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는 지혜 동서문화사 월드북 27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권기철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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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밑줄긋기)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야말로 605

내가 스토아학파의 윤리학 정신을 이해한 것에 의하면, 그 근원은 다음과 같은 사상에서 나오고 있다. 이성은 인간의 커다란 특권이며, 간접적으로 계획적인 행동과 거기에서 생기는 결과에 의해 인생과 그 무거운 짐을 현저하게 가볍게 하는 것이지만, 이 이성은 또 직접적으로, 즉 단순한 인식에 의해 인생을 괴롭히고 있는 모든 종류의 고뇌로부터 인간을 완전히 구출할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상이다. 이성을 부여받은 인간이 이성으로 무한한 사물이나 상태를 포괄하고 전망하면서도 현존에 의해 아주 잠시 동안, 불안한 인생의 수십 년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심한 고통을 받는다거나 격한 욕구나 도피에서 생기는 큰 불안과 고뇌에 몸을 맡겨야 한다는 것은 이성의 장점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성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인간은 틀림없이 이러한 고뇌를 초월하고 불사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안티스테네스는 "이성과 목을 맬 밧줄, 이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플루타르코스, 《스토아학파의 모순에 대하여》, 제14장)고 말했다. 그 의미는 인생에는 실로 많은 괴로운 일과 번거로운 것이 있기 때문에 사상을 정돈하여 이것들을 초월하거나, 인생을 버리는 것 중의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결핍이나 고뇌는 직접 또는 사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사물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만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야말로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결핍을 느끼게 하고 고통을 일으키게 하는 유일하고 필연적인 조건이다. "가난함이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고통을 가져온다."(에픽테토스, 《단편》, 제25)


희망을 낳고 키우는 것은 기대나 요구 606

그뿐만 아니라 희망을 낳고 키우는 것은 기대나 요구라는 것이 경험을 통해 알려졌다. 그러므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괴롭히는 것은 많은 사람, 또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피할 수 없는 악도 아니고, 도저히 수중에 넣을 수 없는 재물도 아니며, 인간이 피할 수 있는 것이나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것들이 조금이라도 많으냐 적으냐 하는 문제이다. 또 절대적으로 수중에 넣을 수 없는 것을 수중에 넣었을 때나 절대적으로 피하기 힘든 것을 피할 때만 우리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은 아니고, 상대적으로 수중에 넣기 힘든 것을 손에 넣고 상대적으로 피하기 어려운 것을 피할 때도 우리의 마음은 아주 평안해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개성에 이미 깃들어 있는 악과 그 개성이 단념해야만 하는 재물과는 상관 없이 고찰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이러한 특성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희망도 만약 그것을 기르는 기대가 없다면 곧 소멸하고 더 이상 고통도 생기지 않는다.


오류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세상과 인간을 몰랐다는 것
606

이 모든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행복은 오직 우리의 요구와 우리가 얻는 것 사이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 관계는 둘 다의 양을 감소하는 것으로도 다른 쪽의 양을 증대하는 것으로도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고통은 본래 우리가 욕망하고 기대하는 것과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과의 불균형에서 생긴다. 그런데 이 불균형은 확실히 인식에 존재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으며, 더 높은 식견이 생기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시포스는 "본성에서 일어나는 것에 관한 경험에 따라 살아야 한다"(《스토바에오스 선집》, 제2권, 제7장, p.134)고 했는데, 그 의미는 세계 속에 있는 사물에 대한 적절한 지식을 가지고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이 어떤 일로 마음의 평정을 잃고 불행을 당해 실신하고 화를 내고 기가 꺽이는 일이 종종 있다. 그것은 사물이 자기의 기대대로 되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그가 오류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세상과 인간을 몰랐다는 것, 무생물은 우연에 의해, 생물은 반대로 목적이나 악의에 의해, 어떠한 개인의 의지도 매사에 방해받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의 인생은 이러한 상태를 일반적으로 알기 위해 그의 이성을 사용하지 않았거나, 대체로 알고 있어도 하나하나에 관해 자세하게 재인식하지 않아서 이에 놀라 마음의 평정을 잃는 경우 판단력이 부족했거나 어느 한쪽이다.*

* "일반적인 개념을 개별적인 것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 모든 인간 악의 원인이므로"
   (에픽테토스의 《
논문집》, 제3권 26장)


