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약국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1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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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밤의 약국에는 많은 방문객이 있다. 사람도 있고 동물도 있고 비록 꿈이지만 문어도 있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소란스럽기도 하고 진저리가 나기도 하지만 또 훈훈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그리고 사람 뿐만 아니라 이 지구에는 많은 존재들이 함께 살아간다. 그런 세상일을 작가는 섬세하고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담담하게 이야기 한다.

밤이 깊다.
아직 잠들지 못한 모든 이들이 행복하길. (p.279)

먼저 인터넷서점에 들어간다. -> 사야 할 책을 검색한다. -> 그러다가 온갖 링크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실제로는 유한하겠지만 알고 보면 무한한 책들의 미로를 헤맨다. → 그러면서 동시에, 손에 잡히는 대로 장바구니에 담는다. -> 담을 만큼 담은 후, 결제한다. -> 주문한 책들의 목록을 보며, 꼭 사려고 했던 가장 중요한 책은 정작 사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오히려 기뻐하며 다시 인터넷서점에 들어간다. -> 다시 사야 할 책을 검색한다. 또다시, 온갖 링크를 타고 돌아다닌다. -> 아까와 같은 공간이지만 완전히 달라진 책의 미로를 헤맨다. -> 그러면서 또 다시금 장바구니에 책을 담는다.→ 책값을 결제한다. 이번에도 또, 꼭 사려던 책이 빠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 다시 인터넷서점에 들어간다. -> 위의 과정을 되풀이한다.→ ∞ → 마침내 무한에 빠졌음을 깨닫는다. - P170

‘나‘는 ‘뇌‘가 아니라 ‘(뇌를 포함한) 몸 전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건 순전히 나의 강아지들 덕분이다. 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마토는 내게 생명의 불가역성, 그 빛나는 유일함을 일깨워줬다. 품에 안은 강아지가 마지막 숨을 내쉬며 서서히 식어갈 때, 난 세상에서 가장 큰 질문에 맞닥뜨렸다. ‘살아 있다는 건 뭘까?‘ 그리고 칸토와 매일 산책하면서 나는, 움직이고 걷고 뛰고 맛보고 냄새 맡고 느끼는 나 자신이 곧 ‘살아 있음‘이라는걸 알았다. 만약 슈퍼컴퓨터가 있어서 거기에 나의 뇌를 온전히 업로딩한다 해도, 그게 결코 ‘나‘일 수 없음을, 이렇게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업로딩된 내가 영원히 살며 세상의 모든 지혜와 우주의 비밀을 알게 된다 해도, 그 존재는 산책하며 나뭇잎의 냄새를 맡을 수 없고 따뜻하고 북실북실한 칸토의 털에 얼굴을 파묻지도 못한다. 뇌(혹은 의식, 누군가는 이것을 영혼이라고 표현하겠지만) 몸을 분리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현대의 새로운 종교이며, 죽으면 영혼만은 천국에 올라가 영원히 산다고 믿었던 오래전의 이원론과 다를 바 하나 없었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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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7-31 00: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70쪽 인용문!!!ㅋㅋㅋ
저것은 우리의 모습인 거잖아요?ㅋㅋㅋ

꼬마요정 2023-07-31 08:40   좋아요 2 | URL
맞아요!! 무한에 빠진 우리의 모습이죠!! ㅋㅋㅋ 저 부분 읽으면서 어찌나 웃기면서 공감했는지 몰라요 ㅋㅋㅋ 어멋, 이건 나잖아!! 이러면서요 ㅋㅋ 살 책을 안 샀는데 오히려 기뻐하며 다시 인터넷 서점에 들어간다… ㅋㅋㅋㅋ 작가님 맘 내 맘 책나무님 맘 ㅋㅋㅋ 이렇게 책에 깊이 공감하는 것도 참 오랜만이에요 ㅋㅋㅋ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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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그는 어디서든 《불안의 책》을 보기만 하면 얼른 지나쳐 갔다. 두 사람은 이 사건에 대해 말을 나누지 않았다. 이 일은 둘이 헤어질 때까지 앙금이 남아 있던 온갖 사연 가운데 하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이 굉장한 책이 저한테 어떤 느낌을 주는지 아세요?"
시몽이스가 책의 가격을 계산기에 찍으며 이어서 말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몽테뉴의 《수상록》을 썼다는 느낌이에요." - P97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프라두의 책에 쓰여 있던 문장 가운데 하나였다.299

