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토의 경우
플루타르코스의 작품들에 대하여...

 


내 생각으로는 행운과 불운은 두 가지 최고의 권력이다.
인간의 예지가 운의 역할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철없는 소리이다.

 -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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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는 로마 최고의 웅변가였다. 그래서 플루타르코스가『대비열전』에서 그의 짝으로 그리스 최고의 웅변가였던 데모스테네스를 붙인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런데 키케로는 데모스테네스와는 달리 뛰어난 웅변술뿐 아니라 수많은 저작을 남겨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가 쓴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마도 『우정에 대하여』와 『노년에 대하여』가 아닐까 싶다. 그 두 작품은 그다지 길지도 않을 뿐더러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한번쯤은 지대한 관심을 갖기 마련인 '우정'과 '노년'에 대하여 다룬 작품이어서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는 고전 작품이기도 하다.


그 두 작품은 키케로의 작품이기는 하나 '키케로의 순수한 창작품'으로 보기에는 약간(?) 애매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두 편의 작품 모두 주된 화자(話者)가 키케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노년에 대하여』부터 살펴보면, 그 작품의 시대 배경은 B.C.150년이고, 대화 장소는 84세가 되는 대(大) 카토의 저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에 더 큰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장로이신 마르쿠스 카토의 입을 빌리기로 했소. 장소는 카토의 저택이오. 그가 노년을 그토록 편안하게 보내는 것을 보고, 라일리우스와 스키피오가 감탄하자 카토가 그 두 사람에게 대답한다는 설정이라오.


『우정에 대하여』는 '설정'이 조금 더 복잡하다. 때는 B.C. 129년, 소(小) 스키피오의 사후 얼마 뒤 라일리우스의 저택에서의 대화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이 화제에 이야기가 미치자, 스카이볼라는 라일리우스가 우정에 대해 했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 것이오. 아프리카누스가 죽은 지 며칠 뒤에 라일리우스가 스카이볼라와 또 한 사람의 사위, 마르쿠스의 아들 가이우스 판니우스에게 해준 얘기라오. 나는 그 논의의 요점을 기억해 두었다가, 이 책에서 내 방식으로 그것을 되살린 것이오. 그들 자신을 화자로서 무대 위에 올린 것은, '나는 말했다'거나, '그는 얘기했다'는 말을 쉴 새 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또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눈앞에서 직접 듣는 것처럼 느끼게 하기 위해서라오.


『우정에 대하여』에서는 작품의 초반부터 한꺼번에 여러 인물들이 갑자기 등장하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하나 낯설지 않은 사람이 없는 독자들로서는 적잖이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간단하게 생각하면 또 의외로 간단하기도 하다. 등장인물들만 요약하자면, '노년'을 다룬 작품은 화자가 '대(大) 카토, 라일리우스, 소(小) 스키피오'라는 것이고, '우정'을 다룬 작품은 화자가 '라일리우스, 스카이볼라, 판니우스'라는 얘기다. 두 작품에 모두 등장하는 화자는 라일리우스가 유일하다. 그는 '노년에 대하여'에서는 자신의 절친인 소(小) 스키피오와 함께 30대의 나이로 등장하지만, 그로부터 21년이 지난 시점의 대화를 담은 '우정에 대하여'에서는 그 자신만 홀로 살아 남아 있었고 대(大) 카토와 친구인 소(小) 스키피오는 어느새 고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다시 요약하자면 '우정에 대하여'는 라일리우스가 고인이 된 자신의 절친인 소(小) 스키피오와의 우정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사위인 두 사람(스카이볼라와 판니우스)에게 '우정에 대해 했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는 설정인 셈이다.


키케로가 쓴 『우정에 대하여』는 그리 긴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국내 번역본(동서문화사판)에는 주석이 무려 142개나 딸려 있다. 그만큼 숱한 인물들과 사연들이 그 작품 속에 담겨 있다는 반증이다. 그러면 과연 그 짧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등장하는 인물은 과연 몇이나 될까, 나는 무엇보다도 갑자기 그게 궁금해서 일부러 좀 세어봤다. 꽤나 많았다. 키케로(42번째), 대(大) 카토(18번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14번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39번째), 가이우스 그라쿠스(40번째), 코리올라누스(12번째), 테미스토클레스(7번째), 피루스(21번째). 대충 세어봐도『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담긴 '천하의 영웅호걸 50명' 가운데 무려 2할에 가까운 인물들이 『우정에 대하여』에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노년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열전'을 가진 인물은 몇이나 될까 살펴봤더니 이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이 작품의 원제가 『대(大) 카토』였던 만큼 우선 대(大) 카토(18번째)가 맨 먼저 등장한다. 이어서 테미스토클레스(7번째), 파비우스 막시무스(10번째), 피루스(21번째), 아리스티데스(17번째), 솔론(5번째), 리산드로스(23번째), 마르켈루스(16번째) 등이 화자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결국 키케로의 짧은 두 작품에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들 가운데 플루타르코스의 『대비 열전』에 자신의 독립된 '전기'를 갖고 있는 인물들만 하더라도 단순 계산으로 '플루타르코스의 영웅들' 전체 가운데 3할이 넘는다는 얘기다.(16/50=0.32)


그런데 이렇게 많은 인물들에 대해서 미리 어느 정도의 사전 지식을 갖고 있거나 책에 딸린 주석을 자세히 살펴보더라도 좀처럼 '명쾌하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인물들의 가계도'도 간혹 있기 마련이다. 그런 집안의 인물들 가운데 나의 관심을 끈 인물은 바로 대(大) 스키피오의 집안으로 입양된 소(小) 스키피오였다. 키케로의 책『노년에 대하여』에 등장했다가 『우정에 대하여』에서는 어느새 고인(故人)이 된 바로 그 인물이다. 이 인물을 둘러싼 가계도는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일부러 그림을 그려봤지만 '큰 그림'은 좀처럼 제대로(?) 그려보지 못했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책마다 '그들의 관계'를 헷갈리기 딱 좋도록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속에서도 그런 '오류'를 발견할 수 있을 지경이다.


다음은 내가 이번에 작심하고 꽤나 고생해서 만들어 본 '소(小) 스키피오'를 둘러싼 가계도이다.




얼핏 보면 꽤나 복잡하게 보여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다. 사실 위의 그림도 실제로는 '과감하게 생략한 인물들'이 매우 많은 형편일 정도로 간략하게 그린 그림이다. 대(大) 스키피오만 하더라도 친부에서 조부로 거슬러 올라가면 금세 집정관을 지낸 인물이 나타나고, 친부의 형님인 백부로 건너가고 또 그 후손인 사촌으로, 또 그 아랫대로 계속 더 내려가면 그라쿠스 형제들과의 '악연'까지도 금방 이어질 정도인데, 그런 인물들은 위의 그림에서 과감히 생략했다는 얘기다.(이보다 더 자세한 가계도는 다음 주소에서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내가 이 그림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위의 그림을 일부러 따로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 http://en.wikipedia.org/wiki/Scipio-Paullus-Gracchus_family_tree )


위의 그림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 보면 '소(小) 스키피오'가 어디쯤 있는지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바로 키케로의 『노년에 대하여』에서 대(大) 카토의 저택에서 '대(大) 카토의 이야기'를 듣던 바로 그 인물이다.

그는 아쉽게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따로 '열전'을 독립적으로 갖고 있지 않다. 플루타르코스가 일부러 그를 제외했을 리는 만무하다. 사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판본'만 하더라도 여럿이고, 판본마다 '영웅들의 구성'도 각양각색인 것도 사실이다. 현재 가장 널리 통용되는 판본에서도 테바이의 영웅 '에파메이논다스'와 '대(大) 스키피오'조차 빠져 있는 게 현실이니, 소(小) 스키피오가 자신의 열전이 없는 데 대해 너무 서운해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영웅전』은 23쌍의 그리스 영웅과 로마 영웅의 전기를 기술하고 있는데, 그중 19쌍은 두 사람의 성격과 업적을 비판적으로 비교하고 있다. 그 밖에 두 명의 로마 군인 황제 갈바(Galba)와 오토(Otho)의 전기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에서 비텔리우스(Vitellius)에 이르기까지 그가 쓴 로마 황제전 중에서 남은 것이며, 아라토스(Aratos)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xerxes)의 전기는 따로 씌어진 또 다른 제왕전 중에서 남은 것을 후세 학자들이 『영웅전』에 포함시킨 것이다. '람프리아스 목록'에는 레욱트라(Leuktra), 만티네이아(Mantineia)에서 스파르테군을 격파한 테바이의 영웅 에파메이논다스(Epameinondas), 제2차 포이니 전쟁(bellum Punicum) 때 카르타고 근처의 자마(Zama)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결정타를 가한 대(大) 스키피오(Scipio Africanus Maior)의 전기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전기는 나중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천병희 역,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수다에 관하여』<옮긴이 서문> 중에서

한편, 소(小) 스키피오가 『노년에 대하여』에서 대(大) 카토의 저택에 갔다고 했는데, 이 그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자신의 누나(아이밀리아)의 시아버지(대 카토) 댁에 갔던 셈이다. 그때는 하필 B.C. 150년이어서 누나의 남편이자 자신의 매형은 이미 죽고 없던 때였다.(대 카토의 아들은 B.C. 152년에 사망했고, 대 카토는 그보다 3년 후인 B.C. 149년에 죽었다. 먼 훗날 로마 공화정 말기에 카이사르의 정적으로 맹활약했던 소 카토는 대 카토의 고손자뻘 되는데, 대 카토가 80대에 뒤늦게 새장가를 들어서 낳은 아들의 증손자가 바로 소 카토였다. 대 카토가 늦장가를 든 일화 또한『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담긴 이야기 가운데 손에 꼽힐 정도로 흥미롭고 널리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어쨌든 위의 그림만 봐서는 소(小) 스키피오를 둘러싼 '가문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활약을 했고, 그들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다양하게 얽혀 있는지를 모두 파악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여기서 다시금 소(小) 스키피오에 대해서 '그림을 다시 풀어서 말로 요약해 보면' 이렇다.

