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미는 말은 꽃, 진실된 말은 열매, 듣기 싫은 말은 약, 듣기 좋은 말은 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나라의 개혁가 상앙이 조량의 충고를 얻고자 인용한 말이었지만 결국 그의 충고를 무시하여 화를 당했습니다. 조량은 충고로 백리해를 예로 들었는데, 백리해는 진 목공에게 힘들게 채용이 되어 덕으로서 통치하며 무릇 나라도 부국강병하게 하고 백성과 신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욕심이 없어 왕이 내린 하사품을 받지 않고 땡볕에서도 가리개를 쓰지 않는 등 청렴결백하여 그가 죽자 나라전체가 슬퍼하였습니다. 반면 상앙은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교만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앙을 지지하던 효공이 죽자 반역죄로 몰려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자법자폐’(자기가 만든 법에 자기가 걸리다)란 고사는 바로 상앙을 일컬은 것입니다. 비록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상앙의 변법이 진나라 개혁을 이끈 일등공신임은 누구나가 다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중국 역사를 통틀어 전면적인 개혁이 성공한 예는 극히 드문데, 멀지 않은 송대에만 해도 왕안석의 신법은 훌륭한 개혁안이었으나 좌절되어 결국 송나라는 멸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상앙의 변법은 개혁을 이끌어가고 성공시킬 수 있었을까요?


   상앙은 세 번의 독대로 진 효공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효공의 됨됨이와 개혁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투철함을 파악했습니다. 기존의 실권자들은 개혁에 반대하였지만 상앙이 탁월한 언변으로 반대를 물리치고 왕과 의기투합하여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나무 옮기기와 법을 어긴 태자에 대한 형벌(공자 건과 스승이 대신 벌을 받음)을 통해 법의 신뢰성을 확립하자 개혁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1차 변법은 십오제도의 강화, 가족제도의 개혁, 군공장려, 농업장려 등 사회구조 개혁에 중점을 두었고, 2차 변법은 전통적 부락제 해체, 전국의 성읍과 촌락을 재편하여 31현을 설치, 전세를 국가가 직접 징수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는 정치제도 개혁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사기에 따르면 10년이 지나자 진나라에서는 길거리에 물건이 떨어져도 주워가는 이가 없고 도둑이 없었으며 집집마다 사람이 넘쳐났습니다. 또한 전쟁터에서는 모두가 용감하게 싸웠으며 사사로운 다툼이 없어 마을마다 평화로웠습니다.


    송나라 왕안석의 신법의 경우 신법 자체는 개혁적이며 근대적이었지만, 여러 차례 중단되었고 신종의 지지가 약했기 때문에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반면에 상앙의 변법은 중단되는 일 없이 구체제의 반대를 효종이 막아주며 절대적인 지지를 보여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상앙 변법의 성공은 상앙이라는 걸출한 기획가 한사람의 공이라기보다는 효공이라는 절대적 지지자와의 합작품이라는 평가가 더 어울릴 것입니다. 왕권 국가의 경우 왕과 개혁가의 밀접한 결속력이 개혁의 성공여부를 좌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뛰어난 개혁안도 중요하지만 신법의 경우에서 보듯이 왕의 지지가 없이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개혁이란 뛰어난 개혁안과 그 개혁안을 알아 볼 수 있는 왕의 안목, 둘의 결속력과 추진력이 더해져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진나라 목공과 백리해, 제나라 환공과 관중, 진시황과 이사, 신라 무열왕과 김유신, 고려의 공민왕과 신돈 등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진나라는 효공과 상앙이라는 명콤비의 개혁으로 전국시대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 할 수 있었으며, 훗날 천하를 통일하는 기초를 마련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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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05-10-02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생 과제를 해 주며...^^
 

< 美國에 대해서 > 

Ⅰ. 美國의 역사
가) 들어가면서
美國은 유일하게 식민지 국가에서 출발하여 세계의 종주국이 된 나라이다. 지난 20세기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수호자로서 Pax Americana를 이룩하였지만 이제는 그 자리를 아시아에 넘겨주어야 할 시기인 듯 보이며,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러한 美國의 역사는 결코 평탄하거나 쉽지는 않았다. 또한 美國이라는 나라가 독립혁명을 계기로 탄생한 국가인지, 제국주의 백인국가에 의해 침략 받았을 때부터 시작하는 나라인지, 영국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청교도들로부터 시작한 나라인지, 아니면 그 이전의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했던 원주민들의 문명부터 시작하는 나라인지를 아는 것도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美國의 역사를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문명들이 멸망한 후부터를 미국 역사라고 보고, 그 이전의 역사를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 혹은 美國 이전의 문명으로 다루겠다.
 
나) 美國 이전의 문명
최초의 아메리카 인디언은 갈색 피부에 거칠고 윤이 나는 검은머리, 툭 튀어나온 광대뼈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몽골로이드계로 추정된다. 일반적인 학설에 의하면 시베리아 북동부의 초원지대에 살던 그들은 기후의 변화로 초원지대가 고갈되자 베링 해협을 지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해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들이 인디언들이다. 인디언들은 북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로 나뉘어 각자의 문명을 발전시켰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문명으로는 코치스 문화, 모고욘 문화, 바구니 문화, 아나사지 문화, 푸에블로 문화, 우드랜드 문화가 있다. 그리고 중앙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문명으로는 유명한 마야 문명과 아즈텍 문명이 존재했으며,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잉카 문명을 꽃피웠다.

다) 대륙의 발견
아메리카 대륙에서 아즈텍 문명과 잉카 문명이 번영하고 있을 무렵인 15세기경 유럽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십여 차례의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은 중동지방과의 접촉이 빈번해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상업의 부활'이 일어났다. 그리고 새로운 무역로의 개척이 유행처럼 번져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가 시작되었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이 인도라고 믿었지만 1499년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의해 새로운 대륙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고, 1513년 발보아에 의해 그 사실이 재확인되었다.

라) 원주민 문명의 멸망
① 아즈텍 문명의 멸망 : 1519년 4월, 스페인 귀족 헤르난도 코르테스는 아즈텍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을 공격하여 1521년 5월 왕국을 구하려뎐 아즈텍 최후의 왕인 쿠아우테목을 반역자로 교수형에 처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민족을 정벌하고 잔인하면서도 찬란했던 아즈텍 문명은 스페인에 의해 어이없게 멸망하고 말았다.
② 잉카 문명의 멸망 : 1533년,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잉카 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는 잉카 제국의 내분을 이용하면서 비열한 수를 써서 잉카 제국의 통치권자인 아타후알파를 교수형에 처했다. 그리하여 잉카 제국은 스페인 인에 의해 멸망했다.
③ 스페인의 식민지 정책 : 스페인 인들은 인디언들이 가진 고도의 문명을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학살하거나 문명을 파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스페인 인들은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함으로써 그들이 가진 제물을 요구하는 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스페인이 차지한 아메리카 대륙의 땅들은 식민지가 아닌 본국의 직할지로 관리되었다. 
④ 영국의 식민지 : 美國은 17세기 초엽부터 약 170년 간 영국 식민지였다. 영국은 스페인과 경쟁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리하여 버지니아 지방 및 기타 여러 광활한 대륙의 땅을 지배하게 된 영국은 식민지를 다스리기 위해 교육권의 박탈, 노예제도, 인두권제도 등 여러 가지 정책을 실시했으며, 아메리카 대륙을 영국의 시장으로 삼아 점점 식민지를 가혹하게 대하기 시작해고, 식민지 민들이 가진 영국에 대한 불만이 날로 커져갔다.

마) 美國혁명
美國혁명은 영국이 7년 전쟁(1756-1763) 이후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해 종전의 방임정책을 포기하고 과세와 중상주의적 통제를 실시하여 본국과 식민지간의 관계가 악화함으로써 발생했다. 1774년 9월 필라델피아에서 대부분의 식민지대표가 참여하는 제1차 대륙회의가 열렸으며, 1775년 4월 보스턴 근교에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가 충돌함으로써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독립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 바로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다. 이 사건은 동인도 회사가 보스턴 항에서 차 하역작업을 하고 있던 1773년 12월 16일, 몇몇 보스턴 인들이 모호크 인디언 차림으로 변장을 하고 차를 바닷물에 빠뜨려서 발생했는데, 이 일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가 충돌하였고, 독립혁명의 서막이 오르게 되었다. 식민지 대표들은 1775년 5월 제2차 대륙회의를 열어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1776년 7월4일 '독립선언'을 공포하여 자연권에 입각한 독립을 정당화했다. 식민지 군은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고, 1783년 파리 조약은 식민지의 독립을 승인했다. 

바) 대륙국가 형성
독립전쟁 후, 워싱턴 행정부의 출범은 연방헌법의 인준과 더불어 13개 주가 모두 가입된 美합중국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후 연방정부는 국가적 기틀을 확립하기 위하여 기구조직을 보완·개편하고 제도의 정비를 꾀했으며 국무성, 국방성, 재무성, 법무성 등을 설치하여 보다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국가경영을 시도했다. 정치적 당파의 발생과 당파간의 대립으로 인한 시련 속에서도 애덤스 시대까지 꾸준한 정치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후 토머스 제퍼슨 행정부로부터 존 퀸시 애덤스 행정부로 이어지는 20여 년 동안 美國은 서부개척에 병행한 대외통상의 확대로 경제적 자립 기반을 다녀나가는 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과의 통상관계 악화로 국내산업이 마비되고 해외무역이 손상되어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를 美國의 국가적 단합과 애국심 강화의 계기로 전환시키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련 속에서도 성장을 이룩하며 잭슨 행정부가 출범하였고 이때부터 美國은 정치제도와 정당 구조상 평등주의적인 새로운 변화를 맞기 시작했다. 민선관리의 수적 팽창, 대통령후보 전국지명대회 및 대통령 특별고문제 등이 생겨났으며 양당제도가 뿌리를 내림으로써 어느 특정지역 출신들이 대통령직을 독점하던 시대와는 다른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경제공황과 영토확장에 따른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예문제를 둘러싸고 연방이 분열될 위기가 시작되었다.

사) 남북전쟁
美國經濟는 산업혁명이 1860년대 일단락 되었지만, 이후 남북전쟁(1861-1865)을 계기로 하여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흑인의 '노예해방'이란 인도적·정치적 과제를 두고 남부와 북부가 치른 이 전쟁의 기반에는 서로 다른 경제체질로 인한 이해관계의 대립이 자리잡고 있었다. 즉 남부는 면화생산을 중심으로 농업이 발달한 지역으로서 노예노동을 이용하는 플랜테이션이 경제적 기반이었던 반면, 북부지역은 상공업이 발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질적인 경제체제로 인하여 남북 간에는 모순과 대립이 심화되었는데, 남부가 노예제의 확대를 요구한 반면 북부는 노예제를 반대했다. 북부의 주장이 역사적 진보라는 측면에서 정당성을 지닌 것이기는 했지만, 사실 이 대립은 노동력 확보라는 측면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대립의 두 번째 원인은 관세문제였다. 남부는 농업체제였기 때문에 1차산품을 수출하고 공업제품을 도입하기 위하여 자유무역을 요구하였지만, 북부는 산업자본의 이해를 대변하여 보호무역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양측은 금융과 토지문제 등에서도 이해가 대립하였는데, 1850년대 말 서부 철도망이 확장되면서 서부는 북부와의 경제적 유대관계가 밀접해진 반면 남부와의 관계는 거의 단절되다시피 하였다. 이리하여 1860년대에는 북부의 산업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링컨의 공화당 정권이 탄생하고, 공화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영국제품에 대한 관세인상이 실현되고 철도·농업기계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중공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남부 11주가 연방을 탈퇴한 후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 초기에는 남부군이 우세했으나 앤티담 전투를 계기로 북부군이 세력을 회복하였고,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이 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 결과 첫째, 연방이 유지되었고 둘째,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으며 셋째, 공업발전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고, 끝으로 서부개척의 활력소가 제공되었다. 북부의 산업자본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美國의 공업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즉 산업자본의 발전을 제약하던 자유무역 및 노예제가 사라진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의 산업발전에는 5대호 주변의 철광석, 풍부한 양질의 석탄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리하여 美國은 1880년대에는 세계 제 2위의 철강생산국이 되고, 1890년대에는 공업생산고가 세계 1위에 도달하였다. 요컨대 美國은 남북전쟁으로 동질적인 사회경제체제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발전하였다고 하겠다.

