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사이에 일찌기 경험하지 못한 심각한 갈등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 아베 총리는 주한 일본 대사를 새로운 인물로 교체할 모양인데, 조만간 부임할 신임 대사의 프로필이 새삼 화제다. 그의 장인이 『금각사』를 쓴 미시마 유키오이기 때문이다. 외교관으로서의 신임 대사의 경력 보다는 그의 장인에 얽힌 이야기가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가면의 고백』, 『금각사』, 『우국(憂國)』 등을 쓴 미시마 유키오야말로 세계 대전에서 참패한 이후 극도로 억눌려 있던 '극우 일본'을 갑자기 깨어나게(?) 만든 상징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미시마 유키오가 한국에서 커다란 주목을 끌었던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가 쓴 『우국(憂國)』이라는 유명한 작품이 신경숙 작가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작품 속에 담긴 문장들이 얼마나 매혹적이었으면 한국을 대표하는 여류 작가마저 '자신도 모르게' 그의 글을 고스란히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냈겠는가.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쥐도 새도 모르는 솜씨로 말이다. 명백한 표절조차 순순히 인정하지 못했던 낯부끄러운 여류 작가의 '이중의 과실'을 여기서 새삼 자세히 다룰 필요는 없을 듯하다.

  

미시마 유키오(1925∼1970)는 일본이 점차 팽창하는 제국으로 변모하던 쇼와(재위 1926∼1989)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0대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20대와 30대에 일찌감치 일본 문단의 최정상에 올랐다. 40대에 이미 두 차례나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그는 불과 45세의 한창 나이에 느닷없이(!) 할복 자살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일본 사람들뿐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을 충격 속에 몰아 넣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한 이래 탐미주의의 극치로 평가받는 『금각사』와 같은 걸작을 남긴 천재 작가가 하루 아침에 (아베보다도 더 아베스러운) 꼴사나운 모습으로 '일본 자위대'를 향하여 '깨어나라'고 외치며 장렬하게(!) 할복 자살로 삶을 마감했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느닷없는 행동을 보고 얼마나 놀랐겠는가!

 

 

미시마 유키오의 극단적인 할복 자살에 얽힌 전후 사정들을 들여다 보기 전에, 그의 문학적인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의 갑작스런 우경화와 충격적인 자살이 그만큼 더 충격적으로 느껴질 터이기 때문이다.

 

그는 불세출의 걸작인 『금각사』를 발표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탄탄대로를 질주하는 문학 청년이었다. 그 무렵까지도 그는 31세의 노총각이었다. 금각사를 발표하고 2년이 지난 1958년에 결혼할 때 주례를 맡은 인물은 일본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였다. 그런데 '일본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설국』의 작가로 귀착되기까지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세설의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가 그보다 앞서 세 차례나 노벨상 후보로 올랐다가 아깝게 탈락했기 때문이었다. 다니자키는 1958년에는 펄 벅의 추천으로 노벨상 후보에 처음 올랐고, 1963년과 1964년에는 최종 후보까지 올라 수상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결국 수상에 실패했다.(1964년에는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사르트르에게 밀려났다.) 결국 1965년에 그가 사망하고 나서 1968년에 가와바타에게 노벨상이 돌아가자 "다니자키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노벨문학상은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언급되기에 이르렀다.

 

미시마 유키오는 다니자키가 죽은 지 5년 후인 1970년에 비극적인 자살로 마감했는데, 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탓인지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불과 2년 뒤인 1972년에 가스관을 입에 물고 자살하고 만다. 미시마 유키오는 다니자키가 죽은 해인 1965년과 2년 후인 1967년에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었다. 결국 이들 세 사람의 문학 천재들은 모두 노벨상 후보에 올랐으나 그 가운데 한 사람만 노벨상을 수상했고, 결혼식때 주례와 신랑으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충격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마감했던 것이다.