① 그 자신은 '카르타고의 최후의 정복자'이자, '누만티아의 파괴자'로 불릴 만큼 뛰어난 군인이었다.
② 친부(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알렉산드로스 이후 헬라스를 오랫동안 지배했던 '마케도니아 왕국'을 영원히 끝장낸 '피드나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마케도니아의 정복자'였다.
③ 친조부(루키우스 파울루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 장군에 패해 전사했다.
④ 양조부(大스키피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자마 전투' 승리의 주역이었다.
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도 나란히 등장하는 '그라쿠스 형제'는 자신의 아내(샘프로니아)의 남동생들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에게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로마군이 마침내 아프리카 본토로 진군해서 '자마 전투'를 통해 대승을 거두며 '카르타고의 항복'을 이끌어낸 대(大) 스키피오는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① 그는 자신의 아버지(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큰아버지(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를 모두 B.C. 211년에 한니발의 군대와의 전쟁터에서 한꺼번에 잃었으며, 장차 자신의 장인이 될 사람이었던 루키우스 파울루스까지도 B.C. 216년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에 패해 전사당하는 아픔을 지녔다.
②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처남이었고, 호민관으로 유명했던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자신의 사위였다. 소(小) 스키피오는 자신의 병약한 아들(장남)의 양자였다.

이쯤에서 내가 위의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도록 이끌었던『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속의 문장을 잠깐 인용해 보겠다.

칸나이 전투에서 전사한 루키우스 파울루스는 뛰어난 용기와 신중함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는 전쟁을 시작하려는 동료들에게 반대하다가 마지못해 전투에 참여한다. 그러나 전투가 한창 치열할 때 동료들이 자신을 위험한 곳에 내버려 두고 달아나자 혼자서 적과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죽음을 맞는다. 그에게는 아이밀리아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스키피오 장군과 결혼해서 아들을 하나 낳는다. 그가 바로 이제 이야기하려는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이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중에서

플루타르코스의 설명을 그대로 따르자면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아버지는 대(大) 스키피오가 된다. 그리고 자신의 누나인 아이밀리아는 어머니가 되고, 자신의 아버지는 외할아버지가 되고 만다. 아무리 뛰어난 플루타르코스라고 하더라도 이건 뭔가 '설명'이 단단히 잘못 되었다는 걸 누구나 '그림'을 통해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어디를 찾아보더라도 '스키피오 장군과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父子之間'이 되는 '이런 이상한 관계'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문장 때문에 나는 인터넷을 한참 뒤지다가 결국 저 그림을 직접 그리게 되었다. 저 그림을 그리는 동안 키케로가 쓴 『노년에 대하여』와 『우정에 대하여』를 다시 살펴봤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 책의 뒤에 딸린 200쪽에 가까운 <키케로의 생애와 사상>도 다시 한번 살펴봤는데, 거기서도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대(大) 스키피오와의 관계'를 아주 헷갈리기 딱 좋도록 기술해 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누이를 통해 대 스키피오와 동서지간이 되었으나, 대 스키피오의 장남은 병약하여 공무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친구인 파울루스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촌이기도 한 사람과 양자 결연을 맺었다. 그가 아이밀리우스 가문에서 코르넬리우스 가문의 스키피오 집안에 들어간 푸블리우스, 즉 소 스키피오이다. 소 스키피오는 B.C. 185년 무렵에 태어나 B.C. 168에 친아버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를 따라 그리스에서 싸우고, B.C. 151년에는 군단 부관으로서 스페인 원정에 지원하여 큰 공을 세웠다. 젊은 무인으로서 명성이 높아지고 있던 B.C. 150년에 그가 대 카토의 저택을 방문하여 '노년에 대하여'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 책의 설정이다. 명예로운 공직의 사다리를 건너뛰어, 보통 43살로 되어 있는 나이가 되기 전에 집정관에 선출된 것은 그 뒤인 B.C. 147년, 그리고 제3차 포에니 전쟁의 지휘권을 얻어 대 카토의 예언대로 카르타고를 멸망시키는 것은 B.C. 146년이다.(485쪽)

 - 『아우렐리우스 명상록/키케로 인생론』, <키케로의 생애와 사상> 중에서

스키피오 가문과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에 얽힌 복잡한 '집안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더라도 충분하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이야기를 꼭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왜 그토록 훌륭한 자식들을 낳아준 자신의 첫 번째 아내와 이혼했을까? 그에 얽힌 대목을 조금 더 인용해 보자.

아이밀리우스의 첫 번째 아내는 집정관을 지냈던 마소의 딸 파피리아였다. 아이밀리우스는 파피리아와 꽤 오랫동안 살다가 이혼을 하고 말았다. 그녀는 아이밀리우스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이 바로 그 유명한 스키피오와 파비우스 막시무스였다. 파울루스가 무엇 때문에 이혼을 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내와 이혼한 다른 로마인들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어떤 로마인이 이혼한 사람에게 물었다.

"부인이 정숙하지 않아서요? 아름답지 않아서? 아니면 자식을 못 낳았소?"

그러자 이혼한 로마인은 자신의 신발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 신발은 멋지지 않소? 새것 아니오? 그러나 이것이 내 발 어디를 아프게 하는지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단 말이오. 뚜렷한 허물이 있어도 이혼하지 않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남들은 알 수 없는 성격과 습관 차이가 쌓이고 쌓여 이혼하는 부부들도 있는 법이오."

아이밀리우스는 파피리아와 이혼한 뒤 두 번째 아내를 맞았다. 그리고 전처가 낳은 두 아들은 로마에서 가장 귀하고 훌륭한 가문에 양자로 보냈다. 큰아들은 다섯 번이나 집정관을 지냈던 파비우스 막시무스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고, 둘째 아들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집안 양자가 되어 스키피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Ⅰ』,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왕 앞의 페루세우스 왕>

1802년, 장 프랑수아 피에르 페롱, 부다페스트 미술관



한편, 소(小) 스키피오의 친아버지였던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마케도니아의 정복자'로 가장 큰 전공을 세웠는데, 그가 피드나 전투에서 대결했던 마케도니아의 마지막 왕 페루세우스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에 얽힌 이야기도 몹시 흥미롭다. 페르세우스가 얼마나 자기 목숨을 구차하게 애걸복걸했으면 후세 사람들이 저런 그림을 그려 '교훈'을 삼았을까 싶다.(이 이야기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 건 물론 국회의 '탄핵 심판'으로도 모자라 끝내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까지 받겠다고 구차하게 끝끝내 버티는 박대통령 때문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페르세우스는 아이밀리우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아이밀리우스는 큰 불행을 당한 왕의 슬픔을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며 부하들과 함께 그를 맞았다. 페르세우스는 그를 보자 비굴하게 땅에 엎드리더니 그의 다리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 초라한 모습을 본 아이밀리우스는 슬픈 얼굴로 말했다.


"가엾은 분, 운명의 탓으로 돌릴 수도 있을 텐데 어찌 그 기회마저 저버리는 것이오? 이런 모습을 보면 당신의 불행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되고, 지금 처지가 불행하다기보다 지난날 영광이 과분하다 여기게 될 것이오. 당신은 지금 로마의 적답게 행동해야 할 텐데 오히려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보여, 나의 승리까지 가치 없게 만들고 있소. 어떤 괴로움에 처해도 용기 있게 행동하는 사람은 적에게서도 존경을 받는 법이오. 그러나 로마인은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비굴한 사람은 경멸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손을 내밀어 페르세우스를 부축해 일으켜 투베로에게 인도했다. 그리고 가족과 젊은 장군들을 막사로 불렀다. 아이밀리우스는 운명과 세상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간이 행운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자신만만해하거나, 국가와 도시 또는 왕국을 정복했다고 우쭐대는 것이 과연 마땅한 행동일까? 예를 들어 행운이 주는 승리라는 것 또한 불확실한 인간의 일들 가운데 하나이며 영원히 이어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운명의 뒤바뀜을 목격한 군인은 인간의 나역함을 깨닫고 그 무엇도 영원하거나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우리가 어떻게 자만할 수 있겠는가? 남을 정복하고 나면 운명이 매우 두려운 존재임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는 법이네. 만물이 얼마나 빨리 변하며 저마다 운명이 돌고 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가장 기쁜 순간에도 슬퍼지기 마련이네. 최고의 권세를 자랑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가 한 시간 만에 짓밟히는 것을 보았을 때, 또 한때 수천 수만 병사들 호위를 받던 왕이 어느새 적으로부터 양식을 받아먹는 처지가 된 것을 봤을 때 우리라고 해서 이 권력을 영원토록 누리리라 자신할 수 있을까? 그러니 헛된 자만과 어리석은 자부심을 버리고 겸손한 태도로 미래를 대비하자. 신께서 우리의 행운에 반해 내리실지도 모르는 것에 늘 준비하도록 하자."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Ⅰ』,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페르세우스 왕은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 다운 떳떳한 모습이라곤 도무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으리만치 비굴한 자세로 끝끝내 구차한 목숨을 계속 이어간 끝에 기어이 로마까지 끌려갔다. 그리고 거기서 '사흘에 걸쳐 이어진 개선식'에 자신까지 덧보태 장식하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자신이 빼앗긴 엄청난 전리품과 나이어린 왕자 둘과 공주 하나와 함께. 다 자업자득인 셈이었다.