아) 제 2차 세계대전까지
남북전쟁 후 좀더 활기를 띠기 시작한 서부 개척은 광부, 목축업자, 농민들의 대이주에 따른 인구증가 및 국토개발로 급격한 변화를 이루었고, 1890년대에 이르러 프런티어가 소멸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후에 추진된 정부의 친기업정책 및 대륙횡단철도 건설 등의 영향으로 등장한 대기업가들의 활동으로 美國은 이제 유럽 열강들도 만만히 볼 수 없는 산업국가로 변하게 되었다. 이 때 등장한 대기업가들이 존 데이비슨 록펠러, 앤드루 카네기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수많은 노동단체의 활동, 농민운동, 언론·문학작품 등을 통하여 제기된 항변에도 불구하고 부패는 더욱 만연하고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이 때 등장한 '혁신주의 운동'은 빈곤 및 부정부패 추방을 통한 사회정의운동과 정치개혁운동으로 확산되어,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美國을 변화시켰다. 美國 내에서 개혁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동안 유럽에서는 전면전의 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1914년에 마침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쟁 초기에 美國은 중립을 고수한 채 교전국과의 교역을 통해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독일의 미국상선 공격을 계기로 1917년에 연합국 측에 가담하였고, 이로 인해 美國經濟는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전쟁은 1918년 독일이 연합국의 휴전조건을 수락함으로써 종결되었다. 그러나 美國이 내세운 이상이 국제정치의 정세에 어긋나자 美國은 고립주의를 택했고, 내부적으로 급진적인 물결이 이는 가운데 번영을 누렸다. 그러한 번영도 잠시, 1차 세계대전의 막대한 배상금을 물던 독일경제의 문제점과 美國 내의 거품이 꺼지면서 1929년의 주식시장 붕괴와 더불어 마침내 대공황으로 확대되었고 美國은 물론 세계가 경기 침체의 몸살을 앓게 되었다. 이에 따라 美國인들은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을 선택했다. 뉴딜의 목표인 구호·복구·개혁의 추진으로 수년간 경기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1937년 중반부터 또다시 불황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 유럽과 아시아를 무대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초기에 美國은 1차 대전 때와 유사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다가 1941년에 참전하였고, 군수물자 자원을 위한 산업생산의 증가로 경기침체의 암운이 걷히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경제 전반에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자) 그 이후의 역사
2차 세계대전 후 美國은 평시체제로의 전환을 통한 경제부흥과 공산 세력의 팽창 억제라는 두 가지 중대한 과제에 직면했다. 이를 위해 트루먼 행정부는 '페어딜 정책'과 '마셜 플랜'을 추진했다. 이어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국제적 협조체제의 강화와 반공태세 강화를 위한 대내외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경제·사회 그리고 외교부문에서 보다 발전된 변화가 일어났다. 그렇지만 발전과정에서 도시문제, 경기후퇴, 달러화의 불안정, 그리고 자연자원의 낭비 등과 같은 문제들이 새롭게 또는 반복적으로 드러났다. 3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케네디는 '뉴프런티어 정책'의 실현을 통해 대내적으로는 사회정비, 경기회복을 시도했고 대외적으로는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과의 경쟁에서 자존심을 지키려 하였다. 또한 존슨은 위대한 사회 건설을 표방하면서 빈곤추방과 교육발전에 주력했다. 전후 20여 년간의 변화·발전을 통해 美國은 세계강국으로의 위상을 다져나갔다. 그러나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과의 계속된 대립과 경쟁 속에서 국제적 긴장상태는 계속되었다. 이러한 긴장상태는 닉슨시대의 닉슨-브레즈네프 선언을 계기로 완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긴장완화 무드의 토대 마련에 불과했고 포드·카터 시대에 이르는 1970년대 말까지도 냉전이 종식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건 시대에 이르러 핵 감축시대가 열림으로써 보다 급격하게 긴장완화 무드가 조성되었고 부시 시대에 소련의 붕괴에 이은 美國·러시아간의 전격적인 합의로 마침내 냉전의 시대가 청산되었다. 1991년 소련 해체라는 극적인 상황 발생 이후 美國은 경쟁자 없이 세계무대에서 독주하게 되었다. 92년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의 젊은 B. 클린턴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는 경제도 침체에서 벗어나 건실하게 성장해 나아갔다. 美國經濟에서 첨단기술 특히 컴퓨터 관련 기업들은 역동적으로 세계경제를 이끌었다. 그 후 2001년 9월11일 국제테러조직 알 카에다에 의한 뉴욕세계무역센터 여객기 충돌테러를 계기로 부시 대통령은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 테러용의자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추종세력의 소탕을 위해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을 전쟁대상으로 설정, 그 해 10월 7일 전폭기와 미사일 등을 동원해 아프간 공습을 개시, 12월에 들어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고 사실상 전쟁을 마무리한다. 2002년 들어서도 부시 대통령은 오사마 빈 라덴을 잡기 위한 추적을 계속하는 한편 이라크가 불법대량살상무기를 생산·판매하고 테러리스트를 지원하고 있다며 전선의 확대의지를 천명하고 북한·이란·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이어 10월 의회에서 대 이라크 무력사용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등 사실상 선전포고에 돌입한다. 2003년 3월 20일 美軍 25만을 중심으로 韓美英연합군(영국군 4만 5000명)은 이라크를 공격, 3주만에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같은 해 5월 1일 공식적인 전투종결을 선언했다. 또 12월 14일에는 피신했던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美國에 체포되면서 테러와의 전쟁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Ⅱ. 패권국 美國 (경과. 현황. 전망)
가) 경과
독립 당시 美國은 대륙의 동쪽 끝에 산재하는 작은 농촌의 연합체로, 유럽경제의 변경이었다. 상업은 내륙과의 거래보다 유럽과의 거래가 많고 수출품은 대부분 농산물이었으며 공산품은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美國經濟는 크게 발전하여 19세기 중반에는 세계 최대의 농업국이 되었으며 19세기 말에는 세계 최대의 공업국이 되었다.
▶1929년의 대공황 : 세계대공황은 먼저 美國에서 발생하여 유럽으로 그리고 전 세계로 파급되었다. 당시 美國은 이미 소비수요가 포화상태에 다다르고 있었다. 각 공장마다 재고가 쌓이기 시작했으며, 생산의 축소현상이 일어나 불황이 심화되기 시작했으며, 美國의 대외무역도 크게 감소하였다. 그러나 경기하강과는 달리 주식투자에 대해서는 정도가 지나쳐 투기 붐이 조성되고 있었다. 이 투기 붐은 자본수출의 감소를 가져왔고, 美國시장 내로 해외자본을 끌어들여 美國으로부터의 자본유입에 의존하는 국가에 큰 타격을 입혔다. 유럽 특히 독일의 경기는 1928년 말 경부터 하강국면에 들어갔고, 후진농업국의 경제상태도 궁핍의 도를 더하였는데 먼저 중남미의 여러 나라들과 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가 금본위제를 정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9년 10월 주식시장의 붕괴를 계기로 美國이 유럽에 대부했던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자 공황은 일시에 유럽으로 파급되었다.
▶뉴딜정책 : 1933년3월 금융공황의 와중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시행했던 일련의 공황대책이 뉴딜이다. 그것은 美國의 공황극복을 위해서는 경제기구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불가결의 조건이라고 한 케인즈 이론을 전제로 시행되었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루즈벨트는 긴급은행법, 농업조정법을 제정하여 경기회복정책의 기반을 형성하고, 농산물가격의 회복을 도모하였으며, 그 후에 긴급구제지출법, 사업촉진법을 설치하여 공공사업을 경기진흥정책의 중심으로 하여 대규모적인 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1933년 5월에 '테네시계곡개발공사법'이 제정되어 초기 뉴딜정책 중에서 정부가 가장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뉴딜은 경기회복목표를 충분히 달성하지 못한 채 전시체제로 접어들게 됨에 따라 자연히 종료되었다.
▶IMF-GATT 체제(브레튼우즈체제) 출범 : 제 2차 대전이 끝나고 자본주의국가들이 취한 가장 중요한 조치는 IMF-GATT 체제의 출범이다. IMF는 통화금융면에서 중단기자금공급기관으로서 설립되었고, 통상면에서 GATT는 1947년 제네바에서 성립되었다. 이 브레튼우즈체제가 가지는 의미는 美國이 드디어 팍스 브리태니카를 팍스 아메리카나로 대체해나가는, 美國의 헤게머니가 수립되는 세계자본주의의 재편과정이라는 것이다.
▶마셜플랜 : 1947년 6월 국무장관 마샬이 유럽부흥계획을 제안하였다. 유럽부흥계획의 원조제안 이른바 '마셜플랜'은 경제부흥을 통하여 자본주의 체질을 강화함으로써 서유럽이 직면한 잠재적 위험을 제거한다는 목표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美國의 경제원조는 무엇보다 자신의 이익을 고려한 결과였다. 즉 美國은 경제원조를 통해 경제부흥에 깊숙이 관련하여 영향력을 확대하고 교역상대국을 재건함으로써 수출시장을 개척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서방세계는 1950년대 중반 경까지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완전히 회복하였다.
▶레이거노믹스 : 1980년대 레이건 정부가 8년 간의 임기 중에 실행했던 일련의 경제정책을 일반적으로 '레이거노믹스'라 표현한다. 레이거노믹스는 흔히 '공급 측 경제학'이라 불린다. 공급 측 경제학이란 수요를 중시하는 케인스적 정책과는 반대로 공급을 중시하는 정책이다. 즉 대폭적인 감세 및 규제완화, 그리고 정부의 세출 규모 축소와 과도한 복지정책의 지양 등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국민의 근로의욕을 고취하며 저축성향을 증진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이건의 정책은 원래 설정했던 취지와 비교해 볼 때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고금리와 고달러는 감세조치에도 불구하고 국내투자를 그다지 자극하지 못하였고, 국제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오히려 이러한 정책기조는 생산시설의 해외이전을 촉진하여 美國 내 산업의 공동화를 초래하였다. 또한 대소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우주무기개발(SDI의 추진)을 비롯한 군비지출을 증가시켰다. 그리하여 연방정부의 채무를 누적케 하여 1982년부터는 경상수지도 만성적 적자로 반전되어 美國을 최대의 채무국으로 전락시켰다. 또한 레이건의 경제정책으로 계층간의 소득분배는 더욱 악화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레이거노믹스는 스태그플레이션을 해소하고, 이후의 장기호황을 실현하는 전제를 만들어내는 데는 어느 정도 정책적 성과를 거두었다.  

나) 현황
2003년 세계경제는 美國經濟를 중심으로 지난 2001-2002년의 침체에서 벗어나 회복세를 나타냈다. 美國經濟의 회복세는 감세로 인한 가처분소득의 증대로 민간소비가 대폭 증가했고 기업의 설비투자도 눈에 보이게 회복된 데 따른다. 나아가 이라크전을 계기로 증가한 군사비지출도 내수 진작에 도움이 되었다. 美國경기는 전반기에 비해 후반기에 더욱 호조를 보여 1/4분기의 2.0% 성장에서 2/4분기에는 3.1%로, 그리고 3/4분기에는 8.2%로 성장률이 급속히 상승했다.

다) 전망
2004년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GDP의 6%, 재정적자는 GDP의 5% 수준으로 전망된다. 현재까지는 美國이 세계를 움직이는 강대국이기는 하지만 아시아에서 中國이 맹렬하게 추격해오고 있으며, 가까운 미래에 팍스 아메리카나 팍스 차이나 혹은 팍스 아시아나로 대체될 가능성이 매우 커 보인다. 현재 美國經濟의 회복이 세계경제 회복을 견인하고 있지만 달러화 가치 하락, 국제자금의 유럽, 日本, 신흥시장 등으로의 이동 등이 점점 美國經濟의 세계 속 위치를 격하시켜가고 있는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美國은 이라크전 등 국제사회에서 만행을 저지르고 있어 이미 경제 이외의 美國의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으며, 反美 현상이 세계 각 국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 세계 속 美國의 위치가 로마의 쇠망처럼 느껴지게 될 것이다.  

 Ⅲ. 美國의 강점 및 약점(경제 포함)
가) 강점
미국은 앙시엥 레짐이 없어서 사회 해체 및 변화를 겪지 않고 오히려 기회의 나라가 되어 자유분방한 듯 하면서도 프로테스탄트적인 성향을 깊이 간직한 나라이다. 유럽에 비해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많고, 아직까지 미국 대통령 중 카톨릭 신자는 한 명도 없다. 이미 고대, 중세, 근대의 일부를 경험한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식민지 경영을 위해서, 일자리를 찾아서 등의 이유로 신대륙을 찾아 미국을 세웠기 때문에 정치, 문화, 경제적으로 개방되어 있다. 그리고 개척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성향이 있으며, 과거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앞만 보고 가는 혁신적인 면도 있다. 경제적으로도 과학혁명을 주도한 나라인 만큼 신기술이 발전해 있으며, 세계경제가 아직은 달러 중심이기 때문에 자본조달에 용이하며, 현재의 경제주류는 시카고 학파이며, 시카고 학파 이전의 미국은 케인즈, 프리드먼 등 유명한 경제학자들도 배출했다. 개발과 혁신, 창조를 자신들의 모토로 삼고 있으며, 세계의 거대한 기업들이나 CEO등도 미국에 많이 있다.

나) 약점
위와 같은 수많은 장점들이 존재하지만 현재의 美國은 국제적 만행을 서슴지 않게 자행하고 있어 국제적으로 비판받고 있다. 이라크전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으며, 그 이전에도 베트남전, 걸프전 등 많은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양민을 살육하고, 고엽제 등으로 각종 자연환경을 파괴시켰으며, 테러에 대한 응징이라는 명목 하에 전쟁이라는 테러를 일으켜 전세계에서 비난을 퍼붓고 있다. 그 뿐 아니라 경제면에서도 쌍둥이 적자의 심화, 美國의 강한 달러 정책 후퇴, 美國 대통령 선거 실시 등으로 달러화 약세가 초래되었고, 美國, 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들간에 환율 갈등이 심화되고 달러와의 기축통화로서의 위상이 약화되었다. 또한 2003년 OPEC 회원국들은 원유거래 결제통화를 유러화로 바꿀 수 있음을 시사해 달러화의 위상을 약화시켰다. 게다가 아직까지 인종차별이 존재하고 있으며, 학생이 기관총을 난사해 사람들에게 중경상을 입히는 등 사회적으로도 충격적인 사건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더 이상 美國이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없으며,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美國은 번영의 뒤안길로 사라져갈 전망이다.

