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읽을 책이 필요하다. 주변을 둘러본다. 예전에 읽었을 것이나 생각이 나지 않는 아이들 책 중 한 권을 책무더기 위에 올려놓은 걸 발견, 집어든다. 뉴베리상을 수상했다고 하고 좋은 책&추천도서 등 덧붙여진 말들이 많다. 


주인공은 제시이고 성장하는 것도 제시이고 말하는 이도 제시라 당연히 제시의 감정 위주다. 그러나 제시가 성장하게 되는 계기는 레슬리다. 용기를 주는 것도 레슬리, 편견을 부순 것도 레슬리. 작가가 이 책을 쓴 동기를 보지 않았다면 주인공은 레슬리지! 했을 지도 모르겠다. 결말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나중에 그 동기를 보고 알았다. 그러나 아쉽다. 아쉬운 부분들이 많다. 원제목이 '테라비시아의 다리'인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깊다. 이 또한 제시의 입장에서 지은 제목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마지막 다리와 제시의 행동이 처음에는 그렇구나 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하니 다르게 볼 수도 있겠다. 내가 너무 삐딱하지. 음 그런 거지.) 

등장인물들이 모두 한 캐릭터 하시는데 적절한 묘사에 할애할 지면이 너무 적었다. 레슬리 가족의 사연도 모자란다. 뜬금없이 전화해서 박물관에 가자는 선생님도 과한 설정으로 느껴진다. 학교 친구들은 에피소드에 비해 너무 단역으로 등장했다 소리없이 사라진다. 전체 길이가 훨씬 길어져야 하는 동화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가져오면 다음과 같다. 


"계집애들은 아래쪽 운동장에서 노는 거 아니야. 선생님이 보시기 전에 올라가는 게 좋을 거야." 

"나도 뛰고 싶어." 

레슬리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미 뛰었잖아." 

제시의 가슴 속에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왜 그래, 개리? 뭐가 문제야? 얘랑 뛰는 게 겁나?" 

게리의 주먹이 올라갔다. 제시는 옆으로 비켜났다. 이제 끼워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레슬리가 게리를 달리기에서 이겼다.)

"고마워." 

레슬리가 말했다. 제시는 어리둥절했다. 

"이 거지 같은 학교에서 상대할 가치가 있는 애는 너 하나 뿐이야." 



레슬리는 나직하게 말하는 성격이 아닌 캐릭터다. 제시도 큰소리를 내는 성격이 아니다. 여기서는 바뀌었다. 상황은 이해되지만 행동은 이해되지 않는다. 레슬리의 마지막 말도 그렇다. (참고로 제시가 남자이고 레슬리가 여자이다.)


뭐랄까, 전체적으로 제시라는 인물을 부각시키기 위해 주변 인물들이 너무 과한 설정을 입고 있다는 느낌? 동화가 그렇게 잘 씌어진 훌륭한 작품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데? 미국에서 교과서에 실렸다고 하는데 교과서에 실린다고 다 훌륭한 작품은 아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에잇. 울어버렸어. 제시의 감정은 잘 표현되었다. 그러나 레슬리는... 레슬리는 어쩌고? 흑흑. 어쩌라고? 너무 조연이잖아. 너무 조연으로 사연도 없이 사라지잖아. 흑흑. 작가님 꼭 그래야만 했나요? 네? 


(혹시나 안 읽으신 분들, 읽으실 분들에게 스포일러 될까 봐 작가의 집필 동기와 결말은 비밀에 부칩니다. 하지만 책소개 보면 다 나올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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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5-15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용해주신 문장 읽으니 영화 [히든 피겨스] 생각 나게 하네요.
혹시 그 영화 보셨나요? 거기에 그런 장면 나오거든요. 흑인은 백인과 화장실을 같이 쓸 수가 없었고 그래서 업무 시간에 흑인 전용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유능한 직원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걸 알게된 백인 남자 상사가 백인 전용 이라는 화장실 간판을 부숴 버리는 장면이요. 뭔가 자기들이 정한 제약이니 자기들이 부술 수 있다는 건가 좀 씁쓸했거든요. 왜 그것을 부수는 것은 차별당한 이들이 아니라 차별을 한 사람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그러니까 인종차별의 약자들은 백인의 도움으로만 앞으로 도약할 수 있는건가, 하는 생각이요.

