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기행 1
위치우위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제목을 본 순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동경'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사실 동양의 문화가 더 오래 되었음에도 어찌된 영문인지 유럽을 동경하게 된다. 아마 유럽이 보다 빨리 기술진보와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렸기 때문이지 않을까. 거기다 우리가 가진 사대주의도 약간 보태서.

작가는 중국인이다. 중국의 문인이자 교수이다. 그야말로 학식도 깊고 문화에 대한 조예도 예사롭지 않다. 그런 그가 가슴 한 가득 '중화주의사상'을 묻어둔 채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유럽문화기행은 두 권으로 이루어졌는데, 1권에서는 남부유럽과 서부유럽을 돌아 본 기행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문득 지도를 사고 싶었다. 작가를 따라 가는 이 길이 어디쯤인지 알고 싶어졌다고나 할까. 이정표 없이, 내가 있는 곳의 위치를 모르고서야 진정한 의미의 문화기행이 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책에 친절하게 한 페이지 분량으로 남부유럽과 서부유럽(자신이 돌아본 곳)의 지도를 소개해 놓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세계전도를 펼쳤다. 예전에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빠져 있을 때 보았던 지도보다 한결 복잡했다. 당연하겠지만. 지도를 이리저리 보다가 그냥 치웠다. 길치인 내가 아무리 훑어도 나라들의 위치가 외워지지 않는 걸 어찌하나.

참 잘 쓴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몇 군데 내가 이해하기 어려웠던 말들이 있는 걸 제외하면 말이다. 어찌나 중국과 자잘하게 비교해 놓았는지, 내가 중국문화에 관해 읽는 건지 유럽문화에 관해 읽는 건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뭐, 작가가 중국인이니 그건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한다지만, 그 비교에서 우러나는 중화주의 사상이란.

작가가 이탈리아 피렌체를 무척 좋아하는지 피렌체 기행문에서는 찬사가 그치질 않았다. 더불어 중국 현실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하는데, 내가 볼 때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의 비판이었다. 그거나 비판하지. 당의 명령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학자들, 특히 역사 왜곡하는 자존심 없는 정신 나간 학자들 말이다. 혹시 동조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책을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유럽에 가고 싶어졌다. 아니, 내 마음은 어느새 유럽으로 날아가 있었다. 폼페이를 거쳐 피렌체로 갔다가 베네치아에도 가야지. 로마는 빼 먹을 순 없어. 스페인도 가 봐야겠네. 독일도, 영국도, 프랑스도... 아아~ 정말 여행가고 싶다.

책을 덮는 순간 이 책을 한마디로 표현했다.

'중국인의 눈으로 본 유럽문화'

한국도 역사가 오래되었다. 다른 나라들에게는 없는 찬란함도 있다. 자부심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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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종일 뒹굴거렸다.

정말 밖에 나간 거라고는 아침에 고추장 불고기 50% 할인하는 거 사러 대형마트 간 거...

언제부터인가 주말만 되면 하루종일 집에서 뒹굴거리며 고양이만 쳐다보고 있다.

왜 이러지...

정신 차리고 보니 벌써 11시가 넘었네..

내일부터는 다시 열심히 살아야지~^^

힘내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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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 벗어나야 할 굴레

옛말에 ‘가난은 나라님도 어쩌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가난을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문구가 아닐 수 없다. 왜 가난은 극복하기 어려운걸까. 모두가 가난하지 않은 세상은 정말 이룰 수 없는 꿈인 걸까.

공선옥의 소설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엄마」에서 ‘나’의 가난은 곧 ‘가족’의 가난이다.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아이들도 가난하다. 남편은 이 소설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을 버리고 떠난 무책임한 인간인 그는 이미 ‘나’의 과거 속 인물이다. 이 소설에서 ‘나’는 가난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모두 갖춘 셈이다. 친정이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남편은 없다, 아이들을 키우기엔 살 곳이 없으니 아이들은 보호시설에 맡겨두고 홀로 서울에서 공장 일을 하며 하루하루 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단기적인, 그것도 눈앞의 일만 생각하게 되었다는 체념과도 같은 그 말은 그녀의 인생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분명 그녀는 가난을 벗어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기차 안에서 만난 털북숭이를 따라갔더라면, 혹은 아이들을 고아원에 버린 채 혼자인 양 서울에서 돈을 번다면.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가난’이란 짐이 따라붙기 이전에 ‘애기엄마’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정체성이 가진 무게를 이 소설이 끝날 때까지 지고 간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니 그녀로 대표되는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가난을 벗어날 수 있을까. 가진 것 없이, 제비새끼마냥 보채는 아이들과 함께.