그레고리우스는 목록에 사랑이 빠졌다고 말했다. 조르즈의 몸이 뻣뻣해졌다. 잠깐 그는 술이 완전히 깬 듯했다.
"아마데우는 사랑을 믿지 않았소.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그 단어를 피했지. 그는 사랑에는 욕망과 만족, 편안함밖에 없다고 말하곤 했소. 이 모두가 헛된 것이라고 했지. 제일 허무한 건 욕망이고 그다음이 만족이며, 누군가에게서 보호를 받는다는 편안한 느낌도 언젠가는 결국 부서지는 것이라고 했소.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힘들어서 우리 감정을 다치지 않고 그 일들을 견디어내기는 힘들다는 것이었소. 그래서 신의가 중요하다고 했지. 그는 신의란 감정이 아니고 의지요 결정이며, 영혼의 견해 표명이라고 말했소. 우연한 만남과 감정을 필연으로 바꾸는 그 무엇이라고, 영혼의 숨결이라고 했지. ‘그저 낮은 숨결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영혼의 한 부분이지‘라며.
그는 잘못 생각한 거요. 우리 둘 다 잘못 생각했지. - P305

난 늘 그곳에, 먼 시간의 저편에 있다. 결코 그곳을 떠난 적이 없다. 과거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거나, 그곳에서 출발하며 산다. 이 과거는 단순하고 짧은 일화 형태로 반짝이는 기억이 아니라 현재다. 시간이 몰고 온 수천 가지 변화는, 시간을 초월하는 현재의 이 감각과 비교하면 꿈처럼 덧없고 비현실적이며 환영처럼 우리를 매혹한다.
이 변화들은 고통과 걱정거리를 안고 나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마치 완벽한 자신감과 용기를 지닌 의사라고 믿게 한다. 불안에 떨며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신뢰감은, 그들이 내 앞에 있는 한 나 스스로에게도 이것을 사실로 믿도록 강요한다. 하지만 환자들이 나가자마자 난 소리치고 싶다. 난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학교 계단에 앉아 있는 소년일 뿐이라고, 내가 하얀 가운을 입고 이렇게 거대한 책상 앞에 앉아 환자들에게 충고를 하는 것은 정말 하찮은 일이고 사실은 거짓이라고, 우리가 같잖은 천박함으로 현재라고 부르는 현상에 속지 말라고………….
우리는 시간상으로만 광범위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으로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훨씬 넘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나면서 우리의 일부분을 남긴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 남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단조로운 바퀴 소리가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 장소로 우리를 데리고가면-그 여정이 아무리 짧더라도-우리는 스스로에게 가까이 가고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을 떠난다. - P338

"난 가끔 오빠의 영혼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언어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어요."
이야기를 마친 멜로디가 말했다. - P432

"걸인은? 존엄한 걸인이 있을까?"
에사가 물었다.
"그의 인생에서 진실로 불가피한 일, 그가 어쩔 수 없는 일이있었다면 아마 가능할 듯싶군요. 그리고 그가 자기 자신의 편에서 있다면, 스스로를 옳다고 여긴다면 말입니다."
스스로의 편에 서는 것도 존엄에 속한다. 그래야 갈릴레오나루터처럼 공개적인 혹평을 품위 있게 극복할 수 있다. 그들뿐만아니라 자신의 죄를 부정하려는 유혹과 맞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 P512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프라두가 했던 질문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이 물음이 눈빛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눈빛이란 없고, 읽힐 뿐이다. 눈빛은 언제나 ‘해석된 눈빛‘이다. 해석된 눈빛만이 존재한다. - P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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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7-29 2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리스본 책 읽었던 시간이 갑자기 떠오릅니다.
문장들이 참 좋았었어요.^^

꼬마요정 2023-07-30 10:13   좋아요 1 | URL
그죠… 아마데우의 삶은 슬픈데 문장들은 참 좋았어요. 누군가를 알아가는 과정이 이와같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ㅎㅎㅎ
 
