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개있다 - 저것이 아닌 이것을 위한 인문 에세이
신아연 지음 / 책과나무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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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배려, 동행, 상생이라는 파트로 나누어진 글들은 지은이가 이야기한대로 ‘사람살이’이야기다. 사람 내음이 물씬 배어있는 따뜻한 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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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개있다 - 저것이 아닌 이것을 위한 인문 에세이
신아연 지음 / 책과나무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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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개있다 - 저것이 아닌 이것을 위한 인문 에세이

_신아연 (지은이) | 책과나무

 

 

독서는커녕 제대로 된 글 한줄, 완성된 문장을 읽는 인내심마저 잃은 채, 멍하니 있으면 차라리 유익할 것을 전화기를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시간을 죽이고 삶을 축내는 그 무서운 중독성에 진저리를 칠 때가 있습니다.” 지은이가 스마트폰과 현대인의 일상을 묘사한 대목이다. 물론 스마트폰을 통해 책을 읽기도 하고, 이런 저런 정보를 찾는 경우도 많기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지은이는 구식 전화기를 고수하다가 사진을 찍고 싶어서 폰을 바꿨다고 한다. “아름다운 호주의 자연을 사진에 담아 글로 묘사하고 싶어서입니다. ‘사진이 있는 글을 써보고 싶은 욕심 때문입니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이 책의 지은이 신아연은 호주로 이민 가서 21년을 살다가 3년 전에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역이민인 셈이다. “이 책은 자유칼럼그룹과 호주 한국일보, 그리고 최근 1년간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글 모음집입니다. 호주 살이, 한국살이가 뒤섞이고, 가족과 함께 한 시간과 혼자의 시간이 혼재된 들쑥날쑥한 체험이지만 누구든, 어디든 결국은 모두가 사람살이라는 것에 공감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공감, 배려, 동행, 상생이라는 파트로 나누어진 글들은 지은이가 이야기한대로 사람살이이야기다. 사람 내음이 물씬 배어있는 따뜻한 글들이다. 책 제목에 쓰인 내 안에 개있다의 내용이 궁금했다. ‘에 대한 이미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반려동물로 개를 키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책 제목에서 개의 못된 성질을 연상했다. 내 생각이 틀렸다. “일상은 힘이 센 법이지요. ‘이상일상을 이길 수 없고, ‘일상이 모여 일생을 이룬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맞는 말이다. 나의 하루가 모여서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고, 십년이 되고 나의 평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 이 자리와 현재 나의 생각이 소중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뜬금없는 저것으로 인해 손에 잡히는 이것이 희생되어서는 안 되며, 매끈하게 정제된 저것이 소박하고 질박한 이것을 밀어내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박제된 저것대신 생동으로 빛나는 이것을 보듬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삶의 자세를 지은이는 내 안에 개있다는 말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개는 절대로 주인에 대한 충절을 버리거나 딴 마음을 품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저것이 아닌 이것을 섬긴다. “우리도 개처럼나의 근원이자 나의 지성 너머에 있으면서 매일 매일의 내 삶에 개입하는 절대적 존재를 인정할 때 비로소 저것이 아닌 이것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를 패러디한 죽은 한글의 사회라는 칼럼은 웃고 넘어가기엔 뒤끝이 씁쓸하다. 한글날을 맞아 한 포털 사이트가 대학생 617명을 대상으로 맞춤법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가 매우 충격적으로 나왔다. “감기 빨리 낳으세요. 어의가 없어요. 얼마 전에 들은 예기가 있는데요. 저한테 일해라 절해라 하지 마세요. 이 정도면 문안하죠. 구지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설앞장이 안 열려요. 무리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지은이가 호주에서 21년 동안 한국에 다시 돌아온 후, 마음고생이 많았다. 담담하게 그 이야기를 적었다. 처음에는 좀 어리바리한 지은이를 향해 조선족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더니, 최근에는 외계인 같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는 것이다. 호주라는 이질 문화권에서 살다 온 사실에 대해 한 치의 배려도 없이 원체 이상하게 생겨 먹은 외계 생물 취급을 당하는 것이 지은이를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한다. “‘다르면서고분고분하지도 않으면, 그때부터는 틀린 것으로 찍히게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는 것이 고달파집니다. 제 한국 생활이 점점 고달파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아홉 살 꼬마는 아니지만(초등학교 2학년 때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왔을 때 겪었던 일을 회상) 우울한 일입니다.” 언제까지 나와 다소 다른 점을 틀렸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것인가? 언제까지 오른손을 바른손이라고 부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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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책
세라 메이틀런드 지음, 홍선영 옮김 / 마디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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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이 길어지면, 입 벌려 소리를 내는 것 이외의 모든 감각들이 예민해진다. 내가 여러 해전 영성 프로그램에 참여 하면서 느낀 점이다. 특히 시각과 청각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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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책
세라 메이틀런드 지음, 홍선영 옮김 / 마디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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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책   

_세라 메이틀런드 (지은이) | 홍선영 (옮긴이) | 마디

원제 : A Book of Silence

 

    

 

이른 아침,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빛나는 아침이다. 오늘따라 바람도 잠잠하다. 완벽하다 싶을 만큼 고요하다. 이따금 작은 새 몇 마리가 짹짹거리고 조금 전에는 까마귀 한 쌍이 기침을 토하듯 요란하게 울부짖으며 날아갔다.” 하룻밤 잠시 머무른 곳에서 느끼는 아침이 아니다. 이 책의 지은이는 커피 잔을 들고 작은 집 문간에 앉아 아무것도 없는 진귀한 풍경이 펼쳐지는 계곡을 내려다본다. 정말 멋지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려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내 생각에 그녀는 잘 알지 못했다. 내게는 좁은 방이 아닌 나만의 황무지가 필요하다.” 작가의 친구가 얼마 전에 다녀갔다. 그녀가 벌인 미친 짓을 보러 왔다가 짜증을 버럭 내면서 예리하게 꼬집었다. “세라, 너 밖에 없네. 반경 삼십 킬로미터 안에 아무것도 없잖아!”