페르세우스는 행렬이 시작되기 전에 아이밀리우스에게 사람을 보내, 제발 자신을 행렬에 내보내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아이밀리우스는 페르세우스의 비겁한 태도와 목숨에 대한 애착을 비웃으며 대답했다.


"선택은 언제나 그의 손에 있었으니, 지금이라도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


치욕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겁이 많은 페르세우스는 그럴 용기조차 없었다. 비겁한 그는 마침내 전리품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Ⅰ』,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이야기가 한참이나 길어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태고 싶은 이야기는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두 번째 아내로부터 얻은 두 아들 이야기'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내가 그렸던 저 위의 그림에서도 빼놓지 않았다.

아이밀리우스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처음 아내에게서 얻은 두 아들은 저마다 스키피오와 파비우스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 그리고 두 번째 부인에게서 낳은 두 아들은 아이밀리우스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아이가 개선식을 올리기 닷새 전에 열네 살 나이로 죽었고, 열두 살인 작은아이도 개선식이 끝난 지 사흘 뒤에 죽었다. 로마 사람들은 가혹한 운명의 섭리에 몸서리를 치며 그의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운명의 신은 기쁨에 넘친 이 집안에 뛰어들어, 승리와 개선의 노래 속에 눈물과 비애를 섞어놓았다.

그러나 아이밀리우스는 용기란 마케도니아군을 쳐부수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불행을 견디는 데도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불행보다는 행운을 더 많이 가졌다고 생각해, 자기 개인 슬픔을 나라의 영광으로 감추려고 했다. 그는 큰아들 장례를 치른 뒤 곧 개선식을 거행했고, 개선식이 끝난 다음 또 작은아들이 죽자 시민들을 모아놓고 연설했다. 그는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의 불행을 함께 슬퍼해주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예전부터 인간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믿을 수 없고 변덕스러운 운명의 여신만은 언제나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신이 부드러운 바람처럼 순조롭게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을 보고, 곧 불운한 일이 닥치거나 처지가 뒤바뀔 것임을 미리 짐작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나는 브룬디시움을 떠난 지 하루 만에 이오니아 해를 건너 코르키라에 도착했고, 닷새 만에 델포이에서 제사를 드렸으며, 다시 닷새 만에 마케도니아에 도착했소. 그리고 제사를 지낸 다음 곧 전투를 시작해 겨우 보름 만에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었소. 나는 이토록 큰 행운이 오래 이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소. 모든 일이 내게만 유리하게 돌아가고 적의 위협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오. 내 운명이 곧 뒤바뀌리라 걱정하기 시작한 것은, 적의 대군을 무찌르고 전리품들과 함께 왕까지 포로로 잡아 배에 태웠을 때였소. 그런데 우리는 모두 무사히 돌아왔고, 온 나라는 기쁨과 찬사로 가득했소. 그러나 운명의 신이 큰 은혜를 베푼 다음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요구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여전히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소. 그리고 기어이 내 집안에 이런 커다란 불행이 생기고 말았소. 개선식을 하는 동안 나는 두 아들을 잇따라 무덤으로 보낸 것이오. 그러나 이제는 더 불행이 찾아올까봐 두려워하지 않소. 오히려 마음이 놓이오. 내 성공에 대한 값은 이제 충분히 치렀으니 말이오. 인간의 운명은 정복자도 희생자와 마찬가지로 하루 앞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여신은 보여주었소. 나에게 정복당한 페르세우스에게는 아직도 자식들이 남아 있지만, 나는 자식들을 모두 잃었다는 것만 다를 뿐이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Ⅰ』,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올 한해 우리나라가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국가적 불행 또한 수백 년 뒤에 태어날 사람들에게도 길이 전해질 만큼 미증유의 대사건으로 역사의 기록에 남을 것임에 틀림없다. 부디 이 사건에 책임이 있는 당사자들이 먼 훗날을 생각해서라도 더이상 뻔뻔스럽고도 구차한 모습을 보이지 말았으면 싶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민의 '촛불의 위대한 승리'까지 초라하게 만드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올 한 해 온 국민이 이만큼 큰 충격과 불행을 겪었으니만큼 이제 앞으로는 당분간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찾아오지 않으리라 믿어도 좋을 듯하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우리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 피눈물이 나도록 비싼 값을 치르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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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구두' 이야기는 『몽테뉴 수상록』에도 나온다. 몽테뉴가 가장 사랑했던 작가가 플루타르코스였던 만큼 몽테뉴의 책 속에서 플루타르코스의 영향을 받은 문장들을 마주치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몽테뉴 수상록』은 사실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을 모방해서 쓴 책이었다.


예쁜 구두에 발 벗겨진 것은 남이 보지 못한다

옛말에 나오듯, 예쁜 구두에 발 벗겨진 것⑵은 남이 보지 못한다는 식으로, 그대 가정의 평화로운 질서를 꾸며 보이느라고 얼마나 힘이 드는가. 아마도 그 살림을 유지하기에 너무 큰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1050쪽)

⑵ 플루타르크의 이야기, 한 로마 인이 예쁜 아이까지 낳아 준 미모의 아내를 내쫓았다고 친구들이 책망하자 "이 구두는 새롭고 예쁘지 않은가? 그러나 그 때문에 내 발이 벗겨진 것을 그대들 중에는 아는 사람이 없네"라고 대답하였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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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예견할 수 없다는 말은 거짓이다. 역사가 예언된 경우는 셀 수 없을 정도다. 만일 미래가 예언에 열려있지 않다면, 그것이 실현되어 과거가 된다 해도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역사가가 뒤돌아선 예언자라는 것은 모든 역사 철학을 요약해주는 관점이다. 역사가는 물론 미래의 일반적인 구조를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구조 자체가 사실은 우리가 과거나 현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시대를 잘 보길 원한다면 멀리서 봐야 한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이 적당할까? 그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거리면 족하다.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Jose Ortega y Gasset)


 * * *


톨스토이는『전쟁과 평화』에서 '역사는 아무도 묻지 않는 것에 대해 대답하는 귀머거리와 같다'는 표현을 쓴 바 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눈 앞의 현실'을 일찌감치 멀리서 내다보고 거기에 딱 들어맞을 듯한 '좋은 선례'를 미리 충분히 남겨놓은 듯한 착각이 들 때가 도대체 한두 번이 아니니 말이다.


고대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서도 대(代)를 이은 독재자가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디오니시우스 1세와 2세였다.

(시라쿠사는 '참주들의 목록'만 하더라도 스무 명에 가까울 정도로 '독재 정치'로 아주 유명한 국가였다.)


시라쿠사는 시칠리아의 동해변에 있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였다. 도시는 기원전 734년 또는 733년 코린토스에서 온 정착자들에의해 건설되었다. 그리고 로마 공화국에 기원전 212년 정복되었고 그 후 시칠리아의 로마 총독 관저 소재지가 되었다. 독립 도시로서의 시라쿠사이 역사의 대부분에서 그것은 참주들의 계승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민주정과 과두정 시기도 있었다.(출처 : 위키백과)


디오니시우스 2세가 두 차례의 전제정치를 끝으로 마침내 자리에서 쫒겨나 코린토스로 옮겨졌을 때의 이야기가 결코 머나먼 고대의 사건처럼 들리지 않아서 여기에 조금 옮겨보고 싶다. 유명한 철학자인 플라톤과 디오게네스까지 등장하는 일화여서 더욱 흥미롭다.


