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과 기억』이라는 책의 이해는 그 제목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물질과 기억이라는 쌍은 영원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양극단의 실체들인 물질과 정신의 쌍을 거부하면서 등장한다. 『물질과 기억』은 시간의 차원에서 물질은 단지 이미지일 뿐이고 정신은 기억일 뿐이다. 이미지와 기억은 우리가 접하는 가장 구체적 실재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들, 즉 현상의 전체이다. 그러나 배후의 어떤 실체도 거부되는 점에서 그것들은 존재하는 것들의 전체이다. 시간은 이것들의 배경을 이루는 광대한 차원이라기보다는 그것들의 존재방식 자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시간의 존재론이라 할 수 있다.
유대계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손은 1859년 10월 18일 빠리에서 태어났다. 고교 때부터 수학에 비상한 재능을 보여 스승의 애정을 한 몸에 받았던 베르그손이 철학으로 진로를 바꾸게 된 데는 프랑스 유심론 철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라슐리에(J. Lachelier)의 『귀납의 기초에 관하여』라는 책의 독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베르그손이 없는 현대 프랑스 철학은 아마도 신칸트주의적 인식론이나 꽁뜨적인 실증주의의 후예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질과 기억』은 1896년 베르그손이 37세가 되던 해에 출간되었다. 베르그손이 첫 저서인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이하 『시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지 7년만의 일이다. 첫 저작에서 베르그손은 뛰어난 문학적 감수성으로 의식의 내면을 관찰하면서 각각의 의식 상태들이 고정 될 수 없게끔 매순간 질적으로 변화한다는 주장을 한다. ‘의식상태의 지속’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된 이 생각은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프루스트로 대표되는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문학사조를 탄생시킨 철학적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비록 출간당시에는 많은 주목을 끌지 못했으나 의식상태의 심층적 관찰과 묘사는 많은 시인과 작가들을 두고두고 매료시켰다. 다른 한편 명확한 주장과 엄밀한 근거를 제시하는 이 책의 탁월한 논증적 구도는 까다로운 철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모범이 되었다.
철학적 동기에서 볼 때 『물질과 기억』은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탐구하려는 의도로 씌어졌다. 심신관계의 문제는 데까르뜨 이후에 철학의 중요한 분야로 자리 잡았다. 데까르뜨의 심신이론은 제기된 당시부터 여러 가지 반론에 부딪혔으나 베르그손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뇌신경생리학의 발달로 문제점들이 구체적으로 지적되었는데, 이런 이유로 철학자들 내부에서도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베르그손 자신도 당대과학의 발달에 많은 자극을 받았으나, 그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분명히 인정하고 이 영역을 철학적 성찰에 남겨 놓으려한다. 정신과 신체를 연결하는 매개 고리로 베르그손이 선택한 것은 기억이었다. 물론 정신적 기억에서 신체적 기억까지 다양한 종류의 기억현상을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심리학이나 생물학, 생리학, 병리학에서 다루는 내용을 참조해야했고, 베르그손은 첫 저서를 낸 후 6년간 이 분야들에서 직접 심층적인 연구를 했다. 그러나 과학으로 인간의 의식까지도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주의적’ 태도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다.
“우리에게 물질은 ‘이미지들’의 총체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지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관념론자가 표상이라고 부른 것 이상의 존재, 그리고 실재론자가 사물이라고 부른 것보다는 덜한 존재, 즉 사물과 표상사이의 중간 길에 위치한 존재이다.”
베르그손은 데까르뜨와 달리 기억의 능력을 우리 정신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본다. 더 나아가 의식은 곧 기억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렇지만 의식이란 감정, 감각, 의지, 표상, 관념, 기억과 같은 갖가지 심적 요소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기억은 의식의 한 요소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되어왔다. 게다가 의식은 현재에 관한 것이고 기억은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닐까? 데까르드에게 사유는 순간에 포착되는 현재적 의식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기억은 명중한 의식에서 제외된다. 베르그손의 지속의 철학은 바로 이 생각에 도전한다. 의식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느끼고 경험한 모든 내용을 포함하는 것이지 현재에 관련된 것만 포함하지 않는다. 의식상태는 끝없는 흐름 속에서 연속되기 때문에 흘러간 것이라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현재의 의식에 나타나지 않은 뿐이다. 베르그손은 현재에 나타나지 않는 의식 상태를 ‘무의식’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의식은 넓은 의미에서는 현재 의식에 떠오르는 것이다.
의식상태의 지속, 끝없는 잇따름 속에서는 아무것도 사라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보존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의식은 바로 기억이라는 것이다.
생명체는 원시적 형태에서조차 감각과 운동으로 이루어진 체계이다. 베르그손은 이것을 감각-운동체계라고 부른다. 본래 감각과 운동은 하나를 이루었지만 점차 두 개의 다른 기능으로 분화되면서 운동능력을 빼앗긴 감각세포는 자극을 전달하고 정념을 느끼는 기관으로 축소되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감각과 운동이 분화되기 이전의 원시생명체가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상상하기가 어렵다. 원시생명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극이 곧바로 반응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베르그손은 지각조차도 행동과정의 일부로 정의했다. 그렇다면 생명체에게는 지각이 정념보다 더 근본적인 작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계적 식별은 신체 안에 각인된 습관이지만 과거 이미지들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다만 거기서는 행동하는데 필요한 이미지기억들이 이미 선택되어 습관 기억이 작동할 때 동시에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그것들은 처음 습관기억이 형성될 무렵에는 의지적으로 투입되지만 일단 습관이 형성된 뒤에는 자동적으로 상기된다. 그러나 언제나 능동적으로 과거이미지를 불러와 대상의 지각에 투입해야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행동을 하려 할 때가 아니라 대상 그 자체를 파악하려 할 때 필요하다. 처음 보는 대상이나 분석이 필요한 복잡한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 기억을 불러내 참조해야만 한다. 베르그손은 이런 경우를 ‘주의 깊은 식별‘이라고 부른다. 주의 깊은 식별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주의’(attention)라는 심리생리학적 현상이다. 주의라는 말은 어떤 일을 할 때 정신을 집중한다는 일상적의미로 많이 쓰이지만, 프랑스의 심리학과 철학에서는 정신의 중요한 기능으로서 이미 오래전부터 연구대상이 되어왔다.
베르그손은 자신의 철학을 한마디로 “시간이 존재하고 그것은 공간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스피노자의 ‘영원의 관점’을 단번에 ‘시간의 관점’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의 관점에 설 때 현재는 언제나 지나가고 있는 흐름이며 수학적 점과 같은 것이 아니다. 현재를 수학적점과 같이 생각한다면 과거는 지나간 현재들로 구성될 것이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무수한 현재들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진정으로 과거가 존재하는가? 거기에는 각각의 순간만 존재할 뿐이다. 미래도 마찬가지로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무수한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거대한 전체는 순간의 함수로 표현될 수 있다. 그렇다면 거기에 과거, 현재, 미래를 가르는 기준이 있을까? 베르그손은 이러한 체계가 과학이 다루는 시간이며, F(t)로 표현되는 함수는 순간성 속에서 모든 것이 주어진 체계라고 한다. 이 체계에서 과거, 현재, 미래는 임의의 순간 t로 분해되어버린다. 그런데 과거는 무수히 지나간 순간들이고 미래는 다가올 순간들이며 현재는 바로 지금의 ‘한 순간’이라면, 과학이 다루는 순간들이란 기본적으로 현재의 관점에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