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 다츠지 - 조선을 위해 일생을 바친
오오이시 스스무 외 지음, 임희경 옮김 / 지식여행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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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꽤 여러해 전, 대한극장이 리모델링되기 전 그곳에서 「쉰들러 리스트」를 보았다. 유태인들을 도와 그들을 단 한사람이라도 나치 치하에서 목숨을 구해주기 위해 혼신을 다했던 독일인 쉰들러. 그 영화를 보면서 나치의 잔혹한 행위에도 몸서리쳤지만, 나치 집단의 시야로 볼 때는 이적행위로 단정할 수밖에 없는 쉰들러의 목숨을 건 행동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힘들고 위험한 상황 속으로 뛰어들게 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속에는 나의 이익과 반대되는 일에는 아예 관심도 없는 일상에 적응되어 있는 일이 다반사이다. 나 역시 나와 상관없는 일, 나의 이익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는 내 마음이 동하지 않는데, 어떤 생각이 그를 그렇게 이끌었을까? 그 마음이 궁금하기도 하고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런 나의 생각은 곧 사라져버렸다. 밝은 불이 켜지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 햇빛 속에 녹아버리는 눈송이처럼 그렇게 없어졌다.

그 기억이 이 책을 읽으면서 되살아났다. 책 표지에는 조선을 위해 일생을 바친 후세 다츠지 라고 씌어있다. 소제목은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라고 되어 있다. 저자들은 4사람이다. 일본인 오오이시 스스무 외 재일한국인 고사명 그리고 두명의 한국인 교수 이형낭, 이규수이다. 2000년 2월 29일, 삼일절 기념일 전날 밤 방영되었던 MBC 프로그램 ‘일본인 쉰들러 - 후세 다츠지’가 한국인들에게 소개되었다. 
 

뒤이어, 같은 해 11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심포지엄 〈후세 선생 기념 학술대회〉가 열렸다. 2004년 10월 12일, 한국정부는 후세 다츠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때 나종일 주일 한국대사가 한 말이 후세를 간결하게 표현한 듯 싶다.

“다른 나라 국민을 사랑하는 자야말로 자국민을 사랑할 수 있다. 후세야말로 일본의 애국자다. 이 훈장 수여는 한일 발전을 기원하는 한국민의 맹세다.” 
 

변호사인 후세가 변호 활동과 사회운동을 한 때는 1905년부터 1953년까지 라고 한다. 이 시기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에는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제도를 확립한 시기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후세는 누구보다도 조선인을 사랑했고 최선을 다해 변호했다. 그 범위는 조선독립을 지향하는 학생과 애국지사부터 일본의 관, 민에게 토지를 빼앗긴 농부들, 위험천만한 술 밀조로 체포된 사람들에게까지 미쳤다. 특히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시기에 목숨을 걸고 조선인 구원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후세가 40세를 맞이하던 1920년은 후세가 새롭게 태어난 해로 기록되고 있다. 이미 후세는 변호사가 되고 난후 도쿄에서 손꼽힐만한 훌륭한 사무소를 차리고, 가문(家紋)을 새겨 넣은 인력거(아마도 승용차가 대량으로 생산되기 전인 이 당시에는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을 듯)
를 맞추는 등 시민적 성공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고 한다.
그 부와 출세의 길을 스스로 끊은 것이 바로 1920년이었다. 마음속 중대한 결심을 내린 후세는 「자기 혁명의 고백」을 선언하면서 그 내용을 보도기관, 지인, 피고인들에게 보냈다.

