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사다 - 환자의 마음을 공유하는 의사들 이야기
셔윈 B. 눌랜드 지음, 조현욱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오래된 유머 한 꼭지가 생각납니다. 어느 환자가 수술을 앞두고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에 담당의사에게 이야기합니다. “저 태어나서 수술이 처음이에요. 겁이나 죽겠어요.” 의사가 하는 말 “너무 걱정 마세요. 저도 처음이니까요”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 실제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의사가 있다면, 천하의 멍청이 같은 의사가 될 것입니다. 어느 누가 처음 집도를 하는 의사에게 자기 몸을 맡기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의사에게나 첫 수술환자는 있게 마련입니다. 환자는 모릅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지요 . 단지 의사와 그 주변 동료 몇몇만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의료 임상의 현장은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밖으로 잘 알려지지 않습니다. 진료를 통해 얻어진 환자에 대한 정보를 밖으로 유출시키지 않는다는 의료윤리와도 관계있지만, 굳이 밖으로 이야기가 나돌아서 좋을 것은 무엇이냐는 담합적(?) 분위기 탓도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의 내용은 우리네 실정과 비교하면 예외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국내에 몇 권의 메디컬 에세이집이 소개된 저자 셔윈 B. 눌랜드 교수는 이 책을 일종의 의학판 『캔터베리 이야기』라고 부릅니다. 캔터베리 이야기. 잘 아시지요? 영국의 이야기 문학으로, 제프리 초서의 걸작입니다. 총 30명 내외의 사람들이 런던의 어느 여관에 모여, 순교자 토머스 베켓을 모시는 캔터베리의 유명한 사원으로 순례를 떠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여관집 주인이 자진하여 안내자가 되어 왕복길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는 순례길이 되기 위해 한 사람이 두 가지씩 이야기를 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리하여 순례자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중세에 한창 성행되었던 말하자면 이야기집(集)입니다.

 

책은 의학 에세이집입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수집된 이야기입니다.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 평균 연령과 기대수명이 높아지는 요즈음에 관심이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노인의학 전문의의 이야기입니다. 저자가 ‘노인의학은 의학의 역사상 가장 오래 되었지만, 또한 가장 새로운 것’이라고 표현한 것에 공감합니다. 노인병 전문의를 노인을 위한 가정의라고 표현하고 싶다는군요. 소아과 의사가 어린이들을 위한 가정의 기능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노인의학전문의가 환자를 진찰하는 과정이 의학의 선배들이 주로 해왔던 진찰 과정입니다. 조심스럽게 살피는 신체검사는 히포크라테스 시대 의사들 이후로 시행한 검사와 촉진이 주가 됩니다. 문헌에 의하면 이들은 맥박의 질과 횟수를 적는 것에 더해서 피부의 탄력과 색, 모발의 특징과 분포도, 혀와 구강 점막의 외관을 비롯한 유사 요소들, 그리고 간과 비장의 크기를 기록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다소 아날로그 시대로 넘어간 감이 들지만,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진찰과정입니다. 시진(視診),촉진(觸診), 문진(問診), 청진(聽診)등의 과정이 환자와 의사간의 신뢰감을 형성하고, 의사에겐 보다 정확한 환자의 상태를 확인 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는 핑계와 첨단의 진단 기구를 활용해야 한다는 부담감 사이에서 의사는 갈등을 느낍니다. 물론 현대식 진단장비, 첨단화로 무장한 검사 장비가 환자들에게 큰 혜택이 주어지는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만 기계의 역할이 사람이 할 일을 모두 처리 할 수는 없지요.

 

“신체검사는 진단 방법이지만, 좀 더 미묘한 작용도 한다. 특히 의사와 환자가 접촉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이 그러하다. 손을 올려놓는 행위는 서로를 위협하지 않으면서 발견을 위해 서로 매개하는 두 사람이 접촉하게 해준다. 이 행위에 의해 관계의 양상이 바뀌는데, 그 방향은 친밀감과 신뢰가 커지는 쪽인 경우가 흔하다. (………) 그리고 신체검사를 세심하게 수행하면 많은 것을 알 수 있음은 물론이다. 외모, 유연성, 감촉, 내장기관의 크기와 형태, 경련, 그리고 청진기 검사로 드러난 사실은 진단으로 이어 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복잡한 어떤 검사가 적절한지에 관한 단서를 제공하는 경우가 흔하다. 후자는 광범위한 마구잡이식 추측에 의존하는, 오늘날 그토록 널리 퍼져 있는 행태와 비교된다. 예컨대 전형적인 복부 CT 촬영을 보자. 이를 통해 분명한 정보들이 이것저것 드러나기는 하지만, 실상 이들 중 많은 부분은 신중한 복부 검사를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단순한 복부 엑스선 촬영을 병행하는 경우에 특히 그렇다.” (p.170,171)

 

 

