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평점 :
사실 큰 기대에 차서 집어든 소설이다. 이상하게 소설은 잘 안 읽히는데, 이건 달랐다. 손에 잡고 단숨에 다 읽었다. 재밌기도 했지만, 작가의 글솜씨가 나를 잡아끌었다. 어느새 다 읽고 만 내 자신을 발견했을 때, 기뻤다.
해설을 읽지 말 걸.. 하는 생각을 했다. 해설에는 그녀들이 위장의 방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했다. 위장의 방법이라..
그녀들은 정확하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떤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내가 가진 무기는 '처녀성'이다. 모든 여자에게 있는 것도 아니요, 생명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닌, 남성들이 만들어낸 거짓 환상과 권위주의가 요구하는 순결의 잣대인 '처녀성' 말이다. 아직 우리 사회는 여성의 성행위를 그다지 환영하지 않으니 신분상승을 꿈꾸는 나는 이 '처녀성'을 목숨처럼 지킨다. 과거 여자들이 절개를 지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른 걸 다 떠나서 난 이 부분이 통쾌했다. 순결을 지키는 이유가 성행위 그 자체를 부인하며 오로지 한 남자에게만 종속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 선택의 이유가 자신이 원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점에서. 성(性)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하지만 작가는 마지막에 그녀에게 그녀가 바란대로의 성공을 주지는 않는다. 무기가 무기가 아니었음을..
트렁크의 그녀는 멋진 커리어 우먼이다. 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성차별에 저항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선택하여 자신의 지위를 지키면서 꾸준히 올라간다. 뜬금없는 위기에도 그녀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결방법을 모색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하지 못하는 일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외 다른 단편들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켜주며 속으로 비웃는다. 이런 방법은 정말... 얄밉다. 알면서 모르는 척, 순진한 척.. 진정한 내숭이 아니고 뭐겠는가. 남성의 요구대로 다 해주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그녀들은 더 이상 팜므파탈이 아니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여성상을 가진 이들도 아니다. 그녀들은 누구인가.
약자가 살아가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는걸까. 분연히 떨쳐 일어나 모순들을 해결하려고 하면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건 진정 강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아니면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그릇된 사회가 세뇌한 어긋난 남성성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