인용해주신 문장을 읽으면 여자를 뛰지 못하게 하는 것도 남자인데 그 부당함에 맞서 여자가 하는 거라고는 작게 나도 뛰고 싶다고 말하는 것뿐이고(이것도 말하지 않는 것보다야 물론 낫지만요) 옆에 다른 남자가 그것은 부당하다! 라고 말해서 여자를 뛰게 해준다니.... 난티나무님, 저도 기분이 너무 나쁜데요?

난티나무 2021-05-15 22:12   좋아요 0 | URL
영화 안 봤어요! 제가 영화는 (아직) 즐기지 않는 편이랍니다. 하하^^;;;
맞네요. 장면 이야기 쓰신 것만 봐도 화딱지 나요.ㅠㅠ 그런 책과 영화들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다른 이야기지만 저는 티비프로에서 여자들이 보조엠씨 하고 맨날 여자들만 바뀌고 그러는 것도 정말 싫더라고요.ㅠㅠ 남자 엠씨는 안 바뀌는데 흥칫뿡 왜 맨날 여자만 갈아치워! 이러면서 욕하고 그래요.

아아 이렇게 읽다가는 웬만한 책들은 다 성에 안 차서 욕할 것만 같은 기분이...ㅎㅎㅎㅎ 그래도 다락방님이 기분 나쁘다고 해주셔서 안심이에요!!
 
판을 짜는 사람들의 단단한 기획 노트 워커스 라운지 2
고선영 외 지음 / 보틀프레스 / 2021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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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나도 매일 기획을 한다. 기획,이라는 단어는 뭔가 거창하고 전문적이고 멋있어보이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것 또한 편견일 수도.) 그런데 내가 매일 하는 기획은 그렇지 않다. 종이나 컴퓨터에 쓰이지도 않는다. 내 머릿속에서만 그려진다. 내가 하는 것은 살림과 돌봄 기획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매번 하는 기획이 식상하다는 점, 몇십 년을 경험해도 새로운 것이 거의 없다는 점, 그래서 기운 빠지는 일이 될 확률이 높다는 점일 것이다. 무엇보다 큰 차이는 그 기획력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점, 기획하고 실행한 만큼의 경제적 성과가 전무하다는 점. 기획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감이랄까, 그것이 풍기는 뉘앙스를 좀 쉽게 생각해 보려는 노력의 한 방편으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래서 쉬워졌느냐 하면 그건 또 별개의 문제라고. 

나는 가끔 뚱딴지 같은 생각을 한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 대개 뭐야 그 어이없는 생각은, 이라거나 니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라거나 그건 안 돼 니가 잘못 생각하는 거 아님? 이라거나 실현불가능한 망상,이라거나 하는 반응이 돌아온다. 아예 입밖에 내어보지 않은 생각들도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생각하는 데 그치는 것이 나의 특기이자 장기이므로 늘 생각은 생각으로 끝이 난다. 그렇게 파묻힌 ‘기획’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나는 왜 실행하는 힘이 없을까? 

그래서 이런 책을 보면 마음이 끌린다. <판을 짜는 사람들의 기획 노트>, 판을 짜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을 실행했을까, 어떻게 판을 짰을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까, 그들은 어떤 일을 하고 있나. 