이보다 더 신기한 구경거리는 없었다


디오니시우스는 부하 몇 사람과 함께 보물을 가득 실은 배를 타고 히케테스 눈을 피해 몰래 티몰레온 진영으로 들어왔다. 그는 눈에 띄지 않게 초라한 시민의 옷을 입고 티몰레온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 뒤 배 한 척과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받아서 코린토스로 옮겨졌다. 그는 부강한 나라에서 태어나 신분에 걸맞은 최고급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하지만 부왕이 서거한 뒤, 지금까지 10년 동안 전례 없이 심한 전제군주국을 유지해 왔다. 그리고 디온의 원정 뒤 12년 동안 온갖 고생을 겪었고, 그 가운데서 여러 행운을 만나기도 했다. 그는 그동안 남들에게 입혔던 고통보다 더 큰 벌을 살아오면서 충분히 받았다. 앞날이 창창한 아들들의 죽음을 보아야 했고, 꽃 같은 딸들을 납치당했으며, 누이와 아내가 눈앞에서 병졸들에게 능욕당한 뒤 살해되어 강물에 던져지는 것까지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디오니시우스가 코린토스에 닿자 모든 헬라스 사람은 이 유명한 폭군의 얼굴을 궁금해했다. 그 가운데는 그의 패망을 속 시원히 여기며 그에게 모욕을 퍼부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시민들 대부분은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가 겪은 비극들에 동정심을 조금 느끼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신이, 그 섭리로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약하게 만들었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화려하고 찬란했던 왕이 오늘은 코린토스에서 생선 시장을 기웃거리고, 향수 가게 앞에 앉아서 쉬거나 싸구려 주점에서 물 탄 포도주를 마셨다. 거리 여자들과 하찮은 일로 다투기도 하고, 극단 여가수에게 노래를 가르치느라 음악의 운율과 화성법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그 무렵 사람들에게는 세상 여러 일 가운데 이보다 더 신기한 구경거리는 없었다.(463∼464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Ⅰ』, <티몰레온>



플라톤디오니시우스가 코린토스에 오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곳에서는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시노페 사람 디오게네스는 거리에서 디오니시우스를 만났을 때 이렇게 애매하게 인사했다.


"아니, 디오니시우스. 당신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생활을 하시는군요."


이 말에 디오니시우스도 걸음을 멈추며 인사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제 처지를 동정해 주시는군요."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정색하며 차갑게 말했다.


"동정이라니요? 내 말을 잘못 알아들으셨군요. 그대처럼 인간 같지 않은 사람은 당신 아버지처럼 독재자의 궁전에서 쓸쓸히 늙어 죽어야 마땅한데, 우리와 함께 청빈한 생활을 즐기시니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단 말이오."(465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Ⅰ』, <티몰레온>


이 대목에 이르러 디오게네스가 받아친 저 훌륭한 말에 무릎을 탁 치며 감탄하지 않을 독자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버티면 버틸수록 국가와 국민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 더욱더 불행하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조차 여태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그녀에게는 '청빈한 생활을 즐기는 자유'조차도 영영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 * *

디오니시우스 1세


고대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참주(재위 BC 405~ BC 367). BC 405년 참주가 되어 군사적 ·외교적으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시칠리아섬으로 카르타고 세력이 뻗쳐옴을 막으려고 3번에 걸쳐서 싸움을 벌였다. 대함대를 거느리고 이탈리아 반도로 세력을 뻗쳤으며, 아드리아 연안에도 식민시를 만들었다고 한다. 문예애호자로 자처하여 플라톤을 초대했고, 비극작품도 썼다.


디오니시우스 2세

디오니시오스 1세의 아들. 숙부인 디온은 그를 이상적인 군주로 만들고자 플라톤에게 교육을 받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그에 의하여 추방당하였다(BC 366). 뒤에 디온은 귀국하여 그를 몰아냈다(BC 356). 디온이 죽은 뒤, 다시 시라쿠사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전제()를 좋아하지 않는 시민들에게 쫓겨나, 코린트로 도망가서(BC 344경) 가난하게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문학에 취미가 있어서, 시와 철학 논문을 쓰고, 플라톤 ·아이스키네스 ·아리스티포스 등의 철학자를 궁전으로 초대했었다.


디오게네스


시노페의 디오게네스라고도 한다. 가짜 돈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고향인 시노페에서 쫓겨나 아테네에 와서 안티스테네스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행복이란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가장 쉬운 방법으로 만족시키는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은 부끄러울 것도 없고 보기 흉하지도 않으므로 감출 필요가 없으며, 이 원리에 어긋나는 관습은 반()자연적이며 또한 그것을 따라서도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몸소 가난하지만 부끄러움이 없는 자족() 생활을 실천하였다.


디오게네스가 일광욕을 하고 있을 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찾아와 곁에 서서 소원을 물었더니, 아무것도 필요없으니 햇빛을 가리지 말고 그곳을 비켜 달라고 하였다는 말은 유명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내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니었더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출처 :두산백과)



더 더러운 장소를 찾지 못해서


또 어느 사람이 그를 호화로운 저택으로 안내하고 이곳에서는 침을 뱉지 말도록 주의하자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한 다음 그 사람 얼굴에 침을 내뱉고, 더 더러운 장소를 찾지 못해서, 라고 말한 것이다. 단, 이것은 아리스티포스가 행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느 때 그가 '어이, 인간들이여'라고 외쳤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자 그는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그들에게 다가가 '내가 부른 것은 인간이고 쓰레기 따위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헤카톤이 <잠언집> 제1권 가운데서 말한 것이다.


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만일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이길 바랐을 텐데, 이렇게 말했다는 것도 전해지고 있다.(357쪽)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 철학자 열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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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리석고 조리 없는 말을 한다면
    from Value Investing 2017-01-25 23:48 
    (밑줄긋기)정신적으로 초라하다는 증거앞에서도 말했듯이, 디온은 디오니시우스 2세가 그런 생활을 하는 것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왕에게 가장 뛰어난 철학자로 알려진 플라톤을 시킬리아에 초대하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플라톤이 오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르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전하의 성품은 덕의 원리에 따라 고양될 것이며, 어둡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질서를 바로잡는 가장 숭고한 본보기가 되
  2. 텍스트와 주석의 관계
    from Value Investing 2017-07-08 15:32 
    "모든 말은 결핍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담지 못한다. 모든 말은 과잉이다. 내가 전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들도 전하게 된다."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 * * 때로는 간단한 대사 한 구절이 우리의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가령 "이 한심한 화상아!(Alas, poor caitiff)"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의 4막 1장에서 나오는 말인데, 나는 이 대사로부터 위안을 얻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혼 후 고부 갈등으로
 
 
 


어떤 반대에 부닥치면 사람들은 그것이 정당한가를 보지 않고, 옳건 그르건 어떻게 거기서 벗어날 것인가만을 생각한다. 우리는 팔을 내밀기는커녕 발톱을 내민다.

 - 몽테뉴


 * * *



<포르센나 앞의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 17세기 전반경, 푸슈킨 미술관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 BC 59~AD 17)의 ≪로마사(Ab Urbe Condita)≫와 플루타르코스(Plutarchos, 46?~120?)의 ≪영웅전(Parallel Lives)≫에 등장하는 로마의 용맹한 청년이다. 가이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Gaius Mucius Scaevola)라고도 하는데, ‘스카이볼라(Scaevola)’라는 칭호는 그가 행한 영웅적인 업적의 대가로 얻은 것이다.

기원전 6세기 초에 로마는 클루시움(
Clusium, Clusion이라고도 함)의 왕인 라르스 포르센나(Lars Porsena)가 이끄는 에트루리아(Etruria) 동맹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될 위기에 빠졌다. 용감한 청년 무키우스는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라르스 포르센나를 암살하기 위해 에트루리아인의 진영으로 침투했다. 그러나 그는 그만 옷차림이 비슷한 다른 사람을 라르스 포르센나로 착각하여 죽이는 바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무키우스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적들 앞에서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자신은 첫 번째로 온 것일 뿐이며, 300명의 젊은이가 자신과 똑같은 행동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오른손을 불속에 넣어 손이 타들어가는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키우스의 행동에 크게 놀란 라르스 포르센나 왕은 그처럼 두려움 없고 용감한 로마의 젊은 군인들이 자신의 영토에 들어올 것을 염려하였다. 결국 왕은 그를 풀어주고 사신을 보내 로마와 휴전을 하였다. 이후 자신의 오른손을 희생해 로마를 구한 무키우스는 왼손잡이라는 뜻의 ‘스카이볼라’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또한 그는 티베르 강 오른쪽 제방의 농지를 하사받았는데, 사람들은 뒷날 그곳을 무키우스의 목초지라는 뜻의 ‘무키아 프라타(Mucia Prata)’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출처:네이버 지식백과]




<고통에 맞서는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 루이 피에르 드센(1749∼1822), 1791년, 루브르 박물관



가장 믿을 만한 이야기


무키우스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가장 믿을 만한 이야기를 적어보도록 하겠다. 그는 여러모로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무엇보다 전쟁에서 용맹하기로 이름나 있었다. 그는 적왕 포르센나를 암살하기로 결심해 에트루리아인처럼 차려입고 그들 언어를 쓰며 적진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닌 끝에 왕이 앉아 있는 높은 단에 이르렀지만, 여러 귀족 가운데 누가 왕인지 가려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누가 왕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검을 뽑아 들고 자기 생각에 왕이다 싶은 사람을 베어버린 뒤 붙잡혀서 심문을 당했다.


포르센나 왕은 마침 제사를 드리기 위해 마련해 두었던 불이 이글거리는 화로를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무키우스의 오른손을 화롯불에 집어넣고 손이 타들어가도록 했지만 무키우스는 포르센나 왕을 똑바로 마주 본 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포르센나 왕은 탄복하며 그를 풀어주고, 빼앗았던 칼을 되돌려 주었다. 무키우스는 왼손으로 칼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그를 왼손잡이라는 뜻의 '스카이볼라'라 부르게 되었다. 무키우스는 포르센나의 위엄에 무릎 꿇지 않았지만, 그의 덕 있는 성품에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때문에 그는 아무리 모진 고문을 당해도 결코 말하지 않았을 군사기밀을 털어놓았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로마 결사대 300명이 이 진영 안에 잠복한 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비를 뽑은 결과 내가 처음으로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하나도 유감스럽지 않습니다. 당신은 너무도 용감하고 훌륭해, 로마인의 적이 아니라 친구가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포르센나는 이 말을 믿고 로마와의 화해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잠입해 있는 로마인 300명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들의 기상과 용기에 감탄했기 때문이리라.(231∼232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포플리콜라〉



 * * *



내 인생에도 같은 일이 없으란 법은 없잖아.

