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코 (천줄읽기) 지만지 고전선집 486
서보 머그더 지음, 정방규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은 열세 시간 동안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이다. 주인공 어누슈커가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6시 45분에서 부다페스트행 밤 기차가 떠나는 저녁 8시까지. 어누슈커는 순간순간 무엇과 마주칠 때마다 연상되는 과거의 묵은 씨앗들이 마음속 깊은 잠에서 깨어 새롭게 살아난다.

 

이 책은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상투적인 예술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와 함께 갈등하고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을 깊은 이해로 그려 심리학의 연구 대상이 될 만한 인물들을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헝가리의 작가로서 외국에 많이 알려진 여성 작가 서보 머그더의 작품. 서보는 시, 아동문학, 드라마, 여행기, 에세이 등 문학전반에서 업적을 남겼다.

 

글의 전개는 과거와 현재가 경계 없이 넘나든다. 그래서 여간 주의를 하지 않으면 다소 혼란스럽다. 엄마의 장례식 때문에 고향을 내려온 주인공이 느닷없이 학교로 뛰어간다.

“그녀는 달려갔고 비스듬히 총총하게 땋은 머리는 등 뒤에서 흔들거렸다. 그녀가 학교의 문을 막 들어서는 순간 종은 다시 울렸다. 그것은 이미 8시가 되었음을 알리는 종이었다. 이때부터 진짜 아침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누슈크는 그녀가 고향을 떠날 때 예순 네 살이었던 언주라는 사람과의 재회에서 만큼은 평안함을 찾는 듯하다. 지금은 일흔 세살의 머리가 하얀 노인네가 된 언주. 이 소설에선 이 두 사람이 주요 인물이다. 어누슈크와 언주. 어누슈크는 어려서부터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해서 목사인 그의 아버지한테 구타를 당할 정도의 반항아적 기질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그의 딸 어누슈크에게 지독하게 욕심이 많은 아이, 너무 못된 아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잣대로 재보기엔 그랬다. 누구나 성장과정 중에서 받은 상처는 오래 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소설을 성장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

 

유럽이 동서로 갈라지면서 공산권의 문학에서 두드러진 작품은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과 비평위주였다. 따라서 그 저항정신의 높이에 따라 문학 작품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그러나 저자인 서보의 소설을 접한 서방세계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사회주의 건설에의 기여라는 목적이 앞선 나머지 예술이라고 부르기엔 턱도 없는 현실의 공산권 헝가리에서 이렇듯 완벽한 문학이 태어났구나 하는 놀라움 때문이었다. 이 소설의 특징은 화자의 입을 통해 서술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많이 기대하는 대화체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운문(韻文)체다. ‘의식의 흐름’기법이다.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이 글이 쓰인 시대적 배경은 공산권인 헝가리이다. 출판의 자유가 억압되었던 기간 동안에 썼던 글들은 저자의 책상 서랍 깊숙이 들어 있다가 1956년 헝가리 혁명이후 출판이 허가되자 연달아 작품을 발표했다. 훌륭한 작품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느낌과 감동을 줄 수 있는 때를 기다려야 한다. 아무 때나 혼자서 훌륭해질 수는 없는 일이다.

 

어누슈커가 집을 떠난지(가출) 9년 만에 찾은 고향, 가족은 뒤로 변화해가고 있다. 야심으로 한 꺼풀 덧입힌 욕심과 일단 나 혼자만 살고보자는 이기주의만 남아 있었다. 어쩌면 저자는 공산주의 치하에서 살아가는 군상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적당히 따라가는 척 하면서 내 앞가림만 챙기고 있다. 나눔과 희망은 안 보인다. 그나마 인간적인 냄새는 어누슈커와 그의 은밀한 동조자인 언주뿐이다.

 

 

“그녀(어누슈커)에게는 모든 사람이 색깔이었고 색깔로서 그녀의 안에 살아있다. 어머니는 노랗고 아버지는 새까맣고 연커는 회색, 고아는 초록, 늙은 커티는 베이지, 쿤 라슬로는 붉은색. 그러나 할머니는 색깔이 없다.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언주는 하얗다. 하얗기는 아담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그녀의 주변 인물들을 색깔로 표시했기에 그녀의 마음속에 투영된 그들의 이미지가 어떤지를 알 수 있고, 그들의 심성을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기에, 아니 그녀의 가슴 속에 커다란 어두움으로 자리 잡고 있기에 아버지는 ‘새까맣다.’

 

나는 그대 가슴에 어떤 빛깔로 남아있을지 궁금해진다.

굳이 그대가 좋아하는 깔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새까맣게’ 칠해져있지는 말아야 할 텐데 라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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