 Ⅳ. 韓·美 관계(역사, 현 상황, 전망)
가) 역사
韓·美 양국이 처음으로 접촉한 것은 1866년 '제너럴 셔먼호사건'과 71년의 '신미양요'를 통해서였다. 美國은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일관하였다. 그 뒤 강화도조약으로 日本에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美國과의 수교에도 응하여 82년 5월 '朝美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1905년 러·日전쟁의 중재를 맡은 美國은 식민지 필리핀의 안전을 日本으로부터 보장받기 위하여 그 해 7월 가쓰라-태프트밀약을 맺음으로써 조선에 대한 日本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45년 8월 日本이 패망하자 美國과 소련은 韓國의 38°선 분단점령을 발표하고, 이어 R. 하지 중장 휘하 美軍이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향후 3년 동안 南韓에서의 군정이 시작되었으며, 48년 8월 15일 大韓民國정부가 수립되자 폐지되었다. 정부가 출범하자 美國은 韓國을 승인하고 초대 주한美國대사로 J.J. 무초를 임명하고 韓國에서도 초대 주미대사로 장면을 임명함으로써 두 나라의 공식외교가 재개되었다. 韓國은 건국 초기부터 北韓의 군사적 위협, 신생국가로서의 경제사정 등으로 對美일변도의 외교를 폈으며 6.25 이후 정치·군사·경제면에서 韓美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美國은 53년 10월 <韓·美상호방위조약> 체결 뒤 꾸준히 군사원조를 제공하여 韓國군의 현대화를 도왔고, 해마다 韓·美합동군사훈련 등을 통하여 두 나라의 실전능력을 높여 왔다. 또한 71년 이후 연례 韓·美안보협의회가 개최되어 한반도의 군사적 현안문제를 협의하여 왔다. 90년대 美國의 방위비분담 요구가 커지고 주한미군 일부 철수 문제가 대두되었다. 국교 수립이래 韓國에서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이 美國을 방문했고, 美國에서는 아이젠하워·존슨·포드·카터·레이건·부시·클린턴 대통령이 韓國을 방문하여 두 나라 사이의 문제를 협의하였다. 美國의 對韓 경제원조는 6·25 뒤 61년 초까지 韓國經濟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고 노근리 학살 사건 등 駐韓美軍의 만행이 끊이지 않고 있어 국내 反美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고 있다.

나) 현 상황
2002년 對韓수출액 189억 8900만 달러, 對韓수입액 268억 700만 달러로 대폭 흑자를 기록하면서도, 자동차·식품 등 韓國시장 개방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2000년 韓國교민 177만 명, 체류자 16만 1983명이다. 2003년 對美 수출액은 197억4,510만불 (기계류, 전자제품, 피혁, 화학제품), 對美 수입액은 300억950만불 (전자·전기제품, 신발류, 자동차, 의류)이다. 경제면에서는 美國과 韓國의 관계가 밀착되어 있고, 의존적이지만 駐韓美軍이 국내에서 일으키는 갖가지 문제들이 韓國人의 反美감정을 불러 일으켜 美國에 대한 적개심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다.

다) 전망
경제적인 면에서 볼 때 아직 世界經濟는 美國 중심이지만 점점 아시아로 경제의 축이 넘어오고 있으며, 통합된 유럽 역시 만만치 않은 시장이며, 中國의 발전과 日本의 경기회복이 世界經濟 발전에 영향을 주고 있어 앞으로의 世界經濟가 유럽과 美國, 아시아 등 블록화된 경제구조에 의해 이끌어져 갈 전망이다. 특히 각 국이 FTA 협정 체결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어 통합 경제가 주요 경제구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美國이 계속 전쟁을 일으킨다면 北韓이 언젠가는 목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양국간의 마찰이 예상된다. 그러나 만약 北韓과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美國과의 관계는 여전히 우호적일 것이다. 그리고 駐韓美軍의 문제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이며, 동등한 입장에서 해결될 수 있기를 바란다.

 Ⅴ. 南北韓과 美國
제 2차 '6자 회담'이 2월 25∼28일간 북경에서 개최되었다. 핵심 쟁점은 北韓의 고농축 우라늄(HEU) 프로그램 가동 여부, 북한핵 폐기 방식 등이었으며, 막판까지 공동발표문을 작성하기 위해 조율을 했으나 구속력이 떨어지는 의장성명문을 발표하는데 그침으로써 南北韓, 美國, 中國, 日本, 러시아의 6개국은 핵심 쟁점에 대한 새로운 돌파구를 여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번 2차 회담은 1차 회담(2003년 8월 개최)보다는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참가국들은 회담 성과에 대체로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역사적으로 한반도 문제에 영향을 미쳐 온 美國, 中國, 日本, 러시아 등 주변 4강이 본격적으로 南北韓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美國은 '악의 축' 발언 등을 통하여 北韓을 적으로 간주, 제2의 이라크전을 일으킬 의도마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 회담에서 北韓은 美國 측이 증거를 제시하면 해명을 하겠다고 하면서 고농축 우라늄의 존재를 부정했고, 美國은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마치 이라크전 직전에 대량학살무기에 대해 왈가왈부하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美國은 회담 초반부터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방법으로 핵을 완전 폐기한다는 원칙)를 강력히 주장했으나, 北韓은 군사적 핵과 평화적 핵을 구분하여 군사적 핵무기 계획만을 폐기하겠다고 언급하였다. 이렇듯 계속 美國과 北韓은 서로 입장 차이가 크며, 특히 美國의 군사력으로 볼 때 北韓을 제압할 능력이 충분하며, 명분 역시 美國이 만들어낸다면 전쟁마저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한반도 내에 긴장감이 조성되고 있다. 핵무기가 인류를 파괴시킬 만한 힘을 가지고는 있지만, 핵무기가 아닌 그것의 개발여부가 인류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는 듯해서 매우 안타까운 기분이 든다.     

 Ⅵ. 기타 - 미국 문학 中
▶ 아틀라스 - 지구를 떠받치기를 거부한 신(1-5) 
에인 랜드 (지은이), 신예리, 정명진, 조은묵 (옮긴이)

미국의 소설가이자 사상가인 에인 랜드의 장편소설이다. 1957년에 출간된 이래, 여전히 미국의 독자들에게 사랑 받는 작품으로 미국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서평을 써 보겠다.
《신문에서 이 책을 극찬하는 것을 보고 읽게 되었다. 사실 난 미국이 너무나 싫어서 이 책 읽는 것을 기꺼워했다. 적을 알아야 이긴다고 했던가. 미국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 미국인들이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는 책.. 그래서 그네들의 사고방식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책.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였다.
꽤 두꺼웠다. 한 권당 500페이지 정도이니 읽는데도 이틀 밤을 새워야만 했다. 소설 형식을 빌어 기업가 정신을 표현했는데, 내용은 재밌었다. 미국에서는 이 책이 지적 스릴러로 분류된다는데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기차에서, 대학의 강의실에서, 더러운 술수가 난무하는 정치가들의 연회에서 그리고 침대에서까지 철학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철학은 단 하나 '인간의 이성은 위대하고 절대적이다.' 이 명제를 위하여 온갖 상황이 다 발생한다.
이 책은 미래의 뉴욕에서 출발한다. 얼치기 도덕주의자들, 인류애를 주장하는 위선자들의 집권으로 진정한 기업가들은 모두 파업을 선언하고 그들만의 아틀란티스로 숨어버린다. 그러자 그들에게 빌붙어 살아가던 다수의 어리석은 대중 및 집권자들은 멸망하고 기업가들은 세상으로 돌아와 세상을 재건한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한창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미국 정부의 제재에 못 견뎌 캐나다로 이전한다고 소동을 피웠을 때 이 책의 기업가 정신이 언급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 따르면 정부의 제재는 자유로운 경쟁을 막고 시장경제의 침체를 가져온다. 그리고 너무나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기업가들의 이윤을 떨어트리고 판단할 줄 모르는 대중들은 그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며 그들을 옥죄어간다고 했다. 즉,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캐나다 이전 소동이 이 책의 상황과 비슷하거나 혹은 미래에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인데, 어이가 없었다.
이 세상의 기업가들 중 이 책에 나오는 프란시스코나 대그니, 리어든처럼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만을 하는 사람은 없다. 또한 모든 정치가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노리는 무뇌충같다 하더라도 대중들은 생각할 줄 안다.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활동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즉 이 책에 나오는 상황으로 가는 것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또한 사회는 진보하는 법인데 이 책에 따르면 사회는 퇴보한다는 것인가.
예부터 동양에서는 상업을 천시하였고, 덕분에 상인들이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이 책은 그러한 상황을 타개할만한 구실을 주는 책일지도 모르겠다. 산업혁명기에 빨리빨리 어서어서 발전하자는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책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미국과 다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읽고 미국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왜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는지, 왜 세계의 경찰 행세를 하며 온갖 나라에 간섭을 하는지, 그리고 왜 자신의 나라 안의 치안에는 부실한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나에게 많은 의미를 주었다.
그들에게 A는 A이다. 영원히 말이다. 그들은 그들이 한 번 강대국으로서 세계를 호령했다면 영원히 그 상태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진리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이 책에 나오는 대로 제임스나 오런 보일과 같이 남을 등쳐먹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 자신은 공공의 선을 위해 일한다면서 마음 속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착취한다. 대그니와 같은 도덕률로 무장한 이성적인 인간은 그들의 이상향이다. 남의 눈을 가리기 위한. 이상향으로 가는 행세를 하면서 마음껏 남의 피를 빨아먹는다.
나는 이 책에서 그것을 보았다. 이 책이 50년도에 출판되어 아직까지 읽히는 이유는 바로 그들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로맨스에 집중하기도 했는데, 이 책은 사랑마저도 이성의 영역에서 통제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감정, 모성애라는 감정마저도 이성에 포함시킨 이성의 영역에서 행동하는 자들의 사회가 현재의 미국과 같은 사회일까?》

