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월드북27-1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권기철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물음에 대해 캠벨이 내놓은 방법, 즉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라는 대답은 제게도 특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나비님의 글에서도 언급된 '쇼펜하우어'가 쓴 책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목이 있어서 '밑줄긋기'해 놓은 부분을 옮겨 봅니다. 나비님의 글과 제가 인용한 쇼펜하우어의 글을 통해 '언제까지나 근원적인 힘을 가진 '참다운 작품'만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새삼 되돌아 보게 됩니다.

 * * *

그런데 모방자, 꾸미는 자, 모조자, 맹목적인 모방자들은 예술을 개념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참된 작품을 보면, 마음에 들거나 효과가 뚜렷한 점에만 관심을 두고, 이것을 명확하게 하여 개념으로서, 즉 추상적으로 파악한 다음에 공공연하게 또는 은밀하게 교활한 생각을 품고 모방한다. 그들은 기생 식물처럼 타인의 작품에서 양분을 섭취하고, 해파리처럼 그 양분의 색깔을 갖는다. 비유를 사용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끌어 넣은 것을 잘게 깨어 혼합시킬 수는 있지만, 영원히 소화할 수 없는 기계와 같다. 따라서 그 혼합물 속에서는 언제나 다른 성분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거기에서 가려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천재는 유기체처럼 동화하고 변화하고 생산한다. 왜냐하면 천재도 선배나 그 작품에 의해 계발되고 교화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에게 직접 직관적인 것의 인상에 의해 예술적으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생활과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교양이 높아도 천재의 독창성엔 지장을 주지 않는다. 모방자나 꾸미는 자는 타인의 걸작을 개념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개념은 결코 작품에 내적 생명을 부여할 수 없다. 시대 일반, 즉 그 시대의 다수를 점하는 어리석은 대중은 기교를 부린 작품에 기꺼이 갈채를 보내며 환영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은 2,3년이 지나면 재미가 없어져 버린다. 왜냐하면 시대정신, 즉 유행의 개념이 변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작품의 유일한 근거는 이 유행의 개념이다.

자연과 인생에서 직접 이끌어 낸 참다운 작품만이 자연이나 인생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젊고 언제까지나 근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참된 작품은 특정한 시대의 것이 아니라 인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작품은 그 시대에 영합하는 것을 경멸하고 시대로부터는 냉담한 대우를 받으며, 그때그때의 잘못이 그 작품에 의해 간접적이고 소극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나중엔 진가를 인정받게 된다. 또 이러한 작품은 진부해지지 않고, 시대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신선하고 언제나 새롭게 사람의 마음에 호소한다. 이렇게 인정받은 이상, 이제는 무시되거나 오인받을 염려는 없어진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판단력이 출중한 소수의 사람들의 칭찬으로 영광의 왕관을 쓰고 진가를 인정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 소수의 출중한 사람들은 백 년 동안에 아주 적게 나타나지만,* 그들이 말하는 의견은 점차 권위가 확립되는데, 이 권위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이 작품들의 진가를 후세에 호소하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 잇따라 나타나는 위대한 개인이야말로 이 유일한 전거이다. 왜냐하면 동시대의 대중이 언제나 어리석고 우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후세의 대중도 여전히 어리석고 우둔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나 위인들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한 말을 읽어 보라. 인간은 언제나 같기 때문에 위인들의 탄식도 지금이나 옛날이나 변함이 없다. 어느 시대에나 또 어떠한 예술에서도 작풍이 정신을 대리하며, 정신을 소유하는 것은 언제나 위대한 개인뿐이다. 그러나 작풍이란 모든 시대에 존재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은 정신의 현상이 벗어 버린 낡은 의복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후세의 갈채는 동시대의 갈채를 희생하여 얻는 것이며, 또 동시대의 갈채는 후세의 갈채를 희생하여 얻는 것이다.(764쪽)

 * "격랑을 헤엄치는 사람은 드물게 나타난다(Apparent rari, mantes in gurgite vasto)." 출전은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1권 118.

(오래 전에 읽었던『아이네이스』(도서출판 '숲'에서 출간한 천병희 번역본)를 펴보니 해당 대목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몇 사람만이 광대한 심연 위에서 남자들의 무구들과 널빤지들과 트로이야의 보물들과 함께 파도 사이로 헤엄치는 것이 보일 뿐이다.")