그렇다. 이 책은 자기계발서도 아니고 100% 인터뷰집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다.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생각이 뻗어나가는 경험, 문제 해결의 방법, 기획에서 실행까지의, 그리고 거기에서 이어지는 많은 가능성들에 대한 이야기. 평소 좋아하던 제주 잡지 iiin(고선영)도 반가웠고 책과 관련된 콘텐츠 이야기도 좋았다. 책이라면, 책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지만 김미래의 [가루와 반죽]은 비유와 묘사가 돋보였고, 김세나의 [에디터가 플랫폼이 되면 벌어지는 일]에서 “세상의 모든 곳이 다 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말이 눈에 쏙. 정말 그런데! 그렇게 되면 좋겠다! 건축과 부동산을 연결시킨 전명희의 [취향껏 살고 싶은 사람을 위한 안내자]도 좋았다. 공인중개사,에 대한 관념을 바꾸었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 내용과는 크게 상관 없는 말이지만 낡은 집을 용도와 취향에 맞게 리모델링하는 일은 나도 하고 싶은 일이다. 실행할 수 있게 잘 만져볼 것,이라고 또 생각만 한다. 문제는 항상 이거다. ㅎㅎ 그러니 나도 어떻게든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듣고 생각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획’으로 ‘판을 짜’ 보도록 하자! 아, 그리고 매일 하는 살림과 돌봄 기획도 다른 시각으로 보기. 적절하게 나누는 기획을 기획하면 좋겠다는 바람.^^ (획기적인 기획이 나오면 좋겠다. 누구라도 좀 해주세요.)

나처럼 늘 생각만 많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궁금하다면, 이 책으로 13명의 일과 삶을 살짝 들여다보기를 권한다.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자기계발서보다 아마 조금은 더 설렐 수 있을 것이다. 


덧붙임 : 작고 아담한 판형은 좋으나 종이가 너무 두꺼운 게 아닌가 싶다. 책을 펼칠 때 빳빳하다는 느낌이 들고 펼치고 있기가 조금 힘들다. 무겁기도 하다. 좀더 가볍고 책장 넘기기가 쉬우면 좋을 것 같다. 제작 단가를 조금 낮추는 게 어땠을까? 하고 책에 나오는 ‘제작 단가’라는 말을 써먹어본다. 

"손님들이 세렌북피티에 오면 물었어요. "여기 카페예요? 술집이에요? 서점이에요?" 저는 카페도 맞고, 서점도 맞고, 술집도 맞다고 했습니다. 부동산에서 재테크 관련 도서를, 미용실에서 뷰티 관련 도서를, 약국에서 건강 관련 도서를 팔면 어떨까요? 관심 있는 분야인데, 책도 사볼 수 있지 않을까요? 세상의 모든 곳이 다 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김세나, [에디터가 플랫폼이 되면 벌어지는 일])
- P35

"글이라는 것은, 아니 글이기 전에 생각 혹은 감정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손에 만져지지 않는 것, 속 시원히 잡히지 않는 것, 아직 정리된 적 없는 것 들이 어쩌다 새하얀 종이에 검정색 잉크의 옷을 입고, 이렇게나 가지런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움직일 수 없게 박제되어버린 걸까요. 종이 위 글자는 도통 움직일 수 없게 되었지만, 그 움직일 수 없는 모양새로, 우리의 눈을 쉴새없이 움직이게끔 부리고, 제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이들 먹과 백은, 참 쉽게도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한 눈에서 다른 눈으로, 한 서재에서 다른 서재로, 옮겨갈 수 있게 되었으니 신기하지 않습니까." (김미래, [가루와 반죽])
- P70

