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 자연학자 이브 파칼레의 생명에 관한 철학 에세이
이브 파칼레 지음, 이세진 옮김 / 해나무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책을 읽다보면 책이 책을 부릅니다. 관심이 가는 분야의 흐름이 자연적으로 형성됩니다. 그래서 장기적인 독서계획은 세우기가 힘듭니다. 대략 3~4주 간격으로 읽어야 할 책들이 책상 한 곁에서 대기 중입니다. 요즘은 다른 책들과 섞여서 키워드가 ‘우주’인 책들을 자주 들여다보게 됩니다. 나 자신을 우주라는 공간에 던져놓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싶은 생각도 포함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내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어느 철학자가 사형 집행 날짜를 며칠 안남기고도 같은 감방에 있던 동료가 자기가 모르는 것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꾸 캐물었습니다. 그러자 귀찮아진 이 사내가 이 땅을 떠날 날이 얼마 안 남은 철학자에게 핀잔을 줍니다. “곧 죽을 사람이 뭐 그리 알려고 해요” 철학자가 얼굴 표정 하나 안 바뀌며 답을 합니다. “죽기 전에 하나라도 더 알고 싶어서..” 예..저는 이런 심정으로 책을 읽습니다.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책을 읽다보니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니 어쩐 일이지요?
 
최근 읽은 책 중 우주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을 잠깐 언급하고 리뷰대상인 책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막스 셸러의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입니다. 막스 셸러는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sche Anthropologie)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철학적 인간학이란 의미상으로 볼 때 ‘인간에 관한 철학적 고찰’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종래의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온 철학과 과학을 인간이라는 하나의 사실을 매개로 해서 오늘날 새롭게 종합하려는 시도입니다. 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의 이성은 더욱 혼돈가운데 처하게 되지요. 그래서 역사상 양차 세계대전은 ‘인간에 대한 몰이해’를 단적으로 보여 줬다는 질책도 받고 있습니다.

 

셸러는 인간이 “그 자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동시에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또한 잘 알고 있는”상태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다고 하니까 좀 위로가 되긴 합니다. 셸러의 사상을 짧은 글로 다 표현 할 수 없고 이 리뷰에서 깊이 다룰 사항도 아닙니다만, 연관이 있기에 옮깁니다. 셸러는 신의 이념과 형이상학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종래의 형이상학은 신의 이념을 ‘나는 존재한다(데카르트)’ 또는 세계는 존재한다(아퀴나스)‘는 명제에 의거하려 추리하려 했지만, 신의 이념을 현상학의 상관적 고찰법에 따라 이끌어냅니다. 즉, 나의 ’모든 사랑하고 관조하며 사고하고 의지하는 것은 따라서 무엇보다도 신 속에서 사랑하고 관조하며 사고하고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신의 영원한 이념 속에 뿌리박게 되고, 세계 과정에서 이념적 생성과정의 공동 형성자, 공동 창립자, 공동 수행자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 이젠 분위기를 바꿔서 본론으로 들어가 봅니다. 이브 파칼레,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떠오른 생각은 “이사람 참 까칠하네”입니다. 나꼼수나 딴지일보에 적응되어 있는 사람들에겐 “뭐, 이정도 갖고..”하겠지만, 내 수준에는 하도 까칠해서 어감이 좀 그렇지만 ‘까자남(까칠한 자연주의 남자)’라고 이름 붙여주고 싶습니다. 저자는 프랑스태생입니다.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다가 68혁명(이 부분은 나중에 좀 더 알아봐야겠습니다)에 가담하여 격동의 세월을 보냈답니다. 그 후 프랑스의 유명한 탐험가인 자크 이브 쿠스토 함장의 탐사에 동참해 1972년부터 1987년까지 15년간 칼립소 호를 타고 항해하며 자연학자로서의 소양을 쌓았다고 합니다. 책도 수십 권 썼군요. 이 책의 제목은 『신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입니다. 그래서 본인이 썼다는 이야긴가요? 저자의 책 중 제목이 더 튀는 것도 있습니다. 『인류는 멸망하리라, 시원하게 잘됐다!』토종 우리말로 표현하면 '쌤통이다!' 가 되겠지요.
 
그런데 이 사람 참 아는 것도 많습니다. 철학은 기본이고 천문학, 식물학, 동물학 등 과학의 전반을 어우르며 종횡무진 합니다. 그래서 붙는 명칭도 많군요. 생태주의자, 자연학자, 식물학자, 철학자, 환경보호 운동가, 자유기고가 등입니다. 이런 면에선 내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다방면에 걸친 학문에 대한 열의, 열정은 절대 과소평가할 부분이 아니지요. 저자는 다음과 같은 궁금점에서 생각을 키웠다고 합니다. “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  “생명은 어디에서 왔는가?” 사실 이 질문은 철학의 근원이 되고 있지요. 더 나아가 저자가 차기작으로 계획하고 있다는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역시 마찬가집니다.
 