 

서머싯 몸 상 수상작가 세라 메이틀런드. 아무리 그녀만의 공간이 필요하기로서니 황무지까지 갈 필요가 있었을까? 그것도 혼자서. 그녀는 사십 대 후반에 도시를 떠나 침묵 속에 몸과 마음을 푹 담근다. 침묵과 사랑에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침묵을 깊이 묵상한다. 인류가 걸어온 침묵의 여정을 생각한다. 침묵의 영향력을 이야기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그녀가 걸어온 길을 담담하게 전해준다. “나는 몹시 소란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때는 몰랐는데 돌이켜보니 그렇다는 이야기다. 작가 세라는 1950년 육남매 중 둘째이자 큰딸로 태어났다. 그들(형제, 자매들)은 엄청 활달했고 한 덩어리였다. 자기성찰이나 고독, 침묵 또는 무리에서 벗어나는 어떤 행동도 용납되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님이 만들어준 마법 같은 공간 안에서 그들은 놀고 돌아다니고 싸우고 모험하는 엄청난 신체의 자유를 누렸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줄 알았다. 그녀는 소란스러운 삶이, 모든 대화가 좋았다. 평생을 말하고 또 말하며 살았다.

 

본인이 간절히 원하던 작가가 되고 난 후, 삶의 굴곡도 함께 왔다. 결혼 생활의 위기도 찾아오고, 별난 일도 겪게 된다. 아주 생생하고 어수선한 목소리또는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정신분열증증상이었다.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는 두려움은 공포로 변했다. 1990년대 초반 그녀는 삶의 방식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침묵과 고독이 그녀의 삶에 스며들게 된다. ‘침묵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로는 침묵은 모든 소음의 부재와 말의 부재라고 하는데, 그것이 전부일까? 작가는 침묵을 깨는 것은 말과 단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침묵에도 내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음과 정신의 고요가 그것인데 텅 비어 있지 않고 풍요롭다.” 조용함이나 평화는 고요 자체와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도시 한복판에서 침묵을 즐기며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높은 황무지의 거대한 무()’를 찾게 된다.

 

 

 

 

헨리 소로의 월든 호숫가 이야기가 왜 안 나오나 했다. 소로가 남긴 글이다. “내가 숲으로 간 것은 신중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삶의 본질적인 사실만 직면하면서 그로부터 내가 배울 수 있을지 알아보고, 생이 다하는 날, 내가 제대로 살지 못했음을 후회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았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면, 입 벌려 소리를 내는 것 이외의 모든 감각들이 예민해진다. 내가 여러 해전 영성 프로그램에 참여 하면서 느낀 점이다. 특히 시각과 청각이 그렇다. 작가는 침묵 속에서 독서를 한다. “독서는 보통 고요하면서 온전히 긍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몇 안 되는 행위이다.” 침묵에 싸여 살아가는 작가에게 사람들이 종종 하는 말이 있다.“책 많이 읽으셨겠네요.” 책을 가까이 안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독서는 침묵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침묵이 두려워 책을 가까이 못하는가? 침묵을 고독과 동의어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작가는 침묵과 독서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독서에 대해 생각하면 나는 아주 불가사의한 무언가의 존재를 느낀다.” 독서가 침묵이라는 단어의 제대로 된 의미에 걸맞은 것인가? 독서는 주변의 침묵을 심화하는가 아니면 깨뜨리는가? 독서를 할 때 우리는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가,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가, 아니면 작가의 목소리를 듣기보다 작가의 마음과 생각을 직접 들여다보는가? 입말과 반대되는 글말과 관련된 침묵을 뭐라 정의내리면 좋을까? “언어의 부재를 침묵으로 이해한다면, 전체가 언어로 이뤄진 책에는 침묵이 있을 수 없다. 반면 침묵을 두 번째 의미인 소리의 부재로 받아들인다면 글이 인쇄된 책은 어떤 소리도 내지 않는다.”

 

황무지에서조차도 침묵의 갈증을 느낀 작가는 마침내 사막의 은둔자들을 찾아 시나이 사막으로 떠난다. “사막에서 나는 침묵이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았다. 침묵은 본질적으로 자유의 한 형태다. 침묵은 자유와 자유로운 선택, 내면의 명확성과 힘을 창출한다. 자아로부터의 자유, 자기 자신이 되는 자유를 창출한다.” 침묵을 찾기 위해 소로처럼 숲으로, 작가처럼 황무지로 사막으로까지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번잡스러운 일상이 익숙해지다 못해 중독이 된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침묵은 결코 비생산적인 것이 아니다. 통상적인 고독과는 차원이 다르다. 침묵의 시간이 불안하다면 오히려 그것이 문제다. 작가는 침묵이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침묵은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때가 분명히 있다. 이 책을 침묵으로 가는 일탈을 위한 길동무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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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 죽음 - 마지막까지 인간다운 존엄함을 잃지 않는 품격이 있는 죽음을 위하여!
나가오 카즈히로 지음, 유은정 옮김 / 한문화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죽음‘이란 주제는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피한다고 피해질 수 있는 길이 아니지요. 죽음은 마치 생일날 케익 위에 켜진 많은 촛불이 후~ 한 번에 꺼지듯 그렇게 꺼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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