예로부터 가난은 있어왔다. 하지만 예전의 가난은 모두가 가난하였기에, 가난이 가난일 뿐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요즘은 다르다. 가난은 개인의 무능력으로 평가되고 반드시 빠져나와야 할 굴레가 되어 버렸다. 가난이 대물림되는 시대, 그러나 그 가난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건 쉽지 않다. 소설 속에서 잠깐 언급이 되었지만, ‘노동’이 중요한 열쇠가 되지 않을까. 청년 실업자가 넘쳐나고, 정년이 점점 짧아지는, 노동할 권리를 온전히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노동은 조금이나마 가난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는 말처럼 노동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면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 ‘나’는 오늘 아이들을 보러간다는 이유로 일자리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있다. 이런 고용불안정이 가난을 부추기는 요인이라면 이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의 방안이 되지 않을까. 정당한 노동과 정당한 대가, 안정적인 일자리. 이것이 갖추어진 삶이야말로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삶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가난한 자들로부터 이 세 가지를 앗아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막노동판에서, 공장에서 일용직으로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아간다.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모으고, 아끼고 하는 식의 개개인이 잘 살려고 하는 몸부림만으로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할 수 있는 일이, 들어오는 돈이 불안정한 데 어떻게 벌고, 아끼고, 모으고 할 수 있는가. 개인이 어떻게 발버둥 치든 스스로의 힘으로 가난에서 빠져나오기는 너무 힘이 든다. 그러니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에 앞서 정부가, 사회가, 가진 자들이 이러한 불평등을 해소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얼마 전 빌 게이츠는 자신의 모교 하버드 대학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이른바 ‘창조적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기술개발이나 시장의 힘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가진 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만큼 없는 자들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연설은 큰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어쩌면 몰락해버린 사회주의를 대신하여 우리의 대안이 될 지도 모른다.

소설 속 ‘나’역시 가난한 사람들의 또 다른 대안일지도 모른다. 가난을 이유로 번번이 일어나는 가족의 해체가 가슴 아픈 일들을 많이 만드는 세상에서 가족을 끝까지 지키는 일은 가난하지만 버릴 수 없는 자존심이기도 하다. 자신이 결정하고 자신이 짊어지기로 한 책임을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번복하여 버리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가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한 여성의 모습이다. 그리고 가난에만 책임을 전가시키지 않는 꿋꿋한 모습이다. 가난이 자신이 저지른 잘못들을 정당화시켜 주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는 몸짓인 것이다. 체념이 곳곳에 드러나지만, 그래도 그녀는 끝까지 가난에 함몰되지 않았다. 사회보장제도로 가난이 어느 정도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그녀와 같은 꿋꿋함과 책임감이 없다면 가난은 영원히 끊을 수 없는 쇠사슬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사회와 개인, 모두가 함께 풀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인 가난. 어느 사회에서도 풀지 못했던 이 숙제를 우리 사회가 가진 힘으로 풀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아직 졸업 못한 선배가 시험기간에 내야 한다며 써달라고 해서 피자 한 판 얻어먹기로 하고 써 준 창작 글짓기 ^^ 피자 먹으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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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서재가 오픈했다. 어제 꾹 참고 오늘 들어왔더니..

너무 낯설다. 마치 새학기가 시작되어 모든 것을 새로이 시작해야만 하는 것 같은 느낌...

곧 익숙해지겠지만,

난 옛 서재를 그리워하나보다.

익숙함과 편안함, 거기에 길들여짐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래도...

곧 익숙해진다면 여기가 나의 보금자리가 되겠지...

안녕~ 옛 서재..

반가워~ 새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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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14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꾹 참고 오늘 들어왔더니.."
꼬마요정님 표현이 '요정' 같습니다. 하하
전보다 디자인 선택에 자유로움이 있는 만큼
꼬마요정님의 취향에 맞춰 새 서재를 이쁘게 꾸며보시기를..


물만두 2007-06-14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방가방가^^

꼬마요정 2007-06-14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우리 같이 새 서재 예쁘게 꾸며보아요~^^

새벽별님~ 저도 방가방가요~~^^

물만두님~ 방가방가요~^^
 

 

공선옥
 
                                                                                                                                  최을영 


"공선옥의 소설은 담론의 영역에서 실종된 사회하층민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한번도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의 상황을 발화하지 못한 존재들이다. 세상을 향해 내던질 말의 내용은 있지만, 그 말하는 방식을 찾을 수 없는 존재들이 공선옥의 소설에는 흔히 등장한다. 공선옥의 소설쓰기가 오늘날의 현실에서 대단히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그가 제 목소리를 갖고 있지 못한 이 민중들 혹은 하위주체들의 '아가리'를 대신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의 평론집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새움, 2005)에 실린 공선옥 소설에 대한 평이다. 공선옥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그들의 고통스런 삶, 그리고 그 안에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어미마음(모성)'을 이야기한다. 아니, 이명원의 말처럼 그들의 '아가리'를 대신 열어주고 있다.