" 졸업 후 한 도시 재생 프로젝트에 스태프로 참여했고, 거기서 ’재미있는 부동산’을 자처하는 도쿄R부동산을 만났어요. 간담회에서 낙후되었지만 잠재력 있는 공간을 직접 고치고 중개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건축과 출신인 그들이 건축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일을 부동산이라는 수단으로 이루고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건축물을 유통하는 일이고, 건축 바운더리 안에 있는 일이더라고요." (전명희, [취향껏 살고 싶은 사람을 위한 안내자])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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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05-10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하는 것은 살림과 돌봄 기획이다.˝ 앗, 너무 근사한 기획이라는 생각이드는 걸요~ 판을 짠다니 저도 어쩐지 거창한 단어의 나열이라 쑥스 부끄 하지만 우리의 살림과 돌봄이야말로 가장 거창한 단어들을 가져다 붙여야하는 훌륭한 기획이 들어가야하는 무한히 과대평가되어야하는...(더 거창한 말을 가져다 붙이고 싶다..) 암튼 저의 진심은 시혜적 올려치기(?)가 아니라 앞으로의 시대정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난티나무 2021-05-10 17:45   좋아요 1 | URL
공쟝쟝님 말씀에 무한대로 동감입니다. 앞으로의 시대정신,이라는 말도 좋으네요.^^ 아자! 그렇게 되는 날까지~!!!!!!
 

악 이거 뭔가요 @@

26페이지 뒤에서부터 뭔가 이야기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 느낌? 나 왤케 이해 못하지? 이러면서 읽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보니 페이지가 @@ 막 뒤죽박죽 @@
이거 내 책만 이런 거겠지? ㅠㅠㅠㅠㅠㅠㅠㅠ
아이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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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7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07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1-05-08 0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그랬던가?! 이따 집에 가서 찾아봐야겠어요. (어버이날이라고 엄마집 와 있는 1인 ㅋㅋ)

난티나무 2021-05-08 23:48   좋아요 0 | URL
아니기를 바랍니다.ㅎㅎ
어버이날 잘 보내셨어요??^^

잠자냥 2021-05-09 00:26   좋아요 0 | URL
ㅎㅎ 다행히 제 책은 멀쩡했습니다. 하긴 이상했으면 아마 진작에 반품교환했깄지요. ㅎㅎ

다락방 2021-05-08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는 지금 살펴보니 제대로 되어있네요. 난티나무 님 어쩌면 좋아요. 출판사에 연락해보시면 다시 보내주실거에요. 저는 기존에 다른 출판사 책이 그래서 이메일 보냈더니 다시 보내주셨어요. 그나저나 다시 보내줘도 받으시기까지 한참 걸리겠네요 ㅜㅜ

난티나무 2021-05-08 23:49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저만 그런 거죠?ㅠㅠ 작년에도 소설 보다 봄 그 책 완전 페이지 빠진 채로 엉망인쇄 되어있어서 다시 받는데 한참 걸렸어요... 두 번째네요? 흐유.

파이버 2021-05-08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지가 이렇게 될수도 있네요;;;; 정말 놀라셨겠어요… 무사히 교환받으시길 바랍니다

난티나무 2021-05-08 23:50   좋아요 1 | URL
저는 제가 왜 이렇게 글을 이해 못하나 한참을 생각했어요.ㅋㅋㅋ 처음 잘못된 부분이 그냥 부드럽게 넘어가지더라고요? 약간 이상하기는 했지만...^^;;;;; 교환의 길이 너무 멀어서 고민스럽네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알라딘고객센터 2021-05-25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편드려 너무 죄송합니다. 번거롭더라도 상태 확인 가능한 이미지 첨부하여 1:1고객상담으로 연락주시면 확인 후 교환 or 반품 가능하오니 참고해주셔서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이후 이용하시면서 불편하신 부분은 나의계정>1:1고객상담으로 연락주시면 신속하게 안내 드리고 있으니 참고해주십시오.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난티나무 2021-05-28 05:1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답이 늦었습니다.
출판사 인쇄불량이니 알라딘에서 불편을 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해외라 교환이 번거롭다 생각해서 고객센터에 연락드리지 않았는데 반품 생각해 봐야 겠네요. 이렇게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 부부는 런던에 사는 동안에는 상류층 유행에 따라 서로 거의 만나지 않고 지냈다. 일 년에 절반 이상, 자연의 여신이 사방 구석구석 아름답게 꾸며놓은 시골에서 소박한 행복을 즐길 때 역시, 두 사람은 자주 어울리지 않았다. 남편은 냉정하고 무덤덤한 시선으로 그 아름다운 광경을 그냥 지나쳤고, 시골이 내놓는 오락거리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그는 아침이면 사냥을 했고, 과한 만찬이 끝나면 보통 잠들어버렸다. 이렇게 적절히 휴식을 취한 덕분에, 엄청나게 먹어치운 것을 소화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면 그는 예쁘장한 소작농 여인들을 찾아다니곤 했다. 발그레하게 빛나는 그들의 혈색을 볼연지도 살려내지 못하는 아내의 안색과 비교했을 때, '대식가'의 마음에 든 것이 어느 쪽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신이 나서 멋대로 추는 춤은, 병약하고 기력이 없어 늘어져 있는 아내보다 그의 마음에 맞았다. 엘리자의 가녀린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지경이었고, 연약한 여인상을 완성하며 긴장을 너무나 풀어버린 나머지, 그녀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없었다.