 

'아버지가' 그는 생각하였다. '아버지가(집에는 잘 닮은 초상화가 두 개 있었는데 니꼴렌까는 한 번도 안드레이를 인간의 모습으로 떠올린 일은 없었다) 나와 함께 있어서 나를 만져주었다. 아버지는 나를 옳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삐에르 아저씨를 옳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비록 그 분이 뭐라고 하시든 간에 나는 이것을 하겠다. 왼손잡이 무키우스(불굴의 용기를 보이기 위해 적 앞에서 자기의 오른팔을 태웠다고 하는 로마의 전설적인 용사)는 자기 팔을 태웠다. 내 인생에도 같은 일이 없으란 법은 없잖아. 나는 알고 있다. 모두 내가 공부를 하면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나는 공부를 그만 둔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하는 거다. 나는 단 한 가지 하느님에게 빈다. 나에게 플루타르코스의 사람들에게 일어난 것 같은 일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그러면 나는 같을 일을 하겠다. 더 훌륭하게 하겠다. 모두가 나를 알고 모두가 나를 좋아하고 모두가 나에게 열중하게 된다.’ 그러자 갑자기 니꼴렌까는 가슴에 흐느낌이 복받쳐 오는 것을 느끼고 울기 시작하였다. (1608쪽)


 -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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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4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14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누구보다도 "선한 자"를 자처하는 자들이야말로 더없이 독성이 강한 독파리들이다. 저들은 아무 가책 없이 물어뜯고 아무 가책 없이 거짓말을 해댄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중에서

 

 

 * * *


 

한번 움켜쥔 권력을 제때 내려놓기란 얼마나 어려울까. 범인(凡人)들이 그 무시무시한 힘을 이해할 방법은 없다. 다만 간접적으로만 전해 듣고 보면서 그저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한번 거기에 앉으면' 결코 떠날 수가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아주 오래 전부터 깨달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고대 그리스 사람 솔론이었다.


가까운 친구들은 전제군주라는 이름을 들을까봐 왕위를 거절하는 솔론을 설득하려 애썼다. 그들은 덕으로써 국민들을 다스린다면 어진 왕이 될 것이라고 솔론에게 말했다. (…) 그러나 솔론의 마음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친구들에게 전제군주는 좋은 자리이긴 하지만 한번 거기에 앉으면 떠날 수가 없게 된다고 말하며 다시 한 번 왕위를 거절했다. 또 그가 포쿠스에게 준 시에는 아래 같은 구절이 있다.

 

폭군의 권세를 휘두르지 않았고

내 이름을 더럽히지도 않았으니

나는 후회하지 않노라.

이것이 가장 순수한 명예이므로.


(…)

 

그가 왕이 되기를 거절했을 때 친구들이 비난하자, 다음과 같은 시로 그들에게 말했다.


솔론은 지혜롭지도 똑똑하지도 않소.

하늘이 주신 복도 받지 않고

그물을 던져 큰 고기가 걸려도

끌어올리지 못하고 가슴만 떨리니

지혜도 없고 용기도 없소.

오직 하루라도 아테나이 왕으로 지내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겠지만

다음 날은 구렁에 빠져들어

집안까지 망치게 될 것이오.

 

 

(200-201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솔론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이야기는 '솔론과 크로이소스의 만남'이다.(고대의 전설적인 거부이자 뤼디아의 왕이었던 크로이소스는 헤로도토스가 쓴『역사』에도 수없이 자주 등장하는 아주 유명한 인물이다.)


솔론은 크로이소스의 초대를 받아 사르디스로 갔다. 산속에서만 살아온 사람이 처음 바다를 본 뒤 강을 보고도 바다라고 여기듯, 솔론도 처음 크로이소스 궁전에 들어갔을 때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는 궁전에 있는 신하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수많은 호위병을 거느리며 으스대는 모습을 보고 그들을 왕이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곧 진짜 왕에게 안내되어 가까이 갔더니, 왕은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온통 패물과 금으로 치장을 하고 있어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하지만 솔론은 왕에게 어떤 찬사도 보내지 않았다. 그가 크게 놀라리라 짐작했던 왕은 솔론의 그러한 태도를 보고 자신을 경멸하는 것이라 여겼다. 왕은 그를 안내해 성 안의 온갖 화려한 보물들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솔론은 이미 크로이소스 왕의 모습을 보고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솔론이 구경을 마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크로이소스는 자신보다 더 행복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솔론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 대답하며, 그는 바로 자기 나라의 텔루스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텔루스는 정직하게 살았으며 훌륭한 아들들을 남겼고, 그가 원했던 삶을 살았으며 게다가 나라를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음을 맞았다고 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크로이소스는 솔론을 이상하고 불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금은이 얼마나 많은지를 놓고 행복을 셈하지도 않을 뿐더러, 눈앞에 펼쳐진 자신의 권능을 보고도 평범한 평민의 삶과 죽음을 존경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또다시 텔루스 다음으로 자신보다 행복한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다. 솔론은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서로 우애가 누구보다 깊은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가 있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어머니가 타고 있던 수레를 끄는 소들이 너무 느리게 걷자 자신들이 직접 멍에를 끌어 어머니를 헤라 여신 신전으로 모시고 갔다. 그 어머니는 모든 사람에게 축하를 받았으며 아들들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제물을 바친 뒤에 누웠다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지만, 아무런 고통 없는 편안한 죽음을 맞았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크로이소스는 벌컥 화를 냈다.

 

"그러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솔론은 왕의 비위를 건드리지도 않고 아첨하지도 않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리디아의 왕이시여, 저희 헬라스 사람들은 특별한 신의 은총을 받고 있지는 않지만 서민답게 살아가기 위한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 인생이란 늘 변화무쌍하고 앞날을 예측할 수 없음을 알기에, 오늘 하루 행복을 자랑하지 않고 다른 이의 행복을 시기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크로이소스는 이러한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솔론은 그곳을 떠났다.

 

우화 작가인 아이소포스도 그때 크로이소스 초대를 받아 함께 있었는데, 솔론에게 조심스럽게 충고했다.

 

"솔론 선생, 왕과 이야기할 때는 되도록 짧게 말하거나 아니면 좋아할 말만 골라서 해야 한답니다."

 

그러자 솔론이 그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짧게 말을 하거나 아니면 도리에 맞는 말을 해야 하는 겁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시간이 지난 뒤 크로이소스는 키루스와의 전쟁에서 패해 도읍을 빼앗기고, 자신은 잡혀 산 채로 불에 타 죽는 처지가 되었다. 그때 그는 장작더미 속에서, 처형을 지켜보기 위해 모인 모든 페르시아인과 키루스를 향해 솔론이라는 이름을 간절하게 외치며 통곡했다. 이 광경을 보고 놀란 키루스는 잠시 멈추라 한 뒤 도대체 솔론이 누구인지, 신인지 사람인지 그에게 물었다.

 

크로이소스가 울부짖었다.

 

"솔론은 헬라스의 현명한 철학자요. 나는 내 궁전의 화려함을 자랑하려고 그를 초대했소. 그의 말처럼 행복이란 손에 넣었을 때의 기쁨보다 잃어버렸을 때 불행이 더 큰 법이오. 그 행복이 내게 있을 동안에는 화려하지만 실속 없는 소문들뿐이었는데, 이제 그것을 잃고 나니 무서운 고통과 돌이킬 수 없는 불행만 남았소. 그러나 그전에 솔론은 내 불행을 미리 알고, 인간은 그의 마지막을 보고 나서야 행복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 일러주었소. 하지만 어리석은 나는 오히려 그 충고를 무시했지요."

 

키루스는 이 말을 듣고 솔론의 현명함에 크게 감탄해 크로이소스를 살려주었다. 솔론의 말 한마디가 크로이소스 왕의 목숨을 구했던 것이다.(211-212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덧붙임)

 

플루타르코스가 쓴『영웅전』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인물 50명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은 매우 방대한 책이다. 나는 천병희 선생님이 번역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부터 읽었는데, 아쉽게도 그 책 속엔 겨우(?) 10명의 인물들만 담고 있었다. 풀 버전에 비한다면 고작 1/5에 불과한 셈이다. 이번에 50명을 모두 다룬 풀 버전의 책을 다시 붙잡고 읽고 있는데, 솔론傳은 예전에 읽었던 천병희 번역본에도 담겨 있어서 이번에 두 번째로 만나는 셈이다. 그런데 다시 읽어봐도 솔론傳은 여전히 감동적이다. 천병희 번역본에 딸린 주석 일부분을 참고 삼아 덧붙여 본다.