큰 기쁨이라는 것도 오류와 망상이다
607

따라서 큰 기쁨이라는 것도 오류와 망상이다. 왜냐하면 희망이 성취된 만족은 결코 영속하는 것이 아니며, 소유와 행복이라는 것은 모두 우연에서 시간을 정하지 않고 빌려온 것이며, 따라서 다음 시간에는 다시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고통은 이러한 망상의 소멸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고통도 망상도 불완전한 인식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현자에게는 고통도 항상 멀리 떨어져 있고 마음의 평정을 방해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좌우할 수 있는 것과 좌우할 수 없는 것 607

스토아학파의 이 정신과 목적에 따라 에픽테토스는 우리가 좌우할 수 있는 것과 좌우할 수 없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여 구별했다. 그리고 우리가 좌우할 수 없는 것은 절대로 기대해서는 안 되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고통, 고뇌, 불안 등을 모면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출발하고, 또 이것을 지혜의 핵심으로 하여 쉴 새 없이 이에 마음을 집중한다. 그런데 우리가 좌우할 수 있는 것은 의지뿐이다. 그리고 이 의지에서 서서히 덕론에 옮겨 간다. 즉 우리가 좌우할 수 없는 외부 세계가 행복과 불행을 규정한다고 하면, 우리 자신이 마음속으로 만족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 의지에서 생긴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스토아학파의 윤리학은 전체적으로 볼 때 실제로 인간의 커다란 특권인 이성을 중요시하고 행복을 가져오는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는 중대하고 존경할 만한 시도이다.

      어떻게 하면 평안하게 일생을 보낼 수 있을까,
      채울 수 없는 욕망이 언제나 너를 혼란에 빠뜨려 괴롭히지 않도록,
      별로 이익이 되지 않은 일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고 희망을 갖지도 말라.
                                                         - 호라티우스, 《서간집》, 18의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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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연 2012-05-31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 잘보고갑니다^^

oren 2012-06-01 16:07   좋아요 0 | URL
DJ류연님 반갑습니다. 그리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동서문화사 월드북 27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권기철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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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항상, 가끔, 대체로

'모든 오류는 귀결에서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추리'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또한 그 귀결이 그 해당 근거에서 생긴 것이지 다른 근거에서 생길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에는 타당하지만, 그 밖의 경우에는 타당하지 않은 추리다. 오류를 범하는 사람은 하나의 귀결에 그 귀결이 전혀 가질 수 없는 근거를 설정한다. 이 경우 그에게는 오성이 실제로 부족하다. 말하자면 원인과 결과와의 결합을 직접 인식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증거이다.

또한 더 빈번한 경우이긴 하지만,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귀결에 어떤 근거를 규정하는 경우, 물론 그 근거는 가능하지만, 귀결에서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추리 전체에 첨가하여, 그 해당 귀결은 '항상' 그가 진술한 근거에서만 생긴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완전한 귀납을 행한 후에 비로소 가능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오직 전제만 하고 있다. 따라서 그 '항상'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광범한 개념이며, 그 대신 '가끔'이라든가 또는 '대체로'라고 말하기만 하면 별 지장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결론은 미결정의 것으로 되며, 그러한 결론으로서는 잘못이 없다. 그런데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상술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추론하는 것은 조급한 탓이 아니면 가능성에 관한 지식이 제한되어 있어서, 그 때문에 행해야 할 귀납의 필연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류는 가상과 유사하다. (5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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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 까치글방 138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 옮김 / 까치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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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움에 대한 본질적인 경향