 

다시 미시마의 죽음으로 돌아가 보자. 그의 갑작스럽고도 충격적인 자살은 당시에도 세간에 널리 알려졌지만, 차제에 다시 한번 들여다볼 필요도 있다. 그의 죽음이 '아베 정권'의 군국주의 부활과도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어렴풋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1966년 민병대 "방패의 모임(楯の會)'를 결성, 우익 정치 활동에 본격 참여했다. 방패회는 무장 투쟁 훈련을 했다. 이는 이후 일본의 신우익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시마는 1968년에 <문화방위론>을 간행했다. 이는 무질서할 정도로 자유롭게 전개되어 왔던 일본 문화의 정신과 '미의 총람자(總攬者)'로서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천황이라는 존재를 물질 문명의 더러움으로부터 구해내고, 또한 공산주의의 손으로부터 지키려면 무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  1969년 우익 운동가 에토 고사부로의 자결에 큰 영향을 받아 1970년 11월 25일 방패의 모임 대원 4명과 함께 자위대 이치가야 주둔지에 '우수 자위대원 표창'을 명목으로 들어가 자위대 동부 방면 총감과 면담하던 중에 가지고 간 일본도로 위협해 인질로 잡은 뒤 부하 8명을 부상하게 했다. 총감의 방 앞 발코니에서 몰려든 기자들을 향해 미일 안보조약 개정, 헌법 개정을 요구, 자위대의 쿠데타를 촉구하는 '이치가야 연설'을 한 뒤 약 5분 후 모리타 마사카쓰와 함께 할복 자살했다. 이 사건은 세간에 큰 충격을 안겼다. (출처 :위키백과)

 

미시마의 자살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대다수의 일본 사람들에게 '시대착오적인 행위'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내면에 끈끈히 흐르는 '침략 본성'이 어떻게 일순간에 모두 사라질 수 있겠는가.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극우 본성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음은 누구라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이윽고 그의 자살 이후에 새로운 우익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그 흐름이 오늘날 아베 총리로 대표되는 자민당 정권에까지 깊숙히 스며있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그러니 미시마의 자살이 어찌 한낱 '극우 사상에 심취된 어느 문학 천재의 기이한 자살'로 간단히 치부될 수 있겠으며, 그의 맏사위가 차제에 신임 주한 일본 대사로 부임하는 일이 어찌 우연으로만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

 

이미 49년 전에 죽은 어느 문학 천재의 기이한 자살을 둘러싸고 오늘날의 우리가 그의 죽음을 너무 과장해서 새삼 돌이켜 보고 예민하게 재해석할 필요는 없다. 또한 그의 죽음보다 14년이나 앞서서 발표된 『금각사』라는 걸작 소설 속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극우 사상의 씨앗들'을 새삼 꼬치꼬치 찾아내 억지로 연결시킬 필요는 더더욱 없을 지도 모른다. 굳이 맹자나 순자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이, 인간에게는 누구한테나 타인을 지배하려는 나쁜 욕망이 내재되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애국심이나 민족주의와 결합하게 되면 더욱 맹렬하게 불타 올라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까지 발전할 개연성은 어느 시대에나 능히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금각사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유명한 건축물이 되었고, 그곳을 찾는 여행객들이 한해 수백 만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이 건축물이 지어진 해가 공교롭게도 1397년이었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된 해보다도 딱 1년이 앞섰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또한 이 소설 속에 미국과 맞서 싸우던 '군국주의 일본'이 자주 등장하고, 금각사가 실제로 '방화범'에 의해 완전히 전소된 때가 6.25 전쟁이 터지고 나서 정확히 7일이 지난 때였고, 작품 속의 주인공이 한국전쟁 때문에 금각사를 불태우려는 결심을 더욱 앞당겼다는 사실마저도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 금각사(출처 : 위키백과)

 

 

6월 25일, 한국에 동란이 발발했다. 세계가 확실히 몰락하고 파멸하리라는 내 예감은 사실이 되었다. 서둘러야 한다.(342쪽)

 

 -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제9장>

 

 

소설 『금각사』와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와 극우주의 아베 정권을 강력하게 이어주는 뚜렷한 연결고리들은 그런 사소한 우연 속에 숨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웃 국가에 대한 악랄한 식민 지배뿐 아니라, 가장 추악한 범죄인 2차 대전 당시의 끔찍한 만행들까지도 뉘우치지 못하고, 도리어 멀쩡한 평화 헌법을 개정하지 못해 저토록 안달하는 아베 정권의 추악함은 어쩌면 '악의 평범성'으로부터 훨씬 더 쉽게 찾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내가 욕망하지만 차지하지 못하고, 행위하지 못하고, 지배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해코지 본성' 또는 '파괴 본성'이 아닐까.

