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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리 시편 - 심호택 유고시집
심호택 지음 / 창비 / 2011년 1월
평점 :
아픈 건 그럭저럭 나았소 / 올해도 김장 몇 포기 담갔소 //
사랑이여 / 당신이 사준 고동색 파카는 / 시골집 수도펌프가 입게 되었소
- ‘겨울편지’ 전문
내가 좋아하는 시는, 읽으면서 그림이 그려지던가, 가슴이 촉촉 해진다던가 해야 한다.
시인의 시는 우선 쉽다. 그리고 언어의 기교도 없는 편이다. 언어의 절제 또한 적절하다.
이 시집은 시인의 유고시집으로 출간 되었다. 불문학자인 저자는 1991년 『창작과 비평』겨울호에 「빈자의 개」등 8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늦깍이 시인 데뷔인 셈이다. 『하늘밥도둑』외 3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원광대 불문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시작(詩作)을 하던 중 2010년 1월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1947년생이다.
이 시집은 유년시절의 스케치가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어떻게 그 여린 정서를 지금껏 가슴에 고이 싸놓았는지, 천성 시인의 마음이다. 아울러 농촌 마을의 여러 심성들이 그려진다.
모르는게 없으면 / 그게 선생인데 / 농부는 사양 한다 / 국졸이라 선생 자격 없다고 //
형님으로 모신다니 / 그는 한 자랑이다 / 혀가 곧을 때나 꼬부라졌을 때나 / 아 글쎄! /
개울 건너 선생님이 자기를 / 형님으로 부른다고 //
이날까지 육십 평생 / 자기가 이렇게 대단한 줄 / 처음 알았다고
- ‘선생의 형님’ 전문
내 생애의 수많은 저녁 중에 / 가장 포근했던 한 때는 /... (중략)
“어서 밥 먹고 학교 가거라” / 잠결에 들려오던 식구들 말소리가 /
한바탕 웃음 끝에 / 거짓말로 되는 순간이었다. //
낮잠 자는 아이를 놀리자고 / ...(중략) 시간이 많이도 생겨서 /
부자가 된 듯 한 동안이었다.
- ‘수많은 저녁 중에’
시를 읽다가 미소를 짓게 하는 분위기도 여럿 만난다.
우리 육학년 나이 든 반장이 / 대막대기 하나 들고 / 애들한테 학교 우물물 떠오게 해서 /
변소청소 시키고 있었다 // 나 좀 들어갔다 나오자 / 젊은 여선생이 볼일 보고 나온 뒤 /
녀석이 문 열어보고 / 막대기로 더러운 데 톡톡 두드리며 / 말했다 //
가시내두 참 ! / 기왕이면 여기다 좀 깔기지 !
- ‘청소시간’ 전문
한번은 이장 마누라가 / 어머니와 상의하는 눈치였다 /
어린 내가 있거나 말거나 / 성님, 어쩐대유.... / 또 애가 들어섰어요 ..../
낳아놓은 것들 키우기도 심난한데 / 한 걱정을 만났다는 것이었다
지혜롭고 현명하다는 / 어머니가 뭐라고 대답하는지 / 가만히 들어보고 싶었으나 /
어머니도 뾰족한 수 없는 눈치였다 / 기다란 한숨이나 내쉴 뿐 /
그러니께 그놈의 관계 .... / 안 맺고 살 수도 없고...
- ‘관계’ 전문
63세에 되던 1월 30일 새벽, 동료 교수의 상가에 문상을 다녀오다 교통사고로 타계한 시인이 안타깝다. 가족들을 위해서도, 후학들을 위해서도, 시문학을 위해서도 참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