거리를 없앰은 거리를,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의 멂을 사라지게 함을, 가까워지게 함을 말한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거리를 없애며 존재한다. 그는 그가 무엇인 그 존재로서 그때마다 존재자를 가까이에서 만나도록 해준다. 거리를 없앰은 멂을 발견한다. 이 멂은 거리와 마찬가지로 현존재적이지 않은 존재자에 대한 범주적 규정이다. 그에 반해서 거리를 없앰은 실존범주로서 확고하게 견지되어야 한다. 도대체 존재자가 현존재에게 그것의 멂이 발견되는 한에서만 세계내부적인 존재자 자체에서 다른 것과 관련되어서 "거리"와 간격이 접근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존재자들 가운데 어떤 것도 그것의 존재양식상 거리를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단지 거리를 없앰에서 발견되는 측정 가능한 간격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거리없앰은 우선 대개 둘러보는 가깝게 함, 조달함으로서의 가까이 가져옴, 예비해놓음, 손안에 가짐이다. 그런데 존재자를 순수하게 인식하며 발견하는 특정한 방식들도 가깝게 함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현존재에는 가까움에 대한 본질적인 경향이 놓여 있다.  우리가 오늘날 다소 강요되듯이 함께 행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속도상승은 멂을 극복하도록 몰아세운다. 예를 들면 "라디오 방송"과 함께 현존재는 오늘날 일상적 주위세계의 확장과 파괴라는 방법으로써 그것의 현존재의 의미를 아직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세계'의 거리를 없애고 있다. (149쪽)



침묵함

말함의 다른 본질적 가능성의 하나인 침묵함도 동일한 실존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 서로 함께 말하는 가운데 침묵하고 있는 사람이 말을 끝없이 하는 사람보다 더 본래적으로 "이해하게끔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해를 형성할 수 있다. 어떤 것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이해가 증진된다는 보장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장황하게 말함은 이해된 것을 은폐하고 거짓 명료성 속으로, 다시 말해서 진부함의 몰이해로 이끈다. 그렇지만 침묵함이 벙어리로 있음은 아니다. 벙어리는 오히려 거꾸로 "말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벙어리는 그가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애당초 그런 것을 증명할 가능성조차 없다. 그리고 천성적으로 말수가 적은 사람도, 벙어리와 마찬가지로, 그가 침묵하고 있고 침묵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은 주어진 [결정적] 순간에 침묵할 줄도 모른다. 오직 진정한 말함에서만 본래적으로 침묵함도 가능한 것이다. 현존재는 침묵할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인가 말할 것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풍부하게 열어밝힐 처지에 있어야 한다. 그때에 과묵함[침묵하고 있음]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잡담"을 눌러버린다. 침묵하고 있음은 말함의 양태로서 현존재의 이해가능성을 근원적으로 분류파악하여, 이 이해가능성에서부터 진정한 들을 수 있음과 투명한 서로 함께 있음이 생기게 한다.(227쪽)


호기심

봄의 근본구성틀은 "보는 것"에 대해서 일상성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존재경향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그것을 호기심이라는 용어로 지칭하도록 한다. 그런데 호기심이라는 용어는 그 특징상 보는 것에 제한되어 있지 않고 세계를 독특하게 감지하며 만나게 하는 경향을 표현한다. 우리는 이 현상을 원칙적으로 실존론적-존재론적인 의도를 가지고 해석하지, 좁게 인식함에 방향을 잡지 않는다. 인식이 이미 일찍부터 그리스 철학에서 "보려는 욕망"에서부터 개념파악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존재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글들을 모은 논문집의 첫번째 논문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 모든 인간은 본성상 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의 존재에는 본질적으로 보는 것에 대한 염려가 있다. 이 문장으로써 존재자와 그 존재에 대한 학문적 탐구의 근원을 앞에서 언급한 현존재의 존재양식에서 발견하려고 시도하는 연구가 소개되었다. 학문의 실존론적 기원에 대한 이러한 그리스적 해석은 우연이 아니다. 거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파르메니데스의 문장에 앞서 윤곽잡혀 있던 그것이 명시적인 이해에 이른 셈이다 : 왜냐하면 사유와 존재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존재는 순수한 직관하는 받아들임에 자신을 내보이고 있는 그것이며, 오직 이러한 봄만이 존재를 발견한다. 근원적이고 진정한 진리는 순수 직관에 놓여 있다. 이 테제는 그뒤부터 서양철학의 기초가 된다. 그 테제 안에 헤겔 변증법도 그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오직 그 근거 위에서만 헤겔 변증법이 가능하다.