등단할 때부터 그는 줄곧 가난하고 소외 받은 이들의 목을 틔워주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공선옥의 펜을 통해 그들을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질릴 만도 하건만 공선옥은 지금껏 그 역할을 자임해 왔다.

2006년 1월 공선옥을 비롯한 소설가·시인 4명과 10명의 사진작가들이 내놓은 인권 사진집 {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현실문화연구)도 그런 얘기다. 이 책에서 공선옥은 <엄마, 저 오네>와 <촌아, 울지마> 등의 사진에 글을 보탰다.

공선옥은 1991년 {창작과 비평}에 중편 [씨앗불]을 발표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이전에 그의 삶은 신산(辛酸)했다. 공선옥은 1963년 전남 곡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 시절, 공선옥은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글에 목말라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노트에 쓰기도 했고, 벽지로 발라놓은 신문이며 누에를 키우기 위해 가져온 헌 신문지를 샅샅이 읽기도 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너무 슬프고 힘든 일이 많으니까 어떤 통풍구가 심리적으로 필요했거든요. 살고 싶었으니까요. 그것이 바로 글이었던 것 같아요."

1983년 전남대학교 국문학과에 들어간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게다. 그러나 아버지가 키우던 소들이 병들어 죽고 가계가 몰락하자 아버지는 빚을 갚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막노동을 하기 시작했다.
 
공선옥은 1학년 1학기에 대학을 중퇴하고, 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버스 안내양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버스 안내양으로 구로공단의 공장노동자로 전전하며 생계를 위해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막장과도 같은 현실에서" 살았다. 그 사이 결혼도 했지만 사는 것은 힘들었다. 그런 그에게 글 쓰는 것은 하나의 위안이었고, 우연찮게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무렵 쓴 글로 등단하게 됐다. 공선옥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나 자신이 소설가로 살아가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80년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나에게 광주의 비극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가계의 몰락 앞에서 다니던 대학을 1학년 1학기에 중퇴하고, 버스 안내양으로 시작, 구로공단의 공장노동자로 생계를 영위해야 했던 막장과도 같은 현실에서, 소설쓰기란 내게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이었던 남편의 고통을 뼈아프게 지켜보면서, 광주 이후에도 세상이 아무런 문제없이 너무나 평화롭게 흘러가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꼈다. 어느 날, 나는 그것이 소설인지도 모르고, 지나온 내 삶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노트에 적어 내려갔다. 그런데 다 쓰고 보니, 사람들이 그것을 소설이라고 말해주었고, 어찌어찌 하다보니 소설가로 등단하게 되었던 것이다."

1991년의 [씨앗불] 이후 공선옥은 글로 먹고살겠다고 작정하고, 끊임없이 작품을 내놓았다. 그렇게 내놓은 작품이 장편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1993)과 소설집 {피어라 수선화}(1994), 장편 {시절들}(1996), 소설집 {내 생의 알리바이}(1998), 산문집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2000), 장편 {수수밭으로 오세요}(2001), 소설집 {멋진 한 세상}(2002), 장편 {붉은 포대기}(2003), 산문집 {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2003), 소설집 {유랑가족}(2005), 산문집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2005) 등이다.

이런 작품을 내놓는 사이 공선옥은 1995년에 신동엽 창작기금을 받았고, 2004년에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2005년에는 올해의 예술상을 받았다. 2001년에는 {조선일보}의 동인문학상 후보로 추천됐으나 공선옥은 이 상을 거부했다. 그는 후보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글을 쓰게 하는 {조선일보}의 행태를 "상금 5,000만원을 미끼로 작가들을 줄 세우기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기자한테 그랬다. 나 솔직히 돈은 탐난다고. (내가 거부한다고 하면) 비웃을지 몰라도 돈 때문에 떨어지는 감 받아먹으려고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입 떡 벌리고 있긴 싫다. 작가가 작품으로 말했으면 됐지 구구절절이 뭘 더 말하라는 건가."
작가적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는 얘기다. 공선옥이 생각하는 작가는 이런 사람이다.

"작가는 '안다'는 사람들 아닌가. 지금 우리 사회는 질곡에 빠져 있다. 질곡이란 운신이 힘들다는 거다. 그렇게 단칸방에 사는 사람들의 숨통을 조금이라도 터주는 게 작가 역할 아닐까."

* 월간 인물과 사상 2006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2006/02/25 [11:37] ⓒ인물과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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