 

알려진 바에 따르면,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사』를 완성한 이후로 죽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에 급속도로 '우경화'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미숙아로 태어난 미시마는 어려서부터 육체적인 열등감에 몹시 시달렸던 탓에 12세까지도 할머니 밑에서 양육되었으며, 또래 소년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내거나, 혹은 조모가 지정해 준 이웃집 여자아이들과 소꿉놀이를 하며 보냈다고 한다. 그런 열등감이 얼마나 지독했겠는가. 그가 마침내 그런 열등감을 극복한 계기가 『금각사』를 연재하는 동안에 병행했던 '육체미 운동'이었다.

 

 

"이러한 열등감을 30년이나 짊어지고 온 것이 무슨 이익이 있었는가를 생각하면, 정말로 어리석게 여겨진다."

 

미시마가 육체미 운동에 열중하여 하루하루 근육이 붙어나가는 동안 『금각사』의 주인공인 미조구치 또한 '말더듬이'이자 '행위 불능자'(그는 대학교에 다니는 건강한 청년이었지만 '동정'을 떼는 데 여러 번 실패한다.)에서 차츰 벗어나 마침내 '미의 화신'인 금각사를 불태우는 대담한 행위를 열망하기에 이른다.

 

과거의 육체적인 열등감으로부터 탈피한 작가 미시마와 금각에 방화하여 행위의 세계로 뛰어든 미조구치는, "일을 하나 끝내고 담배를 한 모금 피우는 사람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이, 살아야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는 마지막 문구에 공감하고 있다. 그렇기에 미시마는 『금각사』에 '개인의 소설'이라는 별칭을 부여했던 것이다.

 

'이면의 테마'에 중점을 두고 『금각사』를 평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고백 소설'이자 '성장 소설'이다. 젊은 시절 특유의 어두운 고뇌와, 그 고뇌를 극복하며 성장하려는 주인공의 필사적인 몸부림이 이 작품의 곳곳에 숨겨져 있다.(401쪽)

 

 -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작품 해설> 불후의 명작 《금각사》의 테마는 무엇인가 

 

 

 소설 『금각사』는 명백히 '고백 소설'이자 '성장 소설'이며, 작가 스스로 밝혔듯이 '개인의 소설'이라는 사실이 새삼 우리에게 크게 부각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금각사』를 읽는 독자가 오늘날 '아베 정권'으로 대표되는 일본 극우파들의 추악한 본성을 소설 속에서 다시 찾을 수 있고, 그러한 재발견이야말로 미시마 유키오가 그토록 치열하게 그려내고자 애썼던 『금각사』 방화범의 행위와 극우파 아베 정권의 폭주를 연결시켜주는 '비밀 통로의 발견'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억측일까.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사 방화범에 얽힌 실화'를 자신의 '고백 소설'로 만들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자료 조사에 매달린 기간만 무려 5년이었다. 그는 방화범의 이야기 속에 자신을 투영시키기 위해 일부러 '수기 소설' 내지 '고백 소설'의 형식을 취했으며, 바로 그 점이 독자들을 강력하게 몰입하도록 만든다.(특정한 대상에 광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끝끝내 그 대상을 파괴하고야 만다는 이야기가 '수기' 형태로 쓰였다는 점에서 소설 『금각사』는 언뜻 『롤리타』를 연상시키키도 한다. 롤리타에 집착한 주인공 험버트의 수기 속에 작가 나보코프의 목소리가 절묘하게 겹쳐져 있다는 점도 서로 닮았다. 『롤리타』는 『금각사』보다 1년 앞선 1955년에 출간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미조구치가 '말더듬이'라는 육체적 결함 때문에 겪는 극심한 열등감은 차츰 '아름다움을 향한 구애의 좌절'로 이어진다. 자신의 이상형이나 마찬가지였던 우이코를 만나러 새벽녘에 골목길에서 숨어 기다렸다가 막상 마주치고 나자 입도 뻥긋 못하고 망신만 당한 게 대표적이다. 그런 좌절들은 나중에 성인이 된 뒤로도 줄곧 이어진다. 대학 동창생인 가시와기가 거듭 여친들을 소개해 주지만 미조구치는 거듭 '행위의 문턱'에서 좌절을 겪는다.