"봄"의 기이한 우위를 누구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가 욕망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본디 눈에 딸린 것이 보는 것인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른 감관으로 무엇을 알려고 할 때에도 "보다"라는 낱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 '들으라, 얼마나 번쩍이는지', '맡으라, 얼마나 빛나는지', '입을 대라, 얼마나 찬란한지', '만져라, 얼마나 눈부신지.' 그러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보라고 말하고 이 모든 것이 보인다고 말한다. 따라서 눈만이 감각할 수 있는 것을 '보라, 얼마나 빛나는지' 할 뿐 아니라, '소리를 들어보라', '냄새를 맡아보라', '맛을 보라', '얼마나 단단한지 만져보라' 하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체의 감각적 경험을 '눈의 탐욕'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머지 감관들도, 비슷한 점에서 인식함이 문제가 될 때면 눈이 윗자리를 차지하는 봄의 기능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235쪽)


무정주성(無定住性)

그러나 자유롭게 된 호기심은 본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그것에 대한 존재에 이르기 위하여 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기 위해서 보려고 애쓴다. 호기심이 새로운 것을 찾는 이유는 그 새것에서 다시금 새로운 새것으로 뛰어들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봄의 염려에서 중요한 것은, 파악하여 알면서 진리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세계에 맡겨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러기 때문에 호기심은 특이하게 가까운 것에는 머물지 않는 특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호기심은 또한 고찰하며 머무는 여가도 추구하지 않으며, 언제나 새것과 만나는 것을 계속 바꿈으로써 생기는 동요와 흥분을 찾는다. 호기심은 아무 데도 머무르지 않음으로 해서 부단히 산만함[부산함]의 가능성을 배려한다. 호기심은 존재자를 경탄하면서 고찰하는 것, 즉 타우마체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호기심의 관심사항은 경이에 의해서 이해하지 못함에 인도되는 것이 아니다. 호기심은 앎을 배려하는데, 순전히 안 것으로 간주하기 위해서이다. 호기심을 구성하는 두 계기, 즉 배려된 주위세계에 머물지 않음과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산만함[부산함]은 이 현상의 세번째 본질성격의 기초를 부여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무정주성(無定住性)이라고 이름한다. 호기심은 도처에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다. 세계-내-존재의 이러한 양태는 일상적 현존재가 그 안에서 끊임없이 뿌리 뽑히고 있는 그런 새로운 존재양식을 드러낸다.(237쪽)


애매함

누구나 다 무슨 일을 당면하고 있고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고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또한 누구나 다 이제 일어나야 할 일이 무엇이고, 아직 당면하고 있지는 않지만, "본래" 했어야만 했던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할 줄을 이미 알고 있다. 누구나 다 처음부터 이미, 다른 사람이 무엇을 예감하고 느끼는지를 예감하고 감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흔적을 따라다니는 것, 그것도 풍문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은 - 진짜로 사실의 "흔적을" 찾은 사람은 거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법이다 - 애매함이 현존재의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가장 위험한 방식인데, 그렇게 해서 애매함은 이미 현존재의 가능성을 무력화시켜버리기 때문이다. ······

공공적인 해석되어 있음의 애매함은 앞질러 얘기하는 것과 호기심으로 예감하는 것을 본래적인 사건인 것처럼 내놓고 실행과 행위는 추후의 일이며 하찮은 것으로 낙인찍어버린다. 그러기에 '그들' 속에 머물러 있는 현존재의 이해는 자신의 기획투사에서 끊임없이 진정한 존재가능성을 잘못 보고 있다. 현존재는 언제나 애매하게 "거기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서로 함께 있음의 공공의 열어밝혀져 있음 안에, 가장 요란한 잡담과 가장 솜씨 좋은 호기심이 "사업"을 관장하고 있는 곳에, 일상적으로는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아무 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곳인 거기에 존재한다.

이러한 애매함이 호기심에게는 언제나 그것이 찾는 것을 건네주고, 잡담에게는 마치 그 속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듯한 가상을 마련해준다.