<참고자료>


1. 이야기 미국사. 청아출판사. 이구한 엮음. (개정4쇄 2004.2.7)
2. 서양사 강의. 한울아카데미. 배영수 편. (개정판10쇄 2004.2.28)
3. 교양. 들녘. 디트리히 슈바니츠 지음. 인성기외 옮김. (초판23쇄 2002.3.15)
4. 신경제사개설. 박영사. 이해주·김호범 공저. (1999.8.30)
5. 다음 백과사전 中 미국.
http://100.daum.net/DIC/detail?id=1356750&sname=미국&ty=1 (2003년)
6. 국정원. 세계각국소개 中 美國 (2003년)
http://www.nis.go.kr/servlet/Board.dbWorldMain?cmd=view&sub_id=5&seq_no=12158&cr_tp=&cr_pg=7&cr_ptp=1&v_sub_id=0
7. 삼성경제연구소. World Report 제101호 2003.12.29. 박번순 수석연구원
8. 삼성경제연CEO Information. 2004년 해외 10대 트렌드. (2004.1.14) 박번순 수석연구원 
9. 삼성경제연구소. CEO Information. '6자 회담' 이후의 남북관계 전망. (2004.3.3) 이정철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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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리주의에 대해서 >
 - 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가 경제학에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담 스미스 이래 리카도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자들은 상품의 가치는 상품에 투여된 노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노동 가치론을 주장했지만, 상품에 투여된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측정하느냐는 질문에는 정확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 때 마르크스가 노동의 양을 통해 상품에 투여된 노동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론을 주장했고, 이 이론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로 인해 자본가들은 당황했다. 산업 혁명 이후 산업 자본가들은 기업 운영으로 많은 돈을 버는 반면에 노동자들은 빈곤에 시달렸는데, 마르크스의 이론대로 기업을 운영한다면 자본가에게는 남는 것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자기들의 이해를 대변해줄 경제학이 필요했다. 이 때 경제학자들이 주목한 것이 바로 공리주의 이론이었다. 후대의 경제학자들은 벤담과 밀의 쾌락과 고통의 개념을 효용이라는 말로 바꾸었고, 효용을 측정하면 상품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는 한계 효용 이론을 발전시킨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현대에 와서 철학의 위기라 일컬어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시발점이 바로 근대 철학 사상 중 하나인 공리주의였다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 마지막 고전학파의 학자임과 동시에 공리주의자였던 그의 사상을 알아보는 것은 어쩌면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당연한 귀결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정직한 것이 자기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정직이 보편적으로 실천되기를 의욕할 수가 있다. 즉 '모든 사람이 정직한 것은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최상의 정책'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추론 방식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도덕적 관점을 취했다고 주장할 수가 없지 않는가? 칸트는 그러한 의지가 도덕적 관점의 일부라고 생각한 점에서 옳기는 하나 도덕적 관점이 그 이상의 것이라는 점을 보지 못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공리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18세기말과 19세기는 놀랄만한 변혁의 시대이다.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근대 민족 국가가 출현하고 나폴레옹 제국이 몰락하고 있었다. 미국의 유혈적 시민전쟁은 급기야 서구 문명 사회에서 노예제도의 종식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산업혁명이 전반적인 사회의 재편성을 초래하고 있었다. 이때의 공리주의 도덕 실천가들은 이전의 낡은 가치들에 진부함을 느끼고 도덕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쾌락 그 자체를 유일한 선으로 여기고, 행위의 유쾌한 결과를 도덕률의 기준으로 여기면서 결정론에 도덕 이론의 기초를 두고자 하였다. 흄은 영국의 사상사에서 도덕 의식의 이론으로부터 기본적인 공리주의적 전제에로의 길을 열어 주었으므로 그를 공리주의의 창시자로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보통 공리주의 철학과 관련되는 두 인물은 벤담과 밀이다. 처음 벤담에 의해 공리주의가 널리 알려져 영국의 사회적·정치적 개혁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벤담에 의하면 도덕은 신을 기쁘게 하는 문제가 아니며, 추상적인 규칙들에 매달리는 문제도 아니다. 도덕은 이 세계에 가능한 한 많은 행복을 가져오게 하려는 의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벤담은 하나의 궁극적인 도덕 원리, 즉 "유용성의 원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유용성의 원리란, 이해 관계가 걸려 있는 당사자들의 행복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경향성에 따라, 다시 말해 행복을 증진시키느냐 감소시키느냐에 따라 모든 행동을 시인하거나 비난하는 원리를 의미한다. 그는 어느 누구도 자기에게는 이익이 없는데 남을 위해 봉사할 것이라고는 꿈도 꾸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남에게 봉사하는 일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는 상황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행위자가 행동하도록 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 이익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편애(self-preference)는 자신의 이익이 어떤 사람 혹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 이롭지 못할 때조차도 언제나 작용한다. 이것은 늘 인간을 형성시켰고 앞으로도 항상 인간을 형성시켜 줄 것이며, 도덕 이론은 이러한 사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벤담은 영국의 법률과 제도를 공리주의 노선에 따라 개혁하려는 목표를 가진 일단의 철학적 급진파의 지도자였다. 그의 추종자 중 한사람인 제임스 밀은 탁월한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요, 역사학자이며 경제학자였다. 제임스 밀의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은 그 다음 세대를 대표하는 공리주의적 윤리설의 지도적 옹호자가 되었다. 그는 최대 행복의 원리에 의하면 그것에 관하여, 그것에 의하여 다른 모든 것들이 바람직한 것이 되는(우리가 우리 자신의 선을 고려하고 있거나, 아니면 타인들의 선을 고려하고 있거나 간에) 그 궁극적 목적은 가능한 한 고통이 면제되고, 즐거운 일이 풍성하게 존재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도덕의 근본 법칙은 아주 간단하게 가능한 한 이와 같은 일이 생겨날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강도, 지속성, 확실성, 근접성, 생산성, 순수성, 범위 등 일곱 가지 기준을 가지고 쾌락과 고통에 대한 쾌락 계산법을 제시하고자 한 벤담에 비해 밀은 이에 대해 부분적으로 반대함으로써 쾌락의 평가에 있어서 양뿐만 아니라 질도 도입하고자 했다. 즉 쾌락, 즐거움, 건강, 만족 등의 많고 적음이 행위 결과에 대한 평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이 쾌락의 고상함과 저열함 또는 탁월함과 비열함까지도 그것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즉 밀은 좋은 인생에 대한 공리주의적 견해에서 인간의 고귀한 능력들이 가져오는 만족들에 최우선적인 역할을 할당함으로써, 공리주의는 본능의 만족을 유일한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다.
     밀은 이타성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윤리적 행위의 궁극적 목적이며 그래서 인간의 행위의 판단 기준이 되는 행복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일 뿐 아니라 관련된 모든 사람의 행복임을 말하고 있다. 게다가 어떤 사람이 자기와 관련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의 행복을 희생함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큰 행복을 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들을 위해 자기 자신의 행복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한다. 밀의 최대 행복의 원칙에서 행복이란 많은 일상적인 쾌락과 순간적인 쾌감, 미세한 고통과 불합리한 기대를 가지지 않는 데서 오는 전면적인 만족으로 가득 찬 삶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쾌락은 질적으로 최상의 것이어야 하며, 최상의 것으로 생각되는 행복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는 행위가 창출해 내는 행복에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원칙의 진술에서 사용되는 행위의 의미와 그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의무의 근거를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밀은 비난받을 만한 행위가 칭찬 받을 만한 성질에서 도출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행위를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데서가 아니라 행위자를 판단하는 데서 비롯된다. 어떤 사람이 호감이 가고 용감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의 행위가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또 잘 이행되었을 때도 불구하고 악한 행위가 되는 경우도 있다. 덕망 있는 성격은 일반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유익하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공헌하기 때문에 바람직하며 숭고한 동기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행위의 윤리적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행위자의 성격이나 동기가 아니라, 행위 자체의 결과이다. 밀은 의무가 윤리상의 제재에서 나오며 어떤 다른 도덕률의 체계에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도덕률을 당연히 지키도록 하는 중요한 궁극적인 제재, 양심의 제재를 밀은 어떻게 생각할까? 밀에게 있어서 양심은 동정심이나 상호 이해심, 동료와 함께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특징지어지는 감정 또는 '집단 감정'이다. 처음에는 이런 감정이 이기주의적인 감정보다 약하지만, 사회 조직과 교육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강한 욕망으로 발달됨으로써 다른 사람의 이익을 고려하게끔 만들어 준다. 일단 이런 감정이 형성되면, 이를 위반하는 행위는 양심의 가책을 낳게된다. 밀은 양심을 본질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은 양심의 가책이라고 말한다. 도덕적 행위의 궁극적인 제재가 되고 의무를 최종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은 발달된 동정심으로부터 나오는 바로 인간의 이러한 양심적인 감정인 것이다.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이 주장했던 이론인 공리주의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행위들은 오직 그 결과에 의해서만 옳고 그름이 판단되어야 한다. 옳은 행위란 단지 최선의 결과들을 가져오는 행위이다. 둘째, 결과들을 평가하는 데 문제가 되는 유일한 것은 행위들에 의해 생겨나게 될 행복과 불행의 양이다. 옳은 행위들이란 불행에 대한 행복의 최대 잉여를 낳게 하는 행위들이다. 셋째, 초래되어질 행복 또는 불행을 계산함에 있어서 어떤 사람의 행복도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계산되어져서는 안 된다. 각 개인의 행복은 똑같이 중요하다. 이러한 공리주의의 주장은 많은 반공리주의 논증을 발생시켰는데 이유는 그것들이 도덕 철학의 몇 가지 근본 문제들을 추가로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행복이 문제가 되는 유일한 것인가? 공리주의는 옳은 행위란 최대의 선을 낳게 하는 행위들이라고 말한다.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선이란 오직 하나, 행복이다. 밀의 주장에 의하면 '공리주의 이론은, 행복은 바랄 만한 것이고 더욱이 목적으로서 바랄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바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행복이 하나의 궁극적인 선이라는 사상은 일반적으로 쾌락주의라고 알려져 있다. 쾌락주의 이론을 조금만 검토해 보면 그 이론이 담고 있는 심각한 결점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장래가 유망한 젊은 피아니스트가 교통사고로 손에 부상을 입어 더 이상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이것이 피아니스트에게 나쁜 이유는 무엇일까? 쾌락주의자들은 그에게 불행을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가 자신이 마땅히 어떠했어야 되는가를 생각할 때마다 좌절과 실망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의 불행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반대로 현재 불행한 상황에 대한 이성적 대응이다. 그는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삶을 살수도 있었는데 지금 그녀는 그 일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이 바로 불행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쾌락주의는 행복의 본질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 행복이란, 다른 것들은 오직 행복을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만 여겨지지만 그 자체로서 선하고 그 자체로서 추구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이란 우리가 독립적으로, 그 자체의 권리에 의해 선한 것들로서 인정하는 사물들을 얻었을 때 그것에 수반하여 우리가 얻게 되는 대응물이다.
     결과만이 중요한 것인가? 공리주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가장 근본적인 사상은,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기 위해 우리는 그 행위의 결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다른 문제 역시 행위의 옳음을 결정하는데 중요하다는 사실이 판명된다면, 공리주의는 근거가 흔들리게 된다. 예를 들어 한 공리주의자가 어떤 지역을 방문하던 중, 한 흑인이 백인 여자를 강간한 결과로 인종간의 폭동이 일어나 백인 폭도들이 경찰의 묵인 하에 흑인들을 때리고 죽이고 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치자. 그때 공리주의자가 그 범죄 현장에 있었는데, 그의 증언이 특정한 흑인의 유죄 판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만일 그가 신속한 범인 체포가 그 참상과 린치를 그치게 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공리주의자로서 그 사람은 틀림없이 무죄한 사람에게 형벌을 받게 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공리주의에 의하면 거짓말은 그 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죄한 사람의 처형을 초래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함축을 지닌 공리주의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적 압력과 교육이 내적인 힘과 더불어 힘과 더불어 밀이 생각하는 바처럼 우리의 행위를 결정한다면(밀은 어떠한 선택의 자유나 자기 결정의 자유도 허용하지 않는다), 도덕적 의무에 관하여 말하는 의미를 무엇일까? 어떤 경우에도 불가피한 행위를 도덕적으로 해야 할 의무가 인간에게 있다고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이러한에도 불구하고 밀의 공리주의는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세기와 19세기의 정치경제학자들 중에서 밀이야말로, 경제적 생산이 정체되는 '침체' 상태를 적어도 산업화 된 국가들에서는 위기 신호와 사회적 파국의 전조로 해석하지 않고 더욱 정의롭고 더욱 태연하고 더욱 개화된 사회적 삶의 가능성으로 해석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후진국들에서나 생산의 증가는 의미있는 일이 된다. 최고의 선진국들의 경우 경제적 관점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개선된 분배이다. 그 분배를 이루기 위한 불가결의 수단은 인구 증가의 더욱 강력한 제한이다. 부와 인구가 무제한적으로 증가하게 될 경우 지구에서 사라질 어떤 그런 것들에 힘입고 있는 지구의 쾌적함이라는 저 위대한 환경을 지구가 잃는다면, 그것도 더욱 개선되고 행복해진 주민들이 아닌, 그저 숫자상 엄청나게 증가된 주민들을 부양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서 잃는다면, 이러한 세태가 불가항력적으로 닥치기 훨씬 이전 에 사람들이 침체 상태에 만족하고 살기를 바람이다.'

<참고자료>

1. 인간본성에 관한 논고. D. Hume.

2. 도덕철학. 제임스 레이첼즈 지음. 서광사.

3. 도덕과 입법의 원리들. 벤담. 1789.

4. 현대윤리사상. J.V. 맥글린, J.J 토너 지음. 서광사.

5. 공리주의. J.S. 밀. 1861.

6. 윤리학. 윌리엄 K. 프랑케나 지음.

7. 철학의 거장들 중 J.S. 밀. 디터 비른바허 지음.

8. 탐구. H.J. 맥클로스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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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本(Japan) >

 Ⅰ. 日本經濟의 상황

日本經濟가 지난 2002년 하반기 이후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다. 버블붕괴 이후 92년부터 2002년까지 10년 간 연평균 1.1%에 불과하던 日本經濟의 성장률이 2003년 들어 2.5∼3.5%의 고성장을 실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 내에서 경제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확산되고 있다. 日本 민간 연구기관 뿐만 아니라 정부도 지난 9월 2003년 日本 經濟성장률 전망치를 대폭 상향조정하였는데, 각각 1.8∼2.6%, 2.1% 성장으로 상향조정하였다. 그러나 日本經濟가 회복기로는 접어들었으나 2004년 이후의 성장률은 둔화되고 있다. 버블붕괴 이후 日本經濟가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어 급속한 회복은 기대하기 곤란하다는 전망이다. 즉 내수와 개인소비 부진, 부실채권과 부실기업 처리지연, 과잉고용 상태 지속, 중소기업의 부진 등의 고질적인 문제가 日本經濟의 본격적인 성장에 걸림돌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日本은 여전히 미국 다음가는 경제대국이다. 그간의 저성장으로 미국과의 경제력 차이가 벌어졌지만 지금도 기술강국, 제조업 강국이다. 기술관련 특허출원은 많은 분야에서 미국을 앞서고 있으며, 디지털전자 분야에서는 독보적이다. 日本 經濟산업성이 2003년 6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각 분야 상위 10사중 정보통신기기 6사, 승용차 3사, 반도체제조장비 5사, 철강 2사, 종이펄프 2사, 그리고 건설기계 5사중 2사, 유리 7사중 3사, 전선케이블 6사중 2사가 日本기업이다.
日本은 세계 GNP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무역에서도 거의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95년 수출액에서는 미국과 독일에 이어, 수입액에서도 미국과 독일에 이어 각각 제 3 위를 차지하였다. 日本이 자본의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바뀐 것이 1년 간의 플로(flow;흐름)에서는 65년이고, 스톡(stoke;殘高)에서는 68년의 일이었다. 그 뒤 2차례의 석유 파동시기를 제외하고는 경상수지의 흑자기조와 그 누적을 배경으로 대외증권투자·차관·직접투자가 모두 급증하였다. 특히 83년부터 84년에 걸쳐 대외자산에서 대외부채를 공제한 순자산은 373억 달러에서 743억 달러로 늘어 영국에 이어 제 2 위 국가로 부상하였다.