[eBook] 길상문연화루 - 중 길상문연화루 2
텅핑 지음, 허유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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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편에서 이연화는 자신의 옛 연인이었던 교완만의 결혼식을 축하하러 가서 둘의 인연을 매듭 지었다. 안 그래도 내력이 바닥나고 있던 이연화였으나, 자신이 사랑했고 상처를 줬던 여인을 위해 양주만으로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다. 모든 것을 용서한 연화였기에 그는 더 이상 이상이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된 교완만은 과거의 인연을 매듭짓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쓸쓸함과 적막감이 감도는 가운데 늦은 오후 햇살이 비치는 연화루 속 이연화의 모습은 뭔가 해탈한 것 같기도 하지만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난장강(무덤을 따로 만들지 못한 시신들을 매장하는 공동묘지)에 길상문연화루가 나타났다. 소원진의 난장강에 있는 '구멍'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해결될 때가 온 것이다. 예전 금원맹의 '황천부(특히 황천진경)'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 구멍에서 일어난 일은 추악한 죄의 대가였다. 다른 사람으로 살아오며 멸시 당한 세월 역시 죄를 지은 대가였을테지. 그리고 속세에 미련이 없는 이연화에게 '관음수루'가 그러했듯 '황천진경' 역시 무의미했다. 


향산수객 옥루춘은 전편에 나왔던 금만당의 절친이었고, 둘째 가는 부자쯤 되는 이였다. 그런 그가 단풍을 보자며 여택으로 친구들을 불러모았다. 모인 이들 역시 강호에서 이름을 날리는 이들로 모용요, 시문절, 관산횡, 동방호, 이두보 였다. 이두보는 이름만 봐도 시를 잘 지을 것 같았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그런데 이 중에 이연화도 끼어 있었으니, 그가 이상이였을 때는 빛나는 태양 같았다면 이연화일 때는 은은한 달빛 같은가 보다. 해가 사라지고 난 뒤 어둠이 깔리면 달이 세상을 지배한다. 해가 있을 때는 모르나 해가 사라지고 나면 달빛의 고마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렇게 여전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는 여전히 잊히지 못하고 있었다. 옥루춘의 연회는 다음 날 옥루춘이 토막 난 시체로 발견되면서 사건 현장으로 바뀐다. 


이런 이야기들이 늘 그렇듯, 주인공이 사건을 따라다니는 건지 사건이 주인공을 따라다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이 하고 싶다. "이연화 씨, 코난이세요?" 


옥루춘은 죽일 놈이었고, 원한 맺힌 이들은 그를 응징했다. 하지만 죄는 죄이니, 죄 지은 자들을 백천원으로 보내고, 여인들은 여택을 도관(도교사당)으로 개조한 뒤 그 곳에서 회개하는 것으로 벌을 대신하였다.


사건은 끊이지 않아, 이번에는 강호 최고의 미남자라고 이름 난 위청수가 살해된 뒤 가죽이 벗겨져 그 가죽에 수가 놓인 채 발견되었다. 열흘 전, 강절 지역의 대부호 기춘란의 딸 기여옥과 혼인했는데, 첫날밤을 지낸 다음날 아침 눈을 뜬 신부가 발견한 것은 수 놓인 인피 조각이었다. 방다병이 기춘란과 인연이 있어 이연화는 이 사건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러면서 전운비와 만나고, 또 하나의 인연이 매듭을 짓는다. 이상이와의 결투에서 져서 머리를 빗지 못하게 된 전운비는 이제 머리를 묶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시원한 일인가. 


인피 가죽 사건은 역시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 지 보여주었다. 전처를 죽여야만 호화롭게 살 수 있었던 그는 결국 죄값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등장하는 각려초와 금원맹. 이연화는 한 발 한 발 그들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백천원의 188개 감옥 중 제5감옥이 습격당해서 마두 5명이 탈출했다. 그리하여 불피백석은 방다병, 이연화, 전운비에게 막부산 감옥이 습격당한 사건을 조사해 달라고 청했다. 막부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청죽산에 들어섰을 무렵, 그들은 기이한 집을 발견한다. 그 전에 이 곳에는 이상이가 여인들을 반하게 한 결투가 있었다. 이 곳 청죽산 아래 무미하(撫眉河)에서 이상이와 화초 기르는 걸 좋아하는 동방청총이 결투를 벌였었다. 이상이가 동방청총이 기른 매화꽃이 열 일곱 송이 이상 달린 매화 가지를 꺾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는데, 동방청총이 거절했고, 두 사람은 매화동산에서 결투를 벌였고, 동방청총은 크게 패했다. 이상이는 매화 가지를 꺾어서 가 버렸고, 동방청총은 매화 동산에 불을 질렀다고 했다. 교완만이 매화를 좋아했고, 사고문에는 여협이 열일곱 명 있었다고.  