 -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권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2고찰:
충족 이유율에 근거하지 않는 표상, 플라톤의 이데아, 예술의 대상'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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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2-01-24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이 갈수록 고전에 대한 갈망이 커져갑니다. 무수히 쌓인 독서리스트가 실제로 큰 진보를 못 가져왔다는 아쉬움을 갖게 합니다. 그것보다 먼 예전 고전을 읽으며 받았던 추억이 가슴을 움직입니다.. 좋은 독서와 추천 감사드립니다 ^^

oren 2012-01-26 12:09   좋아요 0 | URL
사마천님께서도 고전을 아주 많이 읽으신 걸로 압니다만, 아무래도 '실생활'의 지배를 받다 보면 고전을 가까이 하기가 쉽지 않을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양주동 선생님께서 '고칠현삼제'를 권한 적이 있지만, 오랜 시간의 테스트를 견뎌낸 고전들이 그 생명력과 가치에 비해 언제나 외면받는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늘 변치 않는 것 같습니다.

라로 2012-01-26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쇼펜하우어를 읽어볼게요~. 하지만 쇼펜하우어를 읽기전에 칸트, 괴테,,,플라톤,,에 이르기까지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아요,,,일단 오렌님과 발 맞추기 위해서 단테를 먼저 읽으려고 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oren 2012-01-26 14:06   좋아요 0 | URL
저도 나비님의 글 덕분에 좋은 책과 훌륭한 사람들을 좀 더 많이 만나게 될 것 같아 기쁩니다.

그리고, 나비님께서 전해주신 캠벨의 얘기는 정말 흥미롭습니다.
("나는 조이스와 토마스 만과 슈펭글러를 읽었다. 슈펭글러는 니체를 언급했다. 나는 니체도 읽었다. 그러다가 니체를 읽으려면 쇼펜하우어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쇼펜하우어도 읽었다. 그러다가 쇼펜하우어를 읽으려면 칸트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접하면서 '문헌학이 아니라 철학'에 몰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느 한 고서점에서 두 권으로 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구입한 즉시 다 읽고, 한동안 이 책에 열광했다고도 합니다. 그가 라이프치히 시절에 쓴 편지나 글에는 거의 종교적 귀의라고 할 정도로 쇼펜하우어 철학에 몰두했다고도 하는데, 니체는 그를 자기 자신보다 더 신뢰하므로 절대적으로 복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까지 생각했다고 합니다.

니체가 쇼펜하우어를 '영웅적인 인물'로 존경했던 이유는 '우리의 삶이 결국은 비극적이고도 무의미한 것이어서 우리를 절망하게 하더라도, 인간의 눈을 가리고 있는 천을 걷어낼 것을 요구해야 하며 쇼펜하우어 스스로가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그런 영웅적인 노력을 계속 했다'는 데 있다고 합니다.

쇼펜하우어는 괴테와도 특별히 인연이 많았던 인물인데, 그가 괴테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는 내용도 영웅적입니다.

“가슴속에 그 어떤 의문도 품고 지내지 않을 수 있는 용기, 바로 이 용기가 철학자를 만든다. 이러한 이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와 비슷한데, 그는 자신의 운명의 비밀이 풀리면 자신에게 끔찍한 일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물이다.”

oren 2012-01-27 22:59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 올라온 화제의 서재글 때문에)2001년 여름에 제주도 앞바다에서 잡았던 '만새기'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찾기 위해 벽장(?) 같은 곳을 뒤적거리다가, 정작 '만새기가 담긴 사진'은 찾지도 못한 채 마침 그해 가을에 가족들과 함께 유럽여행을 갔을 때 '단테가 살던 집' 앞에서 찍은 사진을 '우연히' 발견했답니다.

그런데 피렌체에 있는 '단테'의 집에 들렀을 때만 하더라도(2001.10.4) 저는 그의 저작인 '신곡'은 구경조차 하지 못했던 터라 괜히 머쓱했는데, 오늘 다시 그 사진을 보니 ('신곡'을 통해 그와 열심히 지옥과 연옥과 천국까지 실컷 돌아다닌 덕분인지 몰라도) '단테'와 제법 많이 가까워진 느낌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