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은 속삭인다
타티아나 드 로즈네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벽을 문이라 생각하고 박차고 나가는 거야 ~!』 출근길에 안 보이던 플랜카드 한 장이 건물 벽에 걸려 있습니다. 야권 M당 모 후보의 이름으로 내걸린 슬로건입니다. 이 벽은 넘어야할 장벽, 부셔야 할 장애물, 제도, 생각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겠습니다. 단지 벽을 박차고 나가는 사람의 발이 염려가 됩니다. 제대로 붙어 있을는지.. 그리고 그냥 내버려둬도 될 벽도 부셔버리지나 않는지..



또 때로는 벽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도 오래 되어서 제목과 저자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단편소설 속에 등장하는 젊은 연인들이 있습니다. 전쟁의 상흔으로 폐허가 된 어느 거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이 연인들은 사방이 막힌, 아니 한 두 군데라도 막힌 공간을 필요로 하나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부서진 건물의 잔해와 허허 벌판뿐입니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벽의 이미지는 또 다릅니다. “샤르므는 벽이 고통을 느낀다고 믿었다. 그녀는 돌이 인간의 불행을 빨아들이고 그 속에 빠져 든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감수성 예민한 사람이 이사를 오면 돌은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벗어서 되돌려주는 것이다.” - 자크 란츠만, 《로지에 거리》

 

이 문장이 책의 내용을 함축시켜줍니다. 여기서 ‘감수성 예민한 사람’이라는 표현에 시선이 머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파스칼린 말롱이라는 여인이 너무 감수성이 예민하군요. 짧은 소설입니다. 책도 핸디합니다. 그래서 진도가 잘 나갑니다. 책을 손에 잡고 단숨에 읽었습니다. 


저자 타티아나 드 로즈네는 이 소설을 스스로 누아르 소설이라고 칭합니다. 범죄소설에 이상심리까지 더합니다. 자식 없는 40대 이혼녀인 주인공이 혼자 거처할 집을 찾는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시작은 순조롭습니다. 그 집에 대한 내력을 듣기 전까지는 마음에 쏙 든 집이었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군요. 그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전에 예민한 주인공에게 벌써 증상이 나타납니다. 회사 동료와 함께 이삿짐을 정리하던 중에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운 느낌이 듭니다. 이사 후 첫날밤을 뜬눈으로 지새웁니다. 며칠째 계속 됩니다. 그러나 집을 떠나, 출근을 하면 속이 더부룩하고 귀에서 윙윙 거리는 소리가 사라집니다. 드디어 주인공은 집의 내력을 듣게 됩니다. 한 건물 3층에 사는 이웃입니다.


“잠은 잘 자요?” “무슨 말씀이시죠?” “살인사건 말이에요……댁의 집에서 일어났는데…… 얘기 안 해주던가요?”


주인공 파스칼린의 길고도 험한 정신적, 육체적 여정이 시작됩니다. 살인사건도 단순 살인이 아닌, 연쇄살인 사건입니다. ‘당브르 가 살인사건’ 자그마치 8건의 살인사건 관련 기사가 인터넷 검색에 뜹니다. 피해자들은 7명의 젊은 여성들입니다. 이젠 본격적으로 집에 들어설 때마다 살인사건과 관련된 이야기와 이미지들이 떠오릅니다. 불을 켜면 벽에 영상이 떠오릅나다. 살인의 과정이 그대로 실현됩니다. 물론 파스칼린의 생각속에 나타나는 이미지입니다. 파스칼린의 생각은 확고합니다. “벽은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상상한다.” 결국 회사 근처 저렴한 호텔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그러던 중 역시 혼자 살고 있는 엄마를 만납니다. 파스칼린의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후 엄마는 30년째 혼자 살고 있습니다. 딸의 상태가 염려된 엄마는 대화를 나누다가 파스칼린이 다섯 살 때 일어난 이야기를 꺼냅니다. 일 년을 산 집에서 주인공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립니다. 다섯 살 때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분노와 고통. 그 집에서도 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남자가 세 아이의 신체를 절단해 죽인 사건이 있었지만, 모르고 이사를 했던 것이지요.