그런 사연을 품은 이 곳에 이상한 집이 있었고, 안개독을 피해 그들은 집 안에 있는 지하통로로 도망친다. 그리고 땅 밑에서 강호의 수많은 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중에 부형양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 곳에 용왕관이 있다고 속아서 이 곳으로 오게 되었는데, 각려초의 화피요공(각려초가 연마한 내공심법으로 남자를 유혹하는 수법. 깊이 연마할수록 외모가 아름다워지지만 더 잔인하고 살인을 즐기게 됨)은 실로 놀라웠다. 이 화피요공에 넘어가지 않은 이가 딱 두 사람이었으니, 바로 이상이와 적비성이었다. 


결국 이연화 덕에 각려초의 이번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으나, 이미 이연화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거대한 음모가 숨어있음을,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밝혀야 할 수도 있음을 말이다.


국화산은 뛰어난 비경을 지녔으나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 곳을 무당파 제자인 육검지가 지나가다 이연화를 만났다. 또 다른 사건의 시작이었다, 이름을 묻는 육검지에게 연화가 "이.... 그게..." 이러는 걸 육검지가 이극애로 알아들으면서 말이다. 이 곳엔 해골이 가득한 호수와 손님은 없고 핏자국이 가득한데다 이상한 기관들이 있는 객잔이 있었다. 이 마을의 촌장은 의뭉스러웠으며 마을 사람들은 이상했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을까? 논도 밭도 없고, 과일 나무도 없고, 광물도 없고 오로지 국화만이 펼쳐져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먹고 사는 것일까?


괴질을 이용해 사람들을 조종하는 건 끔찍하다. 곤륜파의 금유도는 치료가 가능할까? 곤륜파나 무당파를 피하겠다는 방다병의 다짐이 허튼소리만은 아닌 것 같았다.


채화루는 방다병 집안의 객잔이다. 그 곳에 묵게 된 이연화와 방다병은 또 하나의 사건을 마주한다. 도철 금비녀에 얽힌 사연과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니던 서북염왕 여양금과 그가 쓰던 박악검, 구경선경(남쪽 멀리 있는 대희국의 고산에 있는 왕릉)의 지도, 여양금의 하녀 경아와 노주대협 유항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등장한 문경. 상이태검 이상이의 검 중 하나가 소사, 또 다른 하나가 바로 문경이었다.


구경선경에 '약몽'이라는 검이 있는데, 무지갯빛 검광이 태양을 뚫고 그림자가 백 리에 뻗치며, 한 번 휘두르면 온 산하가 긴 꿈에 빠지고 강물도 붉게 변하다고 한다. 그 검을 휘두르면 휘황한 검광이 허공에서 춤을 추는데 그 광경이 그렇게나 황홀하고 아름답다고... 훗날 그 검이 부러지자 수정을 이어붙여 다른 검을 만들었는데, 그 검이 바로 문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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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리커버 특별판, 양장)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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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일을 떠오르게 하는 책들이 있다. 어릴 때 겪었던 일들, 잊지 못할 강렬한 경험들, 그저 그런 일상인데도 잊히지 않는 그런 일들 말이다. 이 책 역시 그런 책들 중 하나이면서, 유독 아픈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듯 해서 마음이 심난했다.


전쟁은 삶을 황폐하게 만들면서 많은 것들을 바꾼다. 어쩌면 '존재' 자체에 회의를 들게 할지도 모른다. 불안과 죽음과 상실의 공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 방법을 찾을테고, 여기 두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쟁통에 할머니에게 맡겨져 선악 판단의 기준이나 삶의 방식 같은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야 했던 아이들... 그들은 둘이었기에, 서로에게 의지해서 어린 시절을 살아냈다. 이 아이들은 삶이 투쟁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너희들은 왜 진작 날 도와주지 않았니?"

"네가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덩치 큰 세 녀석이 덤비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니?"

"네 물통을 놈들 대가리에 던져버리든지, 손톱으로 얼굴을 온통 할퀴어놓든지, 불알을 발로 걷어차든지, 그도 저도 안 되면, 고함을 치고, 울부짖기라도 해야지. 아니면 아예 달아났다가 나중에 다시 오든가."   (p.67)


누가 때리면 더하게 갚아줘야 하고, 누가 도와주면 그만큼은 돌려줘야 하는 기준을 가지고, 남이 뭘 하든 참견하지 않으며 가족마저 거리낌없이 이용하고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하는 이 아이들은 그렇게 하나의 전쟁 동안 살아남았다.


