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과 되새김질, 역사적 의미에도 어떤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에 이르면 인간이든 민족이든 문화든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해를 입고 마침내 파멸한다.
-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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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핫이슈로 떠오른 한일 간의 갈등을 통해 새롭고도 뚜렷하게 목도하는 현상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역사의 과잉'이 아닐까 싶다. 과거의 역사가 현재와 미래의 삶까지도 송두리째 삼키는 게 과연 얼마만큼 가치있는 일인지를 우리는 너무 쉽게 불문에 부치고 있는 건 아닌가.
이번 사태의 원인 제공 책임은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도 간악무도한 '아베 일당'에게 따지고 묻는 게 맞다. 그는 태생적으로 우리나라를 업신여기는 고약한 피를 지닌 극우 이데올로기로 찌든 인물이다. 오늘날 일본 사회에 크게 확산된 혐한 분위기마저도 아베 정권 출범 이후에 두드러졌다는 분석도 있는 걸 보면 그가 우리나라에 끼친 해악이 얼마만큼 작위적인 것인지를 새삼 돌아볼 필요도 있다. 또한 그가 자신의 태생적인 성향과 정치적인 야심 때문에 한국 때리기에 유난히 골몰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 이토록 치졸하고도 무모한 도발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터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일본의 경제 보복을 둘러싼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이 '이러다간 우발적인 무력 충돌까지도 우려된다'는 식으로까지 무분별하게 확산된 건 청와대와 집권 여당의 방심과 과잉 대응이 단단히 한 몫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제는 반복하기도 지겨운 레토릭이 되어 버린 죽창가와 의병 운동과 국채 보상 운동 언급부터 과잉이었다. 그런 말들을 재빨리 꺼내 든 사람들이야말로 이번 사태에 대해 최일선을 떠맡은 고위급 핵심 당사자들이었다. 그 정도의 수사로도 부족했는지 곧바로 성웅 이순신의 12척의 배가 소환되었고 신흥무관학교와 헤이그 밀사 파견까지도 뉴스에 오르내렸다. 급기야 한미일 군사동맹의 중요한 고리 가운데 하나인 지소미아 파기가 검토 단계를 넘어 실행 압박에까지 이르렀고, 올림픽 보이콧 문제와 도쿄 여행 금지 구역 선포가 언급되는가 싶더니, 마침내 'No Japan' 깃발이 서울 한복판을 삽시간에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도대체 이토록 무분별한 '과잉 대응'이 어디에 있는가.
이토록 무책임하고도 자극적인 대응이야말로 우리의 지혜 부족과 경박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소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죽창가가 지배계층의 학정을 견디다 못해 맨몸으로 저항하다가 끝내 맥없이 쓰러지고 만 민초들의 최후의 저항을 상징하고, 의병 운동조차 국가적인 대재앙을 미리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조정과 관군 부족 때문에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초들의 항일 구국 운동이었음을 왜 모르는가. 신흥무관학교나 헤이그 밀사 파견 또한 억울하게 나라를 빼앗긴 처지에서 조국을 구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나 간절한 노력을 상징하는 아픈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이토록 아픈 과거의 역사가 왜 하필 이런 시점에 빠짐없이 다시 불려나와야 하는가. 국민들의 삶이 정부의 거듭된 외교적 무능과 경제 실정 등으로 하루하루 나락에 빠져드는 데도 정부에서는 스스로 수습할 능력이나 대책이 없어 애꿎은 국민들을 '한일 경제 전쟁의 최일선'으로 가열차게 내모는 듯한 느낌을 주는 건 왜인가. 우리나라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이 단 이틀 만에 75조원이나 사라지고, 원화의 가치가 수년래 최저치로 급격하게 추락한 이유 가운데 하나를 '일본의 경제 침공'에 놀라 허둥대며 다급하게 죽창가와 의병과 이순신의 12척부터 호출한 무능한 지배층의 언급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다면 너무 지나친 억측일까.
정말로 능력 있고 지혜로운 정부라면 '일본의 경제 침략'을 맞아 황급하게 '의병'부터 찾을 게 아니라 튼튼한 관군부터 내세워 수비를 단단히 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헤이그 밀사 파견을 도모할 게 아니라 일본의 불의와 우리나라의 정당성을 세계 만방에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공식 외교 특사들을 내세워야 마땅한 게 아닌가. 지금의 우리나라가 나라마저 빼앗겼던 100년 전의 그토록 나약하고 가련한 나라가 아니라면 말이다.
지소미아 파기도 그렇다. 두 나라 사이의 과거사 갈등 때문에 일본이 치졸한 경제 보복으로 나온 게 이번 사태의 본질이다. 우리가 일본의 부당한 조치에 격렬하게 항의하고 상대를 마음껏 비난할 수 있는 토대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과거사 갈등의 경제 보복 무기화에 맞대응해 우리가 경제 문제를 안보 문제로까지 확대시킨다면 국제적인 '아베 비난 여론'이 순식간에 흔들릴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가뜩이나 한미일 안보동맹이 크게 흔들리는 마당에, 한일 사이의 과거사 갈등과 경제 보복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안보 협정까지 끌여들여 우리의 유일한 군사동맹국인 미국까지 자극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일본에 보복하기 위해서라면 미국과의 관계는 이럴 때 적당히 훼손시켜도 좋단 말인가. 이런 일이야말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