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을 짜는 사람들의 단단한 기획 노트 워커스 라운지 2
고선영 외 지음 / 보틀프레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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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나도 매일 기획을 한다. 기획,이라는 단어는 뭔가 거창하고 전문적이고 멋있어보이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것 또한 편견일 수도.) 그런데 내가 매일 하는 기획은 그렇지 않다. 종이나 컴퓨터에 쓰이지도 않는다. 내 머릿속에서만 그려진다. 내가 하는 것은 살림과 돌봄 기획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매번 하는 기획이 식상하다는 점, 몇십 년을 경험해도 새로운 것이 거의 없다는 점, 그래서 기운 빠지는 일이 될 확률이 높다는 점일 것이다. 무엇보다 큰 차이는 그 기획력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점, 기획하고 실행한 만큼의 경제적 성과가 전무하다는 점. 기획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감이랄까, 그것이 풍기는 뉘앙스를 좀 쉽게 생각해 보려는 노력의 한 방편으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래서 쉬워졌느냐 하면 그건 또 별개의 문제라고. 

나는 가끔 뚱딴지 같은 생각을 한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 대개 뭐야 그 어이없는 생각은, 이라거나 니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라거나 그건 안 돼 니가 잘못 생각하는 거 아님? 이라거나 실현불가능한 망상,이라거나 하는 반응이 돌아온다. 아예 입밖에 내어보지 않은 생각들도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생각하는 데 그치는 것이 나의 특기이자 장기이므로 늘 생각은 생각으로 끝이 난다. 그렇게 파묻힌 ‘기획’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나는 왜 실행하는 힘이 없을까? 

그래서 이런 책을 보면 마음이 끌린다. <판을 짜는 사람들의 기획 노트>, 판을 짜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을 실행했을까, 어떻게 판을 짰을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까, 그들은 어떤 일을 하고 있나. 

그렇다. 이 책은 자기계발서도 아니고 100% 인터뷰집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다.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생각이 뻗어나가는 경험, 문제 해결의 방법, 기획에서 실행까지의, 그리고 거기에서 이어지는 많은 가능성들에 대한 이야기. 평소 좋아하던 제주 잡지 iiin(고선영)도 반가웠고 책과 관련된 콘텐츠 이야기도 좋았다. 책이라면, 책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지만 김미래의 [가루와 반죽]은 비유와 묘사가 돋보였고, 김세나의 [에디터가 플랫폼이 되면 벌어지는 일]에서 “세상의 모든 곳이 다 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말이 눈에 쏙. 정말 그런데! 그렇게 되면 좋겠다! 건축과 부동산을 연결시킨 전명희의 [취향껏 살고 싶은 사람을 위한 안내자]도 좋았다. 공인중개사,에 대한 관념을 바꾸었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 내용과는 크게 상관 없는 말이지만 낡은 집을 용도와 취향에 맞게 리모델링하는 일은 나도 하고 싶은 일이다. 실행할 수 있게 잘 만져볼 것,이라고 또 생각만 한다. 문제는 항상 이거다. ㅎㅎ 그러니 나도 어떻게든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듣고 생각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획’으로 ‘판을 짜’ 보도록 하자! 아, 그리고 매일 하는 살림과 돌봄 기획도 다른 시각으로 보기. 적절하게 나누는 기획을 기획하면 좋겠다는 바람.^^ (획기적인 기획이 나오면 좋겠다. 누구라도 좀 해주세요.)

나처럼 늘 생각만 많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궁금하다면, 이 책으로 13명의 일과 삶을 살짝 들여다보기를 권한다.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자기계발서보다 아마 조금은 더 설렐 수 있을 것이다. 


덧붙임 : 작고 아담한 판형은 좋으나 종이가 너무 두꺼운 게 아닌가 싶다. 책을 펼칠 때 빳빳하다는 느낌이 들고 펼치고 있기가 조금 힘들다. 무겁기도 하다. 좀더 가볍고 책장 넘기기가 쉬우면 좋을 것 같다. 제작 단가를 조금 낮추는 게 어땠을까? 하고 책에 나오는 ‘제작 단가’라는 말을 써먹어본다. 

"손님들이 세렌북피티에 오면 물었어요. "여기 카페예요? 술집이에요? 서점이에요?" 저는 카페도 맞고, 서점도 맞고, 술집도 맞다고 했습니다. 부동산에서 재테크 관련 도서를, 미용실에서 뷰티 관련 도서를, 약국에서 건강 관련 도서를 팔면 어떨까요? 관심 있는 분야인데, 책도 사볼 수 있지 않을까요? 세상의 모든 곳이 다 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김세나, [에디터가 플랫폼이 되면 벌어지는 일])
- P35

"글이라는 것은, 아니 글이기 전에 생각 혹은 감정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손에 만져지지 않는 것, 속 시원히 잡히지 않는 것, 아직 정리된 적 없는 것 들이 어쩌다 새하얀 종이에 검정색 잉크의 옷을 입고, 이렇게나 가지런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움직일 수 없게 박제되어버린 걸까요. 종이 위 글자는 도통 움직일 수 없게 되었지만, 그 움직일 수 없는 모양새로, 우리의 눈을 쉴새없이 움직이게끔 부리고, 제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이들 먹과 백은, 참 쉽게도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한 눈에서 다른 눈으로, 한 서재에서 다른 서재로, 옮겨갈 수 있게 되었으니 신기하지 않습니까." (김미래, [가루와 반죽])
- P70

" 졸업 후 한 도시 재생 프로젝트에 스태프로 참여했고, 거기서 ’재미있는 부동산’을 자처하는 도쿄R부동산을 만났어요. 간담회에서 낙후되었지만 잠재력 있는 공간을 직접 고치고 중개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건축과 출신인 그들이 건축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일을 부동산이라는 수단으로 이루고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건축물을 유통하는 일이고, 건축 바운더리 안에 있는 일이더라고요." (전명희, [취향껏 살고 싶은 사람을 위한 안내자])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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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05-10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하는 것은 살림과 돌봄 기획이다.˝ 앗, 너무 근사한 기획이라는 생각이드는 걸요~ 판을 짠다니 저도 어쩐지 거창한 단어의 나열이라 쑥스 부끄 하지만 우리의 살림과 돌봄이야말로 가장 거창한 단어들을 가져다 붙여야하는 훌륭한 기획이 들어가야하는 무한히 과대평가되어야하는...(더 거창한 말을 가져다 붙이고 싶다..) 암튼 저의 진심은 시혜적 올려치기(?)가 아니라 앞으로의 시대정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난티나무 2021-05-10 17:45   좋아요 1 | URL
공쟝쟝님 말씀에 무한대로 동감입니다. 앞으로의 시대정신,이라는 말도 좋으네요.^^ 아자! 그렇게 되는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