크로이소스(Kroisos)는 기원전 560년경 ∼546년 소아시아 서부 뤼디아(Lydia) 지방의 마지막 왕으로, 전설적인 거부였다. 그는 "그대가 할뤼스(Halys) 강을 건너면 큰 왕국을 멸하게 되리라."는 델포이의 신탁에 고무되어 할뤼스 강을 건너 페르시아 제국으로 진격하다가 페르시아 왕 퀴로스(Kyros)에게 참패하여 그토록 강성하던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된다. 그는 화형을 선고받고 화장용 장작더미에 올려졌으나 전에 델포이에 값진 선물들을 바친 덕분에 아폴론에 의해 구출되었다고도 하고,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인생의 부침에 관해 솔론(Solon)이 경고했던 말을 그가 되뇌는 것을 듣고 퀴로스가 살려주었다고도 한다.(81쪽)

 - 천병희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솔론과 크로이소스와의 만남'에 얽힌 얘기를 제법 길게 인용했지만 솔론傳에 담긴 다른 이야기 한토막도 마저 인용했으면 싶다. 한낱 오래된 옛날 이야기로 치부하기엔 오늘날의 현실과 너무 닮은 모습들이 너무나 자주 겹쳐 떠오르기 때문이다.


마침내 사람들은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위해 호위병을 세웠으며, 그의 뜻대로 군대를 모아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했다. 온 시내는 발칵 뒤집혔다. 메가클레스도 가족을 데리고 달아나자, 솔론은 광장에 나가 연설했다. 그는 시민들의 경솔함과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한편, 자유를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내야 한다며 사람들을 설득했다. 독재정치는 그것이 싹트기 전에는 막기 쉽지만, 이미 독재정치가 성장한 뒤 쓰러뜨리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일이라며 설득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두려워서 감히 누구도 솔론의 말을 따르지 못했다.

 

솔론은 매우 실망한 채 집으로 돌아와 무장을 하고, '나라와 법을 지키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이렇게 써서 문 앞에 붙였다. 그러고는 친구들이 피신하라고 권하는 것도 듣지 않고 아테나이 사람들을 훈계하는 시를 썼다.


그대들이 어리석어 이런 괴로움을 당했으니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려 결코 하늘과 운명을 원망하지 마라.

폭군에게 성을 내준 것은 바로 그대들이었으니

이제는 자유를 잃은 노예가 될 수밖에 없으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옳은 말을 하는 솔론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그가 곧 독재자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며, 뭘 믿고 그렇게 대담한 행동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솔론은 그들에게 말했다.

 

"내 늙은 나이를 믿소."

 

그러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권력을 잡은 뒤에도 여전히 솔론을 존경하며, 그에게 여러 일들을 의논하기도 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솔론의 법을 거의 그대로 시행했으므로 솔론도 그의 상담을 잘 들어주었으며, 조언과 칭찬 또한 아끼지 않았다.

 

(…)

 

솔론은 아이귑토스를 여행하면서 들었던 아틀란티스 섬의 역사에 대해 방대한 책을 쓰려고 했지만, 끝까지 쓰지 못하고 도중에 그만두었다. 플라톤은 그가 책을 쓸 시간이 모자라서 일을 끝마치지 못했다고 했지만 아래 시를 보면, 시간이 모자라기보다는 나이가 많고 일의 규모와 양이 너무나도 커 담당해 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이는 하루하루 늘어가지만

배움의 길은 나날이 새롭구나.

 

그러나 지금도 나에게는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아름다움과 술과 음악이 있구나.


그래서 플라톤은 솔론이 끝내지 못한 아틀란티스 섬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상속인이 없어서 자신이 저택을 물려받게 된 듯한 마음으로 이어서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너무 늦게 시작한 탓에 완성을 보지 못한 채 그도 세상을 떠났다. 플라톤이 이어서 써놓은 글들을 읽다 보면 미처 쓰지 못한 부분에 대한 그의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아테나이 여러 신전 가운데 제우스 신전만이 완성되지 못했던 것처럼, 플라톤의 뛰어난 작품 가운데 오직 이 아틀란티스에 대한 글만이 미완성 상태로 전해진다.(214-215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여기까지 옮겨놓고 보니 이 글의 제목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얘기만 잔뜩 인용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든다. 제목부터 먼저 달아놓고 아무 생각없이 무작정 여기까지 마구 내달린 탓이다. 시시각각 급변하는 작금의 난국을 보면서 오늘 내가 문득 떠올린 건 사실 '원숭이'였다. 그것도 병신년(丙申年)을 맞아 그동안 저지른 온갖 병신짓(?)이 만천하에 다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대단원의 끝을 보여줄 생각조차 못하는 '욕심많은 원숭이'였다.


알제리의 카바일 족(주로 알제리 북부의 해안 산악 지대에 사는 부족-역자주) 농부가 호리병을 나무에 단단히 붙들어 매놓고 그 안에 약간의 쌀을 넣어두었다. 호리병의 주둥이는 원숭이의 손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크기를 갖고 있다. 원숭이는 밤에 나무로 와서 손을 집어넣고 쌀을 움켜쥔다. 쌀을 쥐고 있어서 손이 빠지질 않지만 원숭이에겐 쌀을 놓고 손을 뺄 지혜가 없다. 그렇게 해서 원숭이는 아침이 될 때까지 거기에 서 있다가 사람에게 잡히고 만다.(298쪽)


- 새뮤얼 스마일즈, 『인생을 최고로 사는 지혜』중에서


우리의 아주 머나먼 조상이 틀림없이 아프리카의 원숭이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이 아무리 과학적이고 명백하게 증명된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진짜로 아프리카의 원숭이를 쏙 빼닮은 너무나 욕심많은 인간을 우리의 코앞에서 진짜로 생생하게 지켜보는 일은 너무나 괴롭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 고약하다! 또한, 무려18 년 동안이나 정치를 해 온 사람이 “오늘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단 한 순간도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작은 사심도 품지 않았다”고 너무나 천연덕스럽고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는 건 너무 소름끼친다!

정치 Politics

 

원칙들의 경연으로 변장한 이해관계의 상충. 사적인 이익을 위해 공공 업무를 행하다.

 

 - 앰브로스 비어스, 『악마의 사전』


어느새 토요일마다 광화문 광장으로 나가는 일이 하나의 일상이 될 지경이다. 그래도 혹시나 이번 주중엔 일(?)이 잘 풀려서 주말엔 모처럼 동네 도서관에서 편안하게 책장이라도 좀 넘길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또 속았다는 기분이 든다. 참으로 무서운 '기만'이다. 오늘 내 눈에 번쩍 뜨인 어느 만평 하나를 옮기는 걸로 이 글을 끝맺고 싶다.





기만 Delusion

 

'열의', '애정', '자기부정', '신뢰', '희망', '자비' 등의 수많은 착한 아들과 딸을 둔, 대단히 인망 있는 집안의 가장.


기만에게 모두 경례! 그대가 없었다면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이었을 터.

멋진 환상을 자랑하는 악덕은

버려진 미덕의 둔한 발걸음을 훌쩍 뛰어넘으니.

 

멈프리 마펠(Mumfrey Mappel)


 - 앰브로즈 비어스, 『악마의 사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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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_Shin 2016-12-04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글을 읽어면서 저도 니체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편을 인용하고 싶어졌습니다.

국가는 온갖 냉혹한 괴물 가운데서 더없이 냉혹한 괴물을 일컫는다. 이 괴물은 냉혹하게 거짓말을 해댄다. 그리하여 그의 입에서 ˝나, 국가가 곧 민족˝이라는 거짓말이 기어나오는 것이다. 79쪽

국가는 선과 악이라는 말을 다 동원해가며 거짓말을 해댄다. 국가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거짓말이다. 국가가 무엇을 소유하든 그것은 그가 훔친 것이고. 80쪽

국가라고 하는 이 새로운 우상은 자신의 주변에 영웅들과 영예로운 자들을 들러리 세우고 싶어하지! 떳떳한 양심의 했볕을 쬐고 싶은 것이다. 이 냉혹한 괴물은 말이다! 81쪽

여기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을 보라! 저들은 부를 축적하는데도 더욱더 가난해지고 있다. 저들은 권력을 원하며 그 무엇보다도 먼저 권력의 지렛대인 많은 돈을 원한다. 이 무능한 자들은!
저들 잽싼 원숭이들이 기어오르는 꼴을 보라! 앞을 다투어, 서로를 타고 넘어 기어오르다가 서로를 진흙과 나락으로 끌어내리고들 있으니.
모두가 왕좌에 오르려 하는 것이다. 마치 행복이라는 것이 왕좌에 앉아 있기라도 하듯. 정신나간 짓들이다! 흔히 진흙이 왕좌에 앉아 있기도 하고, 왕좌또한 진흙에 앉아 있기도 하거늘. 82쪽

oren 2016-12-13 16:04   좋아요 0 | URL
맨슨 님 반갑습니다^^
맨슨 님께서 인용해 주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담긴 글귀들을 찬찬히 음미해 보니, 요즘 시국에 너무나도 절묘하게 들어맞는 듯해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좋은 내용을 정성스레 옮겨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는 언제쯤 이런 연설을 들을 수 있을까?