이러한 세계-내-존재의 열어밝혀져 있음의 존재양식이 서로 함께 있음 그 자체도 철저히 지배한다. 타인은 우선 사람들이 그에 관해서 들은 것,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말하고 알고 있는 그것을 근거로 "거기에" 존재한다. 잡담은 우선 근원적인 서로 함께 있음 사이로 끼어든다. 누구나 먼저 우선 타인의 눈치를 살펴서,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것에 대하여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본다. '그들' 속에 서로 함께 있음은 절대로 폐쇄되어 무관심하게 옆에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니고, 긴장 속에 애매하게 서로를 살피며, 몰래 서로 엿들으며 있는 것이다. 서로를 위한다는 가면 아래 서로를 적대하는 연출을 진행하고 있다.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애매함이 위장과 왜곡을 명시적으로 의도한 데에서 비로소 생기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 개별 현존재가 애매함을 비로소 야기시켜놓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애매함은 이미 하나의 세계 안내 내던져져 있는 서로 함께 있음인 그런 서로 함께 있음 속에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애매함이 공공적으로는 은폐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해석이 '그들[자신들]'의 해석되어 있음의 존재양식에 해당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언제나 저항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설명을 '그들'의 동의를 얻어서 확증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오해일 것이다.(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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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2-05-24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께서 밑줄 그어놓으시니 제게 돌올하게 보입니다. 아니 왜 내 책에는 이런 말이 없지? 하고 다시 보니 책이 <존재와 시간>이 아니라 <시간과 존재>네요. 이게 같은 책이 아니라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 무지녀입니다.

oren 2012-05-25 13:06   좋아요 0 | URL
'단순한' 밑줄긋기에 소중한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알라딘에서 검색해봐도 찾기 어려운데) 반딧불이님께서 말씀하신 <시간과 존재>라는 책도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과 '같은' 책이겠지요.
 
열정과 기질
하워드 가드너 지음, 문용린 감역, 임재서 옮김 / 북스넛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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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하버드 대학교의 교육심리학과 교수이자 다중지능이론의 창시자로 유명한 하워드 가드너가 쓴 책이다.

원제목은 Creating Minds인데 번역서로 나온 제목은 '열정과 기질'이어서 원제목의 느낌에서 너무 벗어난 제목으로 책이 나오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이 책에서 저자는 '창조성'은 어떻게 길러지는가를 탐구하면서, 그 사례들로 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을 살았던 '창조적 거장들'을 심도있게 분석해 놓았다.

그 인물들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세상에 홀로 맞선 사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영원한 아이), 파블로 피카소(신동과 천재),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음악가이자 정치가), T.S.엘리엇(경계선에 위치한 거장), 마사 그레이엄(무용계에 혁명을 몰고 온 여자), 마하트마 간디(신념을 실천한 정치 지도자) 등이다.

아놀드 토인비는 이미 20세기 초반에 "역사의 변화는 언제나 창조적인 소수에 의해 주도된다"며 창조성의 중요성을 갈파했다고 한다. 저자인 가드너는 한 개인 속에 잠재한 창조성의 본질은 지능적 요소와 기질적 요소의 특이한 조합으로 파악하고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한 내용들을 지금에 와서 되짚어 보니 문득 얼마 전에 사망한 '스티브 잡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 가운데 잡스만큼 '창조적인' 인물이 또 있을까 싶은데 그가 위대한 창조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가드너의 지적대로 '기질적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지금 우리는 아주 쉽게 수긍하게 되는 것 같다.

저자는 이 책의 목표를 두 가지에 두고 있다. 하나는 창조성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전 창조자의 배출을 가능케 한 현대사회라는 시대적 특성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저자는 여러 창조적인 천재들을 살펴본 결과 나름대로의 공통점을 추출해 내는데 그점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는 창조적인 혁신에는 아이다운 천진성과 어른의 원숙함이 결합해 있다고 생각한다. 20세기의 고유한 천재들은 어린 아이의 감수성을 체화하고 있었다."

"혁신적인 인물이 어린 아이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섬세하게 간파하는 것도 창조성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들었던 생각은 다음과 같다.

'누구나 한 때는 자기 자식이 천재인줄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정말로 자기 자식이 천재라는 생각이 확고하다면 그 천재적 창조성을 제대로 꽃피우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자기 자식이 천재인줄 진짜로 착각하고 있는 부모라면 더더욱 이 책을 읽고 그런 미망에서 하루 빨리 깨어났으면 좋겠다.'

