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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ㅣ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앙드레 말로 지음, 김붕구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3월
평점 :
1. "모기장을 쳐들어 볼까? 아니면 그대로 모기장째 찌를까?" 소설의 초반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이다. 첫 등장 인물 첸은 칼을 손에 쥐고 긴장한 나머지 속이 다 뒤틀리는 것 같다. 결국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죽였다. 소설은 그렇게 시작한다.
2. 앙드레 말로를 만난다. 말로는 1901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1923년에 앙코르와트 유적 조사를 위해 인도차이나를 방문했다. [정복자](1928), [왕도로 가는 길](1930)을 출간하고, 1932년에 이 책 [인간의 조건]으로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1936년에 스페인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참전해 반파쇼 의용군을 조직했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희망](1937)을 출간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다시 참전. 1959년에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되었지만, 1969년에 드골이 국민투표에서 패해 대통령직을 그만두자 그와 함께 은퇴했다. 1976년에 만성 폐출혈로 파리 교외 앙리 병원에서 사망했다.
3. 소설은 혁명의 소용돌이 중심에서 출발한다. 상하이(上海)가 그 첫 무대이다.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대립이 플롯이다. 중국 국민당은 중화민국의 양대 정당 중 하나로 1949년 까지는 중국 공산당과 1980년대 부터는 민주진보당과 대립관계에 서게 된다. 그 중심에는 쑨원이 있다. 20세기 중화민국에서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사이에 빚어진 충돌을 '국공내전'이라고 한다.
4. 사상과 이념의 대립은 생과 사를 가른다. 첸은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그의 마음에 지극히 평안함과 혼란스러움이 교차된다. "자네가 그 숙명과 함께 살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즉, 그 숙명을 남에게 전해 주는 거야." "그럴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첸은 붙들려 고문을 당하든지 사형을 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결단과 죽음의 세계 속에서 집요하고도 단호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한다.
5. 첸의 주변 혁명 동지들의 공통점은 부평초이다. 전통적인 일체의 연줄을 끊어버린 '고립된'인간이다. 이는 말로의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분위기이다. 국민당 야전부대의 상하이 봉기가 성공한 뒤 장제스 사령관이 입성, 무기 반납령이 내려 혁명 진영이 초긴장 상태에 접어든다. 첸은 장 사령관 암살을 결의하고, 동지 두 명과 폭탄을 지니고 잠복한다. 그러나 실패했다.
6. 첸은 사실 이 소설에서 조연급이다. 주연급은 기요라는 인물이다. 기요의 부친 지조르는 프랑스인이다. 불온사상자로 찍혀 베이징 대학 강단에서 쫒겨났다. 기요의 모친은 일본 여인이었다. 기요의 처는 상하이에서 출생한 독일 여인이다. 말로는 어찌 이 가정을 이렇게 국제적으로 형성했는지 모르겠다. 말로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부정형, 부동(浮動)의 전형을 모아 놓은 느낌이다.
기요가 죽고, 그 아비 지조르 역시 죽음을 앞에 두고 번민과 체념의 시간을 갖는다. "죽음은 모든 힘을 잃고 우주의 무한한 평화 속으로 조용히 미끄러져 흩어지리라. 해방은 바로 저기 있다."
7.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말로가 제목으로 정한 '인간의 조건'을 어디에서 찾아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사상과 이념을 앞에 두고 서로 죽이고, 죽어가는 인간의 군상들을 보면서 도대체 무엇을 위한 싸움인지 방향감을 상실한 느낌이다. 전쟁이란 상황이 그렇지 않던가. 지도부는 단지 한 가지 생각만 주입시켜 줄뿐이다.
8. 지조르가 독백처럼 하는 말이다. "...'한 사람을 만들려면 아홉 달이 필요하지만 죽이는 데는 단 하루로 족하다.'는 말이 있다. 한 인간을 완성하는 데는 아홉 달이 아니라 60년의 긴 세월이 필요한거다. 60년간의 갖가지 희생과 의지와...그 밖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여러 가지가. 그런데 그 인간이 다 만들어졌을 때, 이미 유년기도 청년기도 다 지나가 버리고 정말로 그가 한 인간이 되었을 때, 그때는 이미 죽는 것밖에 남지 않는 거란다."
9. 말로 이야기를 좀 더 적어야겠다. 책 말미에 역자인 김붕구 선생이 '앙드레 말로 연구'를 제법 긴 분량으로 적어 놓은 것을 참고한다. 말로의 정신적 편력과 섭렵의 깊이는 참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20대 청년기에 벌써 프랑스 망명 중인 트로츠키와 이데올로기와 에술에 관해 거침없이 대화, 논쟁을 교환했고 지드, 발레리도 번번이 수세에 몰려 당황을 금치 못하게 했다고 한다. 날쌘 사고의 속도라는 표현을 한다. 후반기(제2차 세계대전후)에는 몇천 년간의 고대 예술을 통해 크메르, 이집트, 그리스, 로마 문화는 물론이고 잉카, 비잔틴 문화, 힌두, 불교 문화와 종교, 중국 일본문화 등을 거침없이 넘나들며 탐색했다고 한다. 말로의 다른 작품을 좀 더 섭렵하다보면 그의 생각을 읽고 정리해 볼 계기가 될 듯하다. 말로를 더욱 알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