클라우스는 국경을 넘었고, 루카스는 할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타인의 증거>는 루카스의 이야기이다. 그저 살아남기만 했을 뿐 외로움과 괴로움이 점철된 영혼을 어찌할 수 없었던 두 아이들 중 한 아이. 루카스는 이 곳에서 형제가 아닌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페테르를 만나고, 클라라를 만나고, 야스민과 마티아스를 만나 상처를 주고 받고 위안을 주고 받으며 그렇게 말이다.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무엇이고, 불행은 언제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으며, 살아있다 해서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내밀지 못한 손은 내밀지 못한 게 아니라 내밀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변할 수 없었던 것은 변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나만 상처 입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고, 모두가 불행해졌으면 좋겠다고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다 스쳐 지나가고 남은 것은 그들이 쓴 노트-원고 뿐이다.


<50년간의 고독>에 앞서 클라우스는 돌아왔다. 하지만 클라우스를 클라우스라고 확인해 줄 공식적인 서류는 없다. 한 몸 같았던 형제 루카스는 이제 없다. 한 곳에 남았던 루카스는 떠났던 클라우스를 확인해 주지 못했다. 이웃들은 이미 죽었거나 떠났거나 클라우스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다. 루카스는 누구이고, 클라우스는 누구인가. 정말 루카스가 남았고, 클라우스가 떠난 것이었을까? 하나였던 둘이, 둘이 되었다가 다시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은 지극히 차갑고 습하고 잔인했다. 


진정한 '나'는 누구이며 어디 있는 걸까? '나'라는 존재는 스스로가 찾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한다. 어쩌면 자기 자신조차 '나'를 모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동안 '나'는 '나'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알고자 하고,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렇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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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3-07-28 1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얼마전에 읽었어요. 그때의 여운이 다시 또 올라오네요ㅎㅎ

꼬마요정 2023-07-28 23:24   좋아요 1 | URL
이 책 좀 충격이었어요 ㅎㅎ 작년에 읽었는데, 그 때 마음이 너무 싱숭생숭해서 리뷰를 못 쓰다가 얼마 전에 다시 꺼내보고 이제야 쓰게 되었네요. 작가가 많이 아프고 힘들었을 것 같아요.

기억의집 2023-07-28 2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꽤 오래 전에 읽었는데… 그 때 작가가 여자인 줄 몰랐어요. 최근에 보통의 책읽기 읽다가 저자가 여자인 걸 알았는데.. 성별이 중요한 거 아니지만 작가가 나중에 습득한 언어로 썼다는 게 알고 완전 놀랐습니다. 그때 읽었을 때 전 묘한 반감이 있었는데(아마 반전이 저에게는 역효과였던 것으로 어렴풋히 기억나요)2차 습득 언어로 이런 작품을 썼다고 생각하니 그리고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니 이 작품을 다시 읽고 재해석 하고 싶더라고요!

꼬마요정 2023-07-28 23:28   좋아요 0 | URL
정말 놀라웠어요. 저는 <문맹>을 먼저 읽었거든요. 그래서 이 책이 무척이나 궁금했는데 읽고 정말 충격이었어요. 제 어린시절도 떠오르고... 작가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한국어로도 못 쓰는데 그녀는 심지어 2차 습득 언어로 이렇게 쓰다니.. 어쩌면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글이 나왔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죠. 고통을 글로 승화시키는 건 정말 멋지기도 하지만 아프기도 하네요...
 
[eBook] 길상문연화루 - 상 길상문연화루 1
텅핑 지음, 허유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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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층자리 목조 누각으로, 전체가 나무이며, 화려하고 정교한 연꽃과 구름 문양이 사방에 조각되어 있는 길상문연화루. 수레에 얹어 이동할 수 있는 '집'인데, 요즘식으로 말하면 캠핑카 정도가 되겠다. 이런 집에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 이 집의 주인은 바로 죽은 사람 둘을 살렸다고 신의로 이름 난 이연화였으며, 그의 이력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스승이 누구인지, 무공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 나이는 몇 인지 아는 사람이 없는 그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그는 6년 전에 나타나 결투에서 중상을 입고 죽은 호수궁경 시문절을 되살렸고, 절벽에서 추락해 전신이 골절되어 죽은 철소대협 하란철을 살려냈다. 이 두 가지 일로 인해 그는 강호의 전설이 되었다.