 Ⅱ. 日本經濟의 잃어버린 10년에 대해서

ⅰ) 원인
80년대 말 과잉 유동성, 재테크 붐으로 발생한 버블경제는 91년의 긴축금융과 부동산 규제 강화로 인해 붕괴되었다. 그리하여 버블관련 업종인 부동산, 건설, 유통 등에 대한 대출이 부실채권화하게 되었다. 90년대 내내 경기침체, 주가·지가 하락으로 부실채권이 계속 증가하였는데, 버블붕괴로 사라진 자산의 10%에 달하는 100조엔이 은행들의 부실채권이 되었으며 10년 간 16개 은행이 파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 생긴 부실채권을 정리하지 못한 것이 日本經濟의 잃어버린 10년이 시작과 지속의 원인 중 하나이다.
그밖에도 구조조정 실패, 정치 리더십 부재와 정책의 실패, 관료의 보수성과 조직 이기주의, 변화를 거부하는 사회분위기와 국내적 시야, 국수주의, 日本의 왜곡된 역사인식 등이 日本經濟의 위기를 불러 온 원인들이다. 특히, 日本의 왜곡된 역사인식에 대해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엔 겐자부로는 "日本의 성숙되지 못한 역사인식이 日本의 폐쇄성과 더딘 변화를 부추기고 있음."이라고 말했고, 가미가제 자살 특공대를 미화하는 역사교과서는 폐쇄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ⅱ) 경과
日本의 부동산거품 붕괴의 결과를 한 마디로 요약하는 말이 ‘잃어버린 10년(The Lost Decade)’이다. 말 그대로 日本經濟가 10년을 허송세월 했다는 의미다.
잃어버린 10년의 구체적 내용을 보면 더욱 참혹하다. 91년부터 98년까지 日本 6대 도시 상업지가는 평균 16.4% 하락했다. 결국 98년 지가는 90년 최고점과 비교할 때 23% 수준으로 떨어졌다.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자 89년 12월말 사상 최고치인 3만8915를 기록했던 닛케이지수는 1년쯤 후인 90년 10월 2만 수준으로 수직하락 했다. 1년도 채 안 돼 반토막이 난 것이다. 주가와 부동산이 폭락하면서 금융회사와 개인의 파산도 늘어났다. 日本 정부는 95년 말∼96년 간 부동산금융을 주로 하는 주택금융전문회사의 부실이 가시화하면서 천문학적 규모의 공적자금을 조성했다. 90년대 중반에는 日本 역사상 최초로 예금인출사태가 발생했으며 해마다 결산기만 되면 금융위기론이 日本經濟계를 유령처럼 떠돌았다. 97년 말에는 산요증권, 북해도척식은행, 야마이치증권등 日本을 대표하는 금융사들이 연이어 도산하면서 경영에 책임을 졌던 사람들이 日本식 할복으로 종업원과 고객들에게 사죄하는 일까지 이어졌다. 특히 97년 아시아 외환위기로 日本經濟가 더욱 어려워지자 영국 런던등 세계금융의 중심지에서는 日本의 금융인이나 종합상사맨들이 저녁만 되면 술에 취한 채 “日本은 끝났다”라며 눈물을 흘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日本 히토쓰바시대 야마모토 지야키 연구원은 “日本經濟는 90년대 부동산거품이 붕괴된 뒤 본격적인 회복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채 21세기를 맞았다”며 “최근 日本經濟가 다시 회복되는 기미를 보이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본격적인 회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ⅲ) 결과
잃어버린 10년을 겪으며 日本經濟는 지금 사면초가의 상태이다. 實物經濟의 침체와 금융불안의 악순환, 국내요인과 해외요인의 악순환 등으로 매우 어려운 상태이다. 經濟분야만 어려운 게 아니다. 사회·문화적으로도 日本은 매우 어려운 지경이다. 일에 대한 욕망과 에너지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도 큰 변화 중 하나다. 일에 매여 살지 않으려는 젊은이들이 크게 늘었다. 소비자본주의의 말로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고도성장기에는 소유, 즉 일에 대한 욕망이 컸지만 이제는 소유에 대한 애착이 없거나 약화했다.

日本의 한 사회학자가 70년대부터 “뭘 갖고 싶은가”라는 똑같은 질문을 초등학생들에게 던졌다. 70년대에는 자동차 전화기 에어컨 등 집안의 소유물을 갖고 싶어했고, 80년대에는 컴퓨터 게임기 등 개인적인 물건으로 선호도가 옮겨갔다. 그러다 같은 질문에 대해 99년의 초등학생들은 대다수가 “없다”라고 대답해 놀랐다고 한다.
과거에는 ‘열심히 하면 출세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 신화가 있었다. 그러나 잃어버린 10년을 지나면서 노력해봐야 소용없다는 사실을 아이들까지 깨닫기 시작했다. 출세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절망, 보이지 않는 유리벽에 갇혀 있다는 자각에 부모들이고 아이들이고 손을 들어 버린 것이다. 거기다가 日本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내놓고 있지 못 할 정도로 허약해져 있다. 日本은 잃어버린 10년을 겪으며, 문화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모두 희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현재 日本經濟는 서서히 회복되고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두고 볼 문제이다.

 Ⅲ. 日本經濟에 대해서

ⅰ) 강점
日本人의 친절함과 성실성이야말로 현재의 日本을 우뚝 세운 강점일 것이다. 기업 내에서 사원 및 이사진 등의 성실성은 도요타, 닛산 등의 대기업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전 세계 어디를 가나 日本人에 대한 태도는 협조적이다. 학사논문자격밖에 없는 사람도 노벨상을 받을 만큼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는 태도는 무척 존경받을 만하다.
게다가 日本經濟의 견인차 역할을 하던 제조업 부문이 회복되고 있는 것은 좋은 조짐이다.
ⅱ) 약점
많은 강점에도 불구하고, 현재 日本이 가지고 있는 부실채권은 日本經濟의 발목을 잡고 있다. 10년 간 90조엔의 부실채권을 정리했으나 아직도 미해결 상태이다. 또한 日本식 구조조정만을 고집하며, 정책적으로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것도 日本經濟의 약점이다. 게다가 實物經濟의 침체와 금융불안의 악순환, 국내요인과 해외요인의 악순환 등 역시 日本經濟의 골칫거리이다.

 Ⅳ. 韓·日 관계

ⅰ) 과거
日本(Japan)의 선조가 한반도의 백제인이라고 할 만큼 두 나라의 교류는 각별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겠다.
고대부터 한반도는 日本(Japan)에게 정치·문화·경제 모든 분야를 걸쳐 문물을 전해줬다. 그 예로 日本 천황의 시조문제나 서기 610년 고구려의 담징이 日本의 호류사에 금당벽화를 그려준 것, 日本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한반도의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유사성, 고구려 수산리 고분 벽화와 日本 다카마쓰 고분 벽화의 유사성 그리고 日本이 한반도와의 무역을 통해 물자를 공급하던 모습 등이 있어 日本과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또한 임진왜란, 정묘왜란, 을미사변, 쇠말뚝 풍수침탄, 강제병탄, 성노예 문제 등은 씻을 수 없는 아픔으로 우리 역사에 남아있다.

ⅱ) 현재
㉠ 韓國의 對日정책 - 經濟
북한과 미국 다음으로 중요한 나라는 日本과 中國이다. 中國과 수교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응당 日本이 美國 다음으로 중요한 우방이자 정책협조대상국이었다. 그런데 中國과 수교가 이루어진지 10년이 경과하면서 양국 간 교역과 인적교류가 급속히 확대되면서 中國의 비중이  높아지고 북한 변수에 대한 中國의 영향력이 높게 평가되면서  최근에는 어느 쪽이 더 중요한 우방이고 정책협조대상국이어야 하는지 모호해지고 있다.
경제적으로 보면 아직은 전체 교역에서 거래규모가 더 크고 주요자본재와 기술을 수입하는 日本이 더 중요한 국가이지만 수출로만 본다면 對中國 수출액이 이미 對日本 수출액을 넘어섰다. 인적교류도 입출국자 모두를 고려하면 일본이 더 많지만 출국자수만 보면 수년 전부터 中國지역 출국자가 더 많다. 현재 같은 추세로 5년 정도 더 경과하면  교역과 인적교류의 양면에서 中國이 日本을 앞설지도 모른다.
요컨대 정치와 안보측면에서는 북한변수의 중요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中國이 日本 이상으로 주요 정책협조대상국으로 자리 매김 할 것이다. 또 경제적으로도 中國經濟의 규모가 현재처럼 빠르게 커지고 그와 더불어 對中 교역량이 확대되며 인적 교류가 활성화할수록 中國이 日本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정책협조대상국이 될 전망이다.

㉡ 日本의 對韓정책 - 經濟
日本의 한반도 정책 특히  韓國에 대한 전략은 21세기에 접어들어 다소간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20세기 후반 韓國經濟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韓國은 인근 시장으로서 또 규모가 큰 무역파트너국 정도로 인식되어 왔다. 구 식민지국가로서 군대위안부 문제 등 청산하지 못한 빚도 없지 않아 마음속으로 껄끄러운 상대이기도 했지만 정치나 안보 면에서 美國, 中國, 러시아 등에 비해 비중이 월등히 작았기 때문에 애써 무시하거나 가급적 모른 채 하고 지내려 했던 것이 對韓정책의 기본흐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던 韓國이 21세기에 접어들어 정치나 안보측면에서 日本의 주요 정책협조대상국의 하나로 급부상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北韓 변수가 자리하고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北韓의 핵 개발 의혹이 부상되고 대포동 미사일이 日本 쪽으로 발사되며 北韓의 괴선박이 日本연해를 들락거리고 게다가 국내적으로는 납치자 문제가 사회문제로 부각되면서 北韓 발 위협이 日本人들에게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 韓國의 DJ정부는 발족이후 긴밀한 대북협상루트를 가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이 日本의 주된 정책협조대상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울러 中國經濟의 급부상으로 위기감을 느낀 日本은 수 년 전부터 韓日 양국 간 자유시장 확대를 목표로 韓國 측에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조기에 체결하자고 촉구하고 있다. 양국은 수년간의 준비모임을 거쳐 2003년 말부터 정부간 공식교섭에 들어가기로 합의한 바 있다. 양국의 기본적인 방침은 관세장벽, 비자 등 기왕의 각종 장벽을 허물어 확대된 시장을 만들자는 것으로 이 협약이 체결되면 日本은 이를 바탕으로 韓日 양국이 정치, 안전보장 등 각 부문을 포괄하는 전면적인 파트너쉽 체제를 확립해 나가자고 촉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 역사·사회적 문제
日本 지배계층의 왜곡된 역사인식이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나 계속되는 日本 고위층들의 망언은 점점 도를 더해가고 있다. 과거의 만행을 사죄하고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잘못한 게 없다는 식의 발언과 태도로 韓國을 비롯한 中國, 동남아 지역의 국가들에게 불쾌감을 넘어선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게다가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등은 다음 세대의 日本人 역시 과거를 모르는 부끄러운 인간으로 교육시키려는 日本 우익층의 음모이다.
올해부터 日本 문화가 전면적으로 개방되었다. 우리는 좋은 것은 받아들이되, 우리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日本이 가지고 있는 국수주의와 만행을 기억해야 한다. 그 이후에 문화를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아닌 것은 버려야 한다. 우리의 인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기이다.
 