“뚜렷하게 사회운동의 급격한 조류를 느끼는 바, 종래의 나는 주로 법정의 전사라고 불리던 변호사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주요 활동장소를 법정에서 사회로 옮기고, 사회운동을 더욱 솔선수범하기 위해서 이와 같이 사무소와 주택의 차이를 구별하겠다. 한편 취급사건을 도쿄에서는   

1) 관권 등의 인권 유린에 우는 누명을 쓴 자의 사건.
2) 재벌의 횡포에 시달리는 약자의 사건.
3) 진리의 주장을 압박하는 언론범 사건.
4) 무산계급의 사회운동을 박해하는 사건 등.
사회적 의의를 포함한 사건에 한해, 지방에서는 사법제도 혁신을 위해 사건의 종류와 성질 여하를 막론하고 되도록 출장 변호 의뢰에 응할 것이다. 이리하여 사회운동의 첫 번째 기수로소 먼저 자기 혁명을 단행한다.
덧붙여 상세한 이유 및 무료법률상담, 사회시사 강연계획 등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서는 오는 6월1일부터 발행하는 잡지인 「법정에서 사회로」를 따라주길 바란다. 하여튼 이 통지까지다.      그럼 이만.
추가해서, 이미 맡은 사건은 사건의 성질에 관계없이 이전처럼 열심히 성실하게 처리해서 의뢰자의 기대에 부응하겠으니 안심해도 된다.      1920년 5월 15일    후세 다츠지

이와 같은 「자기혁명의 고배」후 후세는 이 혁명서 에서 밝힌 대로 그의 남은 생애를 그의 의지대로 불태웠다. 법정에서, 심지어 변호사 단체에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받던 후세는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다. 그리고 1933년 후세는 신문지법, 우편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금고 3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는다. 그 후로도 다시 징역 2년의 실형. 그리고 변호사 등록도 완전히 말소 된다.

후세의 에피소드 중 1948년 8월 아키타 지방법원에서 아키타 주세법 위반사건(탁주밀조사건)이 있다. 이 당시의 배경은 조선인의 일상생활은 의식주 모두 극한의 상태였다. 일본 정부는 애당초 귀국선을 준비하지 않았고, 해방되었다고는 하지만 모두들 조국으로 돌아갈 여비조차 마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조국으로 귀국했다가도 이승만 정권의 혼란에서 도망쳐 일본으로 재입국하는 자도 많았다. 이렇게 조선인들은 차마 굶어 죽을 수 없어서 탁주 밀조를 시작했다. 이형낭 교수는 면밀한 실증에 기초해 미야기현에 있는 조선인의 70%가 탁주와 엿 제조로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추계한다. 아키타 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고작해야 주세법 위반 사건으로 당시 유일한 무장 집단이었던 경찰대를 동원해서 조선인 부락을 습격했다니 이는 도가 너무 지나쳤다.

이 사건후 후세가 변론하는 법정에서 경관을 증언 심문대에 세웠다. 
 

후세  “당신(증인)은 무장을 하고 수색했는가?”
증인  “무장을 하고, 라니...무슨 말씀입니까?”
후세  “무장의 정의는 가죽 행전을 두르고, 군화를 신고, 곤봉을 휴대하고 출동한 것을 말하는 거다.”
증인  “그렇다면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후세  “분명히 무장하고 조선인을 폭도 취급했지!” 
 

책을 읽다보면 후세 개인적 삶의 흔적은 물론 그 시대적 무대인 2차 세계대전 전후 상황이 많이 그려져 있다. 
 

좀 경우가 다른 이야기일지 몰라도 최근 우리나라는 점점 많은 외국 근로자들이 이 땅에 들어와 살고 있고, 다문화가정 또한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머잖아 인종의 용광로라고 불리는 미국만큼은 아닐지라도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공존해가는 국가가 될 가능성이 많다.  이젠 우리나라가 ‘단일민족’의 정의에서 벗어났다는 정의를 내리기도 한다. ‘단일민족’여부를 가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인 후세가 목숨 걸고 지키고자 했던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을 이제는 우리가 우리 땅,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고 있는 많은 외국인들에게 전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급여도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다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야기나 다문화 가정을 이루면서 오는 골 깊은 갈등과 문제점들을 매스컴을 통해서 알게 될 때 마음이 아프다. ‘쉰들러 리스트’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을 ‘후세 다츠지’의 삶을 통해서 되새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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