지배욕. 그것은 저들 스스로가 ' 물러가노라!'고 외쳐댈 때까지 도시와 제국들의 얼굴에 대고 '물러가라!'고 설교하는, 저 크나큰 경멸의 무시무시한 여교사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 * *

 

  


 

너무나 답답하고도 뒤숭숭한 시국 때문에 아무리 기를 쓰고 책을 펼쳐도 도무지 글줄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엊그제는 검찰의 중간 수사 발표를 생방송으로 챙겨보고 나서 어렵사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 동네 도서관을 찾았다. 3주일을 연속으로 광화문 광장을 찾았던 탓일까. 별 일 없으면 주말마다 찾는 동네 도서관이 도리어 무척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거기에 가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수 있을까 싶었다.

 

벌써 여러 날 전부터 읽다 만『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두 권이나 챙겼다. 그 책들을 펼치면 이토록 답답한 현실에서 얼마나 쉽사리 까마득히 머나먼 고대 세계로 한순간에 훌쩍 날아갈 수 있을까 싶은 들뜬 희망마저 생겼다. 그러나 그건 헛된 소망일 뿐이었다. 전3권 가운데 1권과 3권을 가방에서 꺼내 두 권을 동시에 책상 위에 펼쳤지만 결국엔 몇 주 전까지 읽다 만 대목에서 단 한 페이지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하릴없이 키케로가 쓴 '카틸리나 탄핵' 연설문을 다시 읽거나, 탄핵 대상이었던 바로 그 인물이 남긴 카틸리나의 연설문(「거사의 동지들이여」, 「장병들에게 고하노라」)을 다시 읽는 게 고작이었다.(누구에게나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온갖 괴상한 논리를 갖게 마련이다.) 나머지 많은 시간들은 자리를 벗어나 도서관 주위를 어슬렁거리거나 벤치에 앉아 끊임없이 폰을 만지작거리며 최신의 정치 뉴스들을 읽는 데 전부 쏟아붓고 말았다.

 

종내 배터리가 다 닳도록 온종일 뉴스를 살피다가 침침한 눈을 비비며 밤늦게 집으로 되돌아 오자니 허탈한 심정을 달랠 길이 없었다. 또다시 새로운 한 주를 맞이하더라도 정치권으로부터 홍수처럼 끝없이 쏟아져 나올 온갖 더럽고 추악하고 답답한 뉴스들 때문에 더더욱 시달리지나 않을까 싶은 예감마저 불쑥 끼어들어 더욱 기분이 나빴다.

 

이러는 와중에도, 어지러운 정치 뉴스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듯 멀리 벗어나 보려고 발버둥치며 간신히 찾아 읽은 텍스트는 엉뚱하게도 (다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였다. 내가 밑줄로 그어놓은 부분이라도 끄적끄적 옮겨 적다 보면 이토록 어지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이미 읽었던 대목들을 다시 옮겨 갈무리할 때마다 느끼는 건 이제 더이상 그 텍스트가 휘발되지 않고 아주 깊숙하게 어디엔가 고이 저장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럴 때마다 텍스트를 온전히 거둬들이는 듯한 포획감뿐만 아니라 갈무리에 뒤따르는 왠지 모를 뿌듯한 느낌이 참 좋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건 톨스토이가 쓴 소설 속 문장들 속에서조차 '오늘날의 정치 현실'을 좀 더 명쾌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깨우쳐주는 듯한 대목들을 너무나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토록 거대한 장편소설을 읽으며 받았던 깊은 감동의 여운이 아직도 다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된 것도 기뻤지만, 그 무엇보다도 톨스토이가 남긴 멋진 문장들과 통찰들을 현실에 되비쳐 살펴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제법 많은 분량이었지만 끝까지 힘겹게 필사를 계속하는 동안에 '현 시국'에 빗대 놓고 보아도 좋을 만한 대목들을 '인용문'과 함께 글로 엮어볼까 싶은 생각이 정말 여러 번이었지만 그 욕심도 어느새 다 흘려버리고 말았다. 지난 주말 광화문 광장에서 전인권이 불렀던 노래의 한 대목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흘려버릴 수도 있어야겠다 싶었는지도 모르겠다.(지난 주말에 아내와 나는 무대에서 고작 30여 미터 정도 떨어져 앉아 있었기 때문에 무대와 화면을 번갈아 보며 그 역사의 현장에 생생하게 몰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수십만 명의 군중과 함께 목청껏 불렀던 노래들이 정말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상록수>, <애국가>, <행진> 등을 그들과 함께 목청껏 부르는 동안 몇 번씩이나 목이 메이고 울컥했는지 모른다.)

 

서설이 너무 길었다. 사실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주장하고 싶은 요지는 딱 하나였다. 나는 지난 11월 12일에 서울 도심을 꽉 메웠던 100만 군중이야말로 이번 '전쟁과도 같은 싸움'에서 가장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그래도 아직은 이런 판단이 너무 성급한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말할지도 모른다. 그날의 100만 군중은 너무 물렀다고. 그러나 그날 발디딜 틈조차 없이 서울 한복판을 꽉 메운 울분에 찬 민중들의 함성과 촛불 시위보다 더 무서운 '몽둥이'를 권력자에게 들이댈 수 있는 가능성이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까. 물론 이번 주말에 더욱 놀라운 규모의 시민들이 보란듯이 광장을 메울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데는 아무래도 맨 처음으로 100만 시민들이 다함께 들어올린 몽둥이가 결정적이었다는 점을 아무도 쉽게 부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직도 지리멸렬하기만 하고 그저 권력욕에 눈이 멀어 고비때마다 자기 밥그릇이나 숟가락부터 먼저 챙기기에 바쁘고, 밥상을 향해 다투듯이 서로 달려드는 철부지와도 같은 추악한 정치인들의 사소한 잘못들까지 여기서 일일이 말할 필요는 없지 싶다. '그날' 100만 군중이 다함께 모여 참다 못해 기어이 토해낸 깊은 울분과 분노에 찬 함성과 연약하게 흔들리면서도 결코 꺼지지 않던 촛불의 숭고한 의미까지도 진정으로 가슴 깊이 받아들인 정치인들이 과연 얼마쯤이나 될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주제 또한 나폴레옹의 불의한 침략에 맞선 '소리없는 민중의 거대한 승리'가 주제이다. 어쩌면 이번 '11월 혁명'(?)의 결정적인 장면 또한 11월 12일에 광화문 광장 주변을 가득 메운 100만 시민의 함성 속에서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마침 지난 일요일 저녁 무렵에야 겨우 공식적으로 꺼내 든 청와대의 검찰 수사 결과에 대한 반격이 새삼 충격적이고도 놀라웠다. 그 뉴스는 우리 모두의 눈과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 뉴스를 접하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톨스토이가 쓴『전쟁과 평화』속의 여러 대목을 다시금 떠올렸다. 아... 이미 권력자는 '치명상'을 입고 말았구나.. '그날' 받은 '치명상'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낀 짐승이 자신의 파멸을 느끼고 허둥대고 날뛰는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싶었던 것이다. 사태가 여기까지에 이르도록 무수한 '역(逆)의 우연'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음은 부언할 필요도 없다.

 

 

 * * *

 

보로지노에서 받은 치명상 때문에


무서운 힘으로 추켜든 손이 맥없이 늘어지는 꿈과도 같은 기분을 맛보고 있었던 것은 비단 나폴레옹만이 아니었다. 전쟁에 참가했건 안 했건 간에 프랑스군의 모든 장군들과 모든 병사들이 느끼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전투를 경험하면서 (이제까지는 이 10분의 1의 노력에도 적은 도망가 버렸다) 병력의 반을 잃고 전쟁이 끝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와 마찬가지로 무섭게 버티고 있는 적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공격하는 프랑스군의 정신력이 소진된 것이다. 빼앗은 천 조각, 군기라고 불리는 막대기 끝에 단 헝겊 조각이나 군대가 서 있던 또는 서 있는 공간 등에 의해 결정되는 승리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정신적 우월과 상대방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하는 정신적인 승리가 보로지노에서 러시아군에 의해서 쟁취되었다. 러시아를 침공한 프랑스군은 세차게 달리는 동안에 상처를 입어 미처 날뛰는 짐승처럼, 자신의 파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것은 전력이 반으로 약해진 러시아군이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격을 받은 후에도 프랑스군은 모스크바까지 굴러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러시아군 쪽에서 새로운 힘을 가하지 않아도, 프랑스군은 보로지노에서 받은 치명상 때문에 많은 피를 흘리고 멸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로지노 회전의 직접적인 결과는 모스크바로부터의 이유 없는 나폴레옹의 도주, 구(舊) 스몰렌스크 가도를 통한 귀국과 50만 침입군의 괴멸, 그리고 보로지노 전에서 처음으로 정신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압도딘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의 괴멸이었던 것이다.(1127-1128쪽)



