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로 읽는 슬픔과 기쁨 - 예술가의 육필 편지 49편, 노천명 시인에서 백남준 아티스트까지
강인숙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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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군에 입대한 친구의 아들이 훈련 중 특별히 허락을 받고 부모에게 전화를 했다. 

“집에 편지를 쓰라고 하는데 비효율적이야. E-mail로 하면 간단한데..”

이 녀석 막상 편지를 쓰라고 하니까..막막했을 것이 틀림없다. 손 편지와 E-mail은 편지라는 성격은 같을지라도 그 과정 중에 벌써 분위기가 달라진다. E-mail 뿐이랴, SNS는 분, 초단위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답한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누구와 같이 있는지, 현재 기분 상태가 어떤지 서로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기록이 대부분 흔적 없이 사라진다. 계속 새로운 정보와 소식이 그 자리를 메운다.  


손 편지를 마지막으로 써본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우편함에는 각종 청구서와 DM만이 쌓여간다. 달포 전 딸을 시집보내고 난후 다녀가신 하객들에게 손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역시 마음뿐이었다. 딸 내외가 아예 인쇄물로 감사 편지를 뽑아왔다. 하객들에겐 너무 사무적이고 의식적인 느낌이 들겠지만, 시간 없다는 핑계로 그냥 보내 드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를 본다는 것은 흥미롭다. 아마도 인간의 마음속 자리 잡고 있는 내밀한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궁금증이 한 몫 하는 것으로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총 49편의 예술가들의 편지글이 편지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편저자인 강인숙님은 “편지는 수신인이 혼자서만 읽는 호사스런 문학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혼자서 듣는 오케스트라의 공연과 같다. 이 책의 독자들도 모두 수신인이 된 기분으로, 그런 호사를 누려보기를 권하고 싶다.” 라고 쓰고 있다. 


많은 편지글 중 특히 마음이 머무는 것은, 고인이 되신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이 이해인 수녀님께 보낸 편지이다. 두 분 모두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탓도 있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1931년 경기도 개풍 출신이다.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전쟁으로 중퇴했다. 1970년 마흔이 되던 해에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11년 작고 했다. 저서로 『엄마의 말뚝』『아주 오래된 농담』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등이 있다. 

이해인 수녀님은 1945년 강원도 양구 출생이다. 1964년 수녀원에 입회했으며 필리핀 성루이스대학 영문과,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했다. 새싹문화상, 여성동아대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민들레의 영토』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사랑할 땐 별이 되고』『기쁨이 열리는 창』『희망은 깨어 있네』등이 있다.  2008년에 직장암 판정을 받아 항암 방사선 치료를 받고 2009년 4월부터 부산에서 장기휴양을 하고 있다.


책에 실린 편지는 2005년 11월에 이 해인 수녀님에게 보낸 글이다. 해인 수녀님은 완서 성생님이 가시고 난후 모두 그분을 잃은 애통 속에 잠겨 있을 때 이 편지를 공개하셨다고 한다. 

“......『민들레의 영토』가 출간된 지 30년이 됐다는 소식에 접하면서 제가 수녀님을 알고 지낸지 몇 년이나 되었나 새삼스럽게 꼽아보니 어쩔 수 없이 그 힘들었던 88년이 기점이 되는군요. 88년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아’소리가 나올 적이 있을 만큼 아직도 생생하고 예

리하게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수녀님이 가까이 계시어 분도수녀원으로 저를 인도해주신 것은 그래도 살아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은 과연 계실까, 죽은 후에 영혼이 갈 곳이 있기나 있나. 죽으면 먼저 간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온통 사후세계 저 하늘나라 가는 일에만 가 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수녀님의 존재, 수녀님의 문학은 제가 이 지상에 속해 있다는 걸 가르쳐 주셨습니다. 죽어서 어떻게 될지는 죽어보면 알게 아니냐, 땅을 보아라, 땅에서 가장 작은 것부터 민들레를, 제비꽃을, 봄까치꽃을…….  마치 걸음마를 배우듯이 가장 미소한 것의 아름다움에서 기쁨을 느끼는 법을 배웠습니다. 제가 지상에 속했고, 여러 착하고 아름다운 분들과 동행할 수 있는 기쁨을 저에게 가르쳐준 수녀님 감사합니다!!”


완서 선생에게 1988년은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다는 것을 지은이 강은숙 교수에게서 듣게 된다. 88올림픽으로 전국이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을 때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완서 선생은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 그래서 “88년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아’소리가 나올 적이 있을 만큼” 이라고 적고 있다. 이때 이해인 시인이 다가와 박완서 선생의 손을 잡아 주었다. 분도수녀원에 데리고 가서 해인 수녀님은 자식을 잃고 쓰러져 가는 니오베(Niobe.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테베 왕 암피온의 왕비. 자식을 잃고 상심하여 슬픔으로 날을 보내다가 돌이 되었는데, 돌에서도 계속하여 눈물이 흘렀다고 한다.)를 붙잡아 일으킨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주변에 사람이 있어야한다. 의지할 수 있고, 붙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강교수는 문화부장관을 역임하신 이어령 교수의 아내이다. 이 책에는 편지마다 필자 강은숙이 「편지를 말하다」라는 글이 첨부되어 있다. 필자는 “해설이라기에는 일관성이 없고 감상문이라고 하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글이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작가를 알리고 그가 살던 시대를 젊은 독자들이 헤아리게 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편지를 말하다」를 읽는 재미가 솔솔찮다. 수,발신인의 관계는 물론 편지의 상황적 배경까지도 짐작이 가게끔 하는 부분이다. 물론 사생활이 지나치게 노출되는 편지글은 볼 수 가 없다. 이미 작고하신 분들의 편지도 있지만, 현재도 대학 강단에서, 창작생활이나 다른 예술 활동을 하시는 분들의 육필 편지를 볼 수 있다.  


글을 읽다가 서늘한 깨우침을 주는 구절이 있었다.

해가 바뀌면서 이곳저곳에서 새해 인사 주고받느라 바쁜 요즈음이다.

소설가 정연희가 시인 김영태에게 보내는 편지다. 

“...새해가 따로 있겠습니까마는 지니고 계신 모든 것이 새롭게 비춰지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렇다. 새해라는 것은 그저 사람세계에서 편하자고 만든 시간개념이다. 해는 떠오른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한결같이 떠오른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문득 손 편지가 쓰고 싶어졌다. 문구점에 들러서 맘에 드는 편지지를 골라봐야겠다. 누구에게 쓸지는 아직 못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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