여인 중에는 그처럼 제대로 존재하지 못하는 이들이 숱하게 많았다! 하지만 엘리자는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믿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메리] - <메리, 마리아, 마틸다> p.7



"여인 중에는 그처럼 제대로 존재하지 못하는 이들이 숱하게 많았다!"

소설 시작하자마자 맞닥트린 부분에서 지난달 읽은 책의 내용이 떠올라 가져와본다. 19세기 여자들의 삶과 병증, 의사들의 해괴망칙한 처방 등등. "제대로 존재하지 못하는 이들", 여자들.


길먼은 그(가장 저명한 신경 전문가 위어 미첼 박사)와의 만남에 대비해 자신의 전체 병력에 대해 조리 있게 적어 갔다. 이를테면 그녀는 자신의 병이 집, 남편, 아이들로부터 떨어져 있으면 사라졌다가 그들에게로 돌아가자마자 재발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미첼 박사는 그녀가 준비해 간 병력 기록을 "자만심"의 증거라며 묵살했다. 그는 환자로부터 정보를 원하지 않았고 "완전한 복종"을 원했다. 길먼은 자신에게 내린 그의 처방을 아래와 같이 인용한다.


"최대한 가정중심적인 삶을 살라. 항상 아이들과 함께 있어라." (단지 아기에게 옷을 입히고 있을 뿐인데도 그 행동으로 내가 몸을 떨며 울게 되는 것을 상기해 보라. 이 관계가 나한테 미치는 영향은 말할 것도 없이 아기를 위해서도 결코 건강한 동반관계가 아니다.) "매 식사 후 한 시간 동안 누워 있어라. 하루에 단 두 시간만 지적인 생활을 해라.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절대로 펜, 붓, 연필을 잡지 마라."


<200년 동안의 거짓말> p.156


바버라 에런라이크, 디어드러 잉글리시 <200년 동안의 거짓말> p.156

▷ 길먼의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부유한 아내들은 도도새 같은 하나의 비극적 진화의 변종처럼 보였다. 부유한 아내들은 일하지 않았다. 가정에서 수행할 진지하고 생산적인 일이 없었으며, 집 청소, 요리, 자녀 양육처럼 그녀가 하던 일은 가능한 한 많이 가정부에게 넘겨졌다. 생물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단 하나의 유일한 기능, 즉 섹스로 특화되었다. 따라서 스커트 뒷자락의 부푼 장식, 가짜 앞가슴, 큰 엉덩이, 잘록한 허리 같은 부자연스러운 복장은 자연스러운 여성적 외모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그녀의 임무는 자신이 결혼한 사업가, 법률가, 혹은 교수의 상속인을 낳는 것이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남편의 수입에 대한 분배를 요구할 수 있었다. 길먼이 우울증에 걸려 아기를 돌보지 않았던 것은 아기가 자신의 경제적 의존을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증거라는 것을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에게 성적 타락으로 여겨졌다.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신랄하게 지적했듯이 "숙녀"는 하나의 다른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고, 경제적·사회적으로 중요성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했다.