20세기 초반에도 수많은 창조적 천재들이 나타났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창조적 천재들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뿐만 아니라 SNS 혁명을 몰고 온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 역시 세상을 바꾼 창조적 천재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또다른 관점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창조 행위에 담긴 여러가지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조적 천재들의 업적을 뒷받침하는 '토대'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고, 그것은 결국 '현대'를 해명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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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동서문화사 월드북 27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권기철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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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물음에 대해 캠벨이 내놓은 방법, 즉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라는 대답은 제게도 특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나비님의 글에서도 언급된 '쇼펜하우어'가 쓴 책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목이 있어서 '밑줄긋기'해 놓은 부분을 옮겨 봅니다. 나비님의 글과 제가 인용한 쇼펜하우어의 글을 통해 '언제까지나 근원적인 힘을 가진 '참다운 작품'만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새삼 되돌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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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모방자, 꾸미는 자, 모조자, 맹목적인 모방자들은 예술을 개념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참된 작품을 보면, 마음에 들거나 효과가 뚜렷한 점에만 관심을 두고, 이것을 명확하게 하여 개념으로서, 즉 추상적으로 파악한 다음에 공공연하게 또는 은밀하게 교활한 생각을 품고 모방한다. 그들은 기생 식물처럼 타인의 작품에서 양분을 섭취하고, 해파리처럼 그 양분의 색깔을 갖는다. 비유를 사용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끌어 넣은 것을 잘게 깨어 혼합시킬 수는 있지만, 영원히 소화할 수 없는 기계와 같다. 따라서 그 혼합물 속에서는 언제나 다른 성분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거기에서 가려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천재는 유기체처럼 동화하고 변화하고 생산한다. 왜냐하면 천재도 선배나 그 작품에 의해 계발되고 교화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에게 직접 직관적인 것의 인상에 의해 예술적으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생활과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교양이 높아도 천재의 독창성엔 지장을 주지 않는다. 모방자나 꾸미는 자는 타인의 걸작을 개념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개념은 결코 작품에 내적 생명을 부여할 수 없다. 시대 일반, 즉 그 시대의 다수를 점하는 어리석은 대중은 기교를 부린 작품에 기꺼이 갈채를 보내며 환영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은 2,3년이 지나면 재미가 없어져 버린다. 왜냐하면 시대정신, 즉 유행의 개념이 변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작품의 유일한 근거는 이 유행의 개념이다.

자연과 인생에서 직접 이끌어 낸 참다운 작품만이 자연이나 인생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젊고 언제까지나 근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참된 작품은 특정한 시대의 것이 아니라 인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작품은 그 시대에 영합하는 것을 경멸하고 시대로부터는 냉담한 대우를 받으며, 그때그때의 잘못이 그 작품에 의해 간접적이고 소극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나중엔 진가를 인정받게 된다. 또 이러한 작품은 진부해지지 않고, 시대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신선하고 언제나 새롭게 사람의 마음에 호소한다. 이렇게 인정받은 이상, 이제는 무시되거나 오인받을 염려는 없어진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판단력이 출중한 소수의 사람들의 칭찬으로 영광의 왕관을 쓰고 진가를 인정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 소수의 출중한 사람들은 백 년 동안에 아주 적게 나타나지만,* 그들이 말하는 의견은 점차 권위가 확립되는데, 이 권위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이 작품들의 진가를 후세에 호소하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 잇따라 나타나는 위대한 개인이야말로 이 유일한 전거이다. 왜냐하면 동시대의 대중이 언제나 어리석고 우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후세의 대중도 여전히 어리석고 우둔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나 위인들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한 말을 읽어 보라. 인간은 언제나 같기 때문에 위인들의 탄식도 지금이나 옛날이나 변함이 없다. 어느 시대에나 또 어떠한 예술에서도 작풍이 정신을 대리하며, 정신을 소유하는 것은 언제나 위대한 개인뿐이다. 그러나 작풍이란 모든 시대에 존재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은 정신의 현상이 벗어 버린 낡은 의복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후세의 갈채는 동시대의 갈채를 희생하여 얻는 것이며, 또 동시대의 갈채는 후세의 갈채를 희생하여 얻는 것이다.(764쪽)

 * "격랑을 헤엄치는 사람은 드물게 나타난다(Apparent rari, mantes in gurgite vasto)." 출전은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1권 118.

(오래 전에 읽었던『아이네이스』(도서출판 '숲'에서 출간한 천병희 번역본)를 펴보니 해당 대목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몇 사람만이 광대한 심연 위에서 남자들의 무구들과 널빤지들과 트로이야의 보물들과 함께 파도 사이로 헤엄치는 것이 보일 뿐이다.")

