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노보 찬가 - 정글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인간으로 살아남기
조국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지은이는 이 책을 사회의 정글화에 대한 비판을 위해 썼다고 합니다. 책의 제목에 보노보(bonobo)라는 생소한 동물이름을 사용한 것은, 진화심리학과 사회생물학에 대한 개인적 관심 외에도 보노보의 행동양식이 정글화되고 있는 한국사회에 여러 시사를 던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민주, 인권, 공정, 평등, 연대, 복지 등 진보의 가치를 보노보를 통하여 우회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파니스쿠스'라는 종명(種名)을 가진 보노보는 아프리카 콩고의 밀림지대에서 새로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트로글로디테스'라는 종명을 가진 침팬지와 구별되는 영장류 동물입니다.  저자는 그의 전공이 아니지만, 보노보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여러 침팬지 연구를 참고 한 덕분이라고 합니다. 침팬지는 수컷 중심의 수직적 서열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폭력을 수반하는 내부의 치열한 권력투쟁, 다른 침팬지 집단과의 잔혹한 전쟁, 성인 수컷에 의한 유아살해 등의 행태를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무한경쟁, 권력투쟁, 전쟁, 학살, 남성지배 등의 생물학적 기원을 바로 인간의 '사촌'인 침팬지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그런데 보노보라는 종(種)은 좀 다릅니다. 침팬지와 달리 암컷끼리의 연대가 매우 강합니다. 수컷이 암컷을 지배하지 못하며, 공동체내에서 부자보다 모자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점에서 보노보 무리는 암컷 중심의 사회입니다. 아울러 엄격한 수직적 서열을 만들지 않으며 상당히 평등한 문화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노보의 행태와 문화는 전 세계 영장류학계는 물론, 인류학계, 사회학계, 여성학계에 크나큰 충격파를 던졌다고 합니다. 인류가 '자연법칙'으로 수용하는 침팬지식 삶의 방식과 전혀 다른 보노보식 삶의 방식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은이는 대한민국이라는 '정글'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침팬지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 점 깊이 공감합니다. 제일 심한 곳이 '정치판'입니다. 논란 많은 '여성부'란 곳이 있기도 하지만, 직장에서 성차별은 꿋꿋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동물의 왕국'이 되어버렸다고 개탄하기도 합니다. 



-  '정글자본주의'의 시대, 진보의 길 찾기

지은이는 자본 앞에서 초라해진 '법 앞의 평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시장권력 또는 경제권력은 민주화 이후 오히려 정치권력에 비해 더 자유로운 조건에서 더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이야깁니다. 이미 이러한 사례는 뉴스를 통해서 보고 듣고 있는 상황입니다. 재벌 총수가 경제, 폭력등의 사유로 검찰을 들락거리게 되면, 휠체어와 마스크가 법정 복장으로 통일됩니다. 모 판사는 논문에서 이렇게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수천억 원을 횡령한 재벌 회장은 도주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김 한 장을 훔친 노숙자는 얼마든지 도주할 수 있고, 한국의 피해자는 돈만 있으면 90퍼센트 정도가 합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양형은 피고인의 재력에 달려 있는 셈'이라고 했습니다.


-형벌권의 과잉과 남용은 안 된다.

매년 수많은 사람이 범죄를 저질러 유죄판결을 받고 교도소에 갇힙니다. 범죄인의 기본권이 제한, 박탈되는 것은 당연하고 불가피한 것이지만, 문제는 감금 이후입니다. 지은이는 현재 우리나라의 교정시설과 방법에 대해 우려하고 있습니다. 굳이 '신시내티 선언'이 아니더라도 '수형자에 대한 행형규율의 최고목적은 보복적 고통을 과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의 개선이어야 한다.'는 말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죽하면, 교도소가 '학교'로 바뀌었겠습니까? 교도소 동기생들이 한 판 벌리면, 크게 한 판입니다. 지은이는 이를 염려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도소는 수인들에게 고립과 고통과 무의미한한 노역의 기간이 아니라 그들이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생활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러할 대 재범률은 줄어들고 다수자의 안전도는 놓아질 것이다."

 

- 이 땅의 소수자를 위하여

다문화사회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질 정도로 주변에 외국인과 외국인이 결합된 가정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도 일본인들에게 서양인들에게 받은 차별의 역사가 깊습니다. 현재도 재일교포가 받는 차별에는 분노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같이 호흡하고 있는 외국인들을 무시하고, 차별하고, 멸시까지 하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우리 안의 인종차별주의는 난민인정 속에서 드러난다고 합니다. 우리는 중국정부에 대하여 탈북자에게 난민지위를 인정하라고 요구하면서 한국을 '약속의 땅'으로 믿고 목숨 걸고 찾아 온 난민들을 냉대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야기들을 듣고 생각하다보면 부끄러워집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인간이 보노보나 침팬지를 스터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연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듭니다. 보노보가 속으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들은 어찌 저렇게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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