‘금지된 약물의 재발견’이라는 글에서 위험하다고 폐기되었던 약품이 재발견 된 것에 대해 저자 스스로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며 적고 있습니다. 베체트병이라고 있습니다. 베체트병은 1937년 터키의 피부과 의사인 훌루시 베체트가 발견,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국내에는 1961년에 첫 환자가 문헌 보고된 이래 현재 약 5,000∼1만명의 환자가 투병중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베체트병은 입안과 성기가 자주 헐고, 심한 경우 눈의 포도막이나 장에 염증을 일으켜 시각 및 소화기 장애, 말기엔 신경장애까지 일으키는 희귀성 난치병입니다. 보통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발생하며 병의 진행이 심하고 빠른 경우 1∼5 년 내에 실명, 혹은 내부 장기 손상으로 생명을 잃게 되거나 심한 후유증을 앓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 병의 원인과 발생과정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유전병은 아닌 것으로 지적됩니다. 저의 가족 중에도 이 환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증상은 혈액 내 염증수치가 상승되는 것과 입 주변과 입속에 궤양이 자주, 광범위하게 발생하는 것, 피로감이 빨리 오는 것 등입니다. 이러한 베체트병 환자(남)가 저자를 찾아옵니다. 이런 약, 저런 약을 다 써봤지만, 효과를 못보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베체트병 관련 웹사이트에서 찾아낸 제안을 가지고 진료실에 들어와 그를 놀라게 합니다. 그의 상태에 ‘탈리도마이드’가 효과가 있다는 내용 이었습니다.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는 1957년 독일에서 처음 시판, 의사의 처방 없이도 구입할 수 있는 일명 "무독성" 진정 수면제로 판매된 약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본래 목적보다 임산부의 입덧을 완화하는데 효과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럽 전역의 의사들은 임산부 입덧 완화용으로 탈리도마이드를 처방하고 전 세계 48개국의 임산부들이 이 약을 복용했습니다.

 


탈리도 마이드 베이비로 사지결손증을 갖고 태어난 

영국의 구족화가 앨리슨 래퍼가 모델로 선 

「장애엄마의 모성애」를 주제로 한 포스터 

(사진 출처 : 엘리슨 래퍼 홈페이지.  www.alisonlapper.com )



그러나 이 일은 재앙에 가까운 사상 최악의 약화사고를 낳게 됩니다. 임산부의 입덧 완화에는 효과적이었으나 태아에게는 참담한 결과를 불러온 것입니다. 이 약을 임신 3~8주에 복용한 임산부들은 예외 없이 일명 "탈리도마이드 베이비"로 불리는 사지가 짧거나 없는 기형아들을 출산했습니다. 임신 중 복용한 탈리도마이드가 태아의 혈관 생성을 억제, 사지결손 기형아라는 운명을 쥐어준 것입니다. 1961년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그리고 1962년 일본에서 서둘러 판매금지 조치를 내리면서 탈리도마이드는 세상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 약이 무방비로 노출된 5년 동안 출생한 아기가 유럽에서만 8,000명, 전 세계 46개국에서 1만2,000여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약을 환자가 써 보고 싶다고 합니다. 약을 좀 구해서 시험 해봐달라는 이야기지요. 그러면서 (남)환자가 하는 말..“어쨌든 아시다시피 내가 임신 중인 건 아니잖소.” 이 대목에서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노인의학전문의에게 고개를 숙입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요즘도 약이 계속 개발되어 나오니까 다른 약을 써 봅시다. 하고 넘길 내용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숙제를 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1960년대 초반의 비극이후 관련된 모든 용법이 모두 폐기된 상태입니다.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프랭클린과 담당의사는 약 6개월에 걸쳐 인간 연구 윤리 위원회(HIC,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연구가 이루어질 때 피 실험자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위원회) 와 FDA의 허가를 받기 위해 복잡한 서류작업을 계속하게 됩니다. 결국 약을 사용하게 되었고,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새 요법을 시작한 지 여러 주가 지난 뒤 프랭클린의 궤양이 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그리 머지않아 나는 끔찍한 스테로이드 약물과 그로 인해 자주 일어나는 합병증으로부터 그를 해방시킬 수 있었다. 나는 이 약을 다른 환자 몇 명에게도 시도해봤는데, 모두 증상이 호전되었다. 그의 경우가 가장 효과가 좋았지만 말이다. 10년이 지난 현재 프랭클린은 스테로이드를 비롯한 모든 약물들을 끊고 잘 해나가고 있다. 그리고 다른 의료 센터에서 이루어진 여러 연구들의 결과 이 약이 다수의 소집단 환자들에게 잠재적인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p.166)

 

 

이 책은 저자가 수집한 이야기를 1인칭 화법으로 썼습니다. 그래서 읽다보면 마치 저자 본인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여집니다. 임상에 있는 사람들에겐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다른 독자들에겐 의료 현장의 안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됩니다. 단지 대부분의 이야기가 미국의 1970년대가 무대입니다. 저자는 이 시기가 전통적인 직접 해보는 방식에서 초현대의학의 생체공학적 기적으로 점차 대체되기 시작하는 시기라고 표현 합니다.

 

첨단 의료장비가 병을 잡을 수는 있겠지만, 환자의 마음까지 잡지는 못할 것입니다.

임상에서 환자를 돌볼 수 있는 한, 아날로그 마인드를 잊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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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금, 보험, 저축을 능가하는 노후대비'책'
    from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2012-10-24 17:57 
    '두통에는 진통제', '우울증엔 항우울제', '불면증엔 수면제'라는 것이 공식처럼 각인되고 있다. 그러나 시댁과 갈등을 겪는 전업주부의 두통과 학습우울증에 걸린 청소년의 두통이 과연 같은 질병일까. 또 시댁과 갈등을 겪는 주부에게 어깨 결림, 두통, 불면증, 소화불량, 생리통이 동시에 나타났다면, 이는 각각 정형외과, 신경과, 정신과, 내과, 산부인과에서 따로 해결해야 할 병일까. ─강용혁, 『닥터K의 마음문제 상담소』, 12쪽 예전에 손발이 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