작은 마을인 병산진에 이 '길상문연화루'가 나타나자, 학행표행의 우두머리인 정운학은 이연화를 찾아왔다. '푸른 창의 살인귀'의 시작이었다. 무공도 모르고 몸도 약한 이연화는 소면객잔에서 있었던 일을 듣게 된다. 학행표행이 운송하던 궤짝 안에서 무림 옥성 성주의 딸인 옥추상의 시체가 나왔고, 그로 인해 화가 난 옥성 성주인 옥목람이 옥추상의 호위 무사들에게 모조리 자결을 명했으며 궤짝을 운송하던 학행표행 사람들을 죄다 죽여버리라고 했다고 한다. 정운학은 영문도 모르고 벌어진 일 때문에 일단 살고자 이연화를 찾아 온 것이다.


이 일은 삐쩍 마른 서생 같은 대공자 방다병과 함께 해결하게 된다. 옥성으로 간 그들은 옥추상을 살리러 왔다고 하면서 함께 조사를 시작하는데... 가족이라는 말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지 참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물론 이 사건으로 이연화는 더더욱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버리고 만다. 사람들에게 잊히고 싶은 그의 바람은 달리 말이다. 


십 년 전 상이태검 이상이는 사고문을 세웠고, 천하에 이름을 날렸으며, 사교인 금원맹 맹주 적비성과의 결전에서 실종되고 말았는데, 이후 사고문은 해체되었으나 사고문이 설치한 형당인 '불피백석'(백천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기한불, 운피구, 백강순(백아), 석수로 이루어진 이 조직은 강호의 경찰 노릇을 하고 있는데, 십 년 전 금원맹을 소탕하면서 적들을 가둔 감옥이 무려 188개나 되었다.


두 번째 사건인 '일품분'은 전대 황제인 희성제의 황릉으로 비밀을 간직한 곳이었다. 무림에서 이름을 떨치던 사람들이 상체는 바짝 마르고 하체는 퉁퉁 부은 시체로 발견되자 관과 백천원이 함께 수사를 시작하게 된다. 역시 이연화는 특유의 기민함으로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와해되었다 생각했던 금원맹은 끈질겼고, 사건들은 각각인 듯 보이지만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파사보가 나타났다. 파사보는 미종보법 가운데 으뜸으로 사고문 문주 이상이만이 구사하는 무공이었다. 하지만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파사보가 아닌 것을... 


세 번째 사건은 혼례복 살인 사건으로, 이 사건에서 이연화는 곱고 화려한 혼례복을 입어보게 된다. 채련장이라는 장원에는 연꽃들이 만발하여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곳이었는데, 삼십 년 동안 세 명의 부인들이 죽어나갔다. 그들은 하나같이 혼례복을 입고 죽었는데, 그 죽음이 참으로 기이하였다. 그리고 우리 이연화는 또 멋지게 이 사건을 해결한다. 연꽃은 아름다우나 그 꽃을 보는 이들은 모두 제각각이라 억울하게 죽은 이만 불쌍하여라...


네 번째 이야기는 보도사와 관련 있는 사건이다. 보도사 주지 스님인 무료 스님은 이연화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연화가 사고문 문주 이상이였다는 사실도, 이상이의 삼경이 상하여 치료하지 않으면 조만간 미치광이가 되어버린다는 사실도 말이다. 하지만 무료 스님은 이연화를 설득하지 못하고, 도리어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 불이 나고, 백천원과 보도사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하통로에는 기름에 튀겨진 사체가 발견되고, 이연화와 불피백석이라는 인연들이 만나게 된다. 


십 년 전 벽차지독은 너무나 참혹했고, 사고문 사형제들은 함정에 빠졌고, 이상이는 홀로 악전고투 끝에 실종되었다. 결국 이 모든 사건들은 인연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끊임없이 비질을 하는 이연화는 공력이 흩어져 더 이상 진력으로 먼지를 떨어내지 못하고, 오는 비를 그저 맞아야만 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고, 금원맹의 배의 잔해로 만든 길상문연화루는 그저 그 날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연인이었던 교완만의 결혼은 이상이의 인연을 하나 더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우스개소리처럼 하는 "내 아내는 재가했어"란 말은 사실 허튼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연화가 하는 수많은 허튼소리들은 정말 허튼소리 같지만  사실 늘 진실한 말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과연 이연화는 미치기 전에 벽차지독을 해독하고 공력을 되찾아 이상이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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