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 신야 '...후지와라 신야를 인터뷰어인 김윤덕은 서슴없이 이렇게 부른다. 읽다보니 진짜 사부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간 후지와라 신야의 여러 책을 읽어왔지만 그의 개인사는 잘 알지 못했는데 이 책을 통해 이 '거물'의 개인적인 면모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자기만의 길을 가는 사람은 역시 그만의 향기가 있고 그만의 매력이 있다.

 

특히 다음 구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p. 196  후지와라: 우리 신체의 왼쪽은 오른쪽 뇌, 오른쪽은 왼쪽 뇌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좌우는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요. 나는 죽을 때에도 사람에 따라 몸의 오른쪽 혹은 왼쪽이 먼저 죽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 경우 왼쪽이 약합니다. 여러분들도 왼쪽, 오른쪽 중에 어느 쪽이 좀 더 강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양쪽의 생명력이 다른 거지요. 그래서 나는 생명력이 약한 왼쪽 눈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죽음에 더 가까운 쪽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뜻입니다. 죽음에 가깝다는 말은 생에 가깝다는 뜻이에요. 모순된 이야기지만, 죽음을 의식하기 때문에 삶을 알게 되는 겁니다. 왼쪽 눈으로 사진을 찍으면 더욱더 냉철하게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고 믿지요.

 

 

곰곰 따져보니 나는 여직껏 한번도 왼쪽 눈으로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다. 그런 생각조차하지 못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왼쪽 눈으로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후지와라 신야의 말씀도 들어보면,

 

p. 289  후지와라:....일본 사람들은 "인간은 반경 10미터의 공간에서 살아간다"라는 얘기를 자주합니다. 직경 20미터 밖에 있는 삶은 나와는 상관없다는 뜻이지요. 정치 문제에 귀를 막고, 이데올로기를 생각하지 않고 미니멀리즘 속에서 생활하는 데 그만큼 익숙해졌습니다. 하지만 2011년 3월 대지진 이후 방사능 오염의 문제가 우리 삶의 반경 10미터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습니다. 하루키처럼 재즈의 선율 속에 맥주 한 잔 들이키며 세상을 망각하려고 했는데, 이미 맥주 안에 방사능 물질이 들어와 있는 겁니다. 따라서 어떻게 해도 그런 방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절박한 일본이 되어버린 것이죠. 일본 사람들은 현재 그렇게까지 막다른 골목에 놓여 있습니다. '정상성 바이어스'와 '인지성 바이어스'라는 게 있습니다. 방사능 오몀도를 측정해보니 얼마가 나왔고, 이건 굉장히 위험한 상태라고 인지하는 것이 '인지성 바이어스'....그런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은 별일 아니라고 자신을 속이고 위로하는 것이 '정상성 바이어스'이지요....나는 하루키의 마니아라는 독자들이 그런 정상성 바이어스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어요. 하루키의 삶은 실제로 70년대부터 정상성 바이어스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인터뷰어인 김윤덕의 다음과 같은 하소연. 누구나 공감하는 말이지만 누구도 감히 어쩌지 못하고 신음소리만 난무하는 세상에서 후지와라 산야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p. 240  사부 신야의 말대로 일원화된 가치, 획일화된 삶의 방식은 악이라는 사실을 두 아이 키우면서 절감한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하나의 가치를 절체절명의 목표로 삼고 한길로 달려가기. 이 얼마나 소모적이고 비효율적인 경쟁인가. 수학은 왜 그리 어렵고, 영어는 왜 원어민처럼 잘해야 하는지, 왜 모든 아이를 성적만으로 줄 세우는지. 학벌사회, 물질만능주의의 구태는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어서 우리 아이들을 불행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래서 진정한 사부가 필요한 시대. 기존 노선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대로 살아온 사람의 옹골찬 생각을 읽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자 깨달음을 준다. 역시 후지와라 신야는 살아 있는 '사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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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고 냉철하고 야무지고 당차고 꽉 찬 느낌의 책이다. 이제야 이런 책이 눈에 들어오다니...

 

정희진의 책 읽기 습관은 배울만하다.

p.24

1. 눈을 감아야 보인다.

2. 새로운 것을 얻으려면 기존의 인식을 잠시 유보하라.

3. 한계와 관점은 언어와 사유의 본질적인 속성이지, 결함이 아니다.

4. 인식이란 결국 자기 눈을 통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나의 시각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5. 본질적인 나는 없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나다.

