람이 모든 위대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는 이런 비역사적 분위기를 수많은 사례들 속에서 건조시켜서 나중에 흡입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아마 인식하는 존재로서 초역사적인 관점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니부어가 언젠가 역사적 고찰의 가능한 결과로서 이런 사람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 적이 있다. "명철하고 면밀하게 이해한다면 역사는 적어도 한 가지 일에 쓸모가 있다. 우리 인류가 배출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인물의 경우에도, 우연히 그들이 눈이 형식을 받아들여 이 눈을 통해 보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 볼 것을 강요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는 것이다. 강제적인 것은 그들의 의식의 강도가 유난히 크기 때문이다. 이를 확실하게 그리고 많은 경우 잘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주어진 형태에 최고의 열정을 불어넣는 하나의 강력한 정신에 굴복하고 만다." 그런 관점을 초역사적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것을 가진 사람은 역사와 함께 살아가고 역사와 협력하려는 유혹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았다면 그는 모든 사건의 유일한 조건, 즉 행위자의 영혼 속에 있는 저 맹목성과 부당성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런 관점은 초역사적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모든 사건의 유일한 조건, 즉 행위자의 영혼 속에 있는 저 맹목성과 부당성을 인식함으로써 더 살고 싶은 유혹과 역사에 함께 참여하려는 유혹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를 지나치게 진지하게 생각하는 병으로부터도 치유되었을 것이다. 그는 어떤 인간에게나 어떤 체험에서, 그리스인에게서든 터키인에게서든, 또는 1세기나 19세기의 어느 시간에서든,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자신의 친지들에게 그들이 지난 10년 또는 20년을 다시 한번 살고 싶기를 원하는지 묻는 사람은 그들 중 누가 저 초역사적 관점의 모법이 되는지를 쉽게 인식할 것이다. 그들이 모두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있지만, 왜 아닌지에 대한 이유를 각기 다르게 말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 20년은 더 좋아질 거야"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으로 근거를 댈 것이다. 그들은 데이비드 흄이 이렇게 조롱했던 사람들이다.

 

최초의 힘찬 흐름이 줄 수 없었던 것을

인생의 찌꺼기로부터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

 

(296∼298쪽)

 

 - 니체, 『반역사적 고찰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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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는 그 목표에 어떻게 도달하는가? 라고 너희는 물을 것이다. 델포이 신전의 신은 너희가 저 목표를 향한 유랑을 처음 시작할 때 너희에게 신탁을 전한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그것은 어려운 신탁이다. 저 신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듯이 "감추지도 선포하지도 않고, 단지 가리킬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리스인들도 몇 세기 동안 우리가 처해 있는 위험에, 다시 말해 낯선 것과 과거의 것, "역사"의 홍수에 몰락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남과 접촉하지 않는 것을 자랑하며 산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들의 "교양"은 오히려 오랫동안 셈족과 바빌론, 리디아, 이집트의 형식과 개념들이 뒤섞인 카오스였으며, 그들의 종교는 전 오리엔트 신들의 투쟁이었다. 이는 지금 "독일의 교양"과 종교가 모든 외국들과 전체의 전(前) 시대들이 그 안에서 투쟁을 벌이는 카오스와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문화는 저 아폴론의 신탁 덕분에 집합체는 아니었다. 그리스인은 차차 카오스를 조작하는 법을 배웠다. 즉 그들은 델포이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에게 되돌아가,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자각하고 거짓-욕구를 사멸시킴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자신을 소유했다. 그들은 전체 오리엔트의 유산을 잔뜩 짊어진 상속인이나 아류로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과의 힘든 투쟁 끝에 저 신탁을 실천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상속받은 유산을 불리고 키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며 모든 미래의 문화 민족의 선구자며 모범이 되었다.(387∼388쪽)

 

 - 니체, 『반역사적 고찰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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