<200년 동안의 거짓말> p.160~161



▷ 엘리자는 남편이 왜 집에 붙어 있지 않는지 궁금했다. 질투도 느꼈다. 어째서 남편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것인지, 자신의 곁에 앉아, 손을 꼭 잡아주고,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어주지 않는 것일까? 고귀한 독자 여러분, 필자가 그 까닭을 말씀드리자면, 그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항상 하나의 개념에 하나의 단어를 붙인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쉽게 분석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조금도 없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메리] - <메리, 마리아, 마틸다> p.10



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이렇게 적확할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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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5-07 07: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좋습니다!

난티나무 2021-05-07 14:56   좋아요 0 | URL
다섯바닥 읽고 으쓱으쓱!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1-05-07 0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세쪽 읽었는데 난티나무님 엄청 앞서가시네요 ㅎㅎㅎ 다섯바닥이나 읽으셨다니요.
<200년 동안의 거짓말> 160쪽 올려주신 문단 저도 밑줄 그었던 문단이에요. (그녀는) 섹스로 특화되었다 ㅠㅠㅠㅠ

난티나무 2021-05-07 14:58   좋아요 0 | URL
다섯바닥 이라고 쓰면서 좀 웃었어요. 옛날 말인가 하고.ㅎㅎㅎ 쪽, 도 있었네요. 아 진짜 한국말도 줄어....ㅠㅠ

밑줄 문단..하아.. 단발머리님 마음 내 마음...ㅠㅠㅠㅠㅠㅠㅠ

공쟝쟝 2021-05-09 2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으쓱으쓱ㅋㅋ 읽으면 읽을 수록 더 깊어지는 우리들의 읽기 만세😚

난티나무 2021-05-10 03:57   좋아요 1 | URL
만세!!!!!!!!! 🎉🎉🎉
 

전자책 적립금 매일 100원, 한 달 모으면 3천원. 습관처럼 밤마다 클릭클릭. 전자책 이벤트 자주 열림. 클릭클릭. 꼭 사야 할 전자책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얼마를 깎아서 살 수 있다고 하면 무엇 때문에 끌리는지? 요런 마음이 모두에게 존재하니 이 사회가 모든 걸 팔아먹고 있겠지. 5월 되었다고 5일간 이벤트를 하길래 매일 긁었다. 500원 500원 500원 1000원 1000원. 그날 쓰지 않으면 없어지는 포인트라 매일 없어지도록 두었다. 1000원이면 10일을 클릭해야 모이는 건데 아깝다,라고 생각하다가 화들짝. 어차피 내가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고 말이야. 뭐가 아깝다는 거지. 1000원 쿠폰 쓰려고 만원짜리 책을 살 거잖아. 꼭 필요한 거 아니잖아. 전자책 사서 안 읽고 있는 책 무지 많잖아. 안 읽고 묵혀놓은 전자책들이 아까운 거 아님? 그래서 오늘도 쿨하게 1000원 적립금 포기한다. 솔직히 말해 가장 큰 이유는 지금 당장 사야만 할 것 같은 전자책이 없다는 사실이다. 뭐 몇백 권 담아놓은 보관함 뒤지다 보면 사고 싶은 책들이야 많겠지만, 전자책을 사는 기준 같은 것도 있는지라 거기 부합하는 책을 찾는 것도 힘든 작업이니까. 아 드디어 벗어나는 건가요, 전자책 적립금의 유혹에서? (아니요, 그럴 리가.) 


어디 보자. 보관함에 전자책으로 담아놓은 것들이... 





























 















 
















































왓. 너무 많다. ㅠㅠ 겨우 5페이지 봤을 뿐인데 이만큼.(종이책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ㅠㅠ) 이 또한 뻘짓이로구나. 고만 해야지. 책 찾으면서 보니 또 막 사고 싶은 마음이 스물스물. 펼친 책이나 잘 읽으라고! 

그런데 전자책에 대한 기준을 좀 다시 세워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구난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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