6. 선택 밖에서 선택하라.

7. 궤도 밖에서 사유해야 궤도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8. 대중적인 책은 나를 소외시킨다.

9. 독서는 읽기라기보다 생각하는 노동이다.

 

p.176  우리의 근본적 불행은 서구 강대국의 과거와 현재를 모델로 삼아 평생을 숨찬 추격자로 사는 삶이다.

 

p.177  5월과 8월은 민망한 계절이다. '감사의 달'의 상술과 '민족의 한'이, 때를 기다린다.

 

p.215  사회적 약자는 약한 사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부당한 질문을 받는 사람이다. "너 빨갱이지?" "폭력적이지?" "게으르지?" "더럽지?"....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신으로부터 면허라도 받았는가?

 

p.220  "혁명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정하는 것이다.....레볼루션에는 반란의 의미도 있지만 회전한다는 뜻도 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삼라만상은 항상 운동하고 있으니 사는 것이 혁명이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무수한 작은 변화가 세상을 흔들리게 하고 시대를 변화시킨다."....가토 도키코(일본 여가수, 71세)

 

p.241  미야코지마는 오키나와 본토에서 남서쪽으로 약 300킬로미터 떨어진 섬인데...'식민지의 식민지'다. 오키나와는 자신이 본토로부터 당한 차별을 미야코지마를 상대로 반복했다.

 

p.265  "내 행동만이 나의 진정한 소유물이다. 나는 내 행동의 결과를 피할 길이 없다. 내 행동만이 내가 이 세상에 서 있는 토대다."....틱 낫 한

 

아, 책을 그대로 통째로 베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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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5-01-11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으면 읽을수록 숨이 턱턱 막혀요. 내가 이렇게 갑갑한 사람이었구나, 생각하는 게 참 고루했구나 싶어서. 말씀하신대로 정말 책을 통째로 베끼고 싶어요.

nama 2015-01-11 16:52   좋아요 1 | URL
그동안 내가 너무나 쓸데없이, 생각없이 책만 읽었구나, 하는 한탄도 하게 되지요. 책을 제대로 읽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구요. 아픈 책입니다, 이 책.
 

어젯 밤, 잠들기 전에 틀어놓은 백창우의 cd는 16곡 중 겨우 첫번 째 곡을 듣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새벽에 깨어보니 전원이 그대로 켜져 있었다. 나머지 15곡은 전혀 기억에 없고...

 

그 첫번 째로 나오는 시가 바로 김용택의 <해가 지면>으로 시작하는 시였는데 ' ~~~걸어간다'를 자장가 삼아 들었나보다.

 

중2...아, 힘들다. 쓰러질 것 같다. 무례함에 화로 맞서기도 하지만 도를 닦듯 참고 또 참는다. 내가 왜 이 길에 들어섰던가, 를 되새김질할 뿐이다. 그래도 집에 걸어갈 수 있어 좋다. 집에나 가자. 지금 걷기 시작해도 집에 가면 어두워지니 서둘러야겠다.

 

 

 

                  연애 1

                                                       김용택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나무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강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산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질 때, 나무와 산과 강에게로 걸어가는 일은

아름답다 해가 질 때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산그늘처럼

  걸어가는

  일만큼

  아름다운

  일은

  세상에

  없다


*****위 시에 딱 맞는 길이 나의 퇴근길이다. 흙길을 따라 오른쪽엔 소나무, 왼쪽엔 해당화가 도열해 있고, 17도 각도로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봉우리가 다섯 개라서 오봉산이라 불리는 산이 있고, 바닷물이 들고 나는 어귀가 가늘고 길게 흙길을 벗삼아 뻗어 있다. 이 흙길을 따라 한 시간을 산그늘처럼 걸어가면 드디어 우리집에 도착한다. 분명, 나는 이 길로 퇴근하기 위해 내일도 출근하게 될 것이다. 길이, 걷는 일이 나를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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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탁오(1522 ~1602)

명´청나라 교체기에 중국을 뒤흔들었던 사상가.

유학적 질서와 관습에 따라 살다가 가족들에 대한 책무를 다한 뒤에 스스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됨.

'자유로운 사상가'로 삶을 마무리하기 위해 면도칼로 자살함.

연암 박지원이 이탁오의 영향을 받아 자유로운 문체를 구사할 수 있었음.

"지금까지 나는 개처럼 살았다."

"세상에 태어났으면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보아야 한다."