ⅲ) 미래 ( 전망 & 대책 )
한창 韓·日간 FTA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멀지 않은 미래에 韓·日 양국 사이에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어 경제적인 면에서는 국경이 없어지게 될 전망이다.
中國의 급부상과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日本이 가지고 있던 경제적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지난 12월 11일∼12일 간 日本의 동경에서 개최된 日本-아세안 특별 정상회담에서 中國의 뒤를 이어 "아세안 우호 및 협력조약(Treaty of Amity and Cooperation : TAC) 에 서명하는 행사를 치렀다. 아세안을 둘러싼 中國과 日本의 경쟁이 매우 치열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아직은 日本과 中國이 비슷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中國이 日本의 영향력을 앞지를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中國과 日本을 잘 관찰하고 분석해서 그 사이에서 기회를 잡아야 한다. 예전에 고려가 송나라와 거란 사이에서 이익을 취했듯이 우리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고 우호적인 태도로 두 나라를 이어주는 교량역할을 하면서 이익을 취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 韓·中·日, 동남아 지역이 유럽처럼 단일경제체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 먼저 해결되어야 할 과제는 몇 십 년 동안 계속 논쟁거리가 되어온 日本의 과거 참회이다. 인정해야 할 과거의 잘못들을 인정하고, 왜곡된 역사 교과서를 개정하고, 성노예 문제 등 사과해야 할 문제는 사과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전범들의 위패를 격하시키거나 없애야 할 것이다. 日本이 과거를 참회하지 않는 한 동남아가 가지고 있는 과거에 대한 아픔은 동남아시아 단결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Ⅴ. 임나일본부에 대해서. (任那日本府說)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 간 日本이 任那日本府라는 통치기관을 두어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학설.
이 학설은 日本이 조선을 침략하고 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날조한 식민사관의 하나인 타율성이론의 대표적 산물로서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과 궤를 같이한다.
日本人들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태고부터 외세의 간섭과 영향을 받아 타율적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하면서 任那日本府說을 제기했는데, 쓰에마쓰는 이를 체계화한 바 있다. 그의 설에 의하면, 3세기 중엽에 이미 왜인은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즉 임나가야(任那加耶)를 점유하고 있었으며, 왜왕은 그 중계지를 통하여 三韓을 통제했다. 또한 370년경에는 대규모 군대를 보내 백제와 신라에 편입되지 않은 대부분의 三韓 소국을 정복하여 직접 지배하고 양국을 간접 지배했으며, 任那의 지배체제를 이때에 성립시켰다. 왜는 任那의 지배범위를 계속 확대하여 북서쪽은 금강 유역, 북동쪽은 낙동강 상류유역까지 이르렀다. 任那는 400년 무렵에 광개토왕이 파견한 고구려군 5만 명의 침입을 받은 이래 쇠퇴를 거듭하다가 562년 신라의 대가야 정벌 때에 임나관가(任那官家)가 토멸됨으로써 멸망했다. 그 뒤에도 왜는 任那 故地에 대한 연고권을 가져서 646년까지 任那에게 공납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는 〈니혼쇼키 日本書紀〉를 주된 사료로 이용했는데 이 책은 8세기 초에 왜의 왕가(王家)가 자신들을 미화하기 위해 편찬한 사서로서 原 사료 편찬과정에서 많은 조작이 가해진 것이다.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들은 그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설화적인 서술들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 왜가 任那지역을 200년 동안이나 군사 지배했다면, 그 지역에서 그들의 문화요소가 강하게 나타나야 하는데, 가야지역에 대한 고고학 발굴자료는 4세기 이전의 이 지역 문화요소가 연속적으로 계승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처럼 문헌사료의 해석과 고고학 유물의 분석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던 쓰에마쓰의 任那日本府說을 정설로 받아들였던 日本 학계는 1960년대 北韓의 김석형이 '삼한 삼국의 日本열도분국설'을 제기하자, 큰 충격을 받아 1970년대 이후 기존의 任那日本府說에 대해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주요한 연구경향은 〈니혼쇼키〉 사료의 신빙성 문제를 치밀하게 고증한 다음, 그에 입각하여 종래 任那日本府의 성립시기나 그 실체를 제한시켜 설명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이후 대부분의 日本人 연구자들은 〈니혼쇼키〉에 나오는 5세기 이전 사료의 신빙성을 부인함으로써 任那日本府의 성립시기를 6세기 전반 무렵으로 늦추어보고, 그 실체 또한 왜가 任那를 군사 통치한 지배 기관이라기보다는 왜왕이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독점적으로 수용하려는 목적으로 任那에 파견한 사신 또는 관인집단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任那日本府의 존재 이유도 왜 왕권의 지배 욕구보다는 백제·신라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가야세력의 노력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도 역시 왜가 설치한 任那日本府가 가야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음으로써 식민사관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한편 국내 학자들은 한동안 이에 대해 무시해오다가 최근에 이르러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국내 연구자들은 대세론(大勢論)에 근거하여 우선 〈니혼쇼키〉에 나오는 왜의 任那 지배를 부정하고 대신 백제의 가야지배라는 해석을 시도했다. 따라서 任那日本府의 실체도 왜가 가야지역을 정벌하고 설치한 지배기관이 아니라 백제의 근초고왕이 369년에 가야지역을 정벌한 다음, 그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파견군사령부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연구경향은 가야지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다는 것을 밝힌 점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200년 간에 걸쳐 가야가 백제의 지배를 받았다는 설명은 앞에서 언급한 고고학 유물의 분석결과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니혼쇼키〉에 보이는 任那日本府가 반백제적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으므로 그것을 백제의 가야지배기관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국내연구자들의 한계는 가야사 및 日本 고대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

◈ 고대사논쟁의 일각을 차지했던 任那日本府說은 1875년 발굴된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의 한 구절에 그 유래를 두고 있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
- 『광개토대왕비문』 신묘년 조 -
▶위에 신묘년 기사에 대한 해석을 놓고 일본측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였으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근거: 日本서기.
·비문해석: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
           日本은 任那지방에 日本府를 두고 한반도 남단을 지배하여 신라와 백제가 약               200년 간(369∼562) 日本의 야마토 조정에 조공을 바쳤었다.

이에 대한 반박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를 근거로 하였을 때 日本의 한반도 지배에 관한 사료가 없다.
·日本이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영역에서 日本의 유물이 발견된 바 없다.
·日本서기의 신빙성 자체에 대한 의문.
·비문의 변조가능성에 대한 의혹.

▶위당 정인보의 해석 :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했다.
北韓의 박시형도 주어를 고구려로 해석하는 데 동의한 것처럼 주체가 왜인지 고구려인지도 논란 중이다. 정인보나 박시형은 신라를 공격한 주체 세력을 왜가 아니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호태왕의 공적비이므로 주어는 당연히 고구려의 호태왕이 되어야 한다.

▶추가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日本人이 위작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 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의미가 된다. 

 Ⅵ. 韓·中·日 3국 관계

ⅰ) 과거
韓中日 삼국의 관계는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中國의 시조 헌원황제 시절부터 中國과 韓國의 관계는 경쟁적이었다. 헌원황제와 치우천왕의 전쟁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치우천왕은 B.C. 2716년부터 B.C. 2696년까지 실존했던 인물이다. 또한 지나(中國)족의 대족장 공손헌원(헌원황제. 中國의 시조)과 10여 년 동안 70여 차례가 넘도록 싸운 오랑캐의 황제이면서 마지막 전투에서 헌원에 의해 목이 잘렸다. 그리고 다들 잘 아는 당태종이 고구려를 함락시키기 위해 원정 갔을 때 전쟁의 신으로 추앙 받던 치우천왕기를 떠받들고 갔다가 안시성에서 한쪽 눈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 발굴되고 있는 유적지나 유물들, 싸움터 그리고 먼 선조 대부터 치우의 무덤을 지켰다는 무덤 지킴이의 말까지 모두 치우천왕의 패배는 부정되고 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시작해서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한사군을 설치한 한무제,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리던 수와 당,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나당 연합군, 발해를 멸망시킨 여진족, 고려와 대등 외교를 했던 송나라, 서희의 한 마디에 강동 6주를 내주고 돌아간 거란족, 고려를 짓밟은 원나라 몽골족, 조선과 사대관계를 맺었던 명나라, 병자호란으로 치욕적인 항복을 받아낸 청나라, 그리고 6·25 때 인해전술로 南北韓 분단에 큰 역할을 했던 中華人民共和國까지 韓中의 역사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사이사이 많은 문화와 경제의 교류가 있었고, 中國이라는 거대 왕국을 옆에 두고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던 韓國의 자주성과 독자성도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다. 또한 日本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위에서 기술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韓國과 日本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다. 日本과 中國 사이에도 역시 많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주로 한반도를 거쳐 日本에 문화 등을 전파하였는데, 유교, 불교, 도교 등의 종교와 성리학이나 주자학 등의 전파가 주된 문화였다. 또한 원나라는 고려를 통해 日本을 침공하려 했으나 태풍 때문에 두 차례나 실패했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침공한다는 목적으로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과 정묘재란이 발생했다. 이 때 유명한 장군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다. 그 후 격동하는 근대로의 전환을 거쳐 日本에서는 메이지유신의 성공으로 근대화가 빨리 진행되어 동남아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淸日 전쟁, 러日 전쟁 등을 일으켜 한반도 및 만주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고, 난징대학살, 관동대학살, 대한제국에 대한 약탈, 성노예 문제, 731부대의 생체실험 문제 등 엄청난 만행을 자행했다. 결국 日本은 진주만 공격으로 제국주의적 성격을 드러내다가 무참히 패배하여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했다. 그 뒤 패전을 딛고 韓國전쟁 때 전화위복을 맞이하여 현재의 日本이 서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ⅱ) 현재
잃어버린 10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日本과는 달리 中國은 빠른 경제성장으로 동아시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韓國의 경우 對日本 수출액보다 대중국 수출액이 많고, 中國에 투자하는 회사도 많고, 中國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그러나 작년부터 日本이 회복하는 기미를 보이면서 韓中日 자유무역협정지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ⅲ) 미래
韓中日 3국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본다면, 역사적 문제가 해결되고, 관세가 없어지며, 단일통화가 등장하여 결국에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문제의 해결이 매듭지어지지 않는다면, 경제가 통합된다 하더라도 단일공동체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中國人과 韓國人이 가진 反日정서를 감안해 볼 때 경제통합 역시 필요악으로 치부될 가능성도 있다. 미래에 경제통합 및 동아시아 단일공동체 형성은 꿈이 아니라 이루어질 수도 있는 가능성을 지닌 아시아가 살아남을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이다.

ⅳ) 경제통합문제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동북아 지역에서는 자유무역협정을 통한 지역경제통합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동북아의 韓中日 3국은 다양한 형태의 FTA 체결을 추진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3국간 FTA도 검토하기로 함으로써 동북아지역의 경제통합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역패권 경쟁, 영토분쟁, 과거사 문제, 中國의 사회주의적 경제체제, 경제적 격차 지속 우려 등으로 동북아 3국간 경제통합에 대한 논의가 어려웠으나, 냉전의 종식으로 정치 및 군사적 대립관계가 약화되고, 금융위기 이후 韓中日 3국은 인근국가와의 경제협력 강화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동북아 韓中日 3국간 FTA를 통한 3국의 긴밀한 경제협력은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예상되며, 경제발전 단계 및 인적·물적 자원의 차이에 따른 보완성에 비추어 일단 뭉치면 세계 최강의 경제블록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韓中日 3국간 갈등관계를 협력의 동반자관계로 발전시키는데 경제적 협력 강화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정치, 이념, 역사인식의 차이에 기인한 韓國과 中國의 對日本 관계와 中國과 日本간 패권경쟁 등이 지역적 갈등과 불안정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경제적인 부분부터 협력하여 만든 화해 분위기가 이념 등의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풀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참여정부는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 건설을 국정운영지표의 하나로 설정한 만큼 韓中日 FTA 체결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동북아 경제협력체를 형성하고, 장기적으로 이를 유럽의 EU와 같은 경제공동체로 발전시킨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中國과 日本은 동아시아 패권경쟁국으로 동북아 경제통합을 주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지리적, 경제발전단계면에서 중간자적 입장에 있으며, 지역패권을 추구한다는 우려가 작은 韓國이 韓中日 FTA 추진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Ⅶ. 세계 속의 日本

항복문에 따라 일본은 1895년 이후에 획득한 영토는 모두 포기하였다. 日本을 점령한 연합국은 日本의 비무장화·민주화를 추진하였고 1947년에는 정치·사회·교육 개혁안을 포함시킨 새 헌법이 통과되도록 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보수적인 자민당정권 아래에서 日本의 經濟는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비무장화에 따라 국방비의 부담이 없어졌고 韓國의 6·25에 따른 특수 등을 발판으로 삼아 성장을 거듭하여 20세기 후반에는 세계 대부분 나라의 가장 큰 무역상대국이 됨과 동시에 가장 큰 무역흑자국이 되었다. 그러나 日本은 막강한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과거 주변국들을 침략한 역사를 왜곡하고 무역에 있어서 불공정한 행위를 함으로써 각국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20세기말에 들어와 日本은 경제력에 걸맞게 세계평화를 위해 기여하는 나라가 되기를 요청받고 있다.

 <참고문헌>

1.  삼성경제연구소. 日本經濟 되살아나고 있는가.
2.  韓國일보 - 세계2위 경제대국 유지비결.
3.  www.empas.com 백과사전
4.  삼성경제연구소. 잃어버린 10년, 日本의 교훈
5.  <韓國經濟 희망을 찾아서> 日本의 '잃어버린 10년'
6.  韓國일보. '10년 잠 깬 日 보통국가로 변화 모색' 전문가 좌담
7.  韓日역사문제연구소. 우리역사 바로알기
8.  日本의 21세기 대외전략과 韓日관계. 배준호 한신대 교수
9.  삼성경제연구소. World Report 제100호
10. 한국브리태니커 온라인
11. 살아있는 한국사 1권
12. www.cyworld.com  미니홈피 화양연화
13. 대외경제정책연구원. 韓中日 FTA 필요성과 韓中日의 입장.
14. www.daum.net 다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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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면서

     다음달부터 삼성카드사가 수수료율을 올린다고 한다. 유가 상승이나 미국의 금리 인상이라는 이유가 없지는 않겠지만, 무엇보다도 신용불량자의 수가 늘어감에 따라 카드사가 얻는 수익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나 같이 꼬박꼬박 카드 대금 결제하는, 한 번도 연체된 적 없는 우수 고객들만 피해를 본다.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의 비용을 열심히 대금을 지불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대신 지불해야하는 이 현실이 너무나 짜증이 난다. 물론 칸트가 이런 나를 보았다면, "네가 카드 대금을 지불하는 것은 너의 의무이기 때문에 그 결과에 상관없이 너는 항상 카드 대금을 일정한 시일에 결제해야만 한다." 라고 말할 것이다. 또한 신용불량자들에게는 "마치 네 행위의 준칙이 네 의지에 의해 보편적인 자연 법칙이 되어야 할 것처럼 그렇게 행위 하라."고 엄숙히 꾸짖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무책임하게 카드를 사용하여, 카드 빚으로 인해 가정까지 파탄 나는 사례가 늘어가는 때에 칸트가 이야기하는 '보편적인 법칙'이 설자리가 있는 것인지 조금 안타깝기까지 하다. 그런 면에서 칸트의 저서 중 하나인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가 평범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만큼, 대중적인 현 사회에 일침을 가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어본다.