저자의 ‘태초에~’에 대한 관심은 137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5억 4200만 년 전에 멈춥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텍스트로 삼은 것은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입니다. 저자는 여러해 전부터 이를 오늘날의 책으로 다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만물의 본성’이라든가 ‘자연의 섭리’정도의 제목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이 작업에 착수하기 위해 희끗희끗한 수염이 나고 환갑이 넘는 나이가 되기를 기다렸다고 하네요. 그러면서 이 사람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루크레티우스여, 그대는 나처럼 수염이 하얗게 셀 겨를조차 없었겠소. 백과사전을 뒤져보니 그대는 겨우 43년을 살고 세상을 떠났더군요.”    자연적으로 조만간 읽어야 할 도서목록에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포함됩니다. 마침 최근(2012, 1월) 번역 출간된 책이 있군요.

  (강대진 역/아카넷 /원제:De Rerum Natura) 

 

 

저자 이브 파칼레가 루크레티우스를 향한 헌사(獻詞)같은 글이 이 책의 분위기를 그려주고 있는 것 같아 옮겨봅니다.
 

오, 루크레티우스여!
그대에게 나의 죄 없는 황홀경을 바치노라.

나의 터부 없는 쾌락을, 예술적 감흥을,
사물과 사람에 호기심 많은 여행자로서의 소회를 바치노라.
숲, 사막, 산, 바다에 환장하는 자연학자로서의 경이로움을 바치노라.

참으로 덧없이 지나가는 매순간을 음미하되
회백질을 욕되게 하지 않을 정도로만 살다 가고픈
어느 유인원의 넘실대고 굽이치는 철학을 그대에게 선사하고 싶다.
 
 
저자는 스스로 그가 시적이면서도 반어적 유물론자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의 시니컬한 문장들은 용서해줄만 하긴 합니다. 그렇지만, 저자의 글은 좀 불편합니다. 아니, 많이 불편합니다. 신의 존재를 철저히 부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전제하에 글을 써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본인의 관심과 알고 있는 지식을 써도 그 양이 장난이 아닌데, 굳이 왜 신을 끌어들여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지(나의 주관적인 판단)모르겠습니다. 신이 자기한테 뭐라고 했길래, 어쨌길래 말입니다.
 
그대는 데모크리토스(Democritos)와 에피쿠로스(Epikouros)와 더불어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의 존재와 우주를 상상하였다. 소립자와 힘의 조합이 오직 자기들에게 작용하는 법칙들에만 복종하는 형태로. 수염을 드리운 영원하신 성부 하느님도, 야훼도, 알라도, 브라마도, 데미우르고스도, 성모도, 순교자도, 애매한 성별의 천사도, 지옥으로 이끄는 뿔난 악마도 필요 없나니. 창세 신화도, (사실은 죄다 인간이 쓴)『성경』도, 기적과 기도도, 종교재판관들이 집행하던 의식도, 잔혹한 형벌도, 파트와(fatwa : 이슬람 율법에 따른 판결)도 필요치 않나니........

 

 또 우리 마음에 경각심이 필요하다는 표현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다. 인류의 미래는 오로지 우리가 이미 내린 결정, 내리고 있는 결정, 앞으로 내릴 결정에 달린 문제다. 우리가 우주의 힘을 배겨낼 수 있는 한에서 말이다.
 
이렇게 단편적으로만 글을 뽑으면 개성이 강한 사람(?)으로 비춰지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시야는 일단 우주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주. 수십억 개의 천체.....그만큼이나 많은 수수께끼!  저자는 학자들이 우주가 우리의 모태 혹은 활동무대로 쓰이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믿거나 그러한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부분에 대해 심한 반감을 표현하는군요. 그의 우주 이야기는 빅뱅에서 출발합니다. 언젠가는 지구 이외에 다른 행성에서도 생명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도 나타냅니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몇 세기 더 버텨준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다수 세계의 시민들과 교류를 나누게 될 것이라는 꿈도 갖고 있습니다.
 
생명은 기적처럼 보이지만 그보다는 충동에 더 가깝다고 표현하는군요. 일종의 욕구, 경향이라고 합니다. 생명은 물질이 복합되고 조직화되려는 내재적 성향, 엔트로피가 떨어져 죽음에 이르지 않게끔 맞서 싸우려는 성향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별들이 탄생하는 과정, 태양에 대해, 혜성, 지구지각의 분노, 물과 행성, 40억 년 전엔 세포 형성, 8억 년 전 선캄브리아기의 자취를 찾아서 그리고 5억 4200만 년 전 캄브리아기에 나타난 진화의 흔적들 그리고 너무나 연약했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 등을 그리고 있습니다. 일단 대단합니다. 칼럼 형식으로 쓰인 글들이지만, 그저 칼럼이라 생각하고 읽기엔 내용이 무척 깊습니다. 철학적 사유가 깊습니다. 책으로나마 한 번 만나보실 만합니다. 단지 신앙인인 경우에는 읽는 내내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읽다가 그만 둘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생각 바꾸어서 나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정확한 표현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자가 반어법을 쓴다고 고백했으니까요)의 말과 생각을 들어보고, 들여다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합니다. 저자는 본인의 미워~! 미워~! 라고 하는 표현이 ‘사랑해~’로 받아들여주길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도 노파심(?)에 이브 파칼레에게 데이비드 흄의 입을 빌어 한 마디 해주고 싶습니다.

 

"신의 존재에 관한 우주론적 논증과 목적론적 논증은 받아들일 수 없다. 신은 논증으로 밝혀질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없다. 오직 신앙만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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