                ('강신주의 에피소드 철학사'강의록에서)

 

 

 

 

 

 

 

 

 

 

 

 

 

두툼한 이 책을 아무데나 펼쳐본다.

 

p368  ...얌전히 노예가 되었던 시대, 노예가 되려고 했지만 되지 못한 시대. 중국인에게는 이제껏 이 두 시대만이 있었을 뿐이다(루쉰의 말). 충효와 절의 같은 유교의 도덕은 모두 노예를 훈련하기 위해 마련한 규범이다. 마음을 깎고 뼈를 도려낸 2천 년의 세월 속에 중국인의 기질은 그렇게 유순하고 불쌍하게 변했다.

 

p.446 이지(이탁오)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 세상에서 정말로 문장을 잘 짓는 사람은 모두 처음부터 문장을 짓는 것에 뜻이 있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 형용하지 못한 수많은 괴이한 일이 있고, 그의 목구멍 사이에 토해내고 싶지만 감히 토해내지 못하는 수많은 것이 있고, 그의 입에 때때로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것이 있어, 이것이 오랫동안 쌓이고 쌓여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형세가 되는 것이다. 일단 어떤 정경을 보고 감정이 일고 어떤 사물이 눈에 들어와 느낌이 생기면, 남의 술잔을 빼앗아 자기 가슴속에 쌓인 응어리에 뿌리고 마음속의 불평함을 호소하여 사나운 운수를 만난 사람을 천년만년 감동시킨다. 그의 글은 옥을 뽑고 구슬을 내뱉는 듯하고, 별이 은하에 빛을 발하면서 맴돌아 하늘에 찬란한 무늬를 만드는 듯하다......"

 

도서관에서 빌려왔으나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돌려주게 되었다. 언젠가 읽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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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고재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여러 이웃서재에서 글을 읽고 이 책이 궁금했는데 드디어 읽게 되었다. 기다림이라는 과정이 있어서 그렇지 학교 도서관에 신청하면 언젠가는 손에 잡게 된다.

 

지난 10여 년 안짝으로 시골생활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3년 가까이 농사도 지어봤다. 한 달에 자동차 연료비로 30만 원 넘게 드는 것을 불구하고 열심히 오고가며 농사를 지어봤지만 생산물은 돈으로 따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돈은 커녕 갈 때마다 내 키 높이로 자란 잡초와의 한바탕 전쟁으로 온 몸이 몸살날 지경이기 일쑤였다. 시어머님과의 갈등은 별개로 치고.

 

지인들과 어울려 강원도 오지에 오두막을 만들었지만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진입로마저 태풍에 유실된 이후로 한 번도 편하게 집 문 앞까지 당도한 적이 없었다. 자갈길, 풀길 헤치며 옆 집 눈치 봐가며 터벅터벅 걷는 길이 고행이 따로 없다. 동네 분위기는 또 얼마나 복잡하고 주민들은 갈등이 심오한지...

 

얼떨결에 시작한 이런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 책의 내용이 속속들이 잘 들어왔다. 그러나 이 책이 계기가 되어 심기일전하고 유비무환의 대책을 세워서 앞으로 실수없는 시골생활을 할 수 있느냐 하면, 그건 별개다. 절대로 미리 대책을 세울 수가 없다. 철저하게 대책을 세운다면 감히 시골생활하겠다고 나설 수 없을 것이다. 알고는 시작하지 못한다. 시작하고 나서야 알게 된다. 미친 짓을 했다는 것을...

 

그런데도 아직 그 꿈을 접을 수 없다는 게 문제다. 남편은 오늘도 퇴직 이후의 전원생활을 함께 꿈꾸자고 꼬드기고 있다. 그동안의 온갖 시골 경험에도 불구하고.

 

p. 89...안주의 땅, 마지막 거처, 별천지, 지상낙원 같은 화려한 문구에 혹하더라도 망상으로만 끝나면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이상적인 공간을 정말로 발 벗고 나서서 찾으려는 것은 수백 년 전 보물을 찾으려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입니다. 노후 자금만 넉넉하다면 그런 망상에 가까운 꿈을 정말로 실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반복하지만, 문제를 다 알고 있다해도 꿈을 접을 수 없다는 게 진짜 문제다. 아무리 일침을 가하고, 이 책에 나오는 '수제 창'을 목에 들이대도 굽혀지지 않는 게 시골생활에 대한 로망이다. 나도 머잖아 이런 책을 쓸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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