 

“두려웠다. 이제는 장소마다 사연이, 자기만의 사연이, 고통과 아픔이 있었다. 나는 두려웠다. 전신이 옥죄어오는 공포를 느꼈다. 나는 삶의 공간에 스며들어 있는 감정들이 두려웠다. 벽의 속삭임이 두려웠다. 갑자기 내 몸이 일종의 스펀지나 압지(押紙)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집에서 일어난 일들을 초자연적인 힘으로 포착하는 안테나를 몸에 단 기분이었다. 나는 낯선 집을 방문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코가 예민해진 것이었다.” (p.60~61)

 

파스칼린의 이상 행동은 멈추지 않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낸 연쇄 살인 희생자들이 살던 집을 찾아가서 문 앞이나, 계단에 장미 놓아두기, 살인자가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를 찾아가 살인범을 영원히 가둬놓기 위한 담벼락 돌기. 직장 업무와 동료들과의 교통이 두절되기 시작합니다. 반복되는 업무 실수, 동료들과의 갈등. 이를 바라보는 독자의 마음은 안타깝습니다. 혼자 못하면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할 텐데, 대부분의 이런 경우처럼 도움의 손길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본인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 합니다. 바로 이런 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직장 동료의 소개로 남자도 만나지만, 오히려 문제만 발생시킵니다. 더욱 비정상적인 사람으로만 그려집니다.

 

파스칼린에겐 직접적인 상처가 있습니다. 육 개월밖에 못살고 세상을 떠난 딸아이의 죽음을 아직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진실여부는 확인할 길 없지만, 심지어 이혼한 전 남편이 딸을 죽였을 것이라는 강한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급기야 본인의 사정을 잘 모르는 주위사람들에게 딸아이가 열다섯 살이라는 이야기까지 합니다. 지금 같이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 의사를 찾아가긴 합니다. 동네 의사에게 악몽과 불면에 대한 상담을 하면서 그간의 마음 상태를 털어 놓습니다. 범죄 현장에 가보고 싶은 욕구까지 이야기 합니다. 의사는 파스칼린에게 왜 범죄 현장에 가보고 싶은지 물으나 대답을 못합니다. 역시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라는 충고를 받으나, 파스칼린은 스스로 ‘나는 아무 문제도 없어. 조금 피곤한 것뿐이야.’하고 그냥 넘깁니다.

 


보통은 어렸을 때 받은 심각한 심리적, 육체적 외상이 성인이 되어서도 치유되지 않은 상태라면 일상생활에 많은 지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즉, 내적 치유 과정을 거쳐야하는데 대부분 소홀히 넘기기 쉬운 부분입니다. 몰라서 못할 수가 있고, 치료시기를 놓치고 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가 그려낸 파스칼린의 경우는 좀 독특합니다. 어렸을 때의 외상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단지, 어려서부터 예민한 성격입니다. 특히 장소와 냄새 등에서 연상하는 범위가 다른 사람에 비해서 넓고 깊습니다. 그러다보니, 벽이 속삭이는 이야기를 안 들으려고 해도 안 들을 수가 없습니다. 파스칼린의 불행이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딸아이를 일찍 잃게 된 충격과 연쇄살인범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된 젊은 여성들의 모습이 오버랩 됩니다.

 


책을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서로 내색을 하지 않고 살뿐 누구나 아주 성격이 무딘 사람이 아니라면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그곳을 향하는 경우가 있다거나, 사소한 단서에서 장편의 소설을 쓰듯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념이라든가 말입니다.

 


소설의 결말이 궁금 하시다구요?

추리 소설, 범죄 소설에서 범인을 미리 알려주거나, 결말을 알려주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요. 

 끝 이야기는 아끼겠습니다. 앞으로 이 책을 읽어 보시게 될 분들을 위해 참겠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 소설이 모티브가 되어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사라의 열쇠》가 탄생하게 됩니다. 밸디브(동계경륜장, 벨로드롬 디베르의 약칭)유대인 검거사건. 1942년 7월 16일. 나치 치하의 프랑스입니다. 프랑스 정부가 유대계 프랑스인 만 여명(13,000명이라는 통계도 있습니다)을 기습 검거해 밸디브에 가둬두었다가, 아유슈비츠 수용소로 보낸 일을 말합니다. 이 사건이 더욱 충격적인 것은 4천명이 넘는 어린아이들도 검거 대상에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의 작가 타티아나 드 로즈네는 프랑스인들이 언급조차 꺼려하는 이 사건에 주목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 소설은 2010년 프랑스에서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파스칼린은 어쩌면 작가 자신의 분신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사람이 죽었건, 살았건 상관없이 무딘 감각으로 지내는 사람이 있지만, 기억해야 할 일은 누군가 기억하고, 그 순간의 고통을 함께 나누길 바란다는 작가의 마음을 또한 느낍니다. 어쩌면 평범한 이웃 사람의 이미지를 지닌 연쇄살인범이나 수치스러운 역사의 현장에 서있었던 프랑스인들의 내면은 우리의 마음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단지 우리 살아가며 그 거칠고 냉혹한 면모들을 다독여가며 유순함으로 길들여가고 있겠지요.  그런 부드러운 면들만 서로 대하며 살아갔으면 참 좋겠습니다. 



 [밸디브의 유대인 - LIFE 기록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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