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코 페르미, 모든 것을 알았던 마지막 사람
데이비드 N. 슈워츠 지음, 김희봉 옮김 / 김영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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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리코 페르미, 모든 것을 알았던 마지막 사람 】

    _데이비드 N. 슈워츠 / 김영사



엔리코 페르미는 누구인가? 무엇하는 사람이었나? 일반인들에겐 좀 생소할지는 몰라도 물리학 전공자들에겐 익숙한 이름일 것이다. 페르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물리학자이다. ‘아인슈타인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앞에 놓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최초의 원자로 건설, 느린중성자 실험으로 노벨상 수상(1938년, 단독수상)등 페르미의 주요 업적은 핵물리학 분야에 속하고, 원자핵 시대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책의 지은이 데이비드 N. 슈워츠는 정치학 박사이다. 정치학 전공자가 어떻게 저명한 물리학자의 삶을 추적하는 글을 쓰게 되었을까? 그것은 지은이의 아버지 덕분이다. 지은이의 아버지는 ‘중성미자 빔 방법과 뮤온 중성미자의 발견을 통한 경입자의 이중구조 규명’으로 198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3인 공동)한 멜빈 슈워츠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7년쯤 뒤 우연히 차고에서 발견된 서류함의 문서들을 살펴보다가, 페르미의 젊은 동료이자 아버지의 친구였던 물리학자 밸런타인 텔레그디가 페르미에 대해 쓴 글에 흥미를 갖게 된다. 그 후 20세기 물리학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인 페르미의 유산은 날로 커져 가는데, 정작 페르미의 행적에 대한 글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에 대한 전기를 쓰기로 결심했다.


지은이는 약 4년에 걸쳐 페르미의 흔적이 남겨진 미국 일리노이, 뉴멕시코, 뉴욕, 메릴랜드, 이탈리아 로마와 피사, 스위스 제네바 등등 세계 각국의 대학교, 도서관, 연구소, 기록 보관소의 자료를 뒤지고 수많은 사람을 인터뷰하면서 이 책을 썼다.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가 막 시작되던 무렵(1901년) 로마에서 태어난 페르미는 신동이었다. 대학에 들어갈 때는 이미 고전물리학을 (독학으로)모두 통달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 그는 이미 전문 학술지에 발표할 논문을 갖고 있었다. 피렌체 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할 무렵 페르미는 양자역학을 통계역학 분야에 접목하는 업적을 냈는데, 이것은 그가 이룬 최초의 중요한 업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베타붕괴’라는 수수께끼 같은 방사선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을 만들었고, 어떤 원소를 중성자로 때리면 방사성을 띠는데, 느린중성자로 때리면 방사성이 더 커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페르미의 어린 시절은 가히 신동소리를 들을 만하다는 에피소드가 많다. 13세의 페르미는 철도청에 근무하던 아버지의 친구이자 동료인 아돌포 아미데이를 만난 것이 페르미가 물리학 세계로 진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아돌포 아미데이는 페르미가 수학과 물리학 분야에서 매우 영특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소년 페르미를 맡아서 교육을 시키게 된다. 고등학교 과정을 훌쩍 뛰어넘는 대학 수준의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10대의 로마 소년이 최고의 물리학자로 변하기 시작했다. 천재는 태어나기도 하지만, 제대로 키워지기 위해선 주변 환경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페르미는 1938년에 노벨상을 받기 위해 스톡홀름으로 출국하게 된 것을 계기로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탈출한다. 페르미의 아내 라우라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 정책’에 희생되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라우라의 아버지(페르미의 장인)는 이탈리아 해군제독이었지만, 나치에 의해 수용소로 보내져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미국으로 망명한 페르미는 미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동료 물리학자들과 함께 ‘맨해튼 프로젝트’에 동참하게 된다.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만들어진 세계최초의 원자폭탄은 1945년 8월 6일에 일본 히로시마에, 며칠 후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떨어진다. 페르미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페르미의 누나 마리아 페르미는 동생이 주연급으로 활동한 프로젝트에 대해 강경한 견해를 보였다. 그녀는 폭격소식을 들은 직후 동생에게 편지를 썼다. “(....) 모두가 끔찍한 결과에 당황하고 어리둥절해하고 있고, 시간이 지나도 당혹감이 줄어들기는커녕 더 커지기만 해. 나로서는 네가 하나님께 의지하면 좋겠어. 너를 도덕적으로 심판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야.” 그러나 다른 각도로 해석하면, 만약 일본에 두 발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지 않았다면,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했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계속되는 전쟁으로 더 많은 희생이 발생하고, 전쟁 기간도 분명 길어졌을 것이다. 그 후 한국은 8월 15일을 맞이하게 된다.


페르미의 독특함과 탁월함은 그가 이론과 실험 두 분야에서 모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는데 있다. 보통은 이론이 월등한 학자, 실험이 우세한 학자로 양분되나 페르미는 이 두 분야를 모두 장악했다는 점이다. 아울러 그는 훌륭한 스승이기도 했다. 노벨상 수상자가 미래의 노벨상 수상자에게 준 영향을 연구한 사회학자 해리엇 저커먼은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페르미가 독보적이라고 한다. 그의 직계 학생 중에서 다섯 사람이 노벨상을 받았다. 공식적인 제자는 아니지만, 페르미에게 영향력을 받은 사람들 중 두 사람도 노벨상을 받았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페르미의 후광 덕분에 물리학 분야에서 유명해졌고, 중요한 경력을 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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