 Ⅱ.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의 시작

     전문적인 철학적 지식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칸트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상식에서 출발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고, 다양한 예를 들고 있으며, 핵심적인 사상을 반복해서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저서들보다는 이해하기가 쉬웠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따라가면서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만약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의 경향성에 따라 움직이는 모순적인 존재가 될 것이고, 오히려 이러한 어려움이 나의 의무를 더욱 빛내줄 것이기 때문에 내 능력껏 준비해 보았다.
     칸트의 저서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가 의도하는 바는 그리 거창하지 않다. 이 저서는 나중에 『도덕 형이상학』에서 다루게 될 구체적인 주제에 대한 기초를 세우려는 것이다. 즉 도덕성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칸트의 표현을 빌리면 "도덕성의 최상의 원칙을 찾아서 확정하는 일"이 이 저서가 의도하는 바이다. 이 최상의 원칙이 곧 '정언적 명령법'이고, 우리의 행위가 도덕적 행위의 형식에 맞아야 한다는 명령인 것이다.
     이 책은 모두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칸트에 따르면 이 구분은 평범한 인식에서 출발해 그것의 최상의 원칙을 규정하는 데로 분석해나가고, 그런 다음 그 원칙을 검토해서 그 원칙의 원천으로부터 그것이 사용되는 일상적 인식으로 종합해나가기에 가장 알맞은 방법이라고 한다. 그 구분은 다음과 같다.
제 1장 : 도덕에 대한 평범한 이성 인식에서 철학적 이성 인식으로 넘어감.
제 2장 : 대중적인 도덕 철학에서 도덕 형이상학으로 넘어감.
제 3장 : 도덕 형이상학에서 순수 실천이성 비판으로 넘어감.
 Ⅲ. 도덕에 대한 평범한 이성 인식에서 철학적 이성 인식으로 넘어감.

     칸트는 이 장에서 도덕성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에서 출발해 그것들을 분석함으로써, 그러한 생각을 갖도록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제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밝혀내고자 한다. '평범한 이성 인식'이 도덕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들 중 하나는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는 특별한 종류의 가치를 갖는다는 점이다. 

"세상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밖에서조차도 제한 없이 선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 선한 의지는, 그것이 실현하거나 성취한 것   때문에 또는 그것이 제시된 어떤 목적들을 제대로 달성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려고 한다'는 것 때문에 다시 말해 그 자체로 선하다. (....) 이 선한 의지가 자신의 의도를 도저히 끝까지 성취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달성되지 않고 선한 의지만이 남는다 하더라도, 선한 의지는 보석처럼 자신의 완전한 가치를 자기 안에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빛날 것이다. (....)"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는 저 말로 시작한다. 여기서 칸트는 참으로 선하다는 것을 칸트 이전의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쾌락이나 행복이라고 하지 않고, '인간의 세상에서든 천사의 세계에서든 어디서나 선한 것은 오직 선한 의지일 뿐'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선한 의지를 통해서만 선한 것이 되며 가치를 지니게 된다. 즉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것은 오직 '선한 의지'뿐이라는 주장이다. 선한 의지는 오직 '선해지려고 한다'는 것에 의해서만, 어떤 다른 것과 관련되지 않고 그 자체로 그러한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 건강이나 행복과 같은 것도 물론 가치를 갖지만, 그것들이 갖는 가치는 다른 것과의 관련 하에서 갖는 '조건적 가치'일 뿐이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이 가진 천재적인 능력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선한 목적에 사용된다는 조건에서만 가치가 있다. 결국 그의 천재성은 원자폭탄이라는 무서운 살상무기를 개발하는 데 쓰임으로써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다주고 말았다. 그러나 물에 빠진 어떤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 '선한 의지'를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을 구하려다가 자기도 함께 죽을 수 있고, 또는 물에 빠진 그 사람이 살인마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 선한 의지를 그 자체로 칭찬하고 존경한다. 그 선한 의지는 천재성과 같은 성품이나 그 결과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다. 이렇게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에 절대적 가치를 주는 것은 어떤 특별한 종류의 동기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동기를 칸트는 '의무'에서 찾으려고 한다.

"모든 우리 행위의 가치를 평가할 때, 항상 맨 앞에 있고 나머지 모든 가치의 조건이 되는   그 선한 의지라는 개념을 명백히 하기 위해 우리는 의무라는 개념을 다루려고 한다."

     의무라는 것은 행위자 자신이 갖는 어떤 장애와 한계를 넘어서려는 선한 의지를 말한다. 그런 장애와 한계는 오히려 선한 의지를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다. 어떤 행위가 의무에 맞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하나는 자기가 어떤 외부적인 목적에 의해 그 행위를 했을 때 그것이 우연히 의무에 맞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의무에 맞는 어떤 행위가 '의무이기 때문에' 이루어졌다면, 그 행위는 우연적이 아닌 필연적으로 '의무에 맞을' 것이고, 따라서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선한 의지'의 자격을 갖게 된다. 즉 선한 의지란 의무를 동기로 하는 의지, '의무이기 때문에' 하려고 하는 의지인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경향성 없이, 단지 '의무이기 때문에' 행위를 한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그 행위는 참된 도덕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다. 본성상 마음에 동정심이 거의 없는 어떤 사람이 성실하지만 냉정해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하며, 다른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나 그 사람이 원래 박애주의자가 아니라고 해도, 마음씨 착한 사람이 가진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자신에게 부여하는 가치,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장 높은 그 도덕적 가치를 자기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상, 그 가치는 경향성 때문이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에' 자선을 베푼다는 사실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의무이기 때문에' 하는 행위는 그 행위를 통해 달성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그 행위를 결심할 때 준수하는 준칙에서 자신의 도덕적인 가치를 갖는다. 즉 이것은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내용을 말하지 않고 오직 형식만을 표현하고 있다. 칸트는 어떠한 행위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가진 준칙과 그런 내용을 갖지 않고 단지 '의무이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하는 형식적인 준칙을 구별한다.
     그렇다면 '의무인 것'을 하기로 한 이 '형식적인 준칙'을 따르게 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어떤 경향성도 동기가 될 수 없고, 오직 '법칙에 대한 존경심'만이 동기가 될 수 있다. 내용을 가진 준칙이 '자기의 경향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위 하라'는 것이라면, 내용 없이 단지 형식만을 가진 준칙이란 개별적인 행위자의 경향성을 무시하고 '모든 이성적 행위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그것에 따라 행위 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성적 행위자에게 적용되는 그것이 바로 법칙이고, 모든 이성적 행위자는 그가 이성적이기만 하다면, 오직 법칙에 따라서만 행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이기만 하다면, 오직 법칙에 따라서만 행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욕구와 경향성을 가진 감성적인 존재이고, 그래서 저절로 법칙에 따라 행위 할 수는 없으며 그 법칙을 따라야겠다고 결심하고 의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모든 이성적 행위자에게 적용되는 법칙은 객관적 실천 법칙이고, 개별적 인간이 그 법칙을 따르겠다는 원칙을 정한 것이 준칙이며, 이 실천 법칙을 따르려고 하는 의지가 결국은 이 법칙에 대한 '존경심'이다. 이렇게 해서 의무이기 때문에 하는 행위가 특별한 도덕적 가치를 얻는 것은 행위자가 '법칙에 대한 존경심'에서 그 행위를 했다는 사실에 있다. '선한 의지'의 원칙은 오직 법칙의 형식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그런 준칙에 따라, 즉 '하나의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나 또한 바랄 수 있도록 그렇게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Ⅳ. 대중적인 도덕 철학에서 도덕 형이상학으로 넘어감.

     인간은 완전히 이성적인 존재가 아닌 까닭에 욕구, 공포, 나약함 때문에 이성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행위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준칙과 도덕 법칙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듯 욕구나 공포에 의해 영향을 받는 우리에게는 실천 이성의 객관적 법칙이 '명령법'의 형식으로 나타나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을 명령한다.
     명령법에는 가언적인 것과 정언적인 것이 있는데, 가언적인 명령법은 '네가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 어떤 다른 것을 해야만 한다'고 명령한다. 이 명령법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주기 때문에 '숙달의 명령법'이라고 할 수 있다. 가언적 명령법에는 이것 외에도 행복해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영리함의 명령법'도 있다. 이런 가언적 명령법과 달리 정언적 명령법은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목적)에 상관없이, 즉 무조건적으로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령한다.

㉠ 보편적인 법칙
   가언적 명령법에서는 목적을 나타내는 조건절이 먼저 주어지지 않으면 그 명령법이 무엇을 명령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정언적 명령법에서는 조건절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 명령법이 명령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 수 있다. 정언적 명령법이란 우리 인간의 준칙이 따라야 하는 하나의 법칙이다. 그러나 그 법칙은 어떤 조건이나 더 상위의 어떤 법칙을 가지지 않는 무조건적인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살인을 하지 말라'라는 준칙에 따라 행위 할 때 그것이 '신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준칙은 '신의 뜻을 따르려면'이라는 조건에 제한되어 있는 것이고 가언적 명령법에 따르는 것이다. 정언적 명령법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명령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조건에 의해서도 제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행위 할 때 따르는 준칙에 아무런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준칙이 따라야만 하는 법칙이 있다면 그 준칙 자체가 법칙이 될 것을 명령하는 법칙뿐이다. 그렇다면 정언적 명령법이 명령할 수 있는 바는 우리의 준칙이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정언적 명령법은 단 하나뿐인데, 그 준칙을 통해서 네가 그것을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으로 삼으'려고 할' 수 있는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 하라는 것이다."

   어떤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검토해봄으로써, 즉 그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기를 바랄 수 있는지를 검토해봄으로써,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가려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연이란 보편적인 자연 법칙에 의해서 형성되어 있고, 그래서 자연 법칙을 보면서 법칙의 보편성이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일은 곧 준칙이 자연 법칙이 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일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의무에 관한 보편적인 명령법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네 행   위의 준칙이 네 의지에 의해 보편적인 자연 법칙이 되어야 할 것처럼 그렇게 행위 하라"

   칸트는 자살, 거짓 약속, 자기 계발, 자선 등의 예를 통해서 준칙이 자연 법칙이 될 수 없는 경우를 보여주고 있다.
▶ 연속적인 비운과 거듭된 재난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이, 그 고통을 면하고자 차라리 자살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사람의 감정은 삶을 촉진하도록 밀어주게 되어 있는데, 감정에 의하여 생명을 파괴하는 것을 법칙으로 하는 자연은 자기 자신에게 모순되며, 자연으로 유지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보편적 자연 법칙이 될 수 없으므로 어떤 경우에도 자살은 용납될 수 없다고 한다.
▶ 돈이 필요할 때 갚을 가능성이 없음을 알면서도 갚겠다고 약속하고 돈을 빌리는 행위는 용납될 수 있는가?
거짓 약속의 준칙이 자기의 준칙임과 동시에 자기를 포함한 세계 전체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모순이다. 즉 지킬 의사도 없는 약속을 함이 보편적 법칙이 된다면 약속은 제구실을 하지 못하므로 거짓 약속은 어떤 경우에도 옳지 않다.
▶ 환경이 좋아 물질에 부족함이 없을 경우에는 재능을 연마하지 않고 향락을 일삼아도 되는가?
이성자로서의 인간이 필연적으로 의욕 하는 것은 자기가 가진 모든 능력을 발휘함인데 이는 보편적 자연법에 어긋나므로 옳지 않다.
▶ 남을 도울 능력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여 남을 돕지 않아도 되는가?
보편적인 자연 법칙이 위와 같은 준칙에 따라 잘 유지될 수 있을지라도, 그러한 원칙이 자연 법칙으로서 모든 점에서 적용되어야 한다고 바라는 일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이런 것을 결심한 의지는 자기 자신과 대립하는데, 다른 사람의 사랑과 동정심을 필요로 하면서도, 자기의 의지에서 생겨난 자연 법칙 때문에 소망하는 모든 희망과 도움 자체를 빼앗기는 경우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들고 있는 예들은, 우리의 행위가 도덕적인 지의 여부를 정언적 명령법이 어떻게 확정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어떤 준칙이 정언적 명령법을 통과한다면 그 준칙에 따른 행위는 허용된다. 정언적 명령법은 통과하지 못한다면 그 행위는 금지되어, 우리는 그 반대되는 행위를 하거나 아무런 행위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 예들은 자기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기를 바랄 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 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칸트는 우리가 도덕적이지 않은 행위를 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를 전혀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도덕적이지 않은 행위를 지시하는 준칙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려고 할 때 모순이 생긴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짓 약속을 하라는 자기의 준칙을 보편적 자연 법칙으로 바라면 모순에 빠진다고 해서 거짓 약속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왜 우리가 자기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기를 바라야 하는지 밝혀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 목적으로서의 인간성
   이제 정언적 명령법, 도덕법이 필연적으로 우리 이성적인 존재들의 행위의 동인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 때 경험적이고 우연적인 동기들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이성적인 존재는 법칙에 대한 표상에 따라서 행위한다. 그런데 우리가 준칙이나 법칙을 만들게 되는 것은 목적 때문이다. 어떤 행위를 하려고 결정할 때 우리는 언제나 어떤 목적을 갖는데, 행위가 그 자체로 목적일 수도 있고(정언적 명령법) 다른 더 장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다.(가언적 명령법) 그런데 만약 모든 이성적인 존재가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무조건적으로 요구되는 행위라면, 모든 이성적인 존재가 필연적으로 갖고 있는 목적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목적을 모든 이성적인 존재에게 적용되는 목적이라는 점에서 '객관적 목적'이라고 하고, '동인'이라고 한다.
   우리의 일상적 행위의 주관적인 목적은 상대적인 가치만을 갖는다. 인간이 추구하는 것들은 대부분 인간의 필요나 욕구, 관심에 봉사하는 한에서 가치를 갖는다. 반면에 인간을 포함한 모든 이성적인 존재가 갖는 '객관적인 목적'은 절대적 가치를 갖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갖는 가치는 다른 모든 상대적인 가치가 그 가치를 얻게 되는 그런 절대적인 가치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갖는 '객관적인 목적'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인간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인간이 행위할 때의 주관적 원칙"이기도 하다.
   도덕법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힘을 갖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모든 이성적인 존재가 갖는 '객관적인 목적'이 필요하고, 그 객관적인 목적이 바로 '인간,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성적인 존재 모두'인 것이다. 정언적 명령법이 명령의 힘을 갖는 것은 이성적인 존재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객관적인 목적 때문이다. 그래서 정언적 명령법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네가 네 인격 안의 인간성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 안의 인간성까지 결코 단지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언제나 수단과 동시에 목적으로도 사용하도록 그렇게 행위 하라."