 

가시와기는 나를 인생으로 재촉해주는 친절 또는 악의를 내가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 말한 바와 같다. 중학교 시절에 선배의 단검 칼집에 흠을 냈던 나는, 인생의 밝은 표면에 대한 무자격을 이미 내 자신 위에 명확히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시와기는 뒷면에서 인생에 도달하는 어두운 샛길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친구였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파멸로 돌진하는 듯 보이면서도, 의외의 술수에 능하기에 비열함을 그대로 용기로 바꿔 우리들이 악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시금 순수한 에너지로 환원시키는 일종의 연금술이라 해도 좋았다.(180∼181쪽)

 

 

인식이나 욕구가 행위로 이어지지 못하는 극단적인 좌절감은 마침내 '금각사'로 전이된다. 금각사야말로 어려서부터 그에게 줄곧 '완벽한 미의 화신'이자 '우이코의 물질화된 대상'이었음에도 그는 금각사를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 채 줄곧 바라만 본다. 오매불망 '금각사와의 합일(合一)'을 꿈꾸던 그는 금각사 주지로부터 '후계자' 자격을 박탈당한 일을 계기로 학업마저 포기한 끝에 출분((出奔)하고, 금각사를 불태우기로 마음 먹는다.

 

문득 나는 가시와기가 처음 만났던 날 나에게 한 말이 기억났다. 우리들이 갑자기 잔학해지는 것은 화창한 봄날의 오후, 잘 깎인 잔디밭 위에서 나무 사이로 새어 나온 햇빛이 여기저기 비치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을 때 같은 그러한 순간이라고 했던 그 말이.

……

'금각을 불태워야 한다.'(276∼277쪽)

 

 

"내가 인생에서 최초로 부닥친 난관은 아름다움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라고 회상한 〈나〉는 2차 대전 중의 종말관 속에서 '금각사와 함께 불에 타 죽는 생의 결정적 순간'을 바랬지만 전쟁은 허망한 패망으로 끝나고, 전후의 절망과 고독 속에 살아가야만 한다. 주인공 미조구치의 이런 정신 편력이야말로 '먼 훗날 극우의 상징'이 된 미시마의 정신 편력에 다름 아니다. '극우'란 무엇일까. 결국 '화창한 봄날' 같은 따사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 상태도 포함하는 개념이 아닐까. 그렇다면, 전쟁의 참화와 함께 불타오르는 금각을 보지 못하고 절망과 고독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좌절감이야말로 오늘날 '극우 일본'의 상징이 된 아베의 어두운 내면의 일부가 아닐까.

 

그렇다면, 극우가 극단에 이르러 결국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까지 발전한 게 결국 '금각사에 대한 방화'이고, 자위대에 무단 침입하여 '자위대여, 무장하라'고 외쳤던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자살'이고, 미우나 고우나 이웃으로 서로 공생하며 살아온 이웃나라를 다시금 힘으로 짓밟으려는 '아베의 폭주'가 아닐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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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8-18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시마 유키오란 일본 작가는 70년대에 나온 부도덕 교육강좌란 책에서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시니컬한 그의 독설에 맘에 들어 그에 대해 알아보니 지위대에 무력 봉기를 선동하다 할복 자살을 한 극우 인사란 것을 알게되고 그에 대해 관심을 끈 기억이 나네요ㅡ.ㅡ

oren 2019-08-18 23:40   좋아요 0 | URL
<부도덕 교육강좌>라는 책도 있었군요!
그런데 목차를 찾아 보니 참 꺼림칙한 내용들이 많네요...
아베스러운 치졸한 것들도 많고요...
* * *
남에게 폐를 끼치고 죽어라··28
친구를 배신하라··76
약자를 괴롭혀라··82
자만심을 가져라··89
약속을 지키지 마라··106
“죽여버려!”라고 소리쳐라··112
죄는 남에게 덮어씌워라··129
은혜는 잊어라··159
남의 불행을 기뻐하라··165
악덕을 많이 쌓아라··171
죽은 뒤에 험담하라··215
끝이 나쁘면 모든 게 나쁘다··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