 -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권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2고찰:
충족 이유율에 근거하지 않는 표상, 플라톤의 이데아, 예술의 대상'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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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2-01-24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이 갈수록 고전에 대한 갈망이 커져갑니다. 무수히 쌓인 독서리스트가 실제로 큰 진보를 못 가져왔다는 아쉬움을 갖게 합니다. 그것보다 먼 예전 고전을 읽으며 받았던 추억이 가슴을 움직입니다.. 좋은 독서와 추천 감사드립니다 ^^

oren 2012-01-26 12:09   좋아요 0 | URL
사마천님께서도 고전을 아주 많이 읽으신 걸로 압니다만, 아무래도 '실생활'의 지배를 받다 보면 고전을 가까이 하기가 쉽지 않을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양주동 선생님께서 '고칠현삼제'를 권한 적이 있지만, 오랜 시간의 테스트를 견뎌낸 고전들이 그 생명력과 가치에 비해 언제나 외면받는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늘 변치 않는 것 같습니다.

라로 2012-01-26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쇼펜하우어를 읽어볼게요~. 하지만 쇼펜하우어를 읽기전에 칸트, 괴테,,,플라톤,,에 이르기까지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아요,,,일단 오렌님과 발 맞추기 위해서 단테를 먼저 읽으려고 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oren 2012-01-26 14:06   좋아요 0 | URL
저도 나비님의 글 덕분에 좋은 책과 훌륭한 사람들을 좀 더 많이 만나게 될 것 같아 기쁩니다.

그리고, 나비님께서 전해주신 캠벨의 얘기는 정말 흥미롭습니다.
("나는 조이스와 토마스 만과 슈펭글러를 읽었다. 슈펭글러는 니체를 언급했다. 나는 니체도 읽었다. 그러다가 니체를 읽으려면 쇼펜하우어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쇼펜하우어도 읽었다. 그러다가 쇼펜하우어를 읽으려면 칸트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접하면서 '문헌학이 아니라 철학'에 몰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느 한 고서점에서 두 권으로 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구입한 즉시 다 읽고, 한동안 이 책에 열광했다고도 합니다. 그가 라이프치히 시절에 쓴 편지나 글에는 거의 종교적 귀의라고 할 정도로 쇼펜하우어 철학에 몰두했다고도 하는데, 니체는 그를 자기 자신보다 더 신뢰하므로 절대적으로 복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까지 생각했다고 합니다.

니체가 쇼펜하우어를 '영웅적인 인물'로 존경했던 이유는 '우리의 삶이 결국은 비극적이고도 무의미한 것이어서 우리를 절망하게 하더라도, 인간의 눈을 가리고 있는 천을 걷어낼 것을 요구해야 하며 쇼펜하우어 스스로가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그런 영웅적인 노력을 계속 했다'는 데 있다고 합니다.

쇼펜하우어는 괴테와도 특별히 인연이 많았던 인물인데, 그가 괴테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는 내용도 영웅적입니다.

“가슴속에 그 어떤 의문도 품고 지내지 않을 수 있는 용기, 바로 이 용기가 철학자를 만든다. 이러한 이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와 비슷한데, 그는 자신의 운명의 비밀이 풀리면 자신에게 끔찍한 일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물이다.”

oren 2012-01-27 22:59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 올라온 화제의 서재글 때문에)2001년 여름에 제주도 앞바다에서 잡았던 '만새기'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찾기 위해 벽장(?) 같은 곳을 뒤적거리다가, 정작 '만새기가 담긴 사진'은 찾지도 못한 채 마침 그해 가을에 가족들과 함께 유럽여행을 갔을 때 '단테가 살던 집' 앞에서 찍은 사진을 '우연히' 발견했답니다.

그런데 피렌체에 있는 '단테'의 집에 들렀을 때만 하더라도(2001.10.4) 저는 그의 저작인 '신곡'은 구경조차 하지 못했던 터라 괜히 머쓱했는데, 오늘 다시 그 사진을 보니 ('신곡'을 통해 그와 열심히 지옥과 연옥과 천국까지 실컷 돌아다닌 덕분인지 몰라도) '단테'와 제법 많이 가까워진 느낌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