   이것은 행위의 목적에 대해, 다시 말해 행위의 동기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을 목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인 한 정언적 명령법에 따라서, 자기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바랄 수 있게끔 그렇게 행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인간은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단순히 상대적인 가치를 지닌 목적을 위해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이성적인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존경해야 한다. 누군가를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존경한다는 것은 자기의 인생과 행위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존경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남을 속이거나 남에게 무엇을 강요하는 행위는 자기의 목적을 위해 타인이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빼앗는 것이며, 도덕법에 어긋난다.  
   앞에서 사용한 네 가지의 예를 기억해보자.
▶ 첫째, 힘든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파괴한다면, 그는 하나의 인격을 단순히 죽을 때까지 고통스럽지 않게 지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만 이용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가 무슨 행위를 하든 언제나 목적 그 자체로 간주되어야 하므로 나는 내 인격 안에 있는 인간을 불구로 만들거나 상처를 입히거나 죽을 수 없다. 
▶ 둘째,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돈을 갚겠다는 약속을 듣지 않았다면 빌려주지 않았을 텐데, 이 때 거짓 약속으로 돈을 빌리는 사람은 돈을 빌려주는 사람의 이성을, 즉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자기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거짓으로 약속한 사람의 행위가 잘못된 것은 단순히 진실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거짓과 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인간성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느냐의 여부에 있다.
▶ 셋째, 재능이란 계발되어야 할 소질을 의미한다. 이 소질들은 인간의 "자연 목적"을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질들의 계발은 인간의 자기 완성을 비로소 가능케 한다. 소질을 계발하지 않는다고 해서 목적 자체로서의 인류의 자기 보존이 위험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목적 그 자체의 발현"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 넷째, 타인을 돕지 않으려고 하는 자는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잇는 자연적 목적, 즉 자기 자신의 행복"에 관하여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스스로 목적을 결정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도움, 또는 타인이 행동할 수 있기 위해 필요로 하는 도움, 즉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도움을 베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할 수 있음의 가능성은 동시에 내가 목적 자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가능 조건이기도 하다.

㉢ 자율성과 '목적의 나라'
   앞에서 살펴본 법칙의 형식인 보편성과 법칙의 내용인 절대적 가치로서의 인간성 이 두 가지 생각이 결합해서, 이성적인 존재인 우리가 스스로 그 법칙을 만든다는 세 번째 생각에 이르게 된다.

"(....) 보편적으로 법칙을 주는 의지는 이성적인 존재 각각의 의지라는 이념이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법칙을 따르겠다는 동기를 갖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우선 우리는 어떤 '관심' 때문에 법칙을 따른다. 법칙을 지키지 않으면 제재가 따르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어떤 법칙을 지키지 않으면 비난받거나 추방되거나 지옥에 떨어지고, 그 법칙을 지키면 칭찬받고 보상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법칙을 따라야 할 동기가 충분하다. 다른 한편, 우리는 우리 자신이 법칙 자체를 제정하고 승인했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 법칙을 따라야 하고 자기 자신도 그 법칙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법칙을 따른다. 칸트는 첫 번째 경우의 동기에 대해 '타율적'이라고 말하는데,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 때문에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경우의 동기는 '자율적'인데, 우리가 스스로 그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어떤 행위가 도덕적이려면, 따라서 정언명령에 따르는 것이려면 그 행위의 동기가 자율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타율적인 동기를 갖는다면, 그 때의 명령법은 가언적 명령법이다. 만약 정언적 명령법이 존재하고, 따라서 도덕성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자율적인 동기를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의무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이 그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했기 때문이다.
   칸트 이전의 도덕 철학자들은 도덕성의 원칙을, 즉 의무의 근거를 인간이 밖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의무의 근거는 인간이 갖는 자기 지배의 능력, 즉 자율성에서만 찾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성의 법칙을 우리의 행위에 부과하고, 행위를 함으로써 그 법칙을 세계에 부과하는 것이다.

"의지가 자기의 준칙에 의해 스스로를 동시에 보편적으로 법칙을 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행위 하라."

   이 원칙에 따라서 행위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목적의 나라'에서 법칙을 제정하는 입법자로 생각하게 된다. 이 곳에서 시민들은 외부의 어떤 것으로부터 법칙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지켜야 할 공동의 법칙을 스스로 제정하고 또 그 법칙에 스스로 복종한다. 이런 나라에서는 우리 자신이 법칙을 제정하는 시민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인간에게 존엄성이 주어질 수 있다. 바로 이 존엄성이 선한 의지의 무조건적이고 제한 없는 가치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도덕 법칙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힘을 가지려면 우리가 어떠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즉 우리는 자율적인 존재여야 하고, 스스로를 '목적의 나라'의 시민으로서 법칙을 제정한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우리가 실제로 '자율적인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우리가 자율적인 존재라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도덕 법칙에, 정언적 명령법에 따라서 행위 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Ⅴ. 도덕 형이상학에서 순수 실천이성 비판으로 넘어감.

     앞에서 우리는 도덕 법칙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상적인 생각을 분석해서 도덕 법칙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냈다. 도덕 법칙은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바랄 수 있는 그런 준칙에 따라서 행위 하라'였다. 그리고 도덕 법칙에 복종할 수 있으려면 의지의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도 이끌어냈다. 이제 남은 일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이성적인 존재가, 도덕 법칙에 복종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율성을 '실제로'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도덕 법칙이 명령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칸트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선한 의지와 준칙의 보편적 법칙성이 양쪽을 다 포함하고 있는 세 번째 인식과 연결되어 서로 결합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한다. 칸트는 이 세 번째 인식을 '자유'에서 찾는다.
     칸트는 "자유라는 개념이 의지의 자율성을 설명하기 위한 열쇠"라고 하면서 자유의 개념을 두 가지로 나눈다. 의지는 이성적인 존재의 인과성인데, 이성적인 존재에게는 의지가 행위 하는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인과성은 바깥의 다른 원인들에 의해 결정되는 일 없이 작용할 수 있고, 그렇게 할 때에만 '자유롭다'고 칸트는 말한다. 그러므로 만약 이 의지가 자연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의지가 아니게 된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 이외의 어떤 다른 원인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아야 한다. 이 때 자유의 개념은 자기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따라서 소극적 의미이다. 이러한 소극적 개념만으로는 이성적 존재가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없다.
     자유에는 적극적인 개념도 있다. 의지는 인과성이고, 인과성이란 법칙에 따라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자연의 인과성이란 자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자연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유도 "비록 의지가 자연 법칙을 따를 때의 속성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법칙이 없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특별한 종류이긴 하지만 불변하는 법칙에 따른 인과성이어야만 한다." 자유로운 의지는 자기 자신의 법칙이나 원칙을 가져야 하고, 이것은 자기 아닌 다른 것에서 올 수 없으므로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준 것이어야 한다. '스스로에게 법칙을 주는', 다시 말해 '자율적'인 의지여야 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법칙에 스스로 복종한다는 것, 즉 자율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의지란 도덕 법칙 아래 있는 의지와 동일하다.
     이렇게 해서 자유와 도덕성은 연결된다. 즉 자유의 개념 안에 스스로 도덕 법칙을 만들고 복종한다는 개념이 이미 포함되어 있게 된다. 자유로운 의지란 도덕 법칙에 복종하는 의지이고, 우리가 자유로운 의지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도덕 법칙에 복종하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과연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자유는 모든 이성적인 존재의 의지가 갖는 속성으로서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성의 판단에 따라 어떤 행위를 한다고 생각할 때, 지금 결정한 것과 전혀 다른 결정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이성이 판단해서 결정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이성적인 존재의 의지는 오직 자유의 이념 아래에서만 자기 자신의 의지일 수 있으므로, 실천적인 관점에서 모든 이성적인 존재에게 주어져야 한다."
     이렇게 해서 자유와 이성적인 존재가 연결된다. 즉 이성적인 존재라는 개념 안에 자유라는 개념이 포함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유와 도덕성이 연결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와 이성적인 존재가 연결됨으로써, 칸트가 제기했던 과제인 무조건적으로 선한 의지와 준칙의 보편 타당성을 연결하는 종합적 명제의 가능성을 밝히는 과제가 달성되었다. '자유'라는 세 번째 개념이 도덕성과 이성적인 존재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유가 두 개념과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달성된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모든 이성적인 존재는 왜 이 원칙을 따라야 하는가? 도덕성의 원칙에 따라 행위 하려고 한다면 도덕성의 원칙에 복종하려는 관심을 필연적으로 가져야 한다. 즉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그 도덕성의 원칙을 따르기 위해서는, 도덕성의 원칙 자체가 행복에 대한 나의 관심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정도로 강력한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다시 말해 "도덕 법칙이 어떻게 구속력을 얻는지"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칸트는 세계를 이원화시킨다.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대로의 사물들로 구성된 세계인 감성계(현상계)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사물들이 아니라 그렇게 나타날 수 있게 해 주는 사물 자체들의 세계, 자유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인 지성계(예지계)가 있다. 우리는 양쪽 모두에 속해 있다. 이로써 우리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것이 도덕성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미리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성계뿐 아니라 지성계에도 속한다는 데 근거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제 다시 칸트는 "정언적 명령법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돌아온다. 지성계가 감성계의 근거, 따라서 감성계의 법칙의 근거를 포함하기 때문에, 지성계에 속하는 존재인 우리가 감성계에 속하는 존재인 우리에게 법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감성계에 속하는 존재인 우리는, 지성계에 속하는 우리가 준 법칙을 명령법으로 생각하고, 이 명령법에 맞게 행위 하는 것을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칸트는 "모든 실천 철학에 대해 고찰"한다. 우리가 실천하는 데에서 이성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자유는 단지 이념일 뿐이기 때문에 경험될 수 없고, 따라서 자유라는 이념은 결코 설명될 수도 개념으로 파악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도덕 법칙에 관한 관심도 설명될 수 없다. 그렇지만 목적들 그 자체의 보편적 나라라는 훌륭한 이상이 우리에게서 생생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우리 자신도 그 목적들의 보편적인 나라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도덕성에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가치를 주고 '관심'을 갖는다.

 Ⅵ. 마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칸트가 살았던 18세기와 비슷하다. 도덕은 땅에 떨어진 지 오래이고, 사실 도덕이 무엇인지조차 헷갈리기도 한다. 안락사, 복제 인간 등의 문제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사례인 듯하다. 이런 시대에 칸트의 윤리학이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칸트의 철학이 세워진 이후로 많은 지지를 얻었고 또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물론 그의 논리 전개나 철학에 비판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그의 말이 다른 어느 구절보다도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면서 이 글을 마친다.

 < 참고자료 >      
     
1.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책세상. 2002. 임마누엘 칸트 지음.

2. 쉽게 읽는 칸트. 정언명령. 이학사. 2002. 랄프 루드비히 지음.

3. 호모 에티쿠스. 한길사. 2003. 김상봉 지음.

4. 서양근대철학. 창작과 비평사. 2003. 서양근대철학회 엮음.

5. 철학의 거장들 3. 한길사. 2001. 오트프리트 회페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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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 2004-06-25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찬찬히, 시간을 갖고 꼬마요정 님의 서재를 둘러봤어요. 로맨스에서 칸트까지 관심도 다양하고, 볼 거리도 많은 서재네요.

방명록에 글을 남기려다가 칸트에 관한 레포트(?)에 몇 자 적습니다. 카드사의 수수료율 인상으로 레포트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합니다. ^^..

즐거운 주말 보내시기를..

꼬마요정 2004-06-25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상경계열 전공이다보니 아무래도 사고방식이 경제적이게 된답니다..^^;;
제 서재를 칭찬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0^
브리즈님의 서재는 신비스럽고, 왠지 지중해를 연상시켜서 참 좋아하는데...
브리즈님두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