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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리커버 특별판, 양장)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8년 8월
평점 :
품절
옛일을 떠오르게 하는 책들이 있다. 어릴 때 겪었던 일들, 잊지 못할 강렬한 경험들, 그저 그런 일상인데도 잊히지 않는 그런 일들 말이다. 이 책 역시 그런 책들 중 하나이면서, 유독 아픈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듯 해서 마음이 심난했다.
전쟁은 삶을 황폐하게 만들면서 많은 것들을 바꾼다. 어쩌면 '존재' 자체에 회의를 들게 할지도 모른다. 불안과 죽음과 상실의 공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 방법을 찾을테고, 여기 두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쟁통에 할머니에게 맡겨져 선악 판단의 기준이나 삶의 방식 같은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야 했던 아이들... 그들은 둘이었기에, 서로에게 의지해서 어린 시절을 살아냈다. 이 아이들은 삶이 투쟁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너희들은 왜 진작 날 도와주지 않았니?"
"네가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덩치 큰 세 녀석이 덤비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니?"
"네 물통을 놈들 대가리에 던져버리든지, 손톱으로 얼굴을 온통 할퀴어놓든지, 불알을 발로 걷어차든지, 그도 저도 안 되면, 고함을 치고, 울부짖기라도 해야지. 아니면 아예 달아났다가 나중에 다시 오든가." (p.67)
누가 때리면 더하게 갚아줘야 하고, 누가 도와주면 그만큼은 돌려줘야 하는 기준을 가지고, 남이 뭘 하든 참견하지 않으며 가족마저 거리낌없이 이용하고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하는 이 아이들은 그렇게 하나의 전쟁 동안 살아남았다.
클라우스는 국경을 넘었고, 루카스는 할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타인의 증거>는 루카스의 이야기이다. 그저 살아남기만 했을 뿐 외로움과 괴로움이 점철된 영혼을 어찌할 수 없었던 두 아이들 중 한 아이. 루카스는 이 곳에서 형제가 아닌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페테르를 만나고, 클라라를 만나고, 야스민과 마티아스를 만나 상처를 주고 받고 위안을 주고 받으며 그렇게 말이다.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무엇이고, 불행은 언제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으며, 살아있다 해서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내밀지 못한 손은 내밀지 못한 게 아니라 내밀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변할 수 없었던 것은 변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나만 상처 입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고, 모두가 불행해졌으면 좋겠다고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다 스쳐 지나가고 남은 것은 그들이 쓴 노트-원고 뿐이다.
<50년간의 고독>에 앞서 클라우스는 돌아왔다. 하지만 클라우스를 클라우스라고 확인해 줄 공식적인 서류는 없다. 한 몸 같았던 형제 루카스는 이제 없다. 한 곳에 남았던 루카스는 떠났던 클라우스를 확인해 주지 못했다. 이웃들은 이미 죽었거나 떠났거나 클라우스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다. 루카스는 누구이고, 클라우스는 누구인가. 정말 루카스가 남았고, 클라우스가 떠난 것이었을까? 하나였던 둘이, 둘이 되었다가 다시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은 지극히 차갑고 습하고 잔인했다.
진정한 '나'는 누구이며 어디 있는 걸까? '나'라는 존재는 스스로가 찾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한다. 어쩌면 자기 자신조차 '나'를 모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동안 '나'는 '나'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알고자 하고,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렇게...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