치명상을 입은 동물의 단말마적인 도약과 경련을 연구하는 것과 마찬가지


전군의 상태는, 마치 자신의 파멸을 느끼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모르고 있는 상처를 입은 동물과 같았다. 모스크바 입성에서부터 군의 괴멸에 이르기까지의 나폴레옹과 그 군대의 교묘한 작전이나 그 목적을 연구하는 것은, 치명상을 입은 동물의 단말마적인 도약과 경련을 연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처를 입은 짐승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사냥꾼의 총소리 쪽으로 돌진하기도 하고 전후로 뛰기도 하여,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 흔히 있다. 나폴레옹도 군 전체에 끌려 그와 마찬가지 일을 하였다. 따루찌노 전투라고 하는 바삭거리는 소리가 짐승을 겁먹게 하였다. 그리고 짐승은 앞으로 뛰어나가 총소리 쪽으로 달려갔다가 뒤로 되돌아오고, 또 앞으로 갔다가 뒤로 되돌아와 마침내 모든 짐승과 마찬가지로 가장 불리하고 위험한데도 불구하고, 잘 알고 있는 옛 발자국을 더듬어 뒤로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모든 움직임을 지휘한 것처럼 여겨지는 나폴레옹은 (뱃머리에 새겨져 있는 조각상이 야만인에게는 배를 움직이는 힘처럼 생각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행동의 전체 기간을 통해서, 유개마차 안에 매 놓은 줄을 붙잡고 자기가 마차를 조종하고 있다고 공상하는 어린애와 비슷했다.(1377쪽)



조그마한 톱니바퀴야말로

기계의 움직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 움직임을 보고, 그 기계의 가장 중요한 부품은 우연히 그 속에 들어가서 움직임을 방해하면서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는 나무 부스러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계의 구조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 움직임을 해치고 방해를 하는 나무 부스러기가 아니라, 소리도 없이 돌고 있는 조그마한 톱니바퀴야말로 기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의 하나임을 이해하지 못한다.(1394쪽)



국민 전쟁이라는 몽둥이

 

스몰렌스크의 화재 이래, 종래의 어떠한 전쟁의 전설에도 적용되지 않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도시와 마을의 소실, 몇 가지 전투 후의 후퇴, 보로지노에서의 손해, 두 번째의 후퇴, 모스크바의 포기와 화재, 약탈병의 체포, 수송차의 탈취, 유격전 등ㅡ이 모든 것은 규칙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검술가의 정규적인 자세로 모스크바에 남아, 상대방이 검 대신에 자기 머리 위에 쳐든 몽둥이를 본 바로 그 순간부터, 꾸뚜조프와 알렉산드르 황제를 향해서 전쟁하는 방법이 규칙에 어긋난다고 (마치 사람을 죽이는 데도 무슨 규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불평을 계속했다. 지위가 높은 러시아인에게는 몽둥이로 싸운다는 것이 무엇인가 창피한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프랑스 측의 규칙 위반의 불평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제4의 자세나 제3의 자세를 취하기도 하고, 제1의 자세로 보기 좋게 찌르고 싶었는데도 불구하고, 국민 전쟁이라는 몽둥이를 무서운 힘으로 번쩍 들어올려 그 누구의 기호나 법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둔하리만큼 거칠게, 그러나 목적에 따라서 무조건 내리쳐 침략자 전체가 박멸될 때까지 프랑스군을 후려갈긴 것이다.(1409쪽)


 

경험 있는 소몰이

 

러시아군은 반이나 죽으면서 러시아 민족에게 어울리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모든 일을 했다. 그러므로 따뜻한 방에 앉아 있는 다른 러시아 사람들이 하기를 바랐던 일을 다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은 러시아군의 책임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묘한 사실과 역사 서술 사이에 오늘날 이해할 수 없는 차질이 생기고 있는 것은, 이 사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역사가들이 여러 장군들의 아름다운 감정이나 말의 역사를 쓰고 있을 뿐 사건의 역사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에게는 밀로라도비치의 말이나 어느 장군이 받은 포상이나 그들의 생각이 매우 흥미 있게 여겨지지만, 각처의 야전 병원과 무덤에 남겨진 5만 명의 문제는 그들의 연구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흥미를 끌지도 못한다.

그런데 상신서나 종합 계획 등의 연구에 등을 돌리고, 사건에 직접 참가한 무수한 사람들의 움직임을 파내려가 보면, 이제까지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모든 문제가 순식간에, 또 매우 손쉽고 간단하게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해결된다.


나폴레옹을 군과 함께 분단하려는 목적은 열 명 정도의 머릿속 외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의미하고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존재할 수가 없다.

 

국민의 목적은 단 한 가지, 자기들의 영토에서 침략자들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은 첫째, 프랑스군이 퇴각하고 있었으므로 저절로 실현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단지 그 움직임이 멈추지 않도록 하기만 하면 되었다. 둘째로, 이 목적은 프랑스군을 괴멸시키고 있던 국민 전쟁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또 셋째로는, 프랑스군의 움직임이 멈추었을 때에는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 러시아의 대군이 프랑스군의 뒤를 밟는 것으로 수행되어가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달아나는 동물에 대한 채찍과 같은 작용을 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경험 있는 소몰이는 동물을 위협하면서 채찍은 들어 올린 채, 뛰고 있는 동물의 머리는 때리지 않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1465쪽)

 

 

우연과 역(逆)의 우연

 

무엇 하나 자기에게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의의를 덧붙여서 모든 자기의 범죄를 자랑하는 것을 본질로 삼고 있는 영광과 위대한 이상, 이 사나이와 그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인도할 이상이, 자유분방하게 아프리카에서 형성된다. 그가 무엇을 하든 모두 성공한다. 그는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다. 포로 학살의 잔인성은 그의 죄가 되지 않는다. 어린이처럼 경솔하게, 이유도 없이 비열하게 아프리카를 떠나 고통받고 있는 동료를 그대로 남겨둔 것은 그의 공적으로 여겨지고, 적의 함대는 또다시 그를 놓치고 만다. 자기가 행한 행운의 범죄에 기분이 좋아진 그가 자기의 역할을 다할 상태가 되어 아무런 목적 없이 파리로 돌아왔을 때, 1년 전에 그를 파멸시켰을지도 모르는 공화국 정부의 붕괴는 극한에 달해 있었고, 당파의 때가 묻지 않은 인간인 그의 존재는 지금 정부의 의의를 높일 뿐이었다.

 

그 사람만이, 이탈리아와 이집트에서 만들어낸 영광과 위대(偉大)의 이상,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난 자기 찬미, 대담한 범죄, 그럴듯한 거짓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이 이제 일어나려고 하는 일을 정당화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에 필요한 인간이었으므로 거의 자기의 의지에 관계없이, 그의 우유부단과 무계획, 그가 하는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는 권력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음모에 휘말려 그 음모가 성공을 거둔다.

 

우연이, 무수한 우연이 그에게 권력을 주고 모든 인간들이 상의라도 한 것처럼 그 권력의 강화에 협력한다. 우연이, 당시의 프랑스 총재들의 성격을 그에게 복종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

 

…… 그런데 갑자기 그때까지 계속된 일련의 승리에 의해서, 실로 시종일관해서 그를 예정된 목적지로 이끌어온 우연과 천재 대신에, 보로지노의 코감기에서, 혹한과 모스크바에 불을 붙인 하나의 불꽃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역(逆)의 우연이 나타난다. 그리고 천재 대신에 유례없는 어리석음과 비열함이 정체를 드러낸다.

 

침략자는 패주하여 뒤로 물러났고, 다시 패주해서 모든 우연이 이제는 그의 편을 들지 않고 끊임없이 그에게 등을 돌린다.

 

파리ㅡ최종 목적지에 도착한다. 나폴레옹 정부와 군대는 붕괴된다. 나폴레옹 자신은 이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의 모든 행위는 분명히 비참하고 혐오스럽다. 그런데 또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이라는 것이 생긴다. 동맹자들이 나폴레옹을 자기들의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미워한다. 힘과 기능을 빼앗기고 악행과 간지(奸智)가 폭로된 이상, 그는 10년 전이나 1년 후에 그랬던 것처럼 동맹자의 눈에 무법한 악당으로 비쳐야 했다. 그런데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우연에 의하여 아무도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의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는다. 10년 전이나 1년 후에는 무법의 악당이라고 여겨진 인간이 프랑스에서 이틀이면 갈 수 있는 섬으로 보내어지고, 그 섬이 그의 영지로 주어지고, 친위대와 무엇인가를 위하여 지불되는 수백만의 돈도 따라간 것이다.

 

(…)

 

프랑스를 황폐하게 만든 인간이 혼자서 음모도 없이 병사도 거느리지 않고 프랑스로 되돌아온다. 보초라면 누구나 그를 잡을 수가 있었는데 기묘한 우연으로 누구 하나 그를 잡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하루 전에 저주하고 1개월 후에도 저주하게 될 이 인간을 기쁨으로 맞이한다.

 

이 인간은 총괄적인 마지막 막을 납득이 가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아직도 필요한 것이다.

 

그 막은 끝난다. 마지막 연기가 끝난다. 배우는 옷을 벗고 눈썹과 입술연지를 씻어내도록 명령된다ㅡ그는 이제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간이 고독하게 자기의 섬에서 스스로 자기에게 비참한 희극을 연출하고, 정당화가 이제 필요 없을 때에 자기 사업을 정당화하려고 쩨쩨한 책략을 꾸미며 거짓말을 하고, 보이지 않는 손이 이 사나이를 인도하고 있었을 때, 사람들이 힘이라고 착각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를 온 세계에 알리는 데에 수년의 세월이 흐른다.

 

모든 일을 꾸몄던 자가 연극이 끝났을 때 배우의 옷을 벗기고 우리들에게 보인다.

 

"보시오. 당신들이 믿었던 것을! 이거요! 이제 알겠죠? 이 사나이가 아니라 내가 당신들을